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진행 미술세계 편집부
글쓴이 한혜수 객원기자
이미지 제공 백지홍 편집장, 한혜수 객원기자
금강 줄기를 따라서 충청남도 내륙의 공주시에 오면 제비의 꼬리를 닮았다고 전해지는 연미산(燕尾山)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에서 열리는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올해로 어느덧 8회를 맞았다. 비엔날레 전체 규모로는 22개국 81인(75팀), 연미산 자연미술공원에만 16개국 34인(25팀)의 작품이 금강 일대에 펼쳐진다.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는 ‘자연-사적공간-셸터’로 메인 전시는 연미산자연미술공원의 《숲 속의 은신처》전이다. 이외에도 특별기획전으로 영상전 《바람》, 부대 프로그램으로 금강자연미술센터의 자연미술 큐브전 《12×12×12+자연》, 《사이언스 월든-자본》 등을 선보인다.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역대 감독들을 열거해보았을 때 올해는 총감독이 외국인인 점이 눈길을 끈다. 이스트반 에러스(Istvan Eros) 감독은 2008년부터 지속적으로 비엔날레와 인연을 맺어 온 작가이자 교육자이다. 그는 본국인 헝가리에 돌아가서도 자연미술의 계보를 잇는 후학 양성에 힘쓰면서 이번 비엔날레를 다채롭게 만든 작가들을 유치한 주역이기도 하다. 감독 선정이 다소 늦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비엔날레 개최를 무사히 이끌어낸 데에는 ‘자연미술가협회 야투(YATOO, 이하 야투)’를 비롯한 조직위원회와 함께 총감독의 공이 혁혁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올여름 유난히도 가혹했던 폭염을 지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늦장마까지 버텨내야 했던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괜찮을까? 걱정과 기대를 반반씩 안고 연미산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자연 vs. 미술×건축
주제전 《숲 속의 은신처: ‘자연-사적공간-셸터》는 비바람과 같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셸터(shelter)를 보여주고자 한다. 셸터라고 했을 때 보통 자연재해나 방사능처럼 거대한 위협으로부터 숨는, 좁은 의미의 ‘피난처’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번 주제 전의 셸터는 그보다는 넓은 의미이다. 기획 서문에서 숲 속의 셸터들이 ‘사적 공간으로서 방문자에게 안정감을 주고, 사색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고 밝힌 점에서 셸터의 의미를 재설정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어렸을 적에 숨바꼭질하던 기억 속 안방의 옷장이나, 책상 밑의 빈 공간이 주었던 묘한 편안함을 한 번쯤 떠올려보는 것도 좋겠다.
이를 뒷받침하듯 이번 비엔날레의 신작들 중에는 관람자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작품이 많다.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은 프레드 마틴(Fred Martin)의 거대한 인간 두상 형태의 작품 〈나무 정령〉일 것이다. 관람객은 대나무로 된 거인 머리의 입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팀 노리스(Tim Norris)의 〈숲의 파도 셸터〉는 파도 모양의 차양 아래 의자를 대어 놨는데, 제법 아늑한 느낌을 준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이처럼 구조물 내부로 들어가서 앉아 있거나 누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작가인 애니 시니만(Anni Snyman)과 PC 얀서 반 렌즈버그(PC Janse van Rensburg)는 〈잎 셸터〉를 협업하였는데, 이 작품은 두어 개의 나무 사이에, 그것도 공중에 끼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잎 모양의 구조물이다. 작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마치 평상과 같은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그 안에서 쉴 수 있는 한편 공중에 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정감 때문에 관람자는 작품이 기대고 있는 나무들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다.
〈잎 셸터〉처럼 주변 풍광을 보는 시각을 재해석하고자 하는 작업들이 더러 있다. 물론 이 역시 작품 공간 내부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 가운데에는 루마니아 출신 작가인 팔 피터(Pal Peter)의 작업 〈또 다른 풍경을 위한 셸터〉가 돋보이는데, 그는 네모난 목조 구조물 안에 창을 내고 한쪽에는 볼록렌즈를 통해 왜곡되고 뒤집어진 풍경을 볼 수 있게 했다. 그 반대편에는 같은 크기의 동그란 구멍과 함께 아래쪽에 45도 각도로 원형 거울을 설치하여 거울에 하늘의 상을 맺히게 했다. 이를 통해 그는 풍경을 보는 색다른 관점을 광학적으로 시각화하고자 한다.
