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2019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참여 작가 인터뷰 – 정은영

posted 2019.06.20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 정은영


미술세계


1.jpg

정은영 작가. 사진ⓒ 김흥규

정은영(1974-) 작가는 이화여자대학교와 동 대학원, 영국 리즈대학교 대학원에서 시각예술과 페미니즘을 공부했다. 2008년부터 10여 년간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진행해오며 1950년대 직후 출현해 점차 사라져간 여성국극 남역 배우들의 무대 안팎을 추적하며 고정적인 성별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역사의 재구성이라는 문제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영상, 공연, 퍼포먼스 등을 선보여 왔다. 아시아퍼시픽트리엔날레(2015), 광주비엔날레(2016), 타이페이비엔날레(2017), 상하이비엔날레(2018), 세렌디피티 아트 페스티벌(2018) 등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 왔으며, 2013년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2015년 신도리코 미술상, 2018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업로드용2.jpg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비디오 사운드 설치, 가변크기. ©정은영.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but No Matter)’라는 한국관 주제가 정해지고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전시에서 제목으로 차용한 소설 『파친코』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제목 이야기가 나오기 전부터 전시 주제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수차례 나눈 상태였고, 첫 베니스 사전 방문 당시, 세 작가가 모두 한 자리에 모인 상태에서 김현진 감독이 『파친코』의 첫 문장을 제목으로 염두에 두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책을 완독했고, 제목에 대한 믿음이 더욱 선명해졌어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저마다 어느 순간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 순간을 맞이하는데, 그 생(生)의 전환을 기가 막히게 썼더라고요. 긴 역사를 압축시켜야 하니 책 전체의 구성이 다소 거친 면이 있는데, 순간순간 헉 하게 되는 그 턴(turn)에 매료되었습니다. 단지 캐릭터 각자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 이상으로 개별 주체들이 역사와 정치와 맺고 있는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순간인 거죠.


설치에 있어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이며, 김현진 예술감독이 강조한 한국관의 유선형 구조와는 어떤 시너지를 내는지도 궁금합니다.


아시다시피 한국관은 위치상으로도 후미지고, 건물의 형태도 전시에 적합한 장소는 아니어서 매번 골칫덩이였죠. 우선 한국관의 전면, 유리로 들여다보이는 원형의 공간에서 첫 번째 작업을 대면하게 됩니다. 이 첫 번째 공간에 제 작업이 들어가요. 관객들은 건물 앞마당에 서서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때론 입장을 위해 줄을 서기도 하는데, 그때부터 관람이 시작되는 거죠. 내부로 들어가면 뒤편의 방에 설치된 제 메인 작품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세 작가에게 배분된 공간이 유기적으로 관계 맺기 때문에, 제인 진 카이젠 작가의 작업으로 먼저 진입해 들어갈 수도 있고, 혹은 곡선으로 구성된 남화연 작가의 공간으로 들어가 먼저 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건물 밖에서는 조금 상상하기 힘든 방식으로 세 작가의 공간을 구획했고, 내부로 진입하면서 서서히 공간의 배분과 구조가 체험되기 시작할 겁니다.


《올해의 작가상 2018》 전시 당시 베니스비엔날레에 대해 여쭤봤을 때, “완전히 다른” 결의 작품을 구상 중이라고 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여성국극’이라는 소스로 다른 요리를 보여주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데요.


제 작업은 늘 여성국극이 그 준거가 되어왔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언제나 그것을 다시 부활시키거나 재제작하는 방식을 지양해 왔습니다. 여성국극으로부터 제가 발견하고 배운 것들을, 그 장르를 답습하기 위해서 작업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재고하기 위한 관점으로 사용해왔죠. 이번에는 전통예술이 고집하는 ‘전승/전수’라는 중요한 과제에서 착안해, 소위 전승이 ‘끊긴’ 여성국극의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면서 ‘퀴어 계보학’을 상상하기를 제안하는 작업이 될 겁니다. 당대 여성국극이 가진 무대의 스펙터클과 젠더수행, 글램(glam)하고 캠피(campy)한 요소들을 현대의 퀴어 퍼포머들로부터 찾아내고 싶었습니다.


