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선령 부산대 교수
20세기를 관통해 21세기를 살고 있다. 세기말에는 새로운 세기를 반기면서도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불안이 엄습하기도 했다. 이를 떨치고 21세기의 20년 세월이 흘렀다. 이쯤에서 우리가 스무 해 동안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자 한다. 비평이 목도한 21세기를 가늠하며 세기말에 작업을 시작한 작가의 여정을 들어본다. 또한 신세기를 맞은 큐레토리얼 변화를 살펴보며 21세기 미술의 역을 점령한 시장논리의 파워와 내용을 읽어본다. 혹자는 지금을 불확정시대로 정의한다. 그러나 여태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당시에 앞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더 궁금해질 정도다. 지금 우리가 걷는 족적이 곧 길을 만든다.
1990년대 이후, 전통적으로 ‘전시기획자’와 동일시되어온 큐레이터의 역할을 “장기적이고, 덜 대상지향적인, 담론적-교육적 프로젝트”로 확장시키면서, 큐레이터십을 “어떤 사건을 무대에 올리는 작업이 아니라 사건 그 자체”로 재정의하려는 경향이 등장했다. 장 폴 마르티뇽(Jean-Paul Martinon), 이릿 로고프(Irit Rogoff) 등이 주장하는 ‘더 큐레토리얼(the curatorial)’ 개념이 그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큐레이팅의 역을 무차별적으로 확장시킨다는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이 개념은 이 글의 서술 방식과 관련해서 한 가지 단서를 던져준다. 결과지향적, ‘형식주의적’ 관점에 근거한 연대기적 서술방식을 넘어서, 욕망과 관계의 지형도를 새롭게 작성함으로써 큐레이팅의 역사를 그 수행적 측면에서 재조명하는 것은 가능할까? 한국 미술계에 등장했던 어떤 욕망과 지향점들을 되짚어보고 그 ‘사후효과’를 추적하면서 큐레이터십을 몇 가지로 유형화해보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초반은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범 이후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룬 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을 정면으로 수용하던 시대다. 당시 뉴 밀레니엄은 단지 숫자에 머물지 않고 어떤 야망 혹은 포부의 다른 이름으로 나타났다. 이 포부는 “아직 ‘로컬에 머물고 있는’ 한국 미술이 어떻게 하면 글로벌한 미술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글로벌 스탠다드 담론’ 유형의 큐레이팅은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1세대 큐레이터들(김홍희, 이영철, 김선정 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그 구체적 양상은 대형 비엔날레(예를 들어 2000년 《부산국제현대미술전 : 고도를 기다리며》), 사립 미술관 전시(예를 들어 아트선재센터의 2001년 전시 《판타지아》), 대안공간 운영(쌈지 스페이스 레지던시, 2000년 《무서운 아이들전》 이후 쌈지의 전시들)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계속해서 《제 1회 안양 공공미술 프로젝트》(2005), 《플랫폼 인 기무사》(2009) 등 비엔날레나 준비엔날레급의 대형 국제전을 주도하였으며, 이후 공공기관의 수장들이 됨으로써 이 담론을 디렉터십으로 확장시켰다.