한편 셸터는 위협의 구체적인 형태가 무엇이든 외부 세계 즉 자연을 위험으로 간주하고, ‘대적한다’는 점을 근본으로 한다는 데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번 전시의 키워드인 ‘건축’은 자연에 인위적인 힘을 가해 무언가를 구축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작업들은 개념적으로 자연과 대결 구도에 놓일 수밖에 없고, 미술과 건축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게 된다. 그런데 이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자연미술의 정신과 동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야투의 정신성과 전시라는 딜레마
사실 이는 자연미술이 비엔날레라는 전시 형식과 만나면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숙명이기도 하다. 셸터라는 주제 아래에서는 특히 이 딜레마를 잘 느낄 수 있었는데, 자연으로부터 수집한 친환경적인 재료를 동원한다는 사실만이 작가들이 조성한 셸터와 자연이 불화하지 않을 방법으로 고려된 것 같았다. 올해 제작된 셸터들을 비롯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설치 작품들은 비엔날레가 끝난 뒤에도 철거되지 않고, 재료의 수명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라지게끔 기획되었다. 이 점은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다른 비엔날레와는 구별되는 특징이자 개성일 것이다. 그런데 그걸로 충분한 걸까?
자연미술의 변별점이란 자연환경이라는 장소특정성과 그로부터 나온 재료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 주제전의 기획의도에서 이 모순, 특히 미술에서 더 나아간 건축이라는 키워드를 가져온 데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명하려는 시도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분명 ‘자연’과 ‘미술’은 언뜻 서로 이물감을 일으키는 단어 조합처럼 보인다. ‘자연’은 위대한 생명력의 모태이자,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는 세계인 반면 미술은 인간의 손을 거치는 창작물이다. 그리고 야투는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었고, 또 한편 이용해왔던 것 같다. 비엔날레는 2004년에 출범했지만 주최측인 야투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로 37년째를 맞는 야투는 1981년부터 자연미술이라는 미술 장르를 중심으로 꾸준히 활동해왔다. 야투의 자연미술 세계화의 교두보가 되었던 《금강국제자연미술전》은 1991년부터 시작되어 독일, 일본 등지에서의 교류전을 거쳐 현재까지도 국제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연미술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작업은 야투의 내부 모임인 ‘사계절 연구회’의 연구 활동을 주축으로 비엔날레의 심포지엄과 학술 세미나, 레지던스 프로그램 등을 거쳐 밀도 있게 구축되어 왔음을 아카이브된 도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야투는 자연 공간 속에 인간의 미술적 아이디어를 밀어넣기보다는 살아있는 자연과 인간의 예술의지가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즉 자연의 자연성이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인간의 생각을 부족함 없이 받아내는 상호작용의 구조를 지닌 것이 야투 작업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 야투 개념은 ‘들’(野)=‘자연’에서 메시지를 ‘투’(投)=‘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들이란 기존 미술 영역의 외부, 즉 미개척의 광야를 의미하기도 하고 동시에 순수자연을 뜻하기도 한다. 그것은 야성(野性)으로서의 본성을 예술추구의 의지로 삼겠다는 것이다.”
