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진행 박유리 기자
백금자 Kumja Paik Kim 193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루이스앤클락 대학 심리학과 졸업 후 산호세주립대에서 동양미술사로 석사를, 스탠퍼드대에서 동양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부터 2006년까지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 한국미술 담당 큐레이터로 재직하며 총 9회의 전시를 선보였다. 『Profusion of Color: Korean Costumes and Wrapping Cloths of the Choson Dynasty』(1995) 『The Art of Korea: Highlights from the Collection of San Francisco’s Asian Art Museum』(2006) 등을 집필했다. 2007년 유공재외동포포상 대상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이하 AAM)이 1989년 아시아 외 지역에서 최초로 한국미술부를 개설하면서 마련된 전담 큐레이터직에 채용되었다. 한국인 최초 미국 공립박물관 큐레이터였다. AAM에 한국실이 만들어지고 큐레이터를 채용하기까지 코렛재단(The Koret Foundation) 수전 코렛 회장의 숨은 역할이 컸다는데 당시 상황이 궁금하다.
미술관 이사 주디스 윌버(Mrs. Judith Wilbur)가 코렛 회장을 박물관에 초청해 전시된 한국미술을 보여드린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코렛 회장이 초라하게 진열된 한국미술을 본 후 다른 나라처럼 독립된 미술부를 설치하고 한국미술만을 책임지는 큐레이터를 채용하도록 KF가 3년 간 후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런 시작이 있었기에 오늘 한국미술이 미국 여러 박물관에서 전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직 기간 중 한국미술 소장품 구입에 주력해 소장품을 250여 점에서 750여 점으로 확대했다. 2003년 한국계 재미기업인 이종문 회장의 기부로 AAM이 현 위치로 이전할 때 한국실이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 잡았다. 당시 과정이 궁금하다.
미술관 이전 준비 때 전시실 크기, 위치 등 여러 문제로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이종문 회장이 지리적, 문화적으로 중국, 한국, 일본 순서로 전시실을 배치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내 의견을 지지해주었다. KF와 코렛재단, Suno Kay Osterweis의 후원으로 확장 개관했다. 이 회장이 박물관 이전을 위해 큰 금액을 기부했기에 한국과를 아무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소장품 구입에는 미술관 소속 여러 후원 단체의 도움을 받았는데 특히 코렛 재단의 꾸준한 지원이 있었다. 제일 처음 구입한 작품은 불화 〈서방호세광목천왕〉인데 미술관 내부 경쟁을 통해 미술관 감정가위원회 후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선비 화가와 화원 제도를 알리기 위해 관련 작품 구입에 노력했다. 마지막에 어렵게 구입한 작품은 화원 이응록이 그린 〈책거리〉 (1860년경)로 여러 단체의 후원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당시 선보인 주요 한국미술 전시를 소개해달라.
미술관이 이전하기 전에 민화와 궁중화의 차이점을 알리기 위해 한국 채색화 전시 《희망과 염원》(1998)을 선보였다. 제일 힘들었던 전시는 미술관 이전 후 첫 전시 《고려왕조: 한국의 계몽시대》다. 한국의 찬란한 중세를 알리기 위한 전시였는데 여러 나라 박물관과 개인 소장가로부터 작품을 대여 받아야 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전시 개막과 함께 열린 심포지엄에는 세계 각국에서 250여 명이 참여했다.
일하는 동안 외국인으로서 어려웠던 점과 가장 보람된 일은?
제일 어려운 점은 한국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미국인 친구가 없다는 점이었다. 보람된 일은 한국미술 강의를 늘린 것이다. 박물관 도슨트 교육을 위해 열리는 강의가 있는데 중국과 일본미술은 1년 동안 각각 두 학기를 한다. 한국미술 강의도 넣어달라고 했더니 ‘1회면 되겠느냐’ 라는 말을 듣고 강의 제목을 제출하고 8회를 받아냈다.
미국 내 한국실 운영 방향이나 전시 기획 방식에 조언을 한다면?
국외문화재는 한국이 세계 문화발전에 기여했음을 해외에 알리고 한국을 좋아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한국에서 좋은 전시가 많이 열리는데 이 전시들을 해외 박물관에서도 선보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국고미술은 수도 적고 고가여서 구입하기가 어렵다. 고미술뿐 아니라 현대미술을 소개하면 반응이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수묵화가 박대성, 송영방, 문봉선의 작품은 큰 환영을 받을 수 있다.