‘글로벌 스탠다드’ 유형은 대기업 미술관, 특히 1999년 문을 연 로댕 갤러리(2011년에 삼성미술관 플라토로 재개관), 2004년에 개관한 리움 미술관의 전시에서도 다른 형태로 발견되었다. 이는 일차적으로 해외 유명 작가의 대형 전시로 구현되었는데, 리움의 《매튜 바니 : 구속의 드로잉》(2005~2006), 《마크 로스코 : 숭고의 미학》(2006) 등이 초기 사례다. 미술의 국제화를 선구적으로 성취했다는 평가와 ‘명품 쇼핑’이라는 비판을 모두 받았던 이 경향은 ‘리움 스타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큐레이터십 유형을 구축했다. 2016년 플라토가 폐관하고 리움이 소강상태에 들어선 이후, 《라파엘 로자노-해머 : Decision Fores》(2018), 《바바라 크루거 : Forever》(2019)로 ‘리움 스타일’ 전시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보여준 아모레 퍼시픽 미술관의 사례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2000년대 이전의 전시기획은 주로 작가, 상업화랑, 대기업이 운하는 전시장(동아 갤러리, 호암 갤러리 등)이 떠맡고 있었다. 대안공간은 존재하지 않았고, 공공 미술관은 숫자가 적었으며, 그나마 관료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뉴 밀레니엄을 전후로, 이 모든 것들이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1998년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이 개관했으며, 서울시립미술관은 1988년부터 있었지만 1999년이 되어서야 초대 관장이 취임했다. 대안공간 풀(현 아트스페이스 풀), 대안공간 루프, 사루비아 다방은 모두 1999년에 문을 열었다. 쌈지 스페이스는 1998년 암사동에서 개관했고, 2000년에 홍대 앞으로 이전했다. 기성 제도 대 대안성이라는 서구식 대립구도 대신, 모든 종류의 기획자들이 새롭게 큐레이터십을 익히고 배워야하는 상황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지난 20년간 큐레이터십의 역사는 각 기관들이 ‘자기 조직화되는’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대안공간 풀(이하 풀)의 초기 멤버들(이영욱, 박찬경, 황세준 등)의 지향점은 1980년대 민중미술의 유산을 어떻게 시대에 맞게 재구성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대립이 사회의 모든 측면을 규정했던 한국 사회의 현실 덕분에 ‘정치적 미술’의 동질성은 종종 과잉 평가되었으며, 이는 ‘풀 스타일’에 대한 기대와 부담이 동시에 작용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이후의 풀의 운영자/기획자(필자 포함)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적 관심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2000년에 설립된 인사미술공간(이하 인미공)은 풀의 큐레이터십과 느슨히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다. 이는 인미공에서 일했던 백지숙, 김희진이 풀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기획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김희진은 2014~2015년에 풀 디렉터였다), 두 기관이 전시 이외의 담론적 활동(아카이빙, 출판, 토크 등)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인미공 아카이브, 2005~2008년에 발간한 『저널 볼(BOL)』 등은 인미공의 대표적 텍스트 기반 프로젝트들이었다. 한국 큐레이터십의 역사에서 그 숫자가 많지 않은 이 유형은, 때로 너무 이론적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담론 기반 작업을 확장된 의미의 큐레이팅으로 간주하고자 했던 초기 시도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 ‘담론 유형’의 큐레이터십은 2008년 개관 때부터 심포지움, 세미나, 출판 등을 중요 큐레토리얼 플랫폼으로 삼은 백남준 아트센터, 김성은 현 백남준 아트센터 관장이 리움 미술관 연구원 시절 기획한 프로젝트들(2015년의 《비평클럽》, 《인터미디어 극장》 등)과도 비교해볼 수 있다.