위의 기술들을 참고했을 때, 기실 이번 비엔날레에서 야투의 자연미술의 정신과 보다 가까운 섹션은 영상전 《바람》에 있을 것이다. 영상전 《바람》에서는 각국의 작가들이 산, 들, 바다 등의 환경에 온몸으로 부딪히는 퍼포먼스 작업들을 담았다. 헌데 영상전 《바람》은 연미산 공원 내에서는 개방된 공간에 텔레비전 단 네 대를 통해서 많은 작품이 연달아 상영되고 있었는데, 이처럼 몰입하기 힘든 환경에서는 관람객이 수십여 개의 영상들을 모두 독파하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따른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비엔날레 작품들과 함께 〈사이언스 월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생태연 못과 생태 화장실 연구 결과들을 감상할 수 있었지만, 메인이 되는 주제전에서 유예된 문제를 해소하기에는 (부대 프로그램이니만큼)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작은 몸짓의 미학
《2008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도록 서문에 따르면 김미경 미술사가는 1980년대 한국미술 지형에서 소그룹 미술운동의 맥락으로 야투의 자연미술을 보고 있다. 1980년대는 정치•사회적으로 독재 정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어두운 시기였기에, 한국미술사 내에서는 그러한 현실에 참여하고 저항하는 민중미술이야말로 70년대 단색화를 잇는 80년대 미술의 대표주자로 역사화되었다. 그러나 김미경은 한국미술사 연구가 단색화와 민중미술이라는 두 거대한 흐름의 대결 구도에 치우치지는 않았는지 의구심을 표했다. 당시는 많은 작가들이 모더니즘에 저항하는 예술적 실험을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했던 시기이기도 하며, 야투 역시 이 흐름에 몸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야투를 비롯한 다른 소그룹들의 활동이 주류 미술 계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을 뿐이다.
야투가 표방하는 자연미술은 주체가 자연을 이용하고 소비하는 서구 중심적인 사고와는 거리를 두고, 자연에 순응하며 자아와 피아를 식별하지 않는 동양철학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정체성 덕분에 자연미술은 서양미술사적 관점 본위로 편성된 주류 현대미술에 속하기를 거부한다. 자연의 순리에 충실하고자 함이 제1의 목적인 한, 현대미술의 보증수표라 할 수 있는 새로움을 추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미술의 ‘작은 몸짓’의 미학은 곧 국지적으로 꾸준히 활동을 이어나갈 힘이기도 하다. 야투의 일원이자 현 비엔날레의 조직위원장인 고승현 작가, 제3회 총감독을 역임하고 활발한 집필활동과 작업을 보여준 이응우 작가 등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해를 거듭하며 지속되고 있는 데는 이들의 열정이 있는 까닭이다.
가능성 혹은 출구전략
창대하거나 화려하거나, 혁신적이지 않아도 된다. 자연미술은 스스로 아방가르드를 자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미학적 자유로움을 가졌다. 그 대신 그때그때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지의 타협점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과제가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에 놓여 있다. 또한 동인(同人) 성격에서 출발한 미술 행사이기에 자연미술가협회 내부의 폐쇄성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외부의 시선 역시 고려해야 한다. 이에 대한 출구전략으로 외부 인사를 총감독으로 기용하고, 공주 시민들의 참여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자연미술 큐브전을 개최했다. 사실 시민들의 참여라는 아마추어리즘적 결과물이 비엔날레에 가감 없이 전시될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자 지역미술 거점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울산과학기술연구소와의 협력 프로젝트인 《사이언스 월든-자본》의 참여 작가인 스테파노 데보티(Stefano Devoti)의 꿀벌에 관한 작업, 그리고 생태 화장실 실험의 성과도 기대할 만하다. 고승현 위원장은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안정적인 운영과 청년계층의 운영진 유입을 위해 ‘자연의 소리’ 협동조합을 결성해 앞날을 도모하고 있다.