은퇴 후에도 연구 활동을 이어오며 2006년 한 심포지엄에서는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 문제를 논의한 바 있다. 최근 연구하고 있는 주제는?
2016년 정조와 김홍도에 대해 쓴 논문을 [Archives of Asian Art] (vol. 66, 2016)에 발표했다. 2017년 3월 AAM에서 선덕여왕을 주제로 강의하고 독일 함부르크 박물관의 요청으로 한국 병풍에 대한 논문을 썼다.
현직에서 활동 중인 후배들과 후학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현직에 있는 한국미술 담당 큐레이터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알고 있다. 실력과 자신감을 기르고 한국인답게 늘 진실하고 열심히 근무하며 동료들을 따뜻하게 대하고 도울 줄 알면 일하기도 쉬워진다. 새 세대의 동학들은 세계인이 되어서 힘차게 한국의 위신을 빛내기 바란다.
브르그린드 융만 Burglind Jungmann 1955년 독일 힐데스하임에서 태어났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동아시아 미술사를 공부했고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두개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UCLA 한국미술사 교수로 1999년부터 2017년까지 재직했다. LACMA 겸임 큐레이터(1999-2003)로 일했고 UCLA Fowler 박물관 객원 큐레이터로 전시 《Life in Ceramics》(2010-2011)를 기획했다. 『Painters as Envoys』(2004), 『Pathways to Korean Culture』(2014) 등 조선시대 미술사와 관련한 다양한 책과 논문을 썼다. |
한국미술사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1973년부터 1년 간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왔다. 한국어와 서예, 수묵화, 태권도를 배웠고 국내 여행도 많이 다녔다. 1974년 귀국 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중국학으로 석사를 받았다. 1983년부터 1년 간 독일학술교류처(DAAD) 장학금을 받아 서울대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박사 논문 관련 연구를 했다. 이후 일본에서 6년 간 살았는데 해마다 여름은 한국에서 지내면서 18세기 조선통신사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한국미술을 중국미술과의 관계에서 연구한 첫 번째 논문(1992)과 한국미술을 일본미술과의 관계에서 연구한 두 번째 논문(2004)이 있다. 아마 해외에서 한국미술에 관한 연구 논문 두 편을 책 분량으로 출간한 경우는 내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UCLA에서 1999년부터 2017년까지 재직하며 한국미술사를 가르쳤다. KF의 교수직 설치 지원 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미국 내 첫 한국미술사 교수직이었다.
학부 개론 수업 외 불교미술, 도자사, 조선시대 회화사를 가르쳤다. 석사 과정에도 기록화, 진경산수화, 미술 속의 여성 등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설했고 LACMA의 한국미술 소장품을 적극 활용하면서 수업했다. 그리고 UCLA보다 10년 앞서 런던 SOAS의 박영숙 박사가 대학원에서 한국미술사 과정을 최초로 시작했으며, 현재는 샬롯 홀릭 박사가 한국미술사를 가르치고 대학원생을 지도한다. 2013년부터 캔자스대 대학원에도 한국미술사 전공 과정이 생겼다.
1999년 LACMA 한국실 개관 당시 겸임 큐레이터로 일한 바 있다. 당시 미국에서 한국미술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는가?
그때까지 해외에서 열린 한국미술 전시는 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획되어 5000년의 역사를 처음부터 설명하는 식이었다. 매번 같은 유물을 반 세기 가량 반복 소개해왔다. 해외에서도 더 상세한 한국미술 정보를 원했지만 반복된 전시로 인해 많은 해외 연구자가 한국미술에는 더 이상 보여줄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서양에 소개되지 않은 한국미술을 알고 있었기에 이 상황이 답답했다. 나는 LACMA 한국실 담당 큐레이터 키스 윌슨(Keith Wilson)과 함께 LACMA 한국실 개관을 기념해 2001년 국제 컨퍼런스를 기획했다. 이 행사는 이러한 상황을 해소하는 데 첫 발걸음이 됐다. 또한 이때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많은 사람이 참가하면서 당시 컨퍼런스에 초대된 한국 학자들에게 해외에서 한국미술에 대해 갖는 관심과 지식의 깊이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적 관점에서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일찍이 이러한 연구방법론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한국을 처음 방문한 1973년에는 한글과 한문이 병기되던 시절이라 한국의 전통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한문을 공부했다. 한국 역사에 관한 어떤 연구를 하더라도 한문을 알아야 하므로 한문을 먼저 배우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한중일 세 나라에서 사용되는 많은 전문용어의 경우 발음만 다를 뿐 한자 표기가 동일해서 한자를 알면 삼국의 문화를 비교·연구하는 데 보다 수월하다. 그리고 모교인 하이델베르크 대학에는 한국학 전공이 없어 중국과 연결하며 연구해야 했던 상황과, 내가 유럽에서 나고 자란 것도 영향을 미쳤다. 유럽미술사에서 화가들이 다른 나라에 가서 그림을 배우고 교류했듯이 한중일에서는 문인화와 서예가 그랬다. 동아시아 문인들에게 문인화와 서예는 정치적, 문화적 소통 수단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국제 미술’과 같았기에 내가 문인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최근 연구 주제와 출판 계획이 궁금하다.
