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서상숙 미술사
최근 일제히 개막한 가을 시즌 뉴욕의 대형 미술관 전시를 돌아보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들은 ‘포용, ‘비판적 사고’, 그리고 ‘미술의 품격’이었다. 백인 남성 위주의 미술계가 드디어 다른 인종 그리고 여성에게도 문을 열었다는 신호가 읽혀서다. 그리고 미술계 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와중에 보석처럼 빛나는 수준급의 미술작품들이 그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는 흑인작가(Betye Sarr, Pope. L, Michael Armitage) 특별전이, 아트리움에서는 양혜규(1971~)가 의뢰받아 작업한 〈핸들(Handle)〉이 전시돼 많은 관심을 끌고 있고 중국현대미술이 전시장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다.
모마 PS1에서 진행 중인 《전투지역: 걸프전쟁(Theater of Operations: Gulf War: 1991-2001)》에는 유례없이 많은 중동작가가 초대되었다. 모마 PS1에서는 이라크와 그 주변국가 그리고 서구의 작가 및 컬렉티브 82명이 1991년 시작된 걸프전쟁과 2003년 발발한 이라크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 300여 점을 모아 내년 3월까지 전시한다. 그러나 전시에 초대되었던 일부 중동지역 거주 작가들의 방문비자가 트럼프 정부의 ‘여행금지’ 정책에 의해 거부되는 사례도 발생했다.
여성작가들의 주요 미술관 전시도 두드러진다. 휘트니미술관에서는 레이첼 해리슨(Rachel Harrison, 1966~)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고 최근 볼티모어 미술관은 2020년에 여성작가의 작품만을 구입하겠다고 밝혔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개관 80년 이해 첫 흑인 큐레이터(Ashley James)를 채용해 화제를 모았다.
지난 9월 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정면에는 흑인여성을 묘사한 대형 조각 4점이 세워졌다. 케냐 출신의 미국작가 왕게치 무투(Wangechi Mutu, 1972~)의 〈새로운 자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The New Ones, will free Us)〉 시리즈다. 크기가 좀 더 컸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이 조각들은 단순한 형태의 의연함으로 미국과 전 세계에 흑백의 조화를 요구하며 포용과 자유를 침묵으로 기원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같은 긍정적인 시도가 과연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일시적인 눈치 보기, 트렌드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마침내 진정한 마이너리티의 파워가 입증된 것인지는 앞으로 주의 깊게 지켜볼 일이다.
10월 18일 재개관을 앞두고 오프닝 프리뷰 파티가 열리던 MoMA 정문 앞에서는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이들이 개관식이 열리는 21일에 다시 모이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MoMA는 하루 전인 20일 깜짝 오프닝을 하는 해프닝도 벌였지만 항의시위(Art Space Santuary 주도)는 21일 계획대로 열렸다. 사설감옥과 무기 판매 관련 사업에 투자한 래리 핑크(Larry Fink, CEO of Black Rock)와 사설감옥과 푸에르토리코의 재난을 사업 기회로 삼은 스티븐 타넨바움(Steven Tannenbaum, founder of Golden Tree Asset Management)은 재단에서 사임하라고 요구하는 시위였다. 이른바 ‘불량 필란트로피스트(toxic philanthropist)’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움직임이 아닐 수 없다.
멧 브로이어(The Met Breuer)에서 내년 1월 12일까지 열리는 비야 셀민스(Vija Celmins, 1938~)의 〈기억 속의 이미지를 고정시키기(To fix the Image in Memory)〉에서 만나는 바다물결과 밤하늘의 별들은 이 같은 뉴욕의 소음을 한순간에 잠재운다.
온통 회색과 검은색 모노톤 작업들이 전시장에 들어선 사람들을 침묵과 경탄에 빠뜨리는 셀민스전은 평론가들로부터 일제히 호평을 받고 있다.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평생 작업실에 스스로를 가두고 흑연 연필로 바다의 물결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사막과 달의 표면, 거미줄 등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작가의 기나긴 노동의 시간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그가 사막에서 주운 작은 돌들과 자신이 쓰던 연필과 지우개 등을 실제와 전혀 구별할 수 없이 똑같은 조각작품으로 만들어낸 노작가의 마법에 숙연해지는 흔치 않은 경험을 제공한다.
셀민스는 작가들의 작가로 큐레이터, 평론가, 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작가이다. 라트비아에서 태어나 소련이 침략하자 그의 가족은 난민수용소를 전전하다 셀민스가 10세 때 미국 인디애나 주로 이주했다.