반면 홍대앞이라는 특정 장소의 문화적 배경과 연관되어 있던 대안공간들, 즉 쌈지 스페이스(대표 김홍희)나 대안공간 루프(대표 서진석)는 덜 정치적이고, 더 감각적인 성격의 작업들, 더 ‘개인주의적인 감수성’을 지닌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것을 지향점으로 삼았다. 이들의 초점은 그들이 후원하는 작가들의 감수성이 기성세대와 다르다는 것에 맞춰져 있었으며, 이 점에서 이 유형의 큐레이터십을 ‘신세대 문화의 조직화’로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201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예술인 생존’ 담론, ‘신생공간’ 담론, ‘청년작가’ 담론 역시 신세대 담론의 변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최근의 신세대 담론은 ‘생존경쟁에 내몰린 신자유주의 시대의 청춘’이라는 다소 암울한 뉘앙스를 갖는다. 또한 2000년대 초의 신세대 담론 큐레이터십이 뮤직 비디오 등의 영상문화, B급 키치문화와 연결되었다면, 2010년대 중후반의 전시기획은 주로 게임, 인터넷 문화와 연결된다, 이는 《던전》(2015, 강정석, 김동희, 김정태, 이수경, 한진 기획, 공간 사일삼 외)처럼 여러 전시장들을 게임의 공간들로 설정하거나, 《김희천 ‒ 랠리》(2015~2016, 커먼센터)처럼 전시 관람 자체를 일종의 게임 경험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생존담론’ 시대의 큐레이터십은 ‘콜렉티브 유형’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이는 ‘대형 전시를 혼자 지휘하는 카리스마적 큐레이터’ 대신 ‘작가 혹은 다른 기획자들과 느슨하게 협업하는 콜렉티브 멤버로서의 큐레이터’의 등장을 의미한다. 이 변화는 작가들을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협업하는 큐레이터십으로 구현되었으며, 작가/큐레이터의 겸업으로도 나타났다(이는 어떤 의미에서 전문 큐레이터십 정착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청춘과 잉여》(2015, 커먼센터)는 ‘유능사’(최정윤, 안대웅)가 기획했고, 《세 번 접었다 펼친 모양》(2018, 브레가 아티스트 스페이스)기획 주체는 고고다다 큐레토리얼 콜렉티브(장혜정, 최희승)이었다. 공공미술관에서도 오래 함께 일해온 큐레이터들끼리의 일종의 공동 작업 시스템을 구축하는 모습도 보인다(백남준 아트센터의 이수영, 이채영, 박상애 등). 콜렉티브의 부상은, 인도네시아의 콜렉티브 루앙루파가 2022년 카셀 도큐멘터 디렉터로 선정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글로벌한 현상이기도 하다. 이는 성장의 한계와 자유주의적 주체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로 대변되는 21세적 풍경과 연관 있어 보인다.
국공립미술관은 지난 20년간 어느 분야보다도 빠르게 성장했는데, 이는 공공 부분의 비중이 유난히 큰 한국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특히 2013년 서울관 개관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의 비중은 다른 어떤 기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국공립미술관 큐레이터십을 별도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는 애매하지만, 개인보다 조직의 이름을 앞세우는 관료주의적 관행 속에서 개인 기획자들이 역을 점차 넓혀온 것은 특유의 현상으로 꼽을 만하다. 특히 2010년 중반 이후 채용방식의 변화로 경력직 기획자의 합류가 늘어났고(임근혜, 이수정, 배명지 등), 기존에 일하던 기획자도 입지를 넓혀갔는데, 이는 기관 전체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 국립현대미술관의 《아시아 리얼리즘》(2010, 김인혜 기획)은 장기 리서치에 기반한 국제협업 전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2016, 강승완, 류지연 기획)는 소장품 전시의 새 유형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았다. 테이트 모던과 협업한 서울시립미술관의 《데이비드 호크니》(2019)는 지자체 미술관이 블록버스터급 국제전을 자체 기획한 새로운 사례가 되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은 2010년대 중반 이후 나타난 현상인 큐레이팅의 전문화에 힘입어 외부 기획자와의 협업을 시도하기도 했는데(예를 들어 퍼포먼스 분야의 김성희, 영상 분야의 정세라 등), 이는 콜렉티브 큐레이터십의 공공미술관 버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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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서 21세기를 돌아보다 - 비평이 목도한 21세기」, 월간미술, 2020년 1월
조선령은 서울을 근거지로 독립 큐레이터와 미술이론가로 일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부터 부산시립미술관에서 10년간 학예연구사로 일하면서 9건의 전시를 기획하고 다수의 전시를 진행했다. 2007년부터 2년간 대안공간 풀에서 객원 큐레이터와 운영위원으로 일했고 2009년에는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학예팀장으로 일했다.
주요 전시로는 《쾌락의 교환가치(Exchange Value of Pleasure)》,『라캉과 미술』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