업로드용3.jpg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비디오 사운드 설치, 가변크기.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에는 트랜스젠더 전자음악가 키라라, 레즈비언 배우 이리, 장애여성극단 연출가이자 배우 서지원, 드랙킹(Drag king) 아장맨 4인의 퍼포머가 등장하는데, 각 퍼포머들을 섭외한 이유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키라라는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한편 트랜스젠더 음악가라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부단히 하고 있습니다. 저는 키라라의 음악과 음악가로서의 태도, 그리고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는 그의 삶에 대해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취하고 있는 음악 만들기의 방법론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장르적이고 형식적인 기율 안에서 그것을 수차례 다시 쪼개고 조립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그의 음악은 제 작업의 방법론, 즉, 전통과 역사와 규범과 매체를 매번 부수고 다시 조립하는(assemblage) 행위와 유사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형식 만들기에서 발견되는 퀴어적 태도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이리 배우는 연극씬에서 드물게 자기 젠더를 잘 연기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본인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공연으로 커밍아웃하기도 했죠. 그러면서도 배역과 배우 간에 비판적인 거리를 섬세히 취하기도 하고, 당사자성에 갇혀버리는 함정에 빠지지도 않죠. 공연성과 수행성을 퀴어 스테이트먼트로 가장 잘 이용하고 있는 배우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전 작품에서 이미 함께한 경험이 있는 아장맨(Azangman)의 경우 전작과 유사한 이미지를 다시 만들게 될까봐 주저하다가 섭외하게 되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남성성을 공연하고 패러디하는 드랙킹 퍼포머인 그는 이번 작업에서는 예술가의 광기나 천재성 개념이 남성에게만 전유되어온 역사적 사실들을 재전유하는 공연을 보여줬습니다. 그가 퍼포머로서 자기와 강하게 동일시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서지원 배우는 ‘춤추는 허리’라는 장애여성극단의 리더이자 활동 10년차 배우예요. 10년 이상의 커리어를 가진 직업 배우이지만 언제나 ‘장애인’으로 호명되는 상태를 극복하고 싶어 했어요. 그와 인터뷰를 하며 인상적이었던 사실은, 정작 지원씨 본인은 몸의 장애가 불편하거나 이상한 것으로 체현되지 않았다는 거였어요. 어릴 때는 오히려 비장애인인 자신의 언니의 몸의 형태와 제스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는 얘길 하더군요. ‘장애’ 역시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정상성’의 규범과 그 수행을 통해서 강제되는 개념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어요. ‘젠더’를 착장하는 것과 매우 비슷한 방식으로 구성되어온 개념인 것이죠. 이 네 사람의 질문과 도전, 그리고 부단히 추구해 온 그들의 실천(practice)들은 퀴어 경험을 통한 퀴어 미학을 제안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라 생각했습니다.


퍼포머들 4인의 작품 제목에 명시되어 있는 ‘섬광, 잔상, 속도, 소음’과 연동되는 부분이 있을까요?


섬광, 잔상, 속도, 소음은 비디오아트에서 주요하게 쓰이면서도 동시에 배제되는 요소들인데, 그것이 늘 적절하게 규범적으로 쓰일 때 좋은 영상이 된다는 일반적 믿음이 있어요. 이 작품은 그 매체의 기율을 초과하고, 관객들이 관조하기에 ‘좋은 영상’이라는 믿음을 배반하려는 적극적인 실천입니다. 기본적으로 비디오아트는 빛과 시간의 예술인데, 이 매체적 속성을 매우 나이브(naive)한 감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작품 제목도 ‘A Performing with~’가 아닌 ‘by~’를 사용해 이 초과된 감각에 행위주체(agent)로서의 위치를 부여하고자 합니다.


작년 《올해의 작가상 2018》에서 선보인 〈변칙 판타지〉는 ‘퍼포밍’이 곧 ‘퀴어링(queering)’이 되는 것을 시각적으로 구현하셨죠. 이번 작업에서는 그런 개념들이 어떻게 발전되었나요?


퍼포밍이 퀴어링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언제나 제 작업의 출발이 되기도 합니다. 여성국극은 국악 전통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구음 전수(oral transmission)’ 방식을 고수하고 매우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보수적이고 혹독한 교육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수자들이 적을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구음 전수라는 방식은 참 이상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요. 이번 제 작업에 출연하신 이등우 선생님의 레슨 현장에 가서 참관이나 촬영을 종종 했어요. 예를 들면 학생들을 가르칠 때, ‘소리를 굵게 내야지’라고 말씀하시면 될 것을 ‘소리를 남성적으로 내야지’라는 식으로 젠더화된 표현을 많이 쓰시더라고요. 구음 전수라는 전통적 방식은 실은 그리 순혈적이거나 형식적이지 않고, 더 다양한 전수의 언어들이 이미 포함되어 있고, 충분히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 같았어요. 그것에서 힌트를 얻어서, 이번 작업에서는 퍼포머들 간의, 그러니까 신체와 신체 간의 상호적인 전수를 상상해보고 싶었어요. ‘오럴 트랜스미션(oral transmission)’을 ‘인터바디 트랜스미션(inter-body transmission)’으로 확장해 개념화해보려고 한 것이죠. 4인의 퍼포머들도 각자 자신의 공연을 하고 있지만 각각의 공연을 영상 안에서는 수없이 부딪히고 교차되도록 편집함으로써 각각의 신체 사이를 오가는 상호전수의 개념들을 시각화해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 이미지 안으로 관객의 몸이 개입하는 것도 상상하면서요. 그리고 이러한 몸들의 역동적인 상호 교차 속에서 발생하는 퀴어 계보를 상상해 보려는 것입니다.


업로드용4.jpg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설치 전경. ⓒKorean Pavilion Venice Biennale 2019.