2017년 교수직 은퇴 후 독일로 돌아갔지만 계속 바쁘다. 책도 쓰고 독일, 스위스, 한국에서 강의도 하고 박사과정생도 지도한다. 최근 계명대 한국학연구원이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한국미술의 정체성과 한국미의 원형에 대한 검토’를 주제로 기조 발표를 한 바 있는데 이 연구는 내년 학술지 논문으로 발표할 계획이다.
해외에서 한국미술을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해외 연구자들을 위해 국내로부터 지원이 필요한 부분은?
한국미술사를 연구하려면 동아시아 속에서 한국미술을 이해하고 각기 다른 문화적인 배경 속에서 비교하며 연구해야 한다. 내가 지도한 대학원생 대부분은 한국 출신이고 학부와 석사를 한국에서 마친 경우가 많은데 이처럼 동양과 서양 두 문화권에서 심도 있게 교육을 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미국 대학은 등록금이 비싸고 한국 학생은 미국 정부 장학금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국내에서 한국 학생을 위한 장학금 지원이 필요하다. 지난 20여 년동안 한국미술 인지도도 높아지고 연구 성과도 축적됐지만 미술사 분야에서는 여전히 할 게 많다. 특히 고고학, 건축, 서예가 그렇다. 2019년 6월 LACMA에서 한국 서예 전시가 열리는데, 이 전시가 한국미술이 또 한 걸음 나아가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김현정 Hyonjeong Kim Han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 한국미술 담당 큐레이터 Associate Curator of Korean Art, the Asian Art Museum of San Francisco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학부와 석사를 졸업하고 UC샌타바버라에서 동양미술사를 공부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LACMA 한국실 담당 큐레이터로 일하며 2009년 한국실 재개관을 담당했다. 주요 전시로 《흙으로 시를 빚다》(2011), 《조선 왕실, 잔치를 열다》(2013), 《도자에 마음을 담다》(2014,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제3터미널 전시실), 《사이에 머물다: 베이지역 한인 작가 8인전》(2017, 오클랜드 소재 밀스대학 미술관) 등을 기획했다. |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미술사를 전공했다. 미국 유학을 가게 된 계기는?
대학 때 진로를 고민하며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다. 어릴 적 2년 여 간 머문 파리와 런던을 12년 만에 다시 찾아 기메박물관, 영국박물관 등을 갔는데 그곳에서 동양미술품이 제대로 연구되고 있지 않다고 느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미술을 보다 큰 맥락에서 비교 연구하고자 모교 대학원에 진학했고, 석사 학위 취득 후우리 미술사를 국제적으로 알리고 싶은 생각에 미국으로 건너가 동양미술사를 공부했다. 샌타바버라미술관 동양미술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연구뿐 아니라 현장 업무도 중요함을 깨달았다. 대중에게 작품을 소개하고 담론을 제시하는 큐레이터에 매료되어 큐레이터가 되고자 마음먹었다.
2010년부터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이하 AAM) 한국미술부서 담당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AAM이 미국 내 아시아 미술과 관련해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본인의 업무는?
우리 관은 미국 내 아시아미술 전문 독립 미술관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한국미술 전시 역사도 미국 내 어느 곳보다 길다. 현재 900여 점의 한국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지난 8년 남짓한 기간 6개의 한국미술 특별전을 기획했고 진행에 3년 이상 소요된 특별전 두 개를 동시에 준비한 적도 있다. 그 외 상설전시실 운영과 교체전시 기획, 교육프로그램 기획, 작품 구입 등 관내 업무와 지역사회에 한국 문화예술을 알리는 일도 꾸준히 진행해왔다.
