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임근준 미술 · 디자인 이론 / 역사 연구자
오늘날 많은 작가가 비미술적 재료를 사용해 작업을 한다. 하지만, 그 양상과 방법은 천차만별이어서, 미술사적 계보를 그려보지 않으면, 어디까지가 유의미한 실험이고, 어디까지가 퇴행적 브랜드 이미지 연출의 수단에 그치는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구미의 현대미술사를 놓고 보자면, 현대미술의 비미술적 매체 사용은, 입체파와 다다에 연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입체파와 다다의 콜라주(collage)에서 신문지와 밧줄 같은 비미술적 재료가 처음 등장했고, 이후 다양한 실험에 이어 개념어들이 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 브라크와 피카소가 ‘콜라주’란 말을 사용했고, ‘포토몽타주(photomontage)’란 말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유행했으며, 마르셀 뒤샹은 1915년 ‘레디메이드(ready-made)’란 개념어를 창시했다.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의 말미에서 ‘발견물(objet trouvé)’이라는 유사 개념어를 제시했다. 브르통은 그에 앞서 1931년 ‘유령 오브제(object fantôme)’란 용어를 사용했는데, 호응은 딱히 크지 않았다.
반면, 다다이스트 쿠르트 슈비터즈는 1919년 상업을 뜻하는 ‘코메르츠(Kommerz)’에서 ‘메르츠(merz)’란 단어를 파생시켜서 다다적 재구성 실험을 총칭했다. 본디 와인을 섞는 기법을 뜻하던 ‘아상블라주(assemblage)’가 미술 용어가 된 것은 1950년대의 일로, 와인 도매상이던 장 뒤뷔페의 연작 〈흔적의 아상블라주(assemblages d’empreintes)〉에서 연원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진영에서는 1929년 [레프(LEF)]지에 기고된 “팩트의 문학”으로부터 ‘팩토그라피(factography)’란 개념어를 추출해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식 DIY 문화가 확산하면서 DIY의 프랑스 번역어인 ‘브리콜라주(bricolage)’가 네오다다의 맥락에서 창작과 비평의 언어로 폭넓게 활용되기도 했고, 네오다다 예술가였던 청년기의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1954년 레디메이드 오브제의 콜라주를 이용해 회화와 조각을 하나로 사고하는 ‘콤바인(combine)’이라는 방법과 연작을 창안하고 개시했다. 라우센버그는 1967년 E.A.T.(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를 조직해 과학기술 매체와 결합하는 미술을 집단적 운동으로 추동했으니, 1990년대 뉴미디어 아트나 2000년대 포스트미디어 아트의 조상님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대미술의 형성 과정에서 결정적이었던 것은, ‘미메시스(mimesis)’와 ‘전유(appropriation)’의 전략이었다.
네오 아방가르드 세대의 작가들은, 겉으로 하는 말이 어떻든 간에, 대다수는 아도르노식 미메시스의 전략, 즉 ‘자아의 타자에의 동화’를 긍정하는 노선을 걸었다. 타자(사물과 물질을 포괄하는 의미의 타자)에 자아를 동화시키는 전후 비판이론 특유의 인식론, 즉 아도르노가 성찰적 모더니즘을 옹호하기 위해 기획해낸 ‘비희생적 비동일성을 통해 타자성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주체’ 같은 것은, 전후의 실험미술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예컨대, 이우환이 인공물인 녹슨 철판과 자연물이자 발견물인 돌을 조우시킴으로써 인식론적 초월을 향한 덫을 놓는다고 주장했을 때, 그것은 일본식 철학과 미감을 통해 변주해낸 ‘아도르노식 미메시스의 전략’에 다름 아니었다. 북미의 그림들 세대(pictures generation)가 전유를 통해 실재성(the real)을 재맥락화하고 타자성의 영역에서 전복성을 포집한다고 해도, 그들이 설치미술이건 다매체미술이건, 뭔가 자본주의 세상의 질서에 대응하는 미메시스의 비평적 조형 질서를 창출할 때면, 역시 전유된 대상은 ‘타자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성찰적/해체적 주체’를 위한 연출의 도구가 될 따름이었다.
한국에서 전유적 실천이 시도되는 현상은, 1987~1988년 이후에 나타났다. 예를 들어, 1987년 뮤지엄 그룹(이불, 최정화, 홍성민, 고낙범, 정승, 노경애, 명혜경)이 활동을 개시한 이래,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중반에 전개된 다매체적 실험이 새로운 차원에서 부활했고, 곧 이어 그 흐름은 전지구화 시대와 화려하게 결합했다.
하지만, 뮤지엄 그룹의 멤버들보다 아랫세대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박모/박이소(박철호)였다. 박모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시기의 초기 작품은, 비미술적 재료(쌀이나 드럼통 등)를 동원하는 오브제로서 제작된 농담 페인팅을 설치미술의 문법으로 제시함으로써,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문화적 정체성과 회화의 무용성이라는 2중의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박이소로 활동하는 과정에서는, 각목이나 합판, 공업용 조명 등을 활용해, ‘현대미술계에서 반복되는 적나라한 오해의 단면을 가시화하고, 소통의 불가능성을 노출해 풍자하는 설치작업’을 반복 시도했고, 그를 통해 일종의 악역을 연기하고자 했다.
