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곤
한국의 미술가들은 언제, 어떻게 비디오를 예술 표현의 매체로 수용했을까? 그 미술 내외적인 환경은 어떠했을까? 그 전개 과정은 한국 미술과 어떠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가? 1세대 비디오아티스트이자 미디어이론가인 이원곤은 현장 체험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비디오아트 30년의 역사를 개괄한다. 필자의 논지에 따르면, 1970년대 한국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들은 전위적 실험미술의 맥락에서 비디오를 사유와 창작의 도구로 주목했다. 이어 1980년대 중반 백남준의 영향과 영상 매체의 대중화를 통해 비디오의 매체 특정성을 탐구하거나, 조각이나 설치와 결합하는 작품이 출현한다. 1990년대는 서구로부터 유입된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영향으로 비디오아트는 형식적, 내용적 확장이 이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필자는 《한국 비디오아트 7090: 시간 이미지 장치》전에 소개된 작품을 꼼꼼히 분석한다.
19세기 서구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회화의 기원(The Origin of Painting)’이라는 주제는 부테다스의 도공의 딸이 떠나는 애인의 그림자를 따라 그리고, 아버지가 그것을 부조로 남겼다는 이야기이다. 이를 바탕으로 풀이하자면 회화는 “원래는 있(었)지만 지금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가시화시키는 기술”이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플리니우스(Plinius the Elder)의 『박물지』에 전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 즉 화가 제욱시스(Zeuxis)가 크로토나섬에서 5명의 소녀에게서 각각 아름다운 부분을 취하여 헬레나를 그렸다는 설화도 그렇지만, 이 세상에 널려 있는 신전이나 사원에 그려지거나 조각된 수많은 신들의 모습들, 역사적 기록화 등등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있거나, 있다고 믿거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세계를 가시화한 것이다. 즉 화가들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그러한 ‘진실’을 가시화해왔던 것이다. 현대의 과학적 가시화(scientific visualization)나 데이터 가시화(data visualization)도 이와 다르지 않다.
뉴미디어 혹은 미디어 기술에 의해 예술의 새로운 표현의 길이 열렸다는 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공인된 사실인 듯하다. 그리고 그 기술 내지 미디어가 세상을 보는 방법, 보이는 사실의 양상을 결정한다. 모든 것은 ‘매개된 리얼리티(mediated reality)’이다. 영화나 텔레비전과 같은 미디어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관람의 방식을 요구했지만, 예술가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다른 방식으로 그 미디어를 대한다. 즉 그것을 자신의 작업을 위한 수단으로 변형시키거나 최적화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사실 근대의 예술가들은 전문 기술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오래전에 개발되어 실험되고, 결함이 수정되고 완성되어, 이미 산업적으로 대량 생산된 형태의 미디어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예술가는 창작자로서의 잠재적 재능을 발휘한다. (‘ars’와 ‘techne’가 같은 어원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상기하자.) 예술가는 미디어를 전용하거나 해킹하여, 가장 널리 쓰이는 기술(universal technology)를 자신만을 위한 고유한 기술(unique technology)로 만드는 것이다. 백남준이 1963년 〈음악의 전시- 전자텔레비전〉전(독일 부퍼탈 파르나스갤러리)에서 사용한 TV는 자기 스승 존 케이지(John Cage)가 만들었던 ‘prepared piano’와 마찬가지로 ‘prepared TV’였다. 그는 CRT의 갖가지 기능을 고장 내고 전용함으로써 12개의 각기 다른 TV를 만들어내었다. 그의 이러한 해킹은 그가 아베 슈야(Shuya Abe)와 함께 제작한 비디오합성기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르렀고, 이를 통하여 ‘비디오아트(Video Art)’라는 장르가 구체화되었다.
