기획·진행 박유리 기자
정은진 Jung Eunjin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학예원 Curator, The Museum of Oriental Ceramics, Osaka 1973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교토 다치바나대 문화재학과를 졸업하고 리츠메이칸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근대시기 한일 도자를 둘러싼 연구로 주목받았다. 『필드워커로서의 아사카와 노리타카』(里文出版, 2011) 『근대의 고려청자-재발견에서 재현으로』(日本陶磁協会, 2014) 등을 펴냈다. 주요 전시로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 형제의 마음과 눈-조선시대의 미-》(2011), 《연화-청아한 동아시아의 도자기×사진가 무다 도모히로의 눈》(2014), 《조선시대 연적-문인의 세계에 놀다》(2016) 등을 기획했다. |
일본 대학원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간 계기는?
일본에 오기 전 한국의 LG전자에서 근무했다. 생활은 나름대로 충실했지만, 평생을 걸쳐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하다가 일본으로 유학을 결정했다.
2008년부터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MOC) 학예원으로 재직 중이다. 본인의 업무는?
한국도자 담당으로서 학예 업무 전반을 맡고 있다. 소장품 관리, 전시 기획, 이병창 박사 기금으로 지원되는 심포지엄 개최, 미술관 회원 및 시민 대상 강연, 한국도자사 관련 학술 조사•연구 등을 진행한다.
재일동포에게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심어주고 우리 도자의 훌륭함을 알리기 위해 기증한 고 이병창 박사의 사례는 국외 문화재가 현지에서 보전된 사례이다. 일본에 이와 같은 기증 사례가 또 있는가? 현재 이병창 컬렉션과 관련한 연구, 전시 계획이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
오사카역사박물관에 조선통신사 관련 자료로 구성된 이기수(李基秀) 컬렉션이 있다. 우리 관은 이병창 박사가 기증한 한국도자기금으로 장기 계획을 수립해 이병창 컬렉션을 포함한 한국도자 연구를 올해로 12년째 진행 중이다. 주로 고려청자를 주제로 탄생, 편년, 유통 경로, 무역, 수용 경위 등을 연구•조사해왔다. 내년부터 고려 말 청자에서 조선 초기 도자 그리고 조선시대 도자로의 이행 과정을 연구할 계획이다.
MOC의 한국도자 소장품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한국 관객에게 추천하고 싶은 소장품은?
우리 관이 소장한 한국도자는 약 1200점이다.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를 추천하고 싶다. 일본의 문장가인 시가 나오야志賀直哉의 구 소장품이며, 나라 동대사 관음원에 장식돼 있었는데 1995년 도둑이 들어 지면에 내리쳐져 산산조각 났다. 그 파편이 1996년 우리 관에 기증되어 약 1년 간 수복을 거쳐 이전과 다름없이 복원되었다. 이른바 ‘기적의 항아리’로 불린다. 조형과 설백색처럼 빛나는 유태를 가진 명품이다.
2015년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해 한국 수중고고학 성과물을 해외에 처음 소개한 《새로 발견한 고려청자》(2018.9.5.-2018.11.23.)가 MOC에서 열렸다. 어떻게 열리게 됐는지 궁금하다.
우리 관은 한국도자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집, 연구하고 있으며 이를 외부에 널리 전하는 것을 사명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국 수중고고학의 발전 상황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주목하고 있었고 전시도 열고 싶었다. 마침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전시를 추진했다. 최근 한국에서는 수중고고학에 의한 고려청자 연구가 급속히 진전하고 있다. 고려청자 외에 수중에서 인양된 각종 유물을 동시에 전시함으로써 한국 수중고고학의 성과를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전 《고려청자-비취의 반짝임》(2018.9.1.-2018.11.25.)을 기획했다. 기획 의도와 전시 구성을 설명해달라. 관객 반응도 궁금하다.
기존 고려청자 전시가 기술과 유색, 기종, 시대적 변천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전시는 다양한 용도의 고려청자를 통해 고려인의 삶과 정신에 다가서고자 했다. 전시는 총 4장으로 구성되었다. 도입부인 서장에는 근대에 재발견된 고려청자의 가치와 청자 재현 작품을 통해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다. 제1장에는 고려청자의 발생 과정을 고려시대 차 문화를 통해 보여주고 당시 융성한 차 문화와 다기茶器를 소개했다. 제2장에는 고려인의 생활과 그릇 문화를 소개했고 마지막 장에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킨 고려인의 호국 정신이 불교를 향한 두터운 신앙심에도 반영되었음을 향로, 사리용기 등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일본 내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고려청자 3점이 약 30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고려청자가 보석(비취)처럼 아름답고 유색이 다채로우며 용도별 해설을 통해 고려인의 생활과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는 관객 의견이 많았다.
