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 동향

2018 비엔날레 프리뷰: 인터뷰(1)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콜렉티브
홍기빈/김남수

posted 2018.07.27

올해 9월 초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이하 서울), 부산비엔날레(이하 부산), 광주비엔날레(이하 광주)가 개막한다.
‘좋은 삶’을 찾아가는 실험으로 ‘공동감독’이라는 집단 지성을 통한 해법을 모색하는 서울, ‘비록 떨어져있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심리적, 역사적 통찰을 보여줄 부산, 수많은 ‘상상된 경계’에 대해 퍼즐을 맞추는 광주. 제목에 얹힌 문학적 수사법을 잠시 거두고 바라보면 세 개의 비엔날레는 경계 위를 서성이는 대안 가치에 대한 모색과 1인의 영웅적 독재체제를 거부하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또한 미술 안팎의 다양한 영역에서 각기 다른 목소리를 모으며, 선형적인 논리정연한 주제로부터 애써 도망가려 한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수평적 의사 개진 구조에 대한 의지는 단지 한시적인 담론 유행에의 편승이라고 넘겨짚기 어렵다. 다양한 영역에서 부터 온 목소리를 모아 집단지성을 꾸리고, 새로운 결과물을 향해 함께 가는 것. 사실 이 과정 혹은 태도는 세 개의 비엔날레가 정한 주제를 포괄하는 하나의 단서이기도 하다. 영웅적 리더십과 먼 이 제스처는 대안가치를 찾는 새로운 시작점으로 읽을 수 있다. 그 시작점으로부터 이들이 그리려는 제 3의 사고는 무엇일까. 아트로에서 그들의 열망 혹은 상상에 대해 들어보았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이하 서울)가 '좋은 삶(Eu Zen)'이라는 주제로, 2018년 9월 6일 - 11월 18일까지 총 74일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린다. 서울특별시가 주최하고, 서울시립미술관이 주관하며, 개최 이래 미디어아트와 기술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올해로 10회째를 맞는 이번 행사에서는 다중지성 콜렉티브라는 큐레이터 공동체에 의한 기획이다. 기획자로는 무용평론가 김남수, 미술평론가 김장언, 독립예술출판 '더북소사이어티' 대표 임경용, 그린피스 기후에너지 팀장 장다울, 글로벌 정치경제 연구소장 홍기빈으로 구성되었다.


예술, 경제, 환경, 정치, 사회, 기술 등의 전방위적 분야에 걸친 전문가들이 그들의 영역과 미술의 세계 사이의 교집합을 만들고, 다시 그들의 합집합을 '콜렉티브'하는 셈이다. 콜렉티브 중 한 명인 김장언 미술비평가는 이 콜렉티브의 작업을 단지 전문가뿐만이 아닌 일반 관객에게 넓히고, 다양한 분야로 논의를 파생할 수 있는 심포지엄과 같은 행사를 동시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작가 참여자/팀은 총 61명이며 폭넓은 분야의 연구그룹과 다원예술가, 미술작가들이 포함되어있다. 콜렉티브들이 생각하는 '좋은 삶'을 제시하는 작업이 보여지고, 심포지엄이 이어질 예정이다.




인터뷰(1), 콜렉티브 홍기빈

“전시장에서 소란과 잡담이 일어나길 바란다. 화이트큐브가 아닌 아고라니까”
홍기빈/ 2018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콜렉티브, 경제학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와 외교학과 대학원을 거쳐 토론토 요크 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역서로는 칼 폴라니(Karl Polanyi), 『거대한 전환』, 반 파레이스(Van Parijs), 『기본소득』, 스티드먼 존스(Stedman Jones), 『칼마르크스 전기』 등이 있고, 저서로는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가 있다. 현재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과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제학의 광대한 영역에서 어떤 연구를 했는지.


대학원에서 공식적으로 배운 것은 지구정치경제학이였다. 국제정치학의 한 부분인 국제금융이었다. 일본 자본주의 기업구조를 연구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그랬다. 하지만 신고전파 경제학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싫어했다. 경제학자로서 연구한 것은 제도주의 경제학파다. 이는 주류경제학인 신고전파 경제학도 아니고, 맑스주의케인즈주의인 이른바 비주류도 아니다. 제도주의 경제학은 이 모든 것과 다르다. 다른 경제학 분야가 몇가지 변수와 인과관계, 수리모델로 분석하고 연구하는 경제학이라면, 제도주의 경제학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경제변수나 수리모델을 연구하는 것이 아닌, 현실의 제도 그러니까 구체적인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칼 폴라니(Karl Polanyi), 토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홍기빈의 저서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1930년대 스웨덴 사민주의 내각과 당시 재무장관 비그포르스(Wigforss)는 체계적인 적극적 경기 순환 통제 정책을 통해 경제 회복을 넘어 호황으로 전환하는 성과를 거둔다. 이 때는 전 세계가 대공황으로 고통받던 시절이었다. 비그포르스는 자유주의 경제사상에 담긴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맹신을 거부했으며,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사상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나라 살림의 계획’이라는 비그포르스의 정치경제학 개념은 ‘잠정적 유토피아’의 개념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으며, 정치 운동과 경제 제도 및 정책 모두에 걸쳐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를 모두 넘어서는 대안적 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경제학이지만 인문학과 또 예술 사회학과 교집합이 있는 것인지.