연출에 주안점을 두신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퍼포먼스나 비디오에 쓰이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혹사시키고, 초과해서 쓰겠다는 것이 가장 1차적인 목표였던 것 같아요. 모든 안정성을 의심하고, 촬영장에서 통용되는 연출, 촬영, 조명 등의 관습화된 방식을 모두 비껴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목표는 시각예술에서 ‘시각성’이라는 정언명령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관객들이 제가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통해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혹은 배제된 것에 목소리와 가시성을 부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저는 비가시화된 것에 가시성을 부여하는 것, 배제된 것을 복권시키는 것보다는, 그 복권의 자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따져 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가시적인 것에 가시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아니라, 가시성은 어떻게 정언명령이 되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시각적인데 비시각적일 수도, 청각적인데 비청각적일 수 있는 상태를 고안하고, 그럼으로써 퀴어한 방법론, 퀴어한 미학을 밝혀내는 것에 집중했어요. 저는 우리가 가진 역사, 자아, 젠더, 매체, 미술, 규범 그 어떤 것도 안정적일 수 없다고 봐요. 그리고 그 불안정성 위에서 만들어지는 미학이 퀴어 미학이라고 봅니다. 그 불안정성을 연출에 녹여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퀴어 문화가 익숙한 환경에 놓인 서구 관객들에게 오히려 이 작업이 퀴어 코드로만 읽혀서 전체 주제가 오독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도 듭니다.


종종 제 작업에 등장하는 한복 입은 배우의 이미지 때문에 오리엔탈리스트다, 민족주의자다 라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런 지적들에 항상 신경이 쓰입니다만, 사실 오독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우리가 더 이상 그러한 서구 담론의 계보 속에서 휘둘리거나 눈치 보기식의 작업을 제공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클리셰(cliché)나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을 어떻게 맥락적으로 세심히 배치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예 쓰지 않기로 하는 것보다 더 생산적이라고 봅니다. 그것이 제가 좋아하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다시 시도하고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고 봐요. 상투적이고 진부한 이미지가 위험해서 쓰지 않는 거라면, 계속 겁에 질린 반대항을 생산해야 하는 것일 텐데, 그랬다면 “그래도 상관없다(but No Matter)”라는 문장도 쓸 수 없었을 거예요.


업로드용5.jpg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설치 전경. ⓒKorean Pavilion Venice Biennale 2019.

매혹적인 ‘빛’과 ‘반짝임’ 속에서 스크린이 곧 무대가 되는 공감각적 체험이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올해의 작가상 2018》 전시에서는 관객들이 전시장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극장인가?’하는 감각을 몸으로 바로 느꼈으면 했다고 언급하신 바 있는데, 베니스비엔날레 관객들에게 기대하는 즉각적인 감각은 무엇인가요?


이번에도 연극적인 감각을 많이 가져왔어요. 대표적으로 커튼과 같은 재료, 무대와 같은 공간 연출, 드라마를 이끄는 조명과 같은 요소들이요. 반면, 영화를 보는 극장을 연상시키는 감각들을 배제하려고 애를 많이 쓴 편이고요. 마치 클럽 같기도 하고, 공연장 같기도 한, 적어도 미술관이나 영화관을 연상시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공간도, 모니터나 스크린도 사람의 신체 스케일을 기본으로 두고 결정했습니다. 스케일이 위압적이진 않지만 또 너무 타이트하진 않은 상태랄까요. 관람 환경이 좀 혼란스러울 수는 있습니다. 모든 것을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구성이기도 하고요. 그냥 춤이나 추다가 나가도 좋겠고(웃음). 아, 그리고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의 퍼포머 중 한 명인 키라라가 제 작업의 음악을 만들어 주기도 했어요. 음악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흥분됩니다.


이번 베니스비엔날레를 기점으로 앞으로의 작업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미래를 생각하면 좋겠는데, 현재 작업에 너무 몰입해 있어서 차마 이후를 생각할 틈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꾸준히 매체에 도전하는 방식들에 관심을 두고 있고, 또 주제적으로는 한국 미술씬에 관심이 있습니다. 한국 미술계라는 순환구조 안에서 현대미술, 여성주의 미술 같은 게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지, 왜 어떤 미학들은 항상 정답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지, 그런 미학이 비평적 언어를 가질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요. 미디어, 영화, 공연과 같은 매체를 이용하면서도 이용하지 않는 척할 수 있을까? 장르적 규범을 어떻게 재배치할 수 있을까? 장르 규범이라는 것은 긴 세기 동안 유지된 이유가 있을 테니 그것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작업해야 하지 않을까 등. 예술 안에 오롯이 담기는 예술 내부적인 것보다 예술을 이름 짓고, 제도를 만드는, 그런 작품 외적인 것들에 대해서라든가…. 작품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작품과 외부의 경계 그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네요. 그런 이야기들이 더 풍성해질 때 작업의 생존력도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관련 기사 읽기

「2019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참여 작가 인터뷰 – 남화연」, 미술세계, 2019년 6월


「2019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참여 작가 인터뷰 – 제인 진 카이젠」, 미술세계, 2019년 6월


※ 이 원고는 미술세계 2019년 6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미술세계와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김정아

미술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