일본 미술관들 간의 한국도자 소장품 교류나 연구는 활발한 편인가?
각 관의 교류는 물론이고, 각 미술관에서 일하는 큐레이터 간의 교류가 중요한데 미술관이 소장한 한국도자에 관심이 없거나, 언어 문제로 연구를 포기하는 큐레이터도 있다. 일본 내 한국도자 연구자가 드물어 안타까운 상황이다. 한국도자뿐만 아니라 한국미술, 역사, 고고학 등 관련 분야 서적에 표기되는 전문용어, 지명 등에는 한자 병기가 필요하다.
일본 내 한국인 고미술 큐레이터는 드물어 보인다.
큐레이터의 수는 기본적으로 일본인이 좋아하는 미술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프랑스 인상파라든지 이집트 고고학 관련, 일본 회화 등의 전시에는 많은 관객이 몰린다. 그에 비해 한국미술을 좋아하는 관객은 아직 많지 않다.
소장품 보존처리 인력도 있는가? 소장품 구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소장품 복원 업무는 전문 업체에 위탁 의뢰한다. 미술관 개관 당시에는 구입 예산이 있었지만 이후 20년 정도는 구입 예산이 없기 때문에 기증에 의해 대부분 이루어지고 있다.
2019년 MOC 전시 계획을 소개해달라.
중국 명과 청 시대 문방사우, 핀란드 공예, 일본 근대의 대나무 공예품 이렇게 3개의 특별전이 열린다. 이번 고려청자 전시 이후 조선 시대의 분청, 백자 전시를 계획 중인데 자세한 내용은 미정이다. 순서로는 먼저 분청을 계획하고 있는데 새로운 감각으로 전시를 열고 싶다.
한국 독자(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도자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매력이 감춰져 있다. 연구 성과를 통해 한국도자의 매력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우리 관은 한국도자 관람에 적합한 환경으로 자연광을 96~97% 수준까지 재현한 LED조명, 안경렌즈에 가까운 투명 유리 등 최상의 조건을 갖췄다. 우리 관 특유의 여유롭고 리듬감 있는 공간에서 한국도자의 아름다움을 만끽해보길 바란다.
이정희 Jeong Hee Lee-Kalisch 베를린자유대학교 동양미술사 학과장 Chair of the East Asian Art History Division, Freie Universität Berlin, Germany 1955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다. 쾰른대에서 미술사, 중국학 및 일본학을 전공했다. 한국 여성 최초로 독일 인문대학 정교수로 임명됐다. 한국과 독일 정부의 후원으로 기획한 특별전 《한국 고대왕국》(에센, 뮌헨, 취리히, 1999-2000)을 독일과 스위스에서 개최해 큰 주목을 받았다. 다학제적 접근과 비교문화 연구 방법론을 통해 불교, 동아시아 문인 문화 및 실크로드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로 연구해왔으며 이와 관련한 독일어 및 영어 저서를 집필했다. 2017년 출간한 『고려회화도록: 유럽 미국 소장』(절강대출판사)과 한국 정원의 미적 가치 연구로 국제 학계에서 주목 받고 있다. |
독일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때 독어를 공부하면서 일찌감치 미학 및 미술사의 나라 독일에서 공부하겠다는 꿈을 가졌고 1981년 그 꿈이 실현됐다. 대학에서 서양미술사 방법론을 먼저 배웠고, 지도교수님이 중국미술사를 전공하라고 조언해주셨는데 덕분에 다양한 접근 방법과 객관적인 시각을 기를 수 있었다.
2003년부터 베를린자유대 동양미술사 교수로 재직 중이다. 베를린자유대 미술사 수업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우리 학교는 세계적인 컬렉션을 보유한 박물관들과 연계한 실물 중심의 교육을 진행한다. 또한 한/중/일 미술사를 동등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문화 전반을 이해하는 포괄적인 시각을 기를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유럽 내 한국미술 연구와 관련해서 우리 대학만의 장점이다. 수업 준비는 유럽에 출판된 자료를 중심으로 하되 그 외 필요한 자료는 직접 번역해 준비하고 한국에 갈 때마다 자료를 가져오거나 지인 학자들의 저서를 기증받고 있다. 독일 학생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한국미술에 매료되어서 공부를 시작한 경우가 많다. 한국어나 한문 독해가 어려워 현대미술 방면으로 전향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수가 열심히 공부한다.
