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S(Sarubia Outreach & Support)는 사루비아다방이 2015년부터 새롭게 시도하는 중장기 작가지원 프로그램이다. 재작년 6월 공모를 통해 ABC 그룹 총 6명의 작가를 선정하였고, 2년간의 진행 과정을 전시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피드백을 구하는 자리이다.
김주리는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의 순환과 공존을 흙과 물을 이용한 조형 작업으로 다뤄왔다. 이러한 주제를 인체와 도시의 모습을 빌어 시각적 은유의 방식으로 표현했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작가는 시각과 청각, 촉각과 후각, 시간과 공간이 한데 어우러진 공감각적 상황으로의 연출을 시도했다. 특히 그의 작업에서 구체적인 형상의 소멸을 돕는 요소로서 자리했던 물이라는 소재는, 이번 전시에서 조형의 핵심이자, 근본적인 사유의 원천으로서 재조명된다. 견고한 양감을 지녔던 구체적인 형태는 주제의식을 확장해 나가는 가운데, 다양한 외부의 조건과 자극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또 다른 양상으로의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풍경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짙은 어둠과 강한 쑥향, 가끔씩 깜박거리는 조명과 정체마저 알 수 없는 소리들이 어떤 장면을 연상시키지도 못한 채 곧장 드러나 버린다. 공간으로 진입하는 통로는 유난히도 협소해서, 우리는 저마다 크기도 가늠할 수 없는 이 모호한 풍경과 홀로 대면할 수밖에 없다. 그 길 끝에서는, 실체 없는 추상적 형태의 움직임이 전체의 풍경에서 감지되는 신호들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감각을 자극한다.
김주리의 <일기(一期)생멸(生滅)>(2017)은 하나의 풍경이다.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주목해온 “휘발하는 풍경”, 즉 “휘경(揮景)”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는 <휘경>(2011-2017) 연작을 통해, 일련의 건축물을 축소하여 그대로 재연한 후 곧 다시 허물어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풍경에서 감지되는 현실 너머의 우연한 신호들을 붙잡아보려 했다. 그의 첫 <휘경> 연작은 재개발이 한창이었던 서울의 휘경동(徽慶洞)을 소재로 삼아, 곧 사라질 오래된 주택의 형태를 본떠 흙으로 모형을 만든 다음 전시가 시작되면 거기에 조금씩 물을 부어 그 형태가 아래로부터 서서히 붕괴되는 과정을 보여줬다. <휘경> 연작은 작가가 단지 재개발지역에 대한 사회적 이슈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작업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어떤 현실의 풍경이 함의하고 있는 기억과 그것에 대한 비현실적 차원의 감각들을 이야기한다. 때문에 그가 제시하는 어떤 형태의 구축과 소멸 앞에서,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아직 본 적 없는, 하지만 이미 사라진 시간의 기억에 대해 막연한 향수를 갖게 된다.
<휘경>에서 시작된 풍경에 대한 그러한 관심은 <일기생멸>에서 보다 추상적인 사유로 확장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최소한의 장소성을 지시하던 건축적 풍경이 사라진 이번 전시에서, 김주리는 마치 “발견된 오브제들”이 소리 없이 보내오는 초현실적 신호들처럼 풍경의 요소들을 매우 추상적인 시간의 대체물들로 끌어들였다. 이를테면 유럽의 한 작은 도시를 여행하던 중 유난히 창백한 잎이 인상적이어서 한줌 채취해 온 식물을 그는 서울의 한 골목길에서 우연히 발견했고, 그것이 백묘국이라 불리는 야생화라는 것을 알아내 직접 재배하기 시작했다.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의 우연한 만남은, 그에게 어떤 유령 같은 신호로 작용했고 죽은 듯 창백한 이파리가 물이 많으면 오히려 선명한 녹색을 띠며 죽어가는 백묘국의 언캐니한 모습에서 물에 의해 무너져 내리는 “휘경”의 맥락을 감지했다.
공간을 가득 메운 마른 쑥향과 가늠할 수 없는 공간 너머의 소리 또한, 절대 풀리지 않는 이 풍경의 모순을 한껏 가중시키고 있다. 김주리는 도시로부터 외딴 곳에 떨어져있는 한 레지던시에 입주하면서 그 주변에서 서식하는 들쑥을 보며 반복되는 낯선 풍경들 속에서 비현실적 차원의 상상과 마주해야 했다. 일체의 무언가를 감추듯 강한 향으로 위장하고 서 있는 이 식물은, 낯선 풍경에 잠재된 원초적인 것 혹은 사라진 기억을 다시 불러들일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신호체계다. 한편 공간을 소리로 가로지르는 수많은 음의 파장들은 대체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몇 광년 떨어진 어느 우주와의 교신처럼, 이 어처구니없는 상상의 수신음은 풀기 힘든 암호와도 같다. 무언가 타들어가는 소리 같다가도 거대한 원시림에서 무언가가 생성되고 움직이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풍경에서 눈을 돌려 공간 모퉁이에서 연신 흘러내리고 있는 듯한 어떤 형태의 모습이 이 신호음과 포개어지면, 이 낯선 소리는 무언가가 붕괴되어 사라져가는 장면에서 또 다른 감각을 자극하게 된다. 이를테면, 매우 폭발적으로 사라져가는 어떤 형태가 우리에게 보내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 역동적인 소리의 파장들은 매우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곧 소멸을 예고하는 불안한 신호의 실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가늠할 수 없는 이 비현실적인 소리의 정체는, <휘경> 연작에서 일련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친 후 남겨진 메마른 흙의 파편들에 다시 물을 부었을 때 그 사라진 풍경에서 채집한 미세한 소리의 파장들이다. 그 미세하고 비밀스런 소리가 이번 전시에서는 또 다른 경험의 실체들 속에서 증폭돼 서로 교차하면서, 이 낯선 풍경에 잠복되어 있는 생성과 소멸의 표상을 새롭게 환기시킨다. 꽉 찬 원형의 달빛이 검은 수면 위에서 가끔의 미세한 파동에 일시적으로 제 형태를 완전히 놓치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현실의 풍경에 잠복되어 있는 서로 다른 시간의 경험들, 현실 바깥으로 사라질 풍경들이 보내오는 무수한 신호들, 그러한 비현실적인 사건들과 교신할 수 있는 한 주체의 마술적인 감각에 대해 계속해서 말을 건다.
안소연 | 미술비평가
1980년생. 경희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했다. ‘Scape_collection’, 통의동 보안여관, 프로젝트 스페이스 모, 서울(2012), ‘조용한 침범’, 가 갤러리, 서울(2008), ‘Room#203, Ya project 03’, 가 갤러리, 서울(2005) 등 총3회의 개인전과, ‘제1회 중국 국제세라믹비엔날레’, 허난박물관, 정주, 중국(2016), ‘홈 그라운드’, 청주시립미술관, 청주(2016), ‘오늘도 좋은 하루’, 굿모닝 하우스, 수원(2016), ‘낭만적 나침반’, 경기창작센터, 안산(2016), ‘디카포드’, 에어스페이스 갤러리, 스토크언트랜트, 영국(2016), ‘메이드인서울’, 메이막 현대아트센터, 프랑스(2016), ‘랜드마킹: 장소의 사회학’, 스페이스 K_과천(2015), ‘Clusters’, 갤러리 EM, 서울(2012), ‘제10회 송은미술대상전’, 서울(2011) 등 다양한 전시에 참여했다. 그 밖에도 시떼 국제예술 레지던시, 프랑스(2016),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세라믹 창작센터(2010),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2015), 경기창작센터(2016) 입주작가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