최근 연구하는 한국미술품은?
《맑은 빛, 고운 선: 한국 나전칠기의 아름다움》(2016)과 《우리의 옷, 한복》(2018) 전시 이후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 때 작품 기증이 늘었다. 올해는 김환기의 스케치북 2점과 소품을 구입했다. 대한제국 시기부터 20세기 초 근대미술 소장품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소장품을 강화해 조만간 전시로 선보이려고 한다.
작품 구입, 기증 절차, 한국 유물 보존처리 과정이 궁금하다.
연구와 소장품 구입 절차를 총괄하는 담당 큐레이터가 구입할 작품을 결정하면 부서 간 회의와 승인 절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분과 이사진이 작품을 실견, 구입 승인 가부를 결정한다. 이때 유물부는 보조 부서로 지원한다. 기증 절차도 이와 비슷하다. 유물 복원·보존 처리는 큐레이터와 보존부가 함께 진행한다.
전시 기획을 위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는가? 특별히 주안점을 두는 부분은?
한국미술이 생소한 관객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중점을 둔다. 이때 현대미술은 동시대 관객에게 한국의 과거를 들여다보게 하는 연결고리가 된다. 관객 참여형 전시디자인이나 타 분야 전문가와 함께 전시 내용과 기법을 다양하게 고안한다. 전시 기획은 출품작 연구에서 출발하며 다양한 분야의 동료들과 토론하면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특별전이 새로운 시도로 한 편의 거대한 이야기를 만든다면, 상설전은 학구적이고 심층적으로 접근한다.
해외에서 한국미술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어떤 전략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국내로부터 특히 도움이 필요한 부분은?
미국 미술계도 한국미술의 독창성과 무한한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다. 국내 지원이 필요한 부분은 크게 네 가지다. 먼저 전문인력의 교류와 양성이다. 현재 미국 내 한국미술 담당 큐레이터는 물론 보존처리, 교육, 강의 인력도 부족하다. 둘째, 미국에서 한국 문화재 구입이 어렵기 때문에 중장기 문화재 대여 정책이 필요하다. 작품의 실물을 감상하는 일은 그 문화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셋째, 한국미술 데이터베이스 구축 및 영문 개설서와 논문의 출판이다. 한국미술 전문인력이 없는 박물관들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넷째, 재정 지원이다. 한국에서 후원이 탄탄할수록 현지 기금 마련이 성공적인 경우가 많다.
최근 몇 년 사이 미국에서 국내로 환수된 문화재가 이슈였다. 이런 경우 한국인이자 미국 미술관 큐레이터로서 복합적인 심경이 들 것 같다.
LACMA에서 근무할 때 미술관 법무팀장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반입 합법성 여부보다 작품이 그 국가와 국민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국민의 정서가 더 중요하게 고려돼야 한다는 것이다. 환수될 문화재가 있다면 외교를 통해 우호적인 태도와 방법으로 소장처를 설득하고 지속해서 협의했으면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소장품이 공개된 박물관이나 미술관보다 개인 컬렉션의 경우는 문제가 더 복잡하다. 다각적인 전략으로 접근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지난 15년 여의 활동을 스스로 평가해본다면? 자부심이 들었던 순간은?
관객이 조선백자, 특히 달항아리 앞에서 명상하듯 머무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현지 미술대학 도예과 교수는 한국 도자기를 연구하고 재현하는 수업까지 개설했다. 학생들이 한국실의 전통 도자기를 스케치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다. 한국 밖에서 한국미술을 다루는 한국인으로서, 한국문화에 대한 열정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다른 시각을 지닌 동료 및 관람객과 이야기하면서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즐겁게 배우고 있다. 교포 2, 3세대들이 조상의 문화에 대해서 알아가고 한국인 입양아들이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반응할 때 특히 자부심을 느낀다. 큐레이터로서 소장품을 직접 감상하며 연구할 수 있는 기회는 항상 감사하다. 수백 년 전 문화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운명으로 샌프란시스코까지 오게 되었는지 작품과 대화하는 시간은 벅차고 의미 있다.
향후 전시 계획을 소개해달라. 한국과 협업하는 프로젝트가 있는가?