교집합이 있다. 토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 막스 베버(Max Weber) 의 연구도 그러했다. 또 경제학자 좀바르트(Sombart)의 방식 또한 그러하다. 이들은 경제학을 문화의 분석이라는 영역도 포함하는 학문으로 보았다. 자본주의 문명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가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있었다. 또한 사회를 경제 현상의 연장으로 파악했다. 특히 베블런은 ‘현시적 과시적 소비’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러니까 부자들이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방식으로서 이뮬레이션(모방)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배계급이 어떻게 사회를 장악하는가? 이전에는 칼, 힘이었다면, 자본주의 지배계급은 비싼 물건을 두르고 다닌다는 거다. 과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것. 은수저가 금수저 흉내를 내고, 동수저는 은수저 흉내를 내는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지배계급의 문화가 생성되면, 이를 일률로 모방해서 따라가게 되어있다. 이를테면, 지금의 도시 문화라는게 강남의 유학생 자제들이 파리, 베를린 보고 배운 거 강남 청담동, 이태원 등으로 확산되지 않나. 100여 년 경제학에서 이미 언급한 부분들이다.



비주류 경제학도 아닌 대안학파 연구자로서, 행정적 절차와 계량지수로 설정된 관제(?) 행사에 참여하면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자본 회계의 합리성, 사회 전체가 재편된 것은 몇몇 사람의 문제이거나 잘못은 아니다. 행정화, 계량화, 일종의 막스베버가 이야기한 것처럼 합리화의 방식을 겪은 사회를 지옥처럼 볼 필요는 없다. 세상에 그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분야가 있다는 것이 환상일 뿐이다. 최근에 본 영화 〈매드맥스(Mad Max)〉에서 주인공은 지옥에서 탈출해서 도피처로 가지만, 도피처가 없어진 걸 확인한다. 그래서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 지옥을 파괴하고 새로 재편한다. 합리화된 세상을 지옥처럼 여기고, 어딘가 있을 바깥에 유토피아가 있을까? 아니다. 그것은 착각이다. 자기가 있는 자리, 거기서 모든 걸 새롭게, 더 낫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강렬한 프로파간다 밑에서 이율배반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 각자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만드려는 노력이 더 유의미한 접근법이라 본다.


연구소 안의 빼곡이 꽂힌 연구서적


지금 미술 안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아는 체할만한 경험이나 지식이 없다. 예술은 상상력의 영향. 자본주의 밖에서 있을 자유를 허락받은 영역이지만, 사실 작가는 생활인이다. 예술가의 작업과 상상력은 그럴 수가 없다. 현재는 하지만 예술가, 작가, 과학자들은 상상의 영역 속에서 새롭게 할 자유를 얻어야 하나. 기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아방가르드에 대한 집착에 대한 부분에서도 기인한다. 그 집착을 벗어나자는 얘기가 나오지만, 아방가르드 신화구조는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아방가르드가 결국 부르주아의 클리셰로 다시 변하는 과정까지 모든 게 변함이 없다.


주목하는 방식 중에 하나는 80년대 록그룹 유투(U2)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그들은 영국의 에너지 분출의 파괴적인 록음악에 조용하게 다른 방식을 제시했다. 그 당시 80년대 영국 록음악은 에너지의 분출. 거칠고 파괴적이었다. 펑크록이 그때는 젊은이의 대세. 유투는 거기서 한계. 아일랜드 사람들. 이 방식이 자신의 탈출구가 되는가 반문했다. 오히려 그들은 기독교도가 되었다. 절망이나 좌절을 이야기하지만 이야기의 결이 다르다. 그러니까 현실을 왜 파괴, 왜 부정하는가. 그리고 그 파괴하고 부정하는 방식이 꼭 다른 주류의 거친 방식을 모방할 필요가 있나. 유투의 방식이 여러 부분에서 시사점을 주는 바가 크다. 또한 예술의 방식에 대한 고민 역시 다시 원점에서 재고해보아야 한다. 나는 예술이 아직 보이지 않는데 보여야 할 것, ‘아직 아니다(Noch Nicht, 독일어)’에 대해 그러나 꼭 와야 한다는 당위가 있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시각 예술가들이 해야하는 일이고 지금의 예술의 지향점에 단서가 되지 않을까.


