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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수장고에서 외출한 소장품 2 - 미술관 컬렉션, 소장품의 비관적? 희망적? 운명

posted 2019.07.01

월간미술


김주원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미술관 컬렉션, 소장품의 비관적? 희망적? 운명


서울시립미술관 SeMA 신소장품전 《멀티-액세스 4913》 (4.16~6.2) 전시 전경. 95명 작가 작품 102점이 출품됐다.

서울시립미술관 SeMA 신소장품전 《멀티-액세스 4913》 (4.16~6.2) 전시 전경. 95명 작가의 작품 102점이 출품됐다.

“영화배우 출신인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되기 몇 년 전, 정치에 입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애리조나주의 한 기숙 고등학교에서 열린 아들 마이클의 졸업식에 참석했다. 졸업식이 끝난 후 레이건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여전히 할리우드의 스타로 인식되던 그는 새롭게 시작한 정치인으로서의 역할을 지지해줄 새로운 팬을 확보하고자 열을 올렸다. 모자를 쓰고 가운을 입은 한 소년이 신이 나서 그에게 다가갔고, 레이건은 멋진 장면을 연출하려 애쓰느라 소년이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녕, 나는 로널드 레이건이야. 네 이름은 뭐니?’”


자주 회자되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일화로 이 글을 시작하는 것은 적어도 (국공립)현대미술관과 소장품을 결부해 상상할 수 있는 우리의 현재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다소 과장되고 억지스러운 인용일지도 모르겠다. 최근까지 현대 '미술관’을 키워드로 기사를 검색하면 국립현대미술관을 포함한 국공립미술관의 ‘미술관장’ 공모 / 임용 건이 다수를 차지한다. 가까운 지인들과의 만남이나 전화통화의 주요 대화 내용도 마찬가지다. 단편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 안의 ‘미술관’ 논의는 2년에서 5년의 계약직 ‘자리’에 집중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할리우드 스타 레이건이 정치인으로서 새 이미지를 얻기 위한 행보에서 보인 웃지 못 할 해프닝과 별반 다르지 않은 미술관과 미술관을 둘러싼 국내 미술계의 한쪽 풍경은 이렇게 시작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좋은 미술관’의 지표는 다층적이다. 미술관 주체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때로는 미술계의 실존적 현실을 이유로 개개 미술관의 설립 이념 및 소장품(수집 이념)과 무관하더라도 ‘당장’ 멋진 장면을 연출할 미술관장과 흥행 전시 등도 지표에 포함된다. ‘미술관’이 어떤 ‘설립 이념’ 아래 어떤 ‘소장품’을 수집하고 무엇을 어떻게 ‘전시’하느냐를 좋은 미술관의 지표로 삼기에는 미술계를 둘러싼 정황이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아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이름을 묻는 초보 정치인 레이건의 다급함을 정치 초보의 의욕적인 소통 의지의 결과로 그저 웃어넘길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술관에 관한 ICOM(국제박물관협의회)의 정의를 새삼 상기해 볼 때, 미술관의 ‘수집’, ‘조사연구’, ‘전시’의 행위가 대중을 향한 봉사/기여의 발언이어야 하며, 이는 결국 인류에 바치는 존경과 경의여야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미술관은 인간 환경의 물질적인 증거를 ‘수집’하고 보존함은 물론 그 자료들을 조사, 연구해 전시라는 행위를 통해 사회 발전에 봉사할 수 있도록 대중에게 공개함으로써 연구와 교육, 과학에 이바지하는 비영리적이고 항구적인 시설이다.”


‘신소장품전’과 ‘컬렉션’


급진적인 속도로 등장하는 뉴미디어 환경과 시대에 따른 사회구조 변화에 따라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은 전환을 거듭하고 있다. 동시대 미술을 다루는 미술관과 큐레이터의 형태, 내용 변화 역시 가속화된 지 오래다. 컬렉션 수집 및 관리를 조건으로 하는 고전적/보수적 의미의 미술관과, 이와 달리 새롭게 정의되어 컬렉션과 무관한 급진적(?) 형태의 미술관의 공존 역시 이미 미술계의 생태가 되었다. 이러니 대다수 미술인에게 ‘전시’ 외의 미술관 기능을 거론하는 것은 진부하거나 사건이나 역사의 가능성이 제거된 에피소드 정도로 폄하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국내 국공립미술관을 보면 소장품 ‘수집’을 떼고 생각할 수 없다. 별도의 예산을 들여 해마다 작품을 수집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을 제외하고 공립미술관을 예로 들면 많게는 20억 내외에서 적게는 3, 4억에 이른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미술관들은 어김없이 이른바 ‘신소장품’을 전시한다. 큐레이터는 물론 작가, 저널리스트, 비평가 등등의 일부 미술 현장은 《신소장품전》에 ‘담론’과 ‘서사’라는 전시 내러티브를 기대하지 않는다. 사실상 대부분의 《신소장품전》은 전년도에 확보한 예산으로 어떤 작품을 구입했다는 리포트 성격인 탓도 있지만, 어떤 미술관의 특정한 미션 스테이트먼트가 반영된 차별화된 소장품 수집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과 조건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신소장품전》 이후 대부분의 작품이 수장고 속으로 들어간 이후부터다.