유럽에서 한국미술사 연구 현황은 어떠한가?
아시아 미술, 현대미술이라는 세계 미술의 흐름을 공유하며 그 속에서 한국미술의 특징, 미적 정서에 주목하는 학자가 많다. 연구자 규모, 연구 실적과 같은 양적 기준으로 한국미술 연구의 척도를 가늠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한국미술 연구 분야를 개척한 선학들이 다져놓은 토대 위에서 나아갈 방향을 찾고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영미권에 비해 유럽은 상대적으로 한국미술사 연구자나 수업이 드문 것 같다.
한국은 중국, 일본에 비해 서구 문물의 수용이 늦었기에 서구에서의 한국 연구도 출발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유물이 중국이나 일본의 것으로 여겨져 수집된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근대 이후에는 한국전쟁과 이어진 정치적 혼란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점차 다양한 문화, 체육 행사를 통해 한국이 알려졌고 한국기업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현재 독일에는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전공으로 하는 학생이 많다. 지금이야말로 유럽에서의 한국미술사 연구를 진척시킬 수 있는 중요한 시점이다. 유럽 학계에서 한국미술이 학문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는 한국미술 전공 석∙박사를 양성해야 하고 동양미술사학과에 필수 교육 과정이 되도록 제도적인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국외 한국미술 전문가들의 정기 강연, 공동 연구 등의 지원도 필요하다. 향후 독일을 비롯한 유럽 학계와 기관에서 역할을 할 인재 양성을 위한 장기적인 지원 방안도 국내에서 함께 고민해주면 좋겠다.
독일은 미국과 일본 다음으로 국외 소재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유럽 국가 중 독일에 한국 문화재가 많이 소재하는 이유가 있는가?
독일인의 미술품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높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 회사의 한국지사 대표, 외교관들이 수집해온 유물이 많다. 독일 교민들의 소장품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자료 조사가 미비하고 전시가 있을 때 소수의 작품만 선별되어 소개되는 실정이라 체계적인 조사와 유물 감정이 필요하다.
지난 20여 년의 활동을 평가해본다면?
아직 할 일이 매우 많은데 시간이 빨리 갔다. 1906년부터 중국 및 일본 미술품이 독일 내 박물관에 소장되며 독일에서 관련 미술사 연구가 시작됐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연구의 맥이 끊어졌다. 내가 독일의 연구 전통을 다시 이어 동아시아 미술을 연구하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자부심과 함께 책임감을 느낀다. 한국에서 자라면서 익힌 근면함과 인내심이 독일 학문 사회를 이해하는데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그리고 내가 기획한 두 전시 《한국 고대왕국》(1998-2000), 《티벳, 사찰이 보물수장고 열다》(2006-2007)에서 발간한 도록이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사와 미술사 강의에 필독서가 되어 연구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뿌듯하다.
최근 연구 주제나 향후 출판 계획을 소개해 달라.
동양미술사를 교류 및 다학제적인 측면에서 조명한 출판물 시리즈를 펴내고 있다. 독일 정부의 학술 지원을 받아 3년 간 실크로드와 미술에 관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이를 정리한 책이 출판될 예정이다. 그리고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정원이 종합예술임을 밝히는 연구를 진행했고 이것도 출판을 준비 중이다.
국내외에서 한국미술사를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한국미술 연구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미래를 바라보며 연구하길 바란다. 세계 속의 한국, 동아시아 미술이라는 큰 시각으로 보면 한국 미술이 얼마나 아름답고 우수한지, 또 그 미학이 어떻게 표현되고 설명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조앤기 Joan Kee 미시간대 미술사학과 부교수 Associate Professor, History of Art, University of Michigan 예일대 미술사 학부를 마치고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뉴욕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색화 초기 작품을 재해석한 연구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From All Sides: Tansaekhwa on Abstraction』 (Blum&Poe, 2014) 외 다수의 책과 논문을 썼다. [Oxford Art Journal], [Art History], [Art Margins] 및 테이트미술관 전문위원이며, [아트포럼] 객원편집자 등을 지냈다. |
로스쿨을 졸업하고 다시 미술사를 공부하며 단색화로 박사 논문을 썼다. 단색화를 연구한 계기가 무엇인가.
