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언제부터 큐레이터였다고 말할 수 있나요? 아시아문화개발원 이영철 원장은 196년 크리스 마르케(Chris Marker)이 신작 를 보고 큐레이터로서의 각성을 이룰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원장은 한국인 가운데 최조의, 그리고 근대적 경험을 넘어서는 현대미술 큐레이터로 백남준을 꼽는다. 또한 그는 백남준을 '큐레이터-로서의-예술가'와 '예술가-로서의-큐레이터'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들에 의해 현대미술의 전시가 창조되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필자가 경험담을 바탕으로 현대 큐레이터의 세계를 살펴본다.
1993년 뉴욕 퀸즈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태평양을 건너서》전을 제인 파버(Jane Farver)와 공동으로 기획했다. 당시 현지 평가가 기대 이상으로 좋았지만, 그것은 특별한 발견이나 배움이 없던, 말하자면 비평가의 무미건조한 재현적 사고의 전시였다. 그 이전에도 주제를 강조하는 전시들을 더러 선보였지만 그 또한 큐레이터로서의 전시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1996년 여름, 뉴욕에서 전시를 보다가 한 작품 앞에서 가슴이 뛰었다. 작품을 보며 "아, 전시를 저 작품처럼 만들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 작품은 현재는 프라다 매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소호에 위치한 구겐하임 분관 미술관에서 뉴욕 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였던 바바라 런던(Barbara London)이 기획한 《미디어스케이프(Mediascape)》전에 출품된 작품으로, 프랑스의 독특한 다큐멘터리 영화/비디오 감독인 크리스 마르케의 신작인 [Silent Movie](1995)였다. 당초 웩스너 아트센터에서 커미션해 만들어진 다섯 채널 방식의 흑백 비디오 작품으로 다섯 개의 모니터로 상영되었으나,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에서는 한 개의 모니터에 작품을 묶어서 보여주었다. 훨씬 나중 일이긴 하나 무용연출가 피나 바우쉬(Pina Bausch)의 댄스 퍼포먼스 작품인 《카네이션》 을 보면서 새로운 시각예술 전시를 꼭 이와 같이 만들어보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이보다 훨씬 전에 모니터 한 개를 사용한 단 한 개의 영상 작품이 큐레이팅의 ‘테크네(techne)’를 떠올리게 한 최초의 벼락이었던 셈이다. 마르케는 사진, 소설, 멀티 미디어, CD-Rom 작업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청각 분야의 장르를 넘나들며 선형성을 거부하는 편집 방식과 철학적 시(poesie)를 드러내는 나레이션으로 특이한 다큐 형식의 영상을 만들어 ‘시네 에세이스트’라 불린다. 당시 나는 전시장에 서서 현기증을 느낄 만큼 오래 그 작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 들었고, 그 이후로 전시에 대한 사고가 바뀌었다. 내면을 휘젖는 소용돌이 화면의 충격은 마르케와의 만남 이전과 이후를 갈라놓았다.
마르케는 기억의 영역을 역사의 영역이 아니라 지리적인 영역으로 여긴다. 인간의 뇌 속에는 영혼의 원리가 자리하고 있는 어떤 장소나 어떤 지점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비록 정확한 위치에 관해 말할 것이 없지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감각이 만들어 낸 모든 인상들이 전달되고 사고하기 위해 머무르는 고유한 장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상이란 아주 작은 입자와 물질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20세기가 아니라 17세기적 사고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인간의 뇌 속에서 하늘에 속한 별의 숫자와 지상에 속한 풀의 숫자가 같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그의 작품은 각자의 상상과 기억의 무질서 속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지도를 스스로 발견하게 해준다. 이는 시간을 공간화하는 운동 이미지가 아니라 공간에서 각기 다른 시간을 파생시키는 비선형적, 비역사적인 전시를 떠올리게 한다.
말과 사물, 개념과 이미지가 충돌하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아가는 공간 포맷으로 만든 것이 2회 광주비엔날레였고, 그 이후에 만든 《도시와 영상-의식주》, 1회 공장미술제, 2회 부산비엔날레, 《당신은 나의 태양》, 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의 제작 방식으로 계속 이어졌다. 시간은 미래에서 과거로 빛의 속도로 달린다. 우리는 지구상의 현재라는 시점에서 개별적 관점으로 달려 나가는 순간성(temporality)을 총칭하여 ‘동-시대성’이라 부른다.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는 이것을 역사의 군도적 혹은 다도해적 개념이라 했는데, 나와 큐레이터들(로자 마르티네즈 Rosa Martinez, 후한루 侯瀚如)은 그보다 먼저 이 개념을 전시로 풀었다. 2회 부산비엔날레(2000년)는 전시 공간 안에서 작품들을 스스로 규칙을 갖고 있는 섬으로, 그 사이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물로 가득 찬 바다로 간주하였다. 바다는 새 생명을 위한 심연이다. 관객은 섬에서 섬으로 여행하거나 ‘목숨을 건 점프(sarto mortale)’를 한다. 이런 관점은 연속적인 대륙이라는 개념에 반발하는 것으로, 주인공이 사막에 만들어진 욕망의 섬으로 죽으러 들어간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떠올리게 해서 부산비엔날레의 제목을 통속적으로 ‘리빙 아일랜드(섬을 떠나며)’라고 했다. 전시에서 이름짓기는 재밌다. 《산으로 간 팽귄》 , 《랜덤 액세스》 , 《여성 그 비어있는 풍경》, 《당신은 나의 태양》, 《지구의 여백》, 《지금 점프하라》, 《역동적 균형》, 《당신은 어디에 계세요》, 《탈속의 코미디》, 《파라다이스 보다 낯선》, 《리토르넬로》, 《원더풀 여행사》, 《균형을 건드리기》 등등. 전시 제목은 기억 속에 있는 장소와 사건 이미지를 되살려내는 표지판과 같다.