소장품: ‘에피소드’에서 ‘역사’로


오늘의 현대미술관 소장품은 수장고에 갇혀 조사연구, 해석, 전시되지 못하는 비관적 운명을 배태하고 있다. 수집 후 번호를 부여 받아 미술관의 컬렉션이 된 작품 대부분은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안전한 수장고에서 미술관의 에피소드 일부로 관리되고 있다. 모든 소장품이 미술관의 ‘에피소드’에서 미술관의 ‘역사’로 전환되는 일은 쉽지 않다. 잘 알다시피, 1929년 설립된 초기 MoMA가 실천한 컬렉션 수집 정책과 조사연구에 기반을 둔 전시 등은 교훈적이다. 설립 초기 9점의 작품으로 출발한 MoMA는 미술관 초기 여러 차례의 전시를 치르면서 미술관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줄 항구 소장품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MoMA가 1939년, 큐비즘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피카소의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1907)을 컬렉션하는 과정은 개관이후 지속적인 조사연구와 ‘추상표현주의’의 근거가 된 전시 《큐비즘과 추상미술》(1936)이 무관하지 않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로 인해 현대미술의 정당성을 수호해주는 강력한 제도로 부상한 MoMA의 행보는 바로 ‘수집’, ‘조사연구’, ‘전시’라는 미술관의 역할과 기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실천한 것에서 가능했다.


매년 1, 2월은 전국 국공립미술관의 소장품 전시 시즌이다. 대전시립미술관도 올해 초 신년 전시로, 1998년 개관 이래 20년 간 수집해 온 소장품(현재 1,254점)을 기반으로 세 번의 전시를 개최했다. 《신소장품전》을 포함한 두 개의 주제기획전이었다. 그 첫 번째는, 미술관 컬렉션 중 대전미술의 흐름을 살펴보는 소장품들로 구성한 《검이불루 : 대전미술 다시 쓰기 1940~1960》였다. 이 전시는 아카이브 자료 등의 조사연구를 통해 확인된 기록에 근거하여 대전미술의 주요 작품들을 미술관 컬렉션으로 수집하여 대전미술을 다시 서술하겠다는 미술관의 의지의 표명이었다. 두 번째 전시는, 《원더랜드 뮤지엄 :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이다. 미술관의 20년 역사와 수집 정책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주요 작품들을 선별하여 전시했다. 전시에는, 대전엑스포’93의 특별전시 《미래 저편에》(1993. 8.7~11.7)에 출품되었던 독일 출신 작가 레베카 호른, 톰 샤농 등의 실험적 작업이 우리 미술관에 소장된 후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미래 저편에》는 프랑스 고등조형예술학교장 퐁튀스 훌텐과 서울미술관장 임세택이 공동으로 기획한 전시로 다니엘 뷔렌, 장 팅겔리, 니키 드 생팔, 마이클 애셔 등 세계적인 작가 35명이 대거 참여했다. 전시가 열린 93일 동안 무려 약 1,400만 명이 관람한 과학기술축제 대전엑스포’93은 스펙터클한 한국사회의 도약과 비전이 시작되는 포인트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번 전시 《원더랜드》에 다시 전시된 레베카 호른의 움직이는 기계 신체 〈한국의 풍경 그리기〉(1993)와 톰 샤농의 〈광선구〉(1993)는, 도시 대전의 역사와 지나온 정체성 역시 확인하게 했다는 데 의미가 컸다. 특히, 태양과 지구, 비례에 따른 둘 사이의 거리의 초상으로 설명되는 톰 샤농의 〈광선구〉는 대전엑스포’93 당시 55개의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된 구와 그 사이에 발생하는 54개의 간격을 지닌 선으로 구성되어 야외 도로에 설치되었지만, 미술관 내 전시공간에 처음으로 설치되는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컨서베이터와 담당 큐레이터의 작품 상태 및 자료 조사연구에 근거해 38개의 구와 37개의 선으로 구성되어 새로운 컨텍스트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야외에 설치되었던 윤이 나는 구들은 하늘의 태양이 아닌 관람자들을 비추게 되었다.


《2018 성남큐브미술관 신소장품전》 (1.11~6.30) 전시 전경.

《2018 성남큐브미술관 신소장품전》 (1.11~6.30) 전시 전경.

소장품의 희망적 운명을 위하여


수장고 속 비관적 운명의 소장품이 희망적 운명으로 전환되는 방법은 미술관의 전(全) 활동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미술관이 지향할 미션의 설정과 이를 실천하기 위한 수집, 조사연구, 전시, 교육 등의 미술관 활동들이 유기적으로 연동하여 움직일 때, 에피소드로서의 소장품은 미술관의 역사가 될 수 있다. 서사나 담론을 구성하는 일은 ‘멋지게 보이려’는 제스처처럼 겉모습만 신경 쓰는 것으론 가능하지 않다. 의미는 힘겹게 들춰야 할 내부에 있다.


관련 기사 읽기

어두운 수장고에서 외출한 소장품 ① - 류지연, 「《신소장품전》에 대한 단상」, 월간미술, 2019년 6월호


노형석, 「박물관, ‘금단의 공간’ 수장고를 활짝 열다」, 한겨레신문, 2019년 6월 16일


※ 이 원고는 월간미술 2019년 6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월간미술과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김주원 /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김주원은 1996년 미술잡지 기자로 미술계에 발을 들인 이래 2003년부터 현대미술 분야 큐레이터로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등 비서구권에서 서구의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가 어떻게 변용, 구성, 발전되고 소통되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전시와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