유투처럼 보편적일 수 있는 평범한 행동을 통해, 내가 있는 자리에 대한 지나친 부정도 에고도 없이 시작하는 태도는 아주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부연하자면, 있는 자리에서 시작해서, 과장없는 제스처로 세상에 열린 방식으로, 당면한 과제를 풀어가는 것이다.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점이 아방가르드의 귀족주의적 태도와 과장된 저항의식과 대별되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는 엘리트주의가 가득하고, 토론이 없는 고함치는 방식의 행동을 했다. 바깥을 지나치게 이상화하고 안을 저항한 결과, 어거지 프로파간다가 되거나, 부르주아의 새로운 패션의 하나가 되거나 했다. 그들은 열린 소통이 아니었다. 극단의 방식 속에서 혼자만의 자기 확신, 과시, 저항 후 극렬한 체제순응으로 넘어간 것이다.


루도비코 에이나우디(Ludovico Einaudi), 〈북극을 위한 애가(Elegy for the Arctic)〉, 비디오, 3분 13초, 2016. ⓒ Pedro Armestre / Greenpeace
2016년 6월 이탈리아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에이나우디가 북극 빙하 앞에서 ‘북극을 위한 애가’를 그의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하고 있는 장면.


그렇다면 서울 비엔날레에서 나온 키워드 ‘뉴노멀’은 아방가르드의 유토피아적 제시와는 다른 개념인가? 그 개념을 떠나 뉴노멀이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 용어여서 더욱 눈에 띄었다.


잠깐 우리가 생활 속에서 닥치는 수많은 질문을 생각해보자. 실업, 출산, 연금, 결혼, 집장만 이런 인생의 수많은 과제가 불과 이십여 년 전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당연히 해야하는 것들이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 이런 삶의 방식이 가능한 사람도 20%밖에 되지 않는다. 청년 실업이 문제가 아니라 청년은 백수인 상태가 되었다. 개인들의 그런 선택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정부 정책을 만드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계량지표 속에서 터무니 없는 숙제를 국민에게 떠넘긴다.
뉴 노멀. 기자간담회 때의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금융 시장에서 등장한 단어 뉴노멀은 2009년 비즈니스 잡지에서 이자율 구조, 부동산 시장의 흐름이 다 바뀌었음을 설명하는 단어였다.
충분히 포괄적으로 해석 가능함과 동시에, 현재 우리가 인지한 ‘근본적으로 환기가 필요한 상황’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한다. 지구 생태학적, 개인 사생활, 개인의 삶의 주기 등등의 수많은 부분에 적용 가능하다. 예를 들면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시작한 연금제도는 65세 이후 지급되는 구조였고, 당시에는 70세 정도까지만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 청도 노조의 퇴직금은 당시 많은 기관사가 폐결핵으로 퇴직 후 일찍 병사하는 상황에서 보상의 의미가 컸다. 100세시대에 당연히 연금제도는 기존과 같을 수 없다. 수많은 지점에서 재검토가 필요하다.


케이트 라워스(Kate Raworth)

미셸 보웬스(Michel Bauwens)

요하이 벤클러(Yochai Benkler)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진화: 인류세(Anthropocene)의 도래와 공유 인간의 부활〉이라는 큰 주제 아래 강연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경제학자들. 3차에 걸친 포럼으로 구성되며, 각 포럼은 1박 2일에 걸쳐 3개의 세션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거대한 전환의 시대를 맞아 이전 산업시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제생활의 원리와 주체를 찾아보기 위한 핵심 주제들을 논의하고자 한다. 세부적으로는 성장주의가 가져온 생태적, 자연적, 사회적 위기의 심각성을 고찰하고,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만들어진 이기적 존재로서의 호모-이코노미쿠스적 인간의 한계를 파악하여 4차 산업혁명이라는 21세기 새로운 물질적 조건에 적합한 새로운 인간 유형으로의 진화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


그런 문제의식에 바탕한 경제학적 연구와 토론이 서울비엔날레에서 어떻게 재현될 예정인가.