한국인 가운데 최초의 그리고 근대적 개념을 초극하는 차원에서의 현대미술 큐레이터는 누구인가? 당대의 여러 지식과 예술 영역들 안에서 마치 수학자 포앙카레(Jules-Henri Poincare)처럼 새로운 관계들을 찾아내 자신만의 특유한 예술 어휘를 창안하고, 모든 감각들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질문의 형식으로 되바꾸었고, 주어진 갤러리의 한정된 공간을 넘어 요즘의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처럼 욕조, 부엌, 지하실, 정원, 로비 등을 사용하여 전시와 담론의 공간을 생산하고, 자신의 개인전에 다른 예술가들을 초청하여 하나의 인격, 하나의 정신으로서의 ‘작가(Author)’ 개념을 거부했던 그 큐레이터는 누구였을까? 그는 자신을 한번도 큐레이터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냥 예술가였다.
백남준은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 하지만 한낮의 개기일식처럼 얼굴이 가려진 백남준이다. 그는 먼 과거 속의 몽골이나 만주에서 방금 당도한 젊은 샤먼의 ‘에크리튀르(ecriture, 문자적/비문자적 쓰기 일체)’로 사물과 장소와 관객들을 흔들어대며 유럽의 일방향적인 근대적 소통 방식, 형이상학적인 작품과 저자 개념 일체를 부숴버리는 실험을 펼쳤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물의 키네틱적 운동의 성적 판타지에 매료했을 뿐, ‘열린 회로’의 시대를 예견하지 못했던 뒤샹에서 훌쩍 벗어나 새로운 세기를 여는 새 예술개념들을 출현시킨다.
첫 출발부터 그는 ‘기획자-로서의-예술가’의 하나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레디메이드 아트가 탄생(1913년)한 지 50년이 되는 해인 1963년에 열린 《음악의 전시》에서 시베리아 만주에 기원하는 한국의 대감굿 놀이(사건이 펼쳐지는 장소에서 터줏대감 귀신을 불러내 굿을 하는)를 현대 퍼포먼스 전시로 풀어내 미술사의 빅뱅을, 1984년 정초에는 견우와 직녀의 민담 설화를 바탕으로 세계 최초의 위성 아트(우주적 오페라)를 기획했고, 아시아 최초의 광주비엔날레에서 《정보 아트》전을 그리고 서구의 뮤지올로기에 맞서 독일어로 ‘쿤스트할레’(아트홀) 개념을 처음 만들어냈다. 큐레이터이자 관장으로서 본인이 백남준아트센터에서 3년간 기획하였던 몇 개의 전시들은 백남준의 사이언스 픽션적인 판타지를 느끼며 놀이를 했던 전시 큐레이팅이었다. 누군가는 야사같은 이야기들로 전시를 만들었다고 냉소했지만, 예술가 자신이 레퍼런스 자체이듯이 큐레이터는 자신만의 전시 레퍼런스를 구성하는 전시의 예술가, 디자이너이다.
또 한명의 예술가로서 전시 기획의 조건을 형성했던 중요한 인물이 있다. 프로젝트 기획 공간으로서 비영리적인 대안공간을 1985년 뉴욕 열었던(인사동에 있던 그림마당 민은 1986년), ‘마이너 인저리’라는 제목으로 소수자를 위한 열린 공간을 창설했던 예술가가 있다. 그는 부르클린에서 발간하는 한 지역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사람은 모두가 한배를 타고 있다"며 나중에 둔중하기 짝이 없는, 물에 도무지 뜰 수 없는 실물 콘크리트 배를 만들었고, 빌리 조엘의 ‘어니스티’를 우리 말로 번역하여 자신이 부른 곡을 첨가했다. 백남준이 특히 좋아했던 벽암록의 한 구절 가운데 ‘무봉탑’(이음새가 없는 탑)은 그림자가 없는 나무 밑의 모두가 타고 가는 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천리(우주의 이치)와 심리(마음의 이치)가 같다는 말을 선시로 표현한 것이다. 마음과 우주는 죽은 자와 산자, 앞으로 태어날 자 모두를 싣고 함께 타고갈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배에 비유되어 있다. 누군가는 그의 콘크리트 배에 대해 두개의 다른 문화 사이에서 번역의 희박성이란 측면에서 해석했고, 누군가는 현대적 삶의 자화상이라고도 했다. 그는 47세에 작고한 박모(박이소)이다. 이 두 예술가는 각자 다른 시기에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가는 퍼포먼스를 하였다. 박모는 삼일 간 단식하며 자신이 만든 큰 밥솥을 끌고 가는 퍼포먼스 를, 백남준은 바이올린을 끌고 가는 퍼포먼스 를 하였다.
이영철은 현재 국가법인 아시아문화개발원 원장(대표이사)이며, 계원예술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 제 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예술감독, 2회 광주/부산비엔날레 예술감독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는 『백남준의 귀환』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