물론 내실을 다지면서 외연을 확장하기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비엔날레 조직위의 노력뿐만 아니라 외부의 관심과 지원이 중요한 열쇠이다. 우선은 지자체 차원, 충남도청 및 공주시의 재정적•물적 지원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어야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지역미술의 거점으로 원활하게 기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독자적인 미술 세계를 확립하고 활발한 국제교류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지역의 한계를 넘을 또다른 약진을 꿈꾸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것이 요구될 지 모르지만, 너무 채근하지 않아도 좋다. 마르지 않는 금강의 생명력만큼이나 자연미술에는 어떤 잠재력이 늘 도사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글쓴이 백지홍 편집장
이미지 제공 백지홍 편집장
《창원조각비엔날레》는 비교적 늦게 시작된 비엔날레다. 마산, 창원, 진해가 통합하여 탄생한 오늘날의 창원시가 명실공히 경남의 대표 도시로 자리 잡은 2010년, 창원에서는 마산 출신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을 기념하기 위해 《문신조각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그 후로 2년이 지난 2012년, 《문신조각심포지엄》은 《창원조각비엔날레》로 명칭을 바꾼 뒤 서성록 감독 체제로 첫 번째 비엔날레 《창원조각비엔날레: 꿈꾸는 섬》을 개최했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이하는 《창원조각비엔날레》는 창원을 대표하는 미술 행사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왜 ‘조각’ 비엔날레인가? 올해 도록에 실린 수많은 글에서도 강조하듯 창원이 ‘조각’을 주제로 내세운 데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 김종영(1915~1982)과 문신(1923~1995)을 비롯하여 박종배, 박성권, 김영원 등 조각계 거장들이 창원 출신이기 때문이다. 올해 비엔날레의 주제 ‘불각(不刻)의 균형’은 조각(刻)임에도 인위적인 손길이 가해지지 않은 듯한 ‘불각의 미학’으로 대표되는 김종영 작가와 좌우대칭(symmetry)을 강조하며 ‘균형의 미학’으로 유럽을 사로잡은 문신 작가에 대한 헌정이라는 점도 《창원조각비엔날레》가 뿌리내린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알려준다. 국내에서 유일한 것은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사례가 드문 ‘조각’을 중심으로 한 비엔날레로 자리잡기 위한 노력이 창원에서 지속되고 있다.
유어예(遊於藝) 마당
이번 《창원조각비엔날레: 불각(不刻)의 균형》을 진두지휘한 윤범모 감독은 전시의 기획 초기부터 ‘즐기는 전시’를 강조했다. 전시를 통해 공원에 설치될 조각들이 공원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부담을 주는 위압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람객들이 작품과 함께 노닐 수 있는 존재이기를 바란 것이다. 이러한 전시 방향 자체는 《창원조각비엔날레》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16년 제3회 《창원조각비엔날레: 억조창생》의 윤진섭 감독은 “비엔날레하면 떠오르는 어려운 이미지보다 대중친화적인 방향을 지향”한다고 말하며 비엔날레를 개최한 바 있다. 윤범모 감독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대중친화적인’ 전시의 방향을 ‘놀이’로 잡고 전시 도록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번 ‘유어예(遊於藝) 마당’은 이와 같은 관행을 엎고, 대중에게 휴식과 놀이의 기능을 갖도록 안배했다. 조각 작품 위에서 뛰어놀 수 있고, 미끄럼 탈 수 있고, 앉아 쉴 수 있고, 누워 잠잘 수도 있다. 한마디로 조각작품과 함께 놀기가 가능한 마당이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한 ‘유어예’를 ‘예술에 노니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이름 붙인 ‘유어예(遊於藝) 마당’이란 용지공원에서 펼쳐지는 야외 전시를 뜻한다. 앞선 《창원조각비엔날레: 억조창생》과 유사하게, 올해도 야외 영구 설치 작품들을 중심으로 한 용지공원의 야외 전시 《유어예(遊於藝) 마당》이 《창원조각비엔날레》의 메인 코스가 되었다. 야외에 전시된 작품 중 상당수를 영구 설치하여 조각공원을 조성한다는, 자타가 공인하는 《창원조각비엔날레》의 가장 큰 특징을 이어간 것이다. 올해 전시는 22점의 야외 설치 작품 중 15점이 영구 설치될 예정이다. 짝수 해에 개최되는 비엔날레 중 가장 적은 편에 속하는 예산으로 다수의 작업을 영구 설치해왔다는 점은 놀라운 성과라 할 수 있다. 돌섬유원지, 문신미술관 일대, 그리고 용지공원이 어느새 조각공원으로서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는 점이 《창원조각비엔날레》 개최 이후 창원시에 나타난 가시적인 변화일 것이다. 전시를 위해 방문한 용지공원에서는 공원 방문객들이 조각 사이를 거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유어예(遊於藝) 마당》에서 선보인 올해 설치물들은 시민이 만지고, 즐길 수 있는 조각 작품을 설치한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듯했다. 용지공원을 찾았을 때 작품을 즐기는 수많은 시민을 만날 수 있었다. 안종연 작가가 제작한 12m 지름의 거대한 금속 꽃 〈아마란스〉는 뛰어노는 아이들을 품었고, 밤이 되면 영롱한 빛을 발하며 올해 전시의 얼굴이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유일한 작고 작가의 작품인 구본주 작가의 〈비스킷 나눠 먹기 2〉는 시민들이 쉬었다 갈 수 있는 벤치로서 기능했으며, 조숙진 작가의 〈삶의 색채〉는 정글짐과 같은 놀이기구나, 잠시 낮잠을 잘 수 있는 휴식처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파격
《유어예(遊於藝) 마당》이 예술과 노니는 새로운 감각을 일깨운다면, 용지공원 옆에 위치한 성산아트홀에서 진행되는 실내전시 《파격》전은 보다 전통적인 전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전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파격》전 역시 ‘전통적’이거나 ‘일반적’인 것을 거부한다.