‘좋은 삶'이라는 것은 아무도 대답할 수 없고, 전제가 이제 아무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확고한 해법이 아닌, 토론이 벌어지도록 하는 매개의 장이다. 전시의 주 장소인 미술관의 1층에 100여명이 수용가능한 아고라가 설치된다. 토론이나, 공연이 있을거고, 쉴 수도 있는 곳이다. 아고라에 모여서 토론하는 영역에는 아주 세세하고 다양한 분야까지 포괄할 것이다. 의식주의 사소한 부분, 생활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담아질 것이다.
경제학에 있어 초청한 세명의 학자 케이트 라워스(Kate Raworth), 미셸 보웬스(Michel Bauwens), 리차드 웰킨스(Richard Wilkinson)가 아고라에서 새로운 대안적 시선을 말할 예정이다. 하지만, 다시 말한다. 명확한 답을 내겠다는 것이 아니다. 답은 무엇? 각자의 처지에 자기가 찾아가는 것. 그것은 모더니티의 세계관에서 저자의 소멸과도 관련이 된 문제이다. 예전에는 저자에 대한 권위가 있었지만, 21세기에는 저자가 없다. 더 이상 뭘 보여줄 수가 없는 상황. 나올 것은 이미 다 나온 상황이다. 어떤 것을 봐도 놀라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보이는 것으로 메시지를 나오는 것은 더 이상 무리라 생각한다.
또한 미술의 임무가 유토피아였지만, 이제 이미 다 나왔던 이야기이기도하다. 이제는 유토피아가 무엇인지 토론해야할 때. 예를 들면, 플라톤(Plato)은 어떤 성인을 믿으면 돼라고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그렇지 않았던 것과 비슷하달까. 이미 존재하는 이데아가 아닌, 사람들의 토론으로 최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던 부분이 그렇다. 특히나 창작자의 권위, 저자의 소멸의 시대에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의 타이틀 ‘좋은 삶'은 상징적 언술인가? 특히 그리스어이며 철학적 언술이라는 점에서 더욱, 수식어처럼 읽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에서는 사람의 욕망은 무한하지 않다. 좋은 삶을 말하려면, 욕망의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새로운 시작점으로 삼고 있다. 이는 ‘좋은 삶이 무엇인가’가 소박하고 단순한 질문임에도, 사람들에게 울림이 있는 주제라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어떤가? 미술이 그려지는 그 바탕이 되는 지금의 우리의 상황은 어떻게 볼 수 있고, 미술과 예술의 역할을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질문이 비교사회학적 가정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특별히 문제가 될 만큼 비정상적이고, 건강하지 않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의 보편적인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독특한 문제라는 것은 아닌. 한 가지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버릇 중 ‘우리나라는-’으로 시작하는 말투가 잘못된 전제를 보인다. 그건 선진국은 정상이라는 착각이다. 이를테면 미국, 일본, 스웨덴, 북유럽, 각각의 체계에서 유용하고 유효한 설계들이 있을 수 있지만, 단편적으로 분리해서 그들의 사회는 우수하고,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 또한 오류이다. 촛불집회처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개혁이 가능한 나라라는 거. 그냥 지나가면 안되는 부분이다. 헬조선이라고 어두운 부분을 어둡다고 말하는 게 긍정적인 부분이다. 클리셰지만 반세기에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압축적 성과를 내는 것도. 그리고 축구도 독일을 이겼지 않은가. (웃음)



문제의식과 동시에 긍정적 층위 역시 포함하고, 토론을 매개한다는 의지가 새롭다. 하지만 그런 관점이 수많은 책을 보고 그린 상상의 꽃노래라는 비판을 듣는다면.


그 질문에 대답을 하기 전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내 개인적인 가장 큰 바람은 가족의 행복이고 건강이다. 그거면 된다. 나는 남들도 나만큼 행복하면 좋겠다. 가족이 건강하다면 그게 최고이고, 많은 사람들도 자신의 행복이 곁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는 데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좋은 삶이라는 것은 공동체적 가치. 곁에 있는 이들과의 함께 하는 곳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은 모든 설정의 기본이 개인이다. 하지만 행복은 가족이나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같이 하는 것에서 오는 가치. 좋은 삶은 같이. 그리고 이 행복이 확장되면, 마을이 될 수도, 친척이 될 수도 더 큰 공동체 단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 연극을 왜 보는가? 논문을 써서 영문과 교수가 되려는 게 어쩌면 그 목적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연극을 누군가와 함께 보고, 그 문학적 가치를 나누는 것이, 진짜 행복 아닌가. 공부하는 사람도, 예술하는 사람도 그렇다. 만든 것의 가치를 누군가와 공감하고 공유하는 순간의 기쁨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 함께하는 가치를 다양한 형태의 집단으로 설정하고, 또한 사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수많은 콘텍스트로 연결되었음을 상기할 때, 경제적 단위로서의 공동체가 예술이라는 공동체로 그 공유의 순간을 함께 나눌 수 있음에 대해 강조하고 싶은 것인가?


