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 동향

2012 키워드로 보는 한국현대미술(5)

posted 2012.06.22

한 나라의 현대미술을 드러내는 키워드라는 것이 있을까? 미술에 대한 다채로운 스펙트럼과 다양한 씬이 있기에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무(모)한 도전'일지 모른다. 그러나 전지구화나 국제화 시대에 대응해 각 국가나 지역의 미술 정체성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 21세기에 이러한 키워드를 (무모하지만)살펴보는 것 또한 의미있는 작업일 듯싶다. 중국 현대미술의 경우 거대한 스케일과 구상회화의 강세 등으로 얘기할 수 있고, 영국 현대미술 또한 yBa라는 이름으로 독특한 그들만의 마감을 규정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웹진'더 아트로'가 창간을 맞아 국내 현대미술의 키워드를 뽑아보는 '무한도전'을 시도했다. 현재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미술계 인사들과 국내 미술계를 관심있게 지켜본 해외 미술인들에게 한국 현대미술의 키워드 세 개를 뽑아달라고 한 것이다. 11인이 생각하는 한국미술 키워드, 이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지속적인 발전과 고찰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이제 그 속으로 들어가 본다.




역동적 자생성을 토대로 성장한 한국 현대미술

다양한 한국 미술 전체를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한다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 세 가지 키워드로 수렴된다거나 그것이 우리나라 미술에만 배타적으로 적용된다고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이런 작업은 가능할 뿐 아니라 분명 유용하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한번 객관화시켜 거리를 두고 바라볼 기회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동시대 한국 미술에 두드러지게 관찰되는, 일정한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으면서 또한 활발하게 진행 중인 특성들은 무엇인가? 양적으로 다수를 차지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질적으로 한국 미술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원천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특성을 거론해볼 수 있을 것인가? 요컨대 한국 미술에 대해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넬 때 앞세울 수 있는 어떤 범주가 가능할까?


필자는 우선 '정치적 미술의 전통'을 들고 싶다. 반드시 액티비즘 혹은 프로파갠더 미술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수많은 일들이 정치적 문제로 강하게 수렴되는 한국의 특성상, 미술가들 역시 정치적 힘에 대한 탐구 혹은 정치적 의식에 대한 표현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이다. 물론 여기서 '정치적 힘'이란 매우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그것은 정치적 내용을 담은 이미지에 대한 직접적인 탐구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때로는 풍자 혹은 자기성찰 속에서 일상성의 옷을 입은 채 주관적 변형을 거칠 수도 있고, 자료 아카이빙이나 오브제 수집의 형태로, 혹은 장르적 형식을 빌린 무의식적 공포나 판타지 같은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물론 이 범주를 지나치게 강하게 사용하면 한국(아시아) 미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불러일으킬 위험도 있지만, 선명한 주제의식을 담보하면서 풍부한 내용을 포함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장점을 갖는다.


두 번째로는, '질료적(물성적) 감성(material-oriented sensibility)'을 거론하고 싶다. '질료적 감성'이란 개념적인 혹은 의미론적인 개입에 앞서 물질 혹은 재료와 감성적으로 접촉하고 그 속에 스며드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일군의 경향을 가리킨다. 이 경향은 때로는 장시간의 노력과 테크닉을 요하는 노동집약적인 작업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소재 자체가 주는 특성을 최대한 살린 감각적 작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이런 표현은 무척 광범위한 경향을 일반화시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해외 아트 페어 등 국제 미술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상당수의 한국 미술이 이런 경향의 작업들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범주화가 그렇게 어렵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맥락의 작가들 중에는 유행하는 담론 혹은 스타일과 무관하게 혼자서 독창적인 작업을 시도하여 주목받게 된 작가들도 많다. 국내 미술계보다 해외에서 먼저 유명해진 작가들도 적지 않다. 사실 한국 미술에는 개념적 작업의 전통이 부족하고 그 경향에서 나온 완성도 높은 작업이 많지 않다. 반면 질료 혹은 물성을 기반으로 하는 감성적 작업에 있어서, 한국 작가들은 중국처럼 거칠지도 일본처럼 너무 단정하지도 않은, 부드러우면서도 생생한 작품을 만드는 재능이 있다.


세 번째로는, '역동적 자생성'을 들고 싶다. 이것은 단지 결과로 나타나는 작품의 특성에 국한되지 않는, 한국 미술계의 작동방식 자체를 일컫는 이름으로 사용될 수 있다. 서구, 예컨대 미술관-화랑-작가가 같은 우산을 쓰고 성장해온 미국 미술계에 비해(규모나 성격에 다소 차이가 있을 뿐 후원자들의 기금으로 만들어진 공간에서 창작-전시-판매가 맞물린다는 점에서), 한국 미술계의 경우는 급격히 성장한 '강남문화'의 공급자였던 상업화랑 및 공무원 조직의 일부로 만들어졌던 공공미술관과는 처음부터 다른 맥락에서 출발한 작가들의 자생적 활동이 중요한 진원지였다. 특유의 역동성과 진취성을 동반한 이러한 자생적 활동은 현재 미술시장과 미술관, 미술비평 등 한국 미술계 전반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물론 이러한 자생성이 한국만의 배타적 특성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다른 분야와 비슷하게, 자생적이고 역동적인 성격은 한국 미술의 키워드 중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


11인이 생각하는 한국현대미술 키워드

글로벌리즘과 차이의 문화정치학
관계성 예술을 통한 공동체적 실어증 극복
한국미술 키워드 3개
예술소곡(藝術小哭)
역동적 자생성을 토대로 성장한 한국 현대미술
과감한 방식으로 예술적 본질을 고찰하는 한국 현대미술
한국현대미술 현장과 경쟁력에 대한 소고
현대 '한국적'인 미술이란 무엇인가
모호한 현실 속 정체성의 탐구
한국 현대미술에 맥락화가 필요한가?
한국 미술에 나타난 변용과 개념적 독립

조선령 / 독립 큐레이터, 미술이론

조선령은 서울을 근거지로 독립 큐레이터와 미술이론가로 일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부터 부산시립미술관에서 10년간 학예연구사로 일하면서 9건의 전시를 기획하고 다수의 전시를 진행했다. 2007년부터 2년간 대안공간 풀에서 객원 큐레이터와 운영위원으로 일했고 2009년에는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학예팀장으로 일했다.

주요 전시로는 《쾌락의 교환가치(Exchange Value of Pleasure)》,
《일상의 역사(Every Day is a History)》,《드림하우스(Dreamhouse)》,
《기념비적인 여행(A Monumental Tour)》 등이 있다. 2011년 9월에 연구서

『라캉과 미술』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