2020년에 조선시대 공신 초상화를 주제로 전시를 개최한다. AAM 소장품 〈분무공신 초상 초본〉과 〈송시열 초상 초본〉을 선보이며 전시기간 중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후원으로 미국 내 서화류 보존전문가들을 초청해 워크숍을 열 예정이다. 현재 우리 관은 상설실 전시 디자인과 케이스를 변경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고려시대 〈청자 주전자〉와 조선시대 〈달항아리〉 두 명품을 새롭고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계획이다.
한국 독자(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실을 방문한 한국 관객의 모순된 반응을 종종 목격한다. 소장품이 압도적으로 많은 중국미술실과 일본미술실과 비교해 한국실이 빈약하다는 반응과 유물이 한국으로 반환돼야 한다는 반응이다. 국외문화재는 하나하나가 한국문화를 알리는 첨병으로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걸작 한 점의 파급력은 매우 크다. 한국미술과 문화의 미감을 더 많은 이가 즐길 수 있도록 국외 소재 한국미술품에 애정을 갖고 전시를 자주 찾아주었으면 한다.
우현수 Hyunsoo Woo 필라델피아미술관 한국미술 큐레이터 The Maxine and Howard Lewis Curator of Korean Art, Philadelphia Musuem of Art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중문과와 동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후 뉴욕대 시각예술행정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브루클린 박물관 한국미술연구원(1997-2001), 뉴욕 재팬소사이어티갤러리 부관장(2001-2005)으로 재직했다. 《조선 백자와 구본창 사진전》(2010), 《신성상의 전래》(2003) 등을 기획했다. 《조선미술대전》 도록과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 봉황, 공작도 쌍폭에 대하여"(국립고궁박물관, 2009) 등을 집필했다. |
미국으로 유학 간 계기와 어떻게 큐레이터로 일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1994년 6개월 정도 뉴욕에 머물 기회가 있었다. 책에서 보던 작품들이 즐비한 미술관들과 그곳의 창의적인 예술 정신에 매료됐고, 뉴욕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다. 그래서 국내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6년 뉴욕대 시각예술행정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이듬해에 KF가 지원하는 브루클린 박물관 한국미술연구원 자리를 제안 받아 일을 시작했고 뉴욕 재팬소사이어티갤러리 부관장을 거쳐 2006년부터 필라델피아 미술관(이하 PMA)에 재직 중이다.
PMA의 한국미술 큐레이터는 미술관 재정과 별도로 운영되는 영구직이다. 이 자리는 어떻게 생겼으며 주요 업무는 무엇인가.
‘루이스 부부가 출연한 기금으로 운용되는 한국미술 큐레이터’직이다. 영구직이기 때문에 미술관이 재정적 어려움 등을 이유로 고용을 해지하지 못하며 내가 떠나도 이 자리는 유지된다. 한국미술 소장품 확장, 전시 기획, 연구, 출판 등을 주로 담당하며 강의, 교육을 통한 한국미술 저변 확대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PMA는 미국 내 미술관 중 아시아/한국미술과 관련해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1876년에 창립된 PMA는 시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문화권의 예술품 25만 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아시아 미술품은 창립과 동시에 입수해왔고 지난 150년 간 수집한 소장품을 바탕으로 아시아 전역의 미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이어 미국 내 종합미술관으로서는 두 번째로 한국미술 전담 큐레이터를 고용해 지난 12년 간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명실상부한 한국미술 관련 활동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문화재청,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등과 협력해 〈봉황, 공작도 쌍폭〉(2008), 〈곽분양행락도〉(2016), 〈백동자도〉(2018) 등 한국미술 소장품 보존&복원 작업을 진행했다. 소장품 보존처리 사업은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는가?
과거에는 미국 내 중국이나 일본 회화 보존 전문 인력들이 한국 회화 보존 처리 및 장황을 담당했으나 최근에는 한국 그림 전문가에게 의뢰해 한국 식으로 보존하는 것이 옳다는 인식이다. 국내 관련 기관의 지원을 받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관 회화 소장품 중 보존이 필요한 작품들에 대한 지원서를 제출하고, 사업 대상으로 선정되면 작품을 한국으로 보내 보존 처리를 진행하게 된다. 우리 관의 경우 한국에서의 지원금은 직접적인 보존 처리에만 사용하고 포장, 운송, 보험 및 행정 비용은 미술관 자체 기금으로 해결해 실질적인 공동 프로젝트로 진행해왔다. 보존 처리 완료 후, 미국으로 환송하기 전에 한국의 미술관, 박물관에 전시해 국내 관객에게 소개하는 기회도 가져왔다.