그렇다. 함께하는 가치를 공유하는 수많은 구분을 경제나 미술, 또 예술의 타 분야를 가로질러, 만나고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매개하고 싶다.



경제학자로서 미술의 담론 생산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는지?


못하면 안 하면 된다. 나는 미술전문가로 스스로를 생각하지 않고, 무엇을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도 아니고. 미술계 안에서 앞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잘할 수 있는 것을 잘 해놓고, 그 가치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의 장이 일어나는 것. 그게 내가 원하는 바였다.



전시에서 말하려 했던 바는 무엇이었는가?


개념적으로 기여하고자 했던 바는, ‘좋은 삶’에서 집적이 되어있다. 미술의 위기는 사진 발명과 시작된다. 사진기 이전에는 보이는 것과 보아야 할 것이 구분되지 않았다. 화가의 손 끝에서 화가가 생각하는 당위의 세계가 화가의 마술에 의해 혼합되어서, 결과물이 나왔고, 반론하기가 쉽지 않았다. 예를 들면, 예수님, 성모마리아가 백인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사진기 이후에는 그럴 수 없었다. 예술가는 동시에 마법의 권위를 잃어버렸다. 화가의 무시무시한 권력이 끝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접근법을 바꿔서, 더 넓은 영역에서부터 제시하는 것이 뉴노멀이다.
수많은 상황에 대한 각기 다른 대답, 이를 위한 토론. 좋은 삶에 대한 토론. 즉, 플라톤적 접근법을 벗어나서 상황 별의 수많은 최선의 해답을 말하기 시작하는 것. 그리고 서울비엔날레라는 아고라를 거쳐간 사람이 다시 스스로의 삶을 그려보는 것. 일종의 발견론적인 관점에서의 시작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화이트큐브 안의 정적인 재현을 넘어서, 연설, 랩, 강연, 잡담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시도되었으면 한다.



그 아고라의 설치가 미술관 가장 중심에 구성된 것도 상징적으로 보인다.


그렇다. 아고라라는 공간이 ‘좋은 삶’의 핵심이고, 비엔날레의 공간적 상징이다. 화이트큐브가 아니다. 전시장 안에서의 수많은 잡담과 소란이 일어나길 바란다. 토론의 장인 아고라이니까.


크리티컬 아트 앙상블 앤드 요하(Critical Art Ensemble and YoHa), 〈그레이브야드 오브 로스트 스피시즈(Graveyard of Lost Species)〉, 2016. 커미션: Arts Catalyst. ⓒCritical Art Ensemble




인터뷰(2), 콜렉티브 김남수

"수많은 소동과 교란위의 또 한번의 질문"

김남수 / 2018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콜렉티브, 무용평론
무용평론가로 시작하여 미술계에 입문한 연구기획자이다. 2008년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원, 2011년 (재)국립극단 선임연구원을 지냈고 2013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아시아문화아카이브팀장 및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했다.


다원예술과 무용의 창작이 화이트큐브 공간과 만나는 지점을 어떻게 보시는지. 그동안의 작업과 함께 설명한다면.


화이트큐브 공간 자체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공간들의 대화가 중요하다고 본다.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는 ‘동시적 오브제’라는 개념으로 두 개의 공간 사이의 기류가 순환하고 교차하는 안무를 제안했는데, 사실 나는 그에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2010년 백남준아트센터 퍼포먼스 전시 《오픈댄스: 달리는 늑대들》과 2011년 국립극단 퍼포먼스 전시 《고래 - 시간의 잠수자》가 화이트큐브나 블랙박스에서 그 자체의 공간적 변환이나 실험을 했다기보다 공간과 공간 사이,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공간 창안을 염두에 두고 진행됐다고 본다.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아고라’라는 사잇공간 개념이 호출되는데, 경제학자 홍기빈 선생의 역할이 컸다. ‘아고라’는 화이트큐브와 저 일상의 공간 사이이기도 하고, 공적 언어로 특화된 광장과 사적 언어로 특화된 밀실(=집) 사이이기도 하다. 화이트큐브는 여전히 공간화의 전략이 될 수 있는 멸균공간이지만, 이번에는 발효와 잡담 그리고 새로운 발상들이 터져나오는 ‘아고라’로 탈바꿈할 것이다. ‘사적이면서 공적인’ 동시에 ‘사적이지 않으면 공적일 수 없는’ 대화의 공간으로 이번 비엔날레의 지향점을 잡았다.


