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언제부터 큐레이터였다고 말할 수 있나요? 아시아문화개발원 이영철 원장은 196년 크리스 마르케(Chris Marker)이 신작 를 보고 큐레이터로서의 각성을 이룰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원장은 한국인 가운데 최조의, 그리고 근대적 경험을 넘어서는 현대미술 큐레이터로 백남준을 꼽는다. 또한 그는 백남준을 '큐레이터-로서의-예술가'와 '예술가-로서의-큐레이터'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들에 의해 현대미술의 전시가 창조되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필자가 경험담을 바탕으로 현대 큐레이터의 세계를 살펴본다.
영국미술계에서 현대 큐레이팅 교육의 초석을 다진 테레사 글래도우는 백남준아트센터 개관 전시 《NOW JUMP!》 를 이틀에 걸쳐 꼼꼼하게 보았다. 그녀가 열심히 본 백남준에 관한 전시를 다시 회상하면서 큐레이팅의 개념과 실제의 한 사례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이 전시는 준비 기간이 다섯 달이 채 안되었다. 비디오 작품은 단 한 점도 빌리지 않고 전시를 했다. 중요한 개관전에서 국내외에 있는 백남준의 명품작들이 전혀 필요가 없어서가 물론 아니었다. 시간, 예산이 턱없이 부족한 이유도 있으나 궁하면 통한다(궁즉통)는 말이 있다. 백남준의 놀라운 업적과 그의 특별한 ‘예술적 사유’ 방식은 결정적인 소장품 없이도 여타 자료들과의 흥미로운 결합 방식으로, 그리고 지적인 자극이나 감동을 줄만한 작가들의 일부 작업들의 흥미로운 연결을 통해 완전히 새롭게 드러내질 수 있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강력한 변수 중의 하나가 바로 텅 빈 미술관의 실내 공간을 소장품들과 결합하여 구조적으로 짜넣어 디자인을 해버린 것이다. 마르케의 영상 작업처럼 맥락에서 벗어난 스토리텔링과 공간디자인의 실질적인 결합에서 새로운 소통의 길이 열린다. 이 여행의 출발점에는,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되었던 중국작가 왕칭웨이의 페인팅을 걸었다. 백남준의 예술적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 스위스 콜렉터가 소장하고 있던 작품을 빌린 것이다.
테레사 글래도우는 백남준아트센터의 개관 행사를 살펴본 뒤 런던으로 돌아가 소감을 보내 왔다. “나는 이 새로운 예술 기관이 구상되고 만들어지는 과정에 동원된 독창성에 매료되었다. 결정적인 소장품 없이도, 이 센터는 성공적으로 백남준의 업적과 상상력 넘치는 세계에 대해 강하고 설득력있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그에 관한 핵심적인 자료와 의도적으로 역사를 뒤집어 놓는 작품들은 이 미술관의 1층을 꿰뚫고 있는 원형 동선의 각 부분을 설명해준다. 앨런 카프로(Allan Kaprow), 조지 프레히트, 존 케이지(John Cage), 헤르만 니치(Hermann Nitsch),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등의 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을 1963년 백남준이 만든 ‘플럭서스의 섬’ 만큼이나 기발한 공간적 줄거리를 그리면서 연결하고 있다. 뒤샹은 경의와 동시에 도전의 대상으로서 이 여행의 출발점에 놓여 있고 하랄드 제만, 루디 푹스, 노먼 로젠탈과 같은 저명한 인물들이 우스꽝스런 배우로 나오는 오토 뮐의 영상 작품 <엿같은 캠브리지로 되돌아가기>가 전시의 끝자락에 배치되어 있다. 이 전시는 뮤지올로지이자 극장으로서 마치 백남준의 아나키스트적 사회 참여가 현대의 영역을 넘나들며 재연되고 있는 듯하다.”