늘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다른 직업도 탐구해보고 싶었다. 로스쿨을 졸업하면 로펌에 취직해야 하는데 적성에 맞지 않았다. 연구는 항상 작품에서 출발하는데 단색화도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됐다. 대학 1학년 때 윤형근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단색화를 잘 몰랐지만 관심은 있었다. 당시 미국 미술계, 학계에서는 아시아 현대미술을 잘 몰랐지만 학부 지도교수님이 유색인종 및 비서구권 모더니즘에 관심이 많았고 덕분에 나도 연구를 시작했다. 단색화는 대학원 때부터 연구했으며 개념에서 출발하지 않고 특별히 끌리는 작품에 주목했다. 가능한 한 직접 본 작품에 대해서만 연구한다. 실제 본 작품과 책에서 본 것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단색화의 대표작은 경험의 중요성을 확인시켜줬다.
2008년부터 현재까지 미시간대 미술사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학교에서 맡은 수업을 소개해달라. 미시간대 미술사 수업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내가 맡은 교수직은 미국 내 처음으로 개설된 아시아 현대미술 전공 교수이다. 덕분에 다른 학교보다 아시아 현대미술과 관련해 세분화된 과목을 가르칠 수 있다.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근현대미술과 아시아미술을 주제로 한 과목을 가르친다. 미국 내에서 한국미술사 연구 규모는 상당히 크다고 본다. 10년 전만 해도 전공자가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고미술뿐 아니라 현대미술 전공자가 많아졌다.
박사 논문을 출간한 책 『한국 현대미술–단색화와 방법의 긴급성(Contemporary Korean Art–Tansaekhwa and the Urgency of Method)』(2013)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미국학계에서 권위 있는 ‘Charles Rufus Morey Award’ 최종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출판 이후 미국 학계 반응은 어떠했는가?
아시아 현대미술을 주제로 수상후보 최종 명단에 오른 것은 내 책이 처음이었다. 이후 대학 출판사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동양미술 전공이 아닌 현대미술사 학자들이 한국 현대미술을 수업 과정에 포함시켰다. 단색화가 현대미술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단색화가 열풍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인가.
단색화는 회화이고 이미 잘 알려진 작품과 유사하면서도 차별화된 특징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한국은 세계 현대미술사의 ‘아시아’란 틀에서도 비교적 낯선 지역이었다. 최근 단색화 시장이 소강상태인 것은 포화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단색화 관련 전시가 많이 열렸다. 이제 단색화 외 다른 작품(작가)을 조명해야 한국미술의 지명도를 높일 수 있다.
한국미술이 세계 미술계에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구체적인 방향을 제안한다면?
체계적인 미술사적 기반이 중요하다. 연구자의 판단도 필요하다. 방대한 자료를 연구한 전시보다는 확실한 주제를 가지고 다른 나라, 문화권의 미술과 연결되는 전시, 책, 학술 행사 등이 필요하다. 정보 제공보다 신중한 비평이 중요하다.
최근 주목하는 한국미술 장르나 작가가 있다면? 향후 출판 계획이 있으면 함께 소개해달라.
한국 동양화가 아직 현대미술로서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것 같다. 최근 이유태의 작품 〈탐구〉(1944)를 주제로 학술지 [Modernism/ Modernity]에 발표했다. 2019년에는 미술과 법을 주제로 한 책 『Models of Integrity: Art and Law in Post Sixties America』(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9)를 출간한다. 미국 현대미술가들이 다뤄온 법, 도구, 기관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다. 1960년대 이후 현대미술사는 법의 역사와 함께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또 미국 미술사학회 대표 학술지인 [Art Bulletin]에 한국 동양화 중에서도 추상화와 관련한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민화, 민속품이 전위 개념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도 쓰고 싶다. 현대미술 연구와 더불어 20세기 초상화와 20세기 초반 사진 작품, 미술과 음악의 관계에도 관심이 많다.
국내외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작품의 의미를 탐구할 때 "어떻게"라는 질문을 갖고 작품을 오랜 시간 세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작품 하나를 1시간 정도 보면 다른 세상을 접할 수 있다. 이를 ‘슬로 루킹’(Slow Looking)이라고 하는데 작품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경험을 제시하는지를 파악해야 미술의 생기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폭넓게 공부해야 한다.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북미, 유럽 미술과 각 나라의 음악, 문학, 역사, 정치 등을 연구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 현대미술의 진정한 맥락을 분석할 수 있고 새로운 상상의 역사를 만들 수 있다.