그런데 인간 신체가 발산할 수 있는 생기와 활력을 집어넣었을 때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늘 있었다. 김승옥의 소설 『생명연습』에는 어머니와 형이 작은 집에서 어떻게 패배하고 결과적으로 승리하는가, 반대로 형식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굴종하게 되는가 같은 문제가 등장한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작은 집은 공간이 좁고, 공간의 사이도 좁다. 이 좁음과 신체는 어떻게 서로 담화를 만들까. 또 어떻게 독창적인 담화를 내놓을까. 나중에는 도처에서 어떻게 '사이' 공간이 증식하고, 하나의 아고라를 만들까하는 문제들이다.


국립극단에 있을 때는 무대라는 사방이 터져 있는 공연 공간을 전통적인 ‘마당’ 개념으로 이해했다. ‘마당’은 너무도 분명한 정답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그 공간의 특질과 밀도를 느끼기 힘들다. 제한된 공간, 그런 공간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통상적으로 춤추지 않는 미술작가가 퍼포먼스를 한다는 것이 화이트큐브나 블랙박스 같은 공간을 떠나서 무엇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예를 들면, 퍼포먼스가 하루동안 진행되면, 그 흔적이 남고, 아카이브가 되는 과정. 그리고 그 다음 작가가 어떻게 그 당혹스런 적층의 공간을 마주하고 영향을 받는 수직적 모멘텀을 처리할 것인가. 그게 재현이라면 그런 식으로 재현의 방식을 고민했었다.



이번 비엔날레에서도 그 재현의 방식이 실현되는가.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큰 행사이고, 이 큰 몸집에서 단순히 공연과 시각예술의 함수관계로만 생각할 수 만은 없다. 사회와 비사회,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의 문제 그리고 중요한 지점은 예술이 창출되기 이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살림과 살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꾸려가는 살림살이의 문제. 그런 삶의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부분까지 생각하고 있다.
비엔날레 전시장은 화이트큐브라는 공간을 장소화하려는 것이 아닌, ‘아고라’ 개념으로 상정될 것이다. 그런데 재현과 관련해서 그 공간은 시각특권적 대상을 본다기보다 대화하는 장소, 구체적인 장소에 가깝다. 전시장 안에 설치되는 ‘아고라’는 공식적인 방식의 장소인데, 그 장소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코라’(Khora) 공간이 역설적으로 필요하다. 코라 공간은 만물을 창조하지만 그 자체는 변화가 없는 생산의 장이다. 이런 장의 작동을 통하여 전시장 곳곳에 ‘아고라’라는 장소가 시민이 개입하고 참여하는 식으로 개방되는 것이다.
공간 설계는 디자이너 조재원 씨가 맡았고, 그가 설계한 ‘아고라’가 이번 비엔날레의 의미를 담지하는 표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기가 모태가 되어서 다른 전시와 실행의 층위로도 계속해서 작은 ‘아고라’들의 움을 틔웠으면 한다.



이번 비엔날레의 핵심 단어인 ‘뉴노멀’이 보여지는 방식이기도 한 것인가?


일종의 공동공간 혹은 공유공간이 되어 수많은 경계의 문턱을 넘고, 되돌아봄으로써 예술의 사회적 장치를 유효화하고 통찰하도록 하는 것 정도가 우리의 소박한 기대이다. 물론 이 기대는 관점에 따라서 난망한 것이기도 하고 거창한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 기존의 예술 작동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터져나온 안티테제라고 봐도 좋겠다.
세계금융위기가 지속되는 경제적 재앙, ‘인류세(Anthropocene)’로 지칭되는 지구의 기후변화 재앙, 21세기 중반 도래한다는 인공지능의 재앙 등등. 작금의 현실은 20세기 아방가르드와 그 이후의 예술이 자율적인 방식으로, 혹은 부정하는 제스처로서 여전히 진행되는 방식으로는 너무나 파국적이고 결정적이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같은 사상가는 이미 이러한 재앙과 격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생각과 예술과 실천이 보다 직접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너무나 맞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혹은 좀더 릴랙스된 상태에서 비스듬하게 몸을 기울일 수 있는 ‘아고라’에서 함께 생각하고 대화하고 토론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작금의 파국에 예술가는 지금까지 해온 방식인 자기변용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겠는가. 이는 이제 지금 개인으로서는 그 거대하면서 복잡성의 문제에 대해 접근하기도 해결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한, ‘아고라’에서 사적이면서 공적인 말하기로서, 수다가 됐든 몽상이 됐든, 그 무엇이 됐든, 일반의지의 힘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비예술이면서 예술이 되는 장을 열고 싶다. 단지 한가지 분과에서 해결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방위적인 분야를 종횡하며 다양한 언술과 생각의 씨앗을 모으는 것이다. 밀도 있는 실행을 준비하고 실제로 실행하는 것이 우리가 제안하는 바이다.



무엇을 실현할까라는 점에서,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뉴노멀’의 범주 속의 작업은 어떠한 것들이 어떻게 들어가는가?