2014년 《조선미술대전》을 담당해 국립중앙박물관, 휴스턴미술관, LACMA, PMA에서 순회전을 열고 큰 호평을 받았다. 사업 추진 배경이 궁금하다.
《조선미술대전》은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선보인 《미국 미술 300년 전》과 함께 양국의 문화교류를 목적으로 기획된 전시이다. PMA, LACMA, 휴스턴미술관 및 테라미국미술재단이 소장한 미국 미술품의 정수가 한국에 소개되었고, 이듬해에는 국립중앙박물관 및 국공립 기관, 대학, 사립 기관 등이 소장한 수준 높은 조선시대 유물이 미국의 세 기관을 순회했다. 참여 기관들과의 긴밀한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중에서 초대형 불화(12×8m) 〈화엄사영산회괘불탱〉(국보 제301호)을 해외 최초로 선보였는데 여러 제약 때문에 PMA에서만 전시됐으나 그 장엄한 모습은 모든 관람객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해외에서 한국미술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어떤 전략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국외문화재는 수량이 한정돼 있고 구입 기회가 드물기 때문에 소장품을 확장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수량이 풍부하고 구입에 제한이 없는 근현대미술로 눈을 돌리는 추세다. 현재 미국 종합미술관의 이슈는 서구 백인 남성 작가가 주류인 현대미술 판도를 어떻게 다양화시킬 것인가, 이다. 우리 관도 아시아, 동유럽, 남미 등으로 경계를 확장하자는 활발한 내부 논의에 힘입어 최근 미술관 최초로 아시아계 여성 작가 진신(Jean Shin)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작가의 의류 및 복식을 재료로 한 설치작품들을 선정해 미술관의 섬유, 복식전시실에서 소개했다. 많은 관객이 신선하고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최근 몇 년 사이 미국에서 국내로 환수된 문화재가 이슈였다. 한국인이자 미국 미술관 큐레이터로서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도난과 약탈로 불법 취득됐음이 밝혀진 문화재는 반드시 환수해 한국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재보호법이 발효되기 이전에 반출된 문화재들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해외에 처음 소개된 한국 예술품은 서양과 수교 이후, 19세기 말 한국에 살던 외국 선교사, 외교관을 통해 건너온 유물이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미(美)를 알리는 데 중요한 부분을 담당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재들의 경우 무조건적인 환수보다 유익하고 창의적으로 활용할 방안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지난 20여 년의 활동을 평가해본다면?
미국 내 한국미술의 인지도와 영향력이 괄목할 만하게 성장한 것이 자랑스러우며 내가 작게나마 기여했다는 사실이 기쁘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한 1997년엔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의 백금자 박사와 내가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계 큐레이터와 한국미술사 전공 교수의 수가 제법 늘었고, 미술사 석박사 과정에 재학 중인 한국 학생도 많다. 이러한 진전을 이루는 데에는 국내 미술계와 유관 기관들의 다각적인 지원이 큰 동력이 됐다.
향후 전시 계획은? 한국과 협업하는 프로젝트도 있는가?
《조선미술대전》의 후속으로 2021년 봄 개막 예정인 《한국현대미술전(가제)》을 준비하고 있다. 또 12월 22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PMA가 소장한 마르셀 뒤샹 작품을 소개하는 《마르셀 뒤샹 전》(2018.12.22.-2019.4.7.)이 개막한다. 우리 관은 한국과의 상호 문화 교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국내 여러 미술계 인사 및 기관과 의미 있는 협력 관계를 지속할 것이다.
한국 독자(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 관객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한국실이 중국실, 일본실에 비해 규모가 작다는 아쉬움이다. 또한 이러한 전시실을 지키는 문화재를 한국으로 환수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마음도 토로한다. 한국에서 미술사를 공부할 때, 미국 미술관의 실상을 알기 전에 나 또한 가졌던 생각이기에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미국의 종합미술관에서 다양한 문화권의 예술품과 경쟁하며 한국 미술품을 한 점이라도 더 소개하고, 한국미술 전시를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알아주시고 애정과 격려를 보내주시면 좋겠다.
월간미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