성산아트홀에서 만날 수 있는 《파격》전은 한국 미술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작가들의 작업과, 기존 전시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작가들의 작업까지, 기법과 내용 면에서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방식을 선보이는 작가들의 작업을 전시했다. 조각 작품이 주를 이룰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시장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거꾸로 걸린 오순경 작가의 〈일월오봉도〉 같은 전통 회화 작업부터 다양한 매체를 이용한 작업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중에는 머리카락을 이용하여 그림을 만들어낸 황재형 작가의 작업이나 흙과 민들레씨로 남북 정상의 모습을 실루엣으로 표현한 임옥상 작가의 〈민들레꽃, 당신〉처럼 윤범모 감독이 설명한 ‘파격’에 걸맞은 흥미로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유어예(遊於藝) 마당》과 《파격》으로 이뤄진 본 전시 이외에도 《김종영특별전: 불각도인, 자연을 새기다》, 《문신특별전: 생명의 형상-Symmetries》, 《김포&실비아특별전: Solace in Nature》, 《영상미디어특별전: 젊음의 심연心-순응과 탈주 사이》에서 총 13개국 70작가의 작품 225점을 만날 수 있다. 전시 외에도 학술대회, 아티스트 워크숍 등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으니 가족과 함께 올해 《창원조각비엔날레》를 찾는다면 성공적인 선택이 되리라 생각한다.
야외 설치라는 특성과 한계
그럼에도, 《창원조각비엔날레》는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지금까지 《창원조각비엔날레》의 전시감독을 맡은 서성록, 최태만, 윤진섭, 윤범모 감독은 한국 미술계에서 오랜 기간 활동하며 신뢰를 쌓아온 이들이었다. 이들의 ‘인맥’ 덕분에 한정된 예산으로 작품 구입(영구 설치)과 실내 전시를 비롯한 부대행사까지 개최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기획자와 작가의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전시를 개최하는 방식은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당장 2020년에 지금까지와 같은 작업을 해낼 수 있는 기획자를 떠올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야외 설치 작업들이 중심을 이루고 그 작업 중 상당수가 영구 설치된다는 점은 《창원조각비엔날레》만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 특징 때문에 한계를 보인 것도 사실이다. 한정된 예산 등 넉넉하지 않은 조건 하에 설치된 작업들은 독립된 작품으로서 그 수준이 아무리 높더라도, 적지 않은 경우 전시의 맥락에 맞춰 주문 제작된 작업이 아니었다(물론 작가가 설치 장소를 찾아 장소와 어울리기 위해 노력한 작품들도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다).
반대로 영구설치 작업에 비엔날레 추진위원회의 역량이 집중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실내 전시들이 소홀하게 다뤄지는 것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실내 전시의 경우 야외 전시에 비해 전시 감독의 연출이 자유로워지는 만큼 주제를 더욱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다. 실내 전시의 비중(꼭 작품 수나 전시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하더라도)을 높인다면 비엔날레의 핵심 주제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실내전 《오브제-물질적 상상력》이 일상 사물들로 만들어진 작품들을 선보여 ‘억조창생(億造創生, 수많은 사물에 생명을 부여한다)’이라는 주제에 부응했던 것에 비하면 올해 실내전과 비엔날레 주제가 ‘딱 맞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지금과 같은 형식이라면 국제적 규모로 개최되는 ‘조각공원 조성 프로젝트’와 그 부대 행사로 열리는 기념전이라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다. 네 차례의 전시를 성공적으로 만든 감독들의 노력으로 《창원조각비엔날레》를 이끌어올 수 있었지만, 반대로 지금까지의 《창원조각비엔날레》는 각기 다른 개성으로 깊이 있는 담론을 전시로 풀어낼 수 있는 기획자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전시를 끌어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조각에 대해 고민하기
《창원조각비엔날레》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창원조각비엔날레》는 어떤 담론을 담아내야 하는가? 대답은 단순하다. ‘조각비엔날레’라는 명칭에 부합하였으면 한다. 비엔날레의 홍수 속에서 창원을 찾을 개성이 획득되어야 전시를 주최한 창원시에게도, 전시를 찾은 관람객에게도, 생태계의 다양성을 확보하게 된 미술계 관계자에게도 이익이 된다. 각 지자체에서 같은 시기에 유사한 형식과 주제의 전시를 개최해서 얻을 것은 적다.