수다, 잡담, 토론, 부조리한 대화, 굿 아이디어, 점프컷, 그 외 미규정적인 것들이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생명연습』하듯이 사적이면서 공적인 이야기들과 실제적이며 직접적인 것들이 '뉴노멀'의 작업이 될 것이다. 부연하자면 언술의 귀납적 논리에 대한 것이 되지 않을까. 사실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는 “나는 어떤 일을 직접 겪어서 사정이 이러하니, 나는 공적인 저항으로서 무엇을 말하겠다” 라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경험을 사회적 언술로 이어가는 것? 이런 실제적인 유통되고 공감받는 언술과 상식으로서 공/사가 확실히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인식 사이의 괴리를 뚫는, 커뮤니케이션의 논리를 이번 ‘아고라’에서 진행하고자 한다.
또한, 지금 예술과 커뮤니케이션의 측면에서 ‘너무 예술’이다. 예술이 과다하다는 것이다. 공공성의 예술 담론은 어느덧 순치된 하청 같기도 하고, 체제에 너무도 밀접한 커넥션이 된 것 같다. 그것이 본래적 공공예술, 무엇인가 여지가 남는 공공예술로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래서 '사적이면서 공적인 타입'으로 접근하여 예술이 창안된 첫날로 되돌아가서 다시 생각해보자는 거다.



너무나 추상적이고 이상적이어서 도리어 사회에 아무 응답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그들만의 비엔날레라는 비판이 있다면.


대선 공약에서도 나왔던 복지에 의한 존립가능성의 문제, 삶의 살림살이를 제공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 예술행정이라는 제도의 문제들. 그런 현실에 대한 즉답은 비엔날레가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삶의 조건, 좁아진 선택지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것. 함께 머리를 맞대는 장을 제공할 수는 있다. 삶의 변곡점에 대한 일종의 화백 회의 같은 것.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각자의 변곡점에 대해 고민해본다면 좋겠다. 그래서 조금 더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변하는 스탠스로서 이 재앙들끼리 경쟁하는 세상에 대응할 수 있도록. 안정을 지향하고, 모험을 거부하는 사회에 예술이 그런 모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야 하는 입장이라 생각한다.


보물섬 콜렉티브(김동찬, 민성홍, 송민규, 최진요, 하석준, 황경현, 좌에서 우) ⓒ작가

보물섬 콜렉티브(김동찬, 민성홍, 송민규, 최진요, 하석준, 황경현), 〈보물섬〉 구축단계 전시 전경, 2016, 경기창작센터 ⓒ작가


이번 비엔날레의 콜렉티브 체제가 축소된 아고라의 형태 같기도 하다. 콜렉티브의 의사결정 구조가 비엔날레 결과에 어떤 차이를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콜렉티브는 차이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시작한다. ‘아고라, 좋은 삶, 아직 아니다(Noch Nicht, 독일어), 뉴노멀’ 이라는 키워드를 수용한 상태에서, 콜렉티브의 개성을 최대한 수용하는 것이다. 해바라기 해를 보고 돌아가듯이, 중간의 심지를 두고 다각도로 돌아보는 방식으로 다양한 아이디어를 수용한다.
1인의 권력자를 정점으로 한 수직체계, 이 익숙한 하이어라키(Hierarchy)에서 헤테로키(Heterarchy)로 전환하는 것이다. 수평적 대화와 이견, 엉뚱함, 썰렁함, 농담 등이 수용된다. 이번 비엔날레 참여자 중에 보물섬은 또 다른 흥미로운 콜렉티브 활동을 보여준다. 그 여섯 작가들의 의기투합과 길항하는 에너지, 그리고 치열하면서 액체적인 서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가들이 우리 비엔날레 콜렉티브에 대해서 한 수 가르쳐주는 느낌이다. 그들이 가끔 비교도 되고, 재밌는 지점들이 많이 보인다. 이번 작업에서도 엿보일 것이다.


노경애, 〈더하기 놓기+,〉, 2016. 퍼포먼스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공연) ⓒ작가

노경애, 〈더하기 놓기+,〉, 2016. 퍼포먼스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공연) ⓒ작가


안무가 노경애 〈움직이는 표준〉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유투브가 1차 검색 사이트라고 한다. 검색이 스트리밍 형식으로 조감되니, 정보를 수용하는 방식이 다르다. 노경애 작가가 진행하는 안무는 그런 변화된 정보수용 방식과 몸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다. 변화된 표준, 즉 뉴노멀이 설정되면, 그 외의 다른 비표준들은 흩어지거나 잠복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안무다' 라는 명제는 공연예술계에서 금과옥조 같은 것이지만, 너무 지나치게 몸과 몸짓이라는 무용사 전반을 꿰뚫고 있는 대상화 기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작가의 안무는 이러한 기제를 부정하기도 하고 작금의 뉴노멀에 비춰서 긍정하기도 하면서 하나의 플랫폼으로 활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개념주의적 안무가 단지 공연에술 맥락을 찢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젊은 세대의 딜레마를 건드리는 작업이 되리라 본다.