양혜규 Haegue Yang 작가, 프랑크푸르트 슈테델슐레 순수미술학부 교수 Artist, Professor of Fine Arts, Städelschule, Frankfurt am Main, Germany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조소과와 프랑크푸르트 슈테델슐레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과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삼성미술관 리움(2015), 중국 울렌스 현대미술센터(2015), 퐁피두센터(2016) 등 세계 유수의 기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09년 《제53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선정됐고 《리버풀비엔날레(2018)》 등에 참여했다. 2018년 한국 작가 최초로 ‘볼프강 한 미술상(Wolfgang Hahn Prize)’을 수상했다. 최근 쾰른 루트비히미술관에서 회고전 《도착 예정 시간(ETA) 1994-2018》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첫 개인전을 마쳤고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개인전을 진행하였다(2019년 1월 13일까지). |
쾰른 루트비히미술관에서 이른바 ‘1기 회고전’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작가로 활동하며 본인을 지탱해준 가치관이나 태도가 있는가? 작업을 지속하는 원동력은?
활동 초기에는 잃을 게 없었기에 순수했다. 전시 제안이 오면 거의 다 했다. 이제는 연륜이 좀 쌓여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자주 있다. 판단 기준은 명확하다. ‘의미가 생산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내가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해 원칙을 지켜주겠는가. 개인전 위주로 일정을 짜고 신작을 선보이는 경우 좀 더 집중한다. 전시를 하면 항상 배우는 점이 있고 그 다음 프로젝트가 보인다. 전시를 안 하면 느슨해진다. 전시는 나에게 일이자 학습이고 도전이다. 즉, 작가는 작업을 통해 성장한다. 삶과 작업의 간극을 좁히는 게 현직 작가로서 관건이다. 둘 사이가 멀어질수록 작업이 기계적으로 되거나 인생의 겸허함을 모르고 경력만 추구할 수 있다. 작업 안에서 일이란 개념을 어떻게 의미심장하게 구현하느냐가 문제다.
베를린과 서울에 스튜디오가 있다. 두 스튜디오 각각의 역할이 궁금하다.
나에게 스튜디오는 집과 같은 근거지이자 동시에 애증의 대상이다. 도망치고 싶지만 돌아가면 안도감을 느낀다. 두 스튜디오를 하나로 몰아야지 싶다가도 마음이 계속 바뀐다. 현재 스튜디오 간 업무 분량은 베를린이 압도적으로 많다. 나는 일종의 제조(생산)와 무역업을 하는 프리랜서로서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치(compatibility)가 중요한데 한국은 그렇지 않아서 쉽지 않다. 하지만 서울에는 날씨, 빛, 풍경과 같은 정서적 울림이 있다. 한국과 주변 지역성을 포함해 이 정서적 울림을 작가로서 포기하기 어려워 두 스튜디오에서 일하려고 노력 중이다.
세계 여러 도시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이는 유명 서구권 작가에게도 드문 일인데 ‘작가 양혜규’를 찾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1990년대 유럽은 소위 글로벌리즘이 시작되던 때였다. 출생지, 교육, 활동지역, 작업 배경이 모두 다른 작가들이 유럽에서 경력을 쌓고 성장한 그 흐름에 나도 포함돼 있다. 물론 아시아 출신 여성 작가로서 내 기반은 항상 약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포퓰리즘과 우익화 경향이 강해지면서 나 같은 작가가 갖는 사회적•정치적 맥락도 달라졌다. 내가 유럽의 한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이로부터 공동체에 어떤 의미가 전달되고, 이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있다면, 그건 국가주의적 경향을 넘어서는 정치적, 사회적 포용력에 대한 의지 표명일 수 있다.
2017년 슈테델슐레 교수 임용 당시 최연소, 최초 아시아 출신 여성 작가였다.