반면, 2000년대 초중반, 다채로운 작업을 전개하기 시작한 양혜규는, 2006년 폐가가 된 외할머니의 집(인천) ‘사동 30번지’에, ‘장소에 연루된 파편-조각들’을 ‘독해해야 하는 감성적 풍경’으로 제시했고, 그 직후 ‘비미술적 재료를 동원해 비기념비적 조각을 제작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초기의 작업에서 나타나던 장소 특정성이 흐려지는 가운데, 작가는 비기념비적 조각을 통해 현대미술의 여러 역사적 차원을 지시하는 참조적 현대성을 드러냈다.
2010년 아트선재센터는 작가의 개인전 《셋을 위한 목소리(Haegue Yang: Voice Over Three)》를 주최하며, 블라인드, 조명, 히터, 선풍기와 같은 재료를 “독창적인 감각 매체”라고 소개했고, “평면, 사진, 영상, 조각, 설치 등의 다양한 형식”을 취함으로써 “공감각적인 설치작업”이 된다고 설명했다.
양혜규가 작업으로 가시화하고자 한 것은, 언명되기 어려운 종류의 감각(the sensible)으로, 이미 2000년경 앞으로의 작업 주제에 대해 예고한 바 있다. 쉽게 말하면, 그는 자크 랑시에르의 가르침에 따라, 현대미술을 감각을 분할하고 재배치하는 사업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참조적 현대성의 연극적 조각-설치작업을 전개해, 감각의 경험을 재구성하는 상황을 연출하고자 애썼기 때문이었다.
평론가/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는, 2015년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의 도록 에세이 “펼침의 경험: 양혜규와 당대의 조각”에서, 벤야민 부클로의 비평적 얼개를 빌려서, 양혜규를 가브리엘 오로즈코에 필적하는 대단한 조각가로 평가한 바 있다. 부클로는 “오브제 경험의 보편적 파괴 앞에 저항 없이 투항”한 예로 이자 겐츠켄이나 레이첼 해리스를 비판하고, 그에 대비되는 예로 오로즈코를 상찬하며, 그가 “자연과 문화의 변증법”을 지켰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의 연장선에서 부리오는, 양혜규가 “자연/문화의 대조가 아니라 주체와 객체의 관계, 존재와 사물들의 관계”로 작업의 “형식 논리를 개발”해냈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양혜규에게 방법론상으로 이자 겐츠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미술사를 참조적으로 비평하는 성격이 두드러진다는 사실, 버내큘러 재료와 조형언어를 동원해 애니미즘적 성격을 띠는 비기념비적 조각을 만들어낸다는 사실 정도다.
부리오는 양혜규가 신자유주의 시대의 현대미술이 지니는 약점, 즉 “상품화의 균질화 원리”에 포섭되고 마는 문제에서도 자유롭다고 평했다. 한데, 겐츠켄이나 양혜규 모두, “상품화의 균질화 원리”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연극적 변신을 시도해왔다. 즉 작업 후반기로 갈수록, 자신들의 작업을 배우 삼아, 비평적 소격을 유도하는 연극-연출적 성격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 그들의 딜레마다.
〈상자에 가둔 발레〉(2013, 2015)는 그러한 딜레마에 공격적으로 순응한 결과였다. 화이트큐브가 아니게 된 21세기의 미술관 전시 공간을 능동적으로 재규정하려는 목적에서 제작된 이 작업의 참조 대상은, 바우하우스의 실패였다. 오스카 슐레머의 대표작 〈삼부작 발레〉의 인물들을 사운드-조각으로 재해석한 작가는, 조각을 통해 나선형의 동세-역사의 진보를 상징하는-를 다시 이야기한다.
비미술적 재료를 향한 확장, 즉 매체 차원의 확장과 다변화를 대전제로, 전유의 방법론을 심화시키며, 장소 특정성을 실험하던 미술가들이, 비기념비적 조각이라는 새로운 탈출구를 통해 도달한 성취의 지점이, 고작 작가 자신의 의사-영웅적 캐릭터와 에고라고 한다면, 이는 퍽 애석한 일이다. 작업에 동원된 타자성의 재료들은, 결국 작가의 에고를 미화하기 위한 관객용 감정 이입의 도구가 되고 말 운명이었던 것일까? 문화 산업화한 미술계에서 소위 이름값-미술로 귀결되지 않는 현대미술로는 미술사에 이름을 남길 수 없는 것일까?
한 가지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특이한 비미술적 재료가 특정 작가의 전유물로 사고되는 현상은, 명백한 퇴행으로서, 새로운 미적 우상으로 작용한다.
미술 · 디자인 이론 / 역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