고연옥 작가의 〈잣 프로젝트〉는 보다 정치적인 언급과 공연예술계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안다.


고연옥 작가는 〈지하생활자들〉, 〈손님이 온다〉, 〈처의 감각〉, 〈손님들〉 등 문제적인 희곡을 써왔다. 한국 연극계를 중심으로 자기 희생을 감수하고 구조적 문제제기를 한 여성들, 예를 들면 연극발 미투운동과 같은 저항운동이 이번 작업에서 발언될 것이다. 이 여성들은 거악을 폭로하고, 인적청산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불가항력 속에서 ‘연극’이 수직적 체계 속에 있었음을 밝힌다. 공연판의 전반적인 상황이 남성중심주의적이기도 하지만, 본래적 연극의 가치 또한 일정한 타입이 주류를 이루어 왔고, 대세를 이루어왔다. 단단한 타입의 밀도 높은 방식의 연극? 그와 다른 방식은 시도가 되어도 결국 주류의 방식으로 흡수되는 모습을 보여왔다.
고연옥는 ‘연극은 여성이다’ 라는 새로운 전제를 바탕으로, 여기에 새로운 작업을 진행할 것이다. 그것은 잘 여며진 해답이 아니다. 더욱이 기존의 잘된 것을 소비하는 구조 속에 편입되지도 않을 것이다. 기존의 체제를 반문하는 많은 운동, 미투운동과 같은 움직임과 함께 가는 결 속에 질문으로서 지속되는 작업이다. 하지만 콜렉티브로서 나는 그의 작업의 결과물에 대해 열려 있는 입장이다.


춤추는 허리, 〈불만폭주 라디오〉, 2017. 정기공연 3막 ‘나는 예술가입니까’ ⓒ춤추는 허리. 장애 여성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차별과 갈등을 담은 공연 '거북이 라디오'를 새롭게 구성.


비엔날레의 제목 '좋은 삶'에 김남수 콜렉티브만의 답변은 무엇인가?


지루하면서도 평화로운 삶을 택할 것인가, 갈등하면서도 재밌는 삶을 선택할 것인가. 그 기로에서의 내 개인적인 고민이 중요한 화두이다. 물론 누구도 경제적 차원을 배제할 수는 없다. 예술은 사회적 교란을 일으키며, 사회를 낫게 만드는 효소작용을 하고 있다. 그것이 불화를 조장해서, 생각하는 재미를 촉발시키는 기제로서 예술. 그런 방식의 예술은 기능항진증을 앓고 있다.



직접 아고라를 설계하는 콜렉티브로서, 토론에는 어떻게 활약하실 예정인지.


이전의 〈사슴뿔 도서관〉이라는 〈도서관을 낳는 도서관〉, 〈생각을 옹호하는 도서관〉 프로젝트를 했었다.(경기문화창조허브에서 진행한 예술 기반 지식 편집 프로젝트). 프로젝트는 바브라 블레어(Barbra Blarie)의 ‘시간을 바꾸려면 여름의 첫 날을 바꾸어야 한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그 말처럼 시간을 바꾸어야 하고, 여름의 첫날을 바꾸어야 한다. 이 시적인 진술을 더하기 위해 더 많은 책을 활용하고 ―'읽지 않는다!'― 서가를 채운다. 그런 일종의 생각의 범주화와 확장화 작업을 했다. 나는 이번 콜렉티브가 그 작업과 유사하다고 본다. 각각의 콜렉티브가 하나의 도서관이다.
또한 생각도 안무라고 생각한다. 안무에서 무는 춤출 무로, 갑골문에서는 춤출 무가 없을 무였다. 생각이라는 안무를 무로 만들고, 소유하지 않으며, 그러면서 사유의 범주화와 확장화를 만드는 것. 그것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사유의 확장과 범주는 공공의 공유자산이 될 것이다. 이 지점이 비록 이 비엔날레가 공기관 주도의 행사이지만, 적당하고 의미 없는 행사가 아닐 수 있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정확한 답변이 아닌 여물지 않은 계속되는 질문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가득한 재밌는 판에 함께이고 싶다. 그 판의 그물처럼 얽힌 수많은 이야기 위에 다시 질문을 만드는 자로서.

박은정 / 더아트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