1963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샤워시설도, 부엌도 없는 작업실에 13년 동안 거주했는데 데스크램프, 선풍기, 코일 하나짜리 전기플레이트, 히터 등 작업실의 사물들을 회색톤으로 그린 오일페인팅들이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일 때는 어린 시절 소련이 공격했을 때 보고 들은 격투기를 그리기도 했다.
작업실에서 가까운 바다와 사막으로 차를 몰고 다니며 사진을 찍고 돌을 줍던 것도 이 시절이다. 페인팅을 포기한 후 10년 동안 연필작업에만 몰두하면서 그린 바다 물결 작업은 밤하늘 시리즈와 함께 그의 대표작이다. 밤하늘 그림은 별 하나하나를 시멘트 액체로 덮은 후 캔버스에 입힌 물감을 갈아내 표면을 완성한 후 다시 별을 그려 넣는 등 길고 정밀한 작업 과정을 거친다. 특히 사막에서 주운 작은 돌들을 브론즈로 만든 후 실물과 똑같이 그려 실제의 돌과 함께 전시한 작품은 경이에 가깝다. 그가 직접 찍거나 미항공우주국에서 출판하는 잡지에 실린 사진 등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그는 이 같은 작업을 “재묘사(re-describing”라고 설명한다.
한편 뉴뮤지엄에서는 ‘미술계의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라고 불리는 개념미술가 한스 하케(Hans Haacke, 1936~)를 33년 만에 재소환했다. 1986년 뉴뮤지엄 전시 후 처음으로 미국 소재 미술관에서 열리는 회고전인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All Connected)》는 1960년대 초기작부터 올해 제작한 신작까지 30여 점이 로비를 비롯, 뉴뮤지엄 전관에 설치 및 전시되고 있다. 하케는 독일에서 태어나 1960년대 초반 쿠퍼 유니온대학 교수로 일하면서 뉴욕에 정착했다.
초기 작업인 바람과 전기 등을 이용해 움직이는 조각을 만든 키네틱 아트부터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전시되었던 대형 말조각 〈선물(Gift Horses)〉(2014)이 뉴욕에 처음으로 소개됐다.
[뉴욕 타임스]는 “하케는 미국 미술계에서 가장 일관적이며 타협하지 않는 인물 중 한 사람”이라며 “미술계가 사실은 행정을 맡은 사람들의 목적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운영되는 복잡한 시스템이라는 것을 끈질기게 강조하는 선구자적 인물”이라고 밝힌다.
가장 관심을 끄는 작품은 1971년 구겐하임이 그의 개인전을 취소하고 담당 큐레이터까지 해고하게 만든 〈Shapolsky et al. Manhattan Real Estate Holdings, a Real-Time Social System, as May 1, 1971〉이다. 당시 뉴욕의 빌딩 소유권을 밝힌 것으로 막강한 구겐하임의 재단이사가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하케는 미술관들의 기피 대상이 되었다.
모마는 4개월 동안 450만 달러의 공사비를 들여 전시공간을 3만 스퀘어피트(2787㎡)로 30% 확대하면서 수장고에 넣어두었던 소장품을 대거 꺼내어 전시했다. 컬렉션 갤러리는 6개월 혹은 9개월에 한 번씩 돌아가며 작품을 바꾸어 전시할 계획으로 18개월마다 완전히 다른 작품을 보게 된다. 물론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 모네의 〈워터릴리〉 등 전 세계에서 이 작품들을 보기 위해 모마로 여행을 떠난다는, 모마를 상징하는 작품들은 늘 전시된다. 전시 방식 역시 파격적으로 바꾸었다. 서로 다른 분야의 큐레이터들이 협업을 통해 미술사적 혹은 연대기적 전시가 아닌 주제 혹은 사건별로 믹스앤매치를 해보았다.
[아트뉴스]는 재개관한 모마에 대해 “아직도 23%만이 여성작가의 작품”이라고 지적했다. 또 피카소의 작품이 가득한 방에 〈게르니카〉에 영향 받은 흑인 여성작가 페이스 링골드(Faith Ringgold)의 작품 〈American People Series No.20: Die〉 1점만을 걸고 마티스의 작품이 가득한 방 역시 흑인 여성작가 알마 토마스(Alma Thomas)의 작품 단 1점을 전시한 것 등을 “형식주의(Tokenism)”이라고 비난하며 “백인 남성 슈퍼스타들의 들러리로 여성들의 작품을 걸었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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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뉴욕타임스]는 이 같은 시도를 두 작품의 정치적 배경과 폭력, 작품 크기 등이 제대로 교류되었다고 평가하면서 큐레이터의 “천재적인 손길(a stroke of genius)”이라고 호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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