오늘날 현대미술에서 ‘조각’과 같은 장르에 따른 구분이 과거와 달리 작품의 제작과 감상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장르의 구별은 작가의 표현에 어떤 재료가 가장 적합한가를 의미할 뿐이다. 하지만 조각 경계를 가능한 넓혀 《창원조각비엔날레》에서 말하는 ‘조각’이 ‘현대미술’과 동일시된다면, 이른바 ‘한국 3대 비엔날레’로 불리며 인근 도시 부산에서 개최되는 《부산비엔날레》 와의 차별점을 두기 힘들 것이다. ‘조각’이라고 말하는 순간 떠오르는 물성, 제작과정, 균형미 등의 요소는 기타 전시와 《창원조각비엔날레》를 차별화하면서도 충분히 다양한 요소를 포괄할 수 있는 특성들이다.
조각이라는 특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실내 전시에서 회화나 영상 작업을 배제하라는 방식으로 이뤄질 필요는 없다. 조각을 둘러싼 형상, 물성, 균형 등으로 전시 전체의 주제를 선정하여 해당 주제에 적합한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선보인다면, 장르의 틀에 편협하게 갇히거나, 조각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전시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올해 주제로 선정된 ‘불각(不刻)의 균형’만 해도 조형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에서 동시대적 이야기로 주제를 확장해 나갈 가능성을 품고 있지 않은가.
설치 작업도 보다 명확한 개성을 갖게 되어 관람객은 물론이고 참여 작가들에게도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단순히 야외에 조각 작품을 전시한다면, 자연 속에 작품을 설치하는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바다미술제》, 《태화강설치미술제》 등과 비교하여 특색을 찾기 힘들다. 전시 장소의 환경적 제약이 작품 제작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타 야외 미술제에 비하여 《창원조각비엔날레》의 야외 설치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희미하다. ‘공원을 찾는 시민들이라는 조건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라는 질문은 ‘파도와, 숲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라는 질문이 그러하듯 창의성을 낳는 제약이 될 수 있다. 이는 참여 작가들에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심화•확장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야외 설치 작업의 성격을 이러한 방향으로 결정한다면 영구 설치 작업의 수를 줄여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작품 3~4점보다 눈에 띄는 작품 한 점이 관람객의 발품을 아쉽지 않게 하는 법이다.
특별전들도 독자적으로 완결성을 지니는 동시에 비엔날레의 큰 틀 속에서도 주제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문신미술관에서 2년마다 《창원조각비엔날레》의 주제와 연관된 독자 주제를 채택하고, 전시 기획에 있어 문신 작가의 작품세계와 연계한다면 《창원조각비엔날레》의 특별전으로서, 문신 작가를 기념하는 미술관의 전시로서, 그리고 동시대 미술 계에 담론을 제시하는 전시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비엔날레가 반드시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처럼 동시대 사회 문제를 전시의 정면에 내세워야 한다는 법은 없다. 혹자에게는 한물간 모더니즘적 접근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예술 작품의 내적 논리를 내세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장르에 대한 담론으로부터 다시 동시대 이야기로 확장해 나갈 수 있다. 동시대를 사는 작가들의 작업에서 동시대성은 잘라낼 수 없는 것이다. 한국 대표의 산업도시 창원이 ‘문화도시’로서도 이름을 높이는 데 《창원조각비엔날레》가 큰 역할을 해내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