백남준과 같은, 혹은 베를린 비엔날레를 기획하였던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같은 ‘큐레이터-로서의-예술가’가 있다면 ‘예술가-로서의-큐레이터’ 또한 존재한다. 현대의 예술가는 그 자신이 레퍼런스이다. 마찬가지로 미술관의 관료주의 시스템과 관습의 고정된 맥락에서 벗어나 자의적으로 고유한 맥락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전시들의 글로벌한 폭증 현상과 더불어 ‘거장-서사’의 선구격인 하랄드 제만(Harald Szeemann)처럼 ‘예술가/전시디자이너로서의 큐레이터’ 혹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처럼 ‘프로듀서로서의 큐레이터’가 도처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뉴욕 현대미술관의 낡은 성문을 지키는 로버트 스토어같은 보수적인 큐레이터는 “나는 큐레이터를 예술가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들이 예술가임을 고집한다면 결국에 그들은 후진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후진 큐레이터들로 판명될 것이다”라고 악담을 퍼붓기도 한다. 미술관의 마당쇠 같은 입장은 큐레이터와 예술가 사이에 어떤 도주선도 인정하지 않고 융합을 거부하는 완고한 태도를 대변한다. 큐레이터들이 예술가 선망에 빠져서 자신의 전시에 예술가를 수단으로 이용해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저자가 되려 한다는 비난이다. 나는 큐레이터는 전시의 작가(author)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라는 말은 어떤 ‘정신’- 신비화의 기원 - 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큐레이터는 작가가 아니라 사회적 미학적 ‘장치’를 만들고 실험하는 제작자다. 그는 몸 전체의 신경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제작자에 더 가깝다. 그는 담론들, 제도들, 건축적 형태들, 규제하는 결정들, 법적 조치들, 행정적인 측정들, (준)과학적 진술들, 철학적, 도덕적, 인간학적 입장들을 갖고 각기 다른 것들을 지속적으로 연결하며 창의적인 그 무엇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제도 정치적 저항과 소통을 강조하든 형식주의 미학의 가치를 증명하든 나에게는 어떤 큐레이터가 예술가의 ‘예술가적 사유’의 뿌리를 찾아 자기 나름의 감각 언어로 물리적인 공간을 다시 시공간화하며 언술적, 비언술적 ‘형식’을 부여하는 그 행위가 흥미롭다. 예술가적 사유를 강조하는 까닭은 예술가의 비전에 의해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앞으로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베트남 출신의 영화감독인 트린 T. 민하(Trinh T. Minh-ha)가 처음 제창한 “글로벌하게 생각하고 로컬하게 행동하라”는 구호는 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후에 전 세계적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유럽에서는 68혁명 이후에 그에 부합할만한 제도 비판적 문화 운동이 치열하였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았던 백남준의 경우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현장 활동을 해 왔음을 발견했다. 이는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시선 자체의 차이다. 시선의 변화란 관점의 변화와는 다른 것이다. 관점의 변화는 이론들 간의 차이, 혹은 입장의 차이를 낳는데 그친다. 반면 시선의 변화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패러다임 전환 이상의 변화다. 백남준은 애초부터 다른 시선을 갖고 있었고, 그로부터 우리는 “우주적으로 사고하고 지구적으로 행동하라”는 전언을 받는 느낌이다. 이는 전통적인 시각 예술의 큐레이터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주문으로 들린다.
하랄드 제만같은 거장 큐레이터조차 시공간 개념이 다른 시선으로 움직였던 백남준을 다루기가 어려웠던지 자신의 전시에서 거의 다루지를 않았다. 다만 그는 백남준을 ‘개방적인 천재형의 외국인 노동자’라고 불렀다. 그러던 제만이 본인의 초청으로 광주비엔날레의 커미셔너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큐레이팅했던 《속도-水》 전시의 맨 앞에 무거운 브론즈로 된 잠수종을 좌대에 올려놓았다. 비엔날레의 가장 선두에 있던 그 물건은 대체 무엇인가? 다른 아무 것도 없고 오직 머리만 올려놓았다. 작품도 아닌 것이 왜 거기에 놓여 있던 것일까? 1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것이 한국에서 태어난 백남준이라는 한 천재에 대한 경의의 표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런 판단을 하게 되었다. 비슷한 연배로 동시대에 활동했던 제만은 광주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을 초대하고 싶어했지만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참여가 어렵다고 하자, 그것으로 대신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에는 백남준이 잠수종을 눈에 띄게 사용했던 사실에 기인한다. 황금사자상에 해당하는 큰 상을 받게 된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칭기스칸의 귀환>이라는 작품의 칭기스칸 머리가 잠수종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인근 숲속에 백인 조수를 시켜서 부처 조각상의 머리를 잘라내 거꾸로 허공에 매달라 걸어 둔 것과 기묘한 일치가 엿보인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이런 생각이 큐레이터의 활동에서 언제든 새로운 레퍼런스일 수가 있다. 그 잘린 머리는 그로부터 30년 전에 있었던 첫 개인전에서 문 입구에 소머리를 잘라 걸어 카오스의 잔혹극을 전시로 만들어냈던 바로 그 상황의 재연인 것이다. 이태리 방송국의 요청이 있자 백남준은 그날 저녁 해가 떨어지자 으스스한 굿 제사를 지냈다. 백인 여성을 벗겨서 몽골계 유목민 집단인 타타르족 로봇에게 제물로 바치는 제사 퍼포먼스였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새로운 관계짓기는 늘 새롭다. 그리스 신화에서 태양신 아폴로가 소유하던 소들에게 주문을 걸어 뒷걸음쳐서 나오게 만든 다음에 감쪽같이 잡아먹은 헤르메스의 저 유명한 스토리가 있다. 흔히 21세기는 유목자, 이방인, 소통의 전령인 헤르메스의 시대라 부른다. 그는 곧 영매(靈媒)이다. 예술가와 큐레이터는 영매 행위에서 댓쉬로 이어져 이미 하나가 되어버린 그런 시대를 지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영철은 현재 국가법인 아시아문화개발원 원장(대표이사)이며, 계원예술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 제 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예술감독, 2회 광주/부산비엔날레 예술감독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는 『백남준의 귀환』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