기존 서구 중심이 아닌 비주류에 주목하는 벨기에 출신 기획자 필립 피로트(Philippe Pirotte)가 학장이 된 후 내가 채용되고, 이집트 출신 작가 하산 칸(Hassan Khan)이 교수로 채용됐다. 나나 하산, 피로트가 교수가 되고 ‘기성세대(!)’가 되어 세대교체를 주도하는 구도이다. 학교는 교육으로 차세대를 길러낸다는 점에서 현장과 미술사의 중간에 위치한다. 우리가 지도한 후학이 어떤 세대를 구성할지 나도 궁금하다. 이 호기심이 내가 학교에 적을 두는 이유다.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 미술 맥락에서 뿌리내리기 위해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
같은 세대 작가 100명이 활동해도 작품이 미술관에 소장되어 50년, 100년 생명력을 가진 작가는 손에 꼽힐 정도다. 우리 세대 작가가 큐비즘, 미니멀리즘처럼 100년 후 미술관의 한 섹션을 구성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우리 세대는 국가적인 소속감이 약하고 세상이 보수화하면 공룡처럼 사라질 수도 있는 연약한 세대다. 이미 알려진 소장가나 미술관은 우리 세대까지 컬렉션하지 않는다. 소장가나 미술관에도 세대가 있고 동시대와 같이 성장한다. 차세대를 주도하고 사회적 파급력을 일으킬 수 있는 소장가와 미술관의 관계 맺기가 필요하다. 세계 유수의 현대미술 기관에는 한국인 큐레이터가 별로 없다. 기관 소속 큐레이터나 관장은 발로 뛰어 자신이 만들려는 역사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기류를 형성한다. 나도 최선을 다하지만 각개전투로는 한계가 있다. 한국 기관들이 보다 국제적으로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별자리를 그리듯 많은 지점이 연결되어야 한다.
윤이상, 김산, 서경식은 각각 음악, 항일운동, 학문으로 족적을 남긴 역사적 인물들로 당신은 이들에게서 영감을 받는다고 밝힌 바 있다. 어떤 지점이 그러한가?
나는 ‘이민자 작가’이고 내가 관심 갖는 인물들 역시 이질적인 면을 갖는다. 이들의 삶은 소외되거나 잊혀 정확한 이해가 어렵다. 나는 이 소외감을 해소하기보다는 소외감으로부터 생산되는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 나는 그들과 다르고 완전히 동의하지도 않지만, 부분적인 공감이면 충분하다. 모두가 동의하는 합의는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시스템의 틈새라면 이들은 바로 그 지점을 상징한다. 나는 그런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 일조하고 싶다. 작가는 현장에서 현상을 생산하는 사람이다. 주장과 제안이 작가의 역할이다. 많은 논의를 통해 ‘이해’로 옮겨가기 전까지 모든 것은 제안이고 이는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들을 ‘한국판 디아스포라’라고 한다면, 베를린 킨들 현대예술센터(Kindl Centre for Contemporary Art)에서 선보인 〈침묵의 저장고– 클릭된 속심〉(2017)은 일종의 ‘살풀이’라고 봤다. 두 지점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당신에게 ‘한국적’이 의미하는 바는?
살풀이는 의례를 위한 춤(ritualistic dance)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춤이란 의례의 공통적 요소이다. 나는 살풀이를 산업화와 연결했다. 도쿠멘타에서 선보인 작업이 살풀이의 시작이라면 〈침묵의 저장고〉는 그 종착지이다. 두 작업은 산업화의 끝자락에 있는 공간에 설치됐다.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산업시설과 그곳에 설치된 현대미술은 우리로 하여금 산업화가 말기에 이르렀음을 인식하게 한다. 따라서 두 작품 모두 나에게는 근대 산업 문명에 관한 살풀이다. 디아스포라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디아스포라는 근본적으로 분산을 의미한다. 이민, 이산의 역사는 시공을 넘어 면면히 살아남아 거대한 흔적을 남긴다. 세대와 국경을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샤먼과도 연결된다. 샤머니즘은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사회에 정착한 종교와 달리 비주류적 가치를 담보하는 포괄적 양상이다. 내가 한국 대표작가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대표성이 뭔지 되묻고 싶다. 그것이 이러한 확장성과 포용력을 의미한다면 동의하겠다. 대표성이 함축하는 평균적인 측면을 깨고 싶다. 그렇게 하는 게 내 몫이다. 우리 세대에는 소외된 상태조차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면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연구하는 주제나 관심 분야가 있다면?
요즘 소리에 관심이 많다. 시각적인 작업에도 보이지 않는 층위가 있듯이 소리, 음악도 그렇다. 특히 윤이상 음악에 그런 그림자가 있다. 한국인 대부분이 윤이상은 알지만 그의 음악을 청각적으로 떠올리지는 못한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윤이상이 ‘들린다’. 윤이상이라는 인물은 정치적으로는 한반도에 갇혀있고 음악적으로는 유럽에 국한돼 있다. 이런 간극이 이 인물에 관심 갖게 된 계기다. 윤이상의 음악을 직접 듣고 연주자와 만나 대화하며 이해도를 높이고 있다. 언젠가 그들의 도움을 받아 작업으로 선보이고 싶다.
월간미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