한편 백남준은 자신의 기술을 너절하다(sloppy)고 표현한 적이 있지만, 1970년대 한국에 살던 박현기에게 백남준의 그것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첨단 기술이었다. 절망한 그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려서 TV 영상을 하나의 오브제로 자신의 ‘비물질적 구조’에 도입하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이처럼 새로운 미디어가 어떤 예술가의 것이 되는 과정엔 그 미디어를 다루는 새롭거나 개성적인 기법이 궤를 같이한다. 물론 1970~90년대의 한국 비디오아트에는 싱글채널비디오와 같은 실험영화의 정신을 계승한 작품들과 같이 위의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 것도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 비디오아트 7090: 시간 이미지 장치》(2019. 11. 28~5. 31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가 조망하는 1970~90년대에 제작된 국내 비디오아트 작품들을 살펴보면서, 한국의 비디오아티스트들이 비디오라는 매체를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표현을 위한 것으로 전용하였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비디오아트’의 시작
1952년, 미국의 수학자이자 과학자, 예술가였던 벤 라포스키(Benjamin Francis Laposky)는 음극선관(cathode ray tube, CRT)의 일종인 오실로스코프(cathode ray oscilloscope)와 사인파 발생기(sine wave generators) 및 다른 전기 전자 회로를 이용하여 사인파, 사각형의 파형(square wave), 리사쥬 형상(lissajous figure) 등이 포함된 추상 이미지를 얻었고, 이것을 사진으로 촬영하였다. 이 작업은 ‘전자적 구성(electrical compositions)’ 또는 ‘전자 추상(electronic abstractions)’이라는 이름으로 미국과 유럽을 순회하는 전시를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 이는 CRT, 쉽게 말해 TV 브라운관 기술이 예술적 표현의 수단이 되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1963년 백남준은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전에서 TV수상기를 해킹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변조해서 새로운 전자 이미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13대의 TV들을 (1) CRT의 주사선 편향 장치를 고장 내거나 혹은 수직, 수평 동기신호회로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조작하거나 (2) 튜너를 거쳐 검파, 증폭 과정을 거친 영상신호회로에 라디오, 테이프레코더로부터 나오는 음성신호를 간섭시켜 화면이 변형되도록 조작하였다.
백남준의 행위는 ‘(완성된) 테크놀로지에 대한 해킹’이라 할 수 있다. 원래의 설계된 목적과는 다른 용도로 전용(轉用, appropriation)하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너절한(sloppy) 수준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그의 스승 존 케이지의 ‘변조된 피아노(prepared piano)’, 더 나아가서는 존 케이지의 스승이었던 H. 코웰(Henry Cowell)의 ‘스트링 피아노(string piano)’로부터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백남준이 보여준 이러한 비전 때문에 ‘TV아트(TV art, television art)’와 함께 ‘일렉트로닉 아트(electronic art)’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5년에 소니사의 포타팩(Portapak)이 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디오아트’라는 표현은 사용되지 않았다. 비디오아트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백남준과 아베슈야, 바술카 부부(Steina and Woody Vasulka), 그리고 스티븐 벡(Stephen Beck) 등에 의한 비디오 합성기의 개발이 본격화되었던 1969~7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1973년의 <글로벌 그루브>는 비디오아트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대표적인 작품이었으며, 한국에 살던 박현기의 비디오아트 실험을 촉발하는 자극제가 되었고, 1984년 1월 1일에 방영되었던 〈굿모닝 미스터 오웰〉도 내용상으로 맥락을 같이하며 국내의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비디오’란 원래 ‘비주얼(Visual)’이란 의미이지만, 1960~90년대에 사용된 아날로그 방식의 ‘영상 기록/재생 미디어’를 부르는 이름이다. 즉 매체 그 자체의 명칭이다. 20세기 후반엔 ‘홀로그래피아트‘(holography art)’, ‘컴퓨터아트’, ‘CG아트’, ‘레이저아트(laser art)’, ‘위성예술(satellite art)’ 등 이런 식으로 그 미디어 자체의 명칭을 그 장르로 부르는 방식이 유행했다. 여기엔 미디어의 특성이 그 예술 장르의 성격과 표현적 특성을 거의 결정한다고 보는 믿음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 다음 시기에는 ‘정보예술(information art, info art)’, ‘사이버아트(cybernetic art, cyber art)’, ‘디지털아트(digital art)’ 등 미디어 혹은 그것이 다루는 정보의 속성에 관심을 둔 명칭들이 많이 사용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소통예술(communication art)’, ‘네트워크아트(network art, net art)’, ‘텔레매틱아트(telematic art)’, ‘웹아트(web art)’, ‘인터넷아트(internet art)’, ‘인터랙티브아트(interactive art)’ 등 소통 방식에 주목한 명칭도 유행했으나, 전반적으로 이들을 통칭하여 미디어아트라고 부르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적 관습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디오’라고 했을 때 그것은 1960~80년대 사용되었던 VHS, 베타캠(Betacam), 유매틱(U-matic) 등 아날로그 방식의 기록, 재생 장치를 이르는 말이고, 따라서 비디오아트란 그런 미디어 기반의 예술 활동 일반을 지칭한다고 가정해 두기로 하자.
개념미술의 실천을 위한 도구
서구에서 기술과 예술의 만남이 제창되고 실험되던 1960년대, 국내에서는 소위 ‘앵포르멜 운동’의 시대를 거쳐 1970년대에는 모노크롬 시대로 이행하면서 모노하의 영향이 강해지고 미니멀리즘이 유행하는 한편, 이윽고 다양한 ‘실험미술’이 관객들에게 ‘낮선 현대미술’을 새롭게 인식시키면서 사회에 충격을 던져주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 초 미국에서 시작된 E.A.T의 활동이 1960년대 말에 이르러 회원이 6000여 명에 이르는 범세계적인 네트워크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의 열기는 1970년 이웃 국가인 일본 오사카에서 6개월간 개최되었던 만국박람회의 ‘펩시관’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러한 동향이 국내에 어떻게 전해졌는지 확인할 만한 자료는 없지만, 전술한 맥락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서구 사회에서 영화는 사진 미학을 계승하는 장르로 간주되었고, 거기에는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영상 미학이 존재했다. 할리우드 이후로 영화는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했고, 그 저변에는 젊거나 실험적인 감독들이 개성적인 작업을 수월하게 발표할 수 있는 개인 영화, 실험영화의 장이 필요했고, 이를 통해 영화 산업에 새로운 정신과 기법을 수혈할 수 있는 공급원이 확보될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1964년 유현목 감독을 중심으로 결성된 동인회 ‘시네포엠’이 1966년 캐나다 몬트리올 국제박람회가 주최하는 ‘국제 문화 및 실험영화 콘테스트’에 출품했던 흑백 35mm 필름으로 촬영한 50초짜리 단편 〈손〉(1966)이 현존하는 최초의 실험영화이다. 그리고 1970년에는 ‘한국8mm동인회’, 1971년 ‘소형영화동호회’, ‘영상연구회’, 1974년대에 '카이두실험영화그룹'이 조직되고, 한국 최초 실험영화 제작과 실험영화 페스티벌을 개최하였다. 전체적으로 이 시기의 실험영화는 오랜 세월 한국인에게 익숙해졌던 계몽 영화나 대한뉴스와 같은 관제 영화에 대한 저항으로서, 또 나아가 상업 영화가 감당할 수 없었던 실험적 영상 미학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비디오아트’는 ”실험적인 영상”이라는 면에서 실험영화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는 그 출발점에서 공유하는 부분이 크지 않았다. 그것은 실험영화가 이미 거대 산업으로 군림하고 있던 영화에 대한 대안적인 활동이었음에 비해, 비디오아트는 전위미술운동의 일부로서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전부터 오랜 기간 국가 혹은 국민 오락으로 사랑받으며, 또 한편으로는 당시 군부정권의 엄한 검열하의 국책 영화나 상업 영화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이에 저항하는 주로 소규모 동인의 에너지가 실험영화로 분출된 반면, 당시의 TV, 비디오는 영화에 비해 열등한 수단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비디오는 이른바 전위미술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영화인으로부터 관심을 받기에 미흡한 미디어였고, 보통 미술가들에게 영화 제작은 매우 진입 장벽이 높은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원래 직장에서 CF 제작 업무를 맡으면서 영상 제작을 경험했던 김구림은 특별한 케이스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1/24초의 의미〉(1969)는 도시화, 산업화 사회로 변화 된 한국 사회의 환경과 한국인들의 일상, 무력한 도시인의 이미지를 프레임 편집으로 구성해 내었으며, 기계적 환경 속에 이어지는 일상을 기계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의 〈발레 메카니크(Le Ballet Mecanique)〉(1924)와 비교할 만하다. 그리고 김덕년의 경우에 촬영하는 자신의 모습을 재촬영한 8mm 필름 작업을 〈서울 70〉전에 발표한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는 비디오 작업을 발표하는 등 필름과 비디오 두 미디어를 혼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실재와 가상의 사이 공간
미술가들이 영화보다 손쉬운 도구이면서 1970년대에 보급되기 시작했던 비디오에 주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비디오는 촬영 즉시 재생이 가능하며, CRT가 스스로 빛을 내므로 어두운 공간이 아니라도 사용 가능하고, 또 모니터라는 오브제를 활용하여 예술적 실험의 장에 수월하게 동원할 수 있기 때문에 영화관과 같은 특별한 공간이 아니라도 사용이 가능한 편리함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비디오는 영화에 비해 화질이 떨어지는 값싸고 대중적 오락을 위한 키치였으며, 영화나 미술과 같은 정통 장르에서 보기에는 상당한 심리적인 거리가 있었다. 미술인들은 비디오를 새로운 영상 미학의 표현 도구로 삼기보다는 전위예술, 개념미술의 실천을 위한 수단으로 수용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 프랑스에서 활동 중이던 김순기가 국내에서 보여준 전위예술에서 비디오가 퍼포먼스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수단이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적어도 1970년대까지 비디오는 영화보다 동적인 환경에서 활용이 가능한, 개념미술을 실천하기 위한 기록 매체였다.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Impact Art Video Art 74》에 백남준과 같이 출품하였던 곽덕준도 1973년 이후 수 편의 비디오 작업을 발표하였고, 특히 〈자화상 78〉(1978)은 재일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미학적으로 표현한 싱글채널 비디오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비디오아트가 주된 활동 영역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70년대까지만 해도 미술가들이 비디오를 작업의 수단으로 수용하는 것은 대부분 개념미술 실천을 위한 보조적인 수단일 뿐인 경우가 많았다. 박현기는 1974년에 대구의 미국문화원에서 백남준의 <글로벌 그루브>를 보고 비디오아트에 대한 포부를 가졌다가, 백남준의 기술이 자신이 넘볼 수 없는 것이라고 깨닫고 절망했지만 1977년 《대구현대미술제》에서 모니터를 위로 향하게 하고 물에 비친 램프의 비디오 영상이 실제로 트레이에 비친 램프 이미지처럼 보이게 하는 작품을 내놓았다. 이 반영 이미지는 낙동강에서 수면과 그 반영 이미지를 결합한 ‘거울 작업’으로 이어지는데, 그는 스스로 이러한 작품이 서구의 방식과 다르므로 ‘비디오아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한 ‘TV 돌탑’은, 처음에는 자연석으로만 된 돌 사이에 투명한 재질로 뜬 ‘인공의 돌’을 끼워 넣는 작업이었다. 이즈음 그는 우연히 대구의 미국문화원에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에 관한 자료를 보게 되었고, 크게 고무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연이어 만든 작업이 자연석 사이에 TV 수상기를 끼워 넣은 TV 돌탑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1979년 상파울루비엔날레와 1980년 파리비엔날레에 참가함으로써 한국을 대표하는 비디오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한다.
박현기가 보여준 일련의 작업은 영상 그 자체가 지니는 ‘허상으로서의 본질’을 현실 공간과 대비시키는 데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TV 수상기가 사각형의 프레임을 통하여 영상을 보여주듯이, 거울 혹은 모니터와 같은 프레임에 수납된 가상 공간을 현실 공간 혹은 실제의 오브제와 관련짓고 물질과 비물질의 공존 및 화해를 이끌어내는 일이다. 즉 처음에는 단순한 반영으로 시작되었던 그의 비디오 영상이 (그로서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건축적 혹은 조형적인 공간과 만남으로써, 바로 가상과 현실이 교류하는 새로운 종류의 공간—사이 공간 혹은 인터스페이스(interspace)—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현실 공간은 가상 공간의 연장선상에서 읽혀지고, 가상 공간 역시 현실 공간과의 관련성에서 읽혀짐으로써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1985년 도쿄 가마쿠라화랑(鎌倉畵廊)의 개인전에서의 퍼포먼스에도 나타나는데, 여기서 작가 자신이 나체로 모니터를 끌어안고 모니터상의 포르노 여체 이미지를 더듬는 퍼포먼스를 연출하였다.
이처럼 현실과 병행하는 허구, 가상 또는 초현실의 세계를 하나의 구조로 조립하는 설치는 후대의 한국 비디오아티스트들에게 자주 보이는 특징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1990년대의 나경자의 〈O.T.〉는 여전히 실재와 가상을 만나게 하는 설치였고, 육근병의 〈풍경의 소리+터를 위한 눈=Rendzevous〉(1992)와 같은 작품의 눈은 이승과 저승의 소통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고, 역사와 현실을 감시하는 영적 심성이기도 하다.
‘백남준’이라는 충격 이후
다시 1980년대의 한국으로 돌아가자. 당시의 한국 비디오아트는 일종의 개화기라고 할 만한 시기였고, 그것은 1984년에 백남준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그때까지 백남준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1984년에 KBS에서 방영되었던 위성 중계 방송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은 국내 예술계와 문화인, 나아가 대중에게도 놀라운 일이었고, 이 방송에서 소개되었던 세계 정상급 작가들의 작품과 첨단 기법을 사용한 현란한 화면들은 때마침 1982년부터 실시되었던 컬러 TV 방송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던 한국 시청자들에게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바이 바이 키플링(Bye Bye Kipling)〉(1986), 〈손에 손잡고(Wraping aroud the World)〉(1988) 등의 ‘위성 중계 아트쇼’가 이어지고, 과천국립현대미술관 중앙홀에 그의 대표작 〈다다익선(The More the Better)〉(1988)이 설치되기에 이르면서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작품은 ‘지구촌’이란 이상향을 그리고 있는 점이나 다양한 문화 간 소통을 암시하는 점에서 〈글로벌 그루브〉의 위성 중계 버전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다다익선〉이 타틀린(Vladimir Tatlin)의 ‘기념비’를 의식한 것이었고, 나아가 타틀린의 아이디어는 파리의 에펠탑을 의식한 혁명 러시아의 대응물이자 신문, 방송, 전파 중계 등을 위한 거대한 미디어 기념비로서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상징물이라는 점을 반추해 보면, 백남준의 일련의 작업은 비디오와 지구적 네트워킹에 의한 신문명의 전시장이었고, 이점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 등 위성 중계 아트쇼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까지 한국에서는 TV, 비디오와 같은 뉴미디어를 ‘새로운 예술’을 위한 수단으로 수용할 만한 인식의 지평이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소개되면서 한국사회에 비디오아트의 가능성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국내에 많은 청년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이 나타나게 된다. 필자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본 후에 비디오와 컴퓨터 기술을 적극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고, 1986년의 《앙데팡당》전에 처음으로 TV 모니터와 라디오 등을 이용한 설치작품을 발표하였고 《이원곤 비디오 인스톨레이션전》(수화랑 1987) 등에서 비디오아티스트로 전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진식은 컴퓨터의 예술적 매체로서의 가능성에 착안하고, 1985년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소위 ‘컴퓨터 판화’ 등을 선보였고, 1987년에는 《한국의 컴퓨터 판화가들》이라는 이름의 단체전 개최를 주도하기에 이른다. 그밖에 《EXODUS》전(1986)이래로 컴퓨터 기판과 자전거 바퀴 기계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강익중, 당시 KBS에 재직하고 있으면서 방송용 장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김윤,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와 1988년 여의도 상공에서 행해진 ‘레이저 쇼’에서 레이저, 인공적인 빛의 연출을 보여주었던 김재권,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다양한 실험적인 조형 작업을 보여주었던 조태병, 1987년경부터 다시 키네틱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1990년대에는 자신이 직접 제작한 비행기를 조종하며 퍼포먼스를 펼쳤던 서동화 외에도 육근병, 김해민, 성선옥, 오경화, 하용석, 이강희 등 많은 작가들이 이 시기에 거의 동시에 미디어아티스트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비디오아트의 위상은, 한편으로는 뉴미디어 및 실험적인 영상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실험영화와 비교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영상을 하나의 오브제 혹은 기록수단으로 활용했던 전위예술과 비교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즉 실험영화가 사진으로부터 이어진 영상 미학의 실험장이었으며 한 세기 이상의 세월 동안 이어진 사진과 영화의 문맥 위에서 프레임의 실험적인 촬영, 미장센 그리고 편집이 주된 관심사였다면, 전위예술에서는 비디오 영상을 새로운 예술적 실험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혹은 기록 매체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새로운 미디어의 (재)창안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는 세상의 관심은 뉴미디어에 의한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에 모아졌다. 당시의 미디어 환경은 멀티미디어, 디지털의 시대로 전환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1993년에 정부가 '영상산업진흥’이라는 새로운 국가 전략 산업을 표방하고, 영상 산업을 장려하기 시작하면서 미디어아트를 향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던 탓도 적지 않다.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미디어 예술가들의 단체인 ‘아트 테크 그룹’(김재권, 심영철, 김영진, 강상중, 송주한, 김윤, 이강희, 신진식, 공병연, 조태병, 박현기)이 창립되고, 강상중, 이윤, 김재권, 박현기, 신민규, 신진식, 심영철, 육근병, 오경화, 이강희, 조태병 등이 참여한 《테크놀로지의 예술적 전환》(국립현대미술관 1992) 등의 전시를 통해 해외의 최신 작품들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외에도 《미술과 테크놀러지전》, 《가설의 정원》, 《과학+예술》 등의 대형 전시가 개최되었고, 특히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때 백남준의 기획에 의한 《정보예술》전을 계기로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활동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비디오’라는 용어가 점점 사라지는 추세였으나 국내에서만 유독 비디오아트라는 말이 대세를 이룬 시기였다. (예를 들어 ‘ART INDEX’에서는 1971년부터 ‘video art’라는 주제 색인 용어가 새로 사용되었으나, 1989년 이후부터 ‘media art’가 이를 대신하게 된다.) 다시 말해 1990년대는 비디오아트의 가장 큰 확장의 시기이기도 했지만, 어느덧 아날로그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고, 디지털로 제작된 작품이 점점 많아지면서 멀티미디어 환경에서 제작, 재생되는 작품이 많아지는 추세에 있었다. 하지만 많은 국내 작가들의 작업 수단은 여전히 아날로그 편집이 주류였고, 대표적으로는 오상길의 경우와 같이 실험영화의 정신을 이어받은 작가들도 많았다. 오경화의 〈하늘, 땅, 사람들〉(1990), 김지현의 〈홈쇼핑〉(2000), 이용백의 〈기화되는 것들(포스트 아이엠에프)〉(1999-2000), 심철웅의 〈다변형 머리의 환영〉(1996), 박화영의 〈소리〉(1998), 김세진의 〈되돌려진 시간〉(1998), 박혜성의 〈골콘다〉(2000), 유비호의 〈검은 질주〉 등 비디오 혹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개성적인 싱글채널 비디오가 쏟아져 나온 시기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전술한 것처럼 작가가 미디어를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전용하거나 해킹하여 새로운 구조로 만들어낸 작품들이다. 한 시대에 폭넓게 보급된 미디어에는 가장 완성도가 높은 상태로서 전형적이거나 안전한 사용법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다익선〉에 있는 1000여 대의 TV는 그처럼 빼곡히 나열된 상태에서 혹은 눕혀진 상태로 사용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그렇게 사용할 것을 상상했었다면 기기 내부 방열판의 위치나 모양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미디어아티스트들은 이들 미디어를 원래 설계된 용도와 다르게 사용하거나 해킹한다.
먼저 설치작품에서 보자면, 나준기의 〈랑데부〉(1992), 안수진의 〈피드백〉 (1999), 문주의 〈시간의 바다〉(1999), 올리버 그림의 〈분당루프〉(1997) 등은 장치를 이용하여 이미지와 실재의 만남을 제어함으로써 비디오아트의 가능성을 크게 확장한 작품들이다. 그것은 박현기가 시도했던 것처럼, 실재와 허구를 하나의 새로운 인식의 틀로 구조화하는 설치작업이 다양한 장치, 설치로 구현되었던 점이다. 나아가 김해민의 〈TV해머〉(1992), 육태진 〈유령상자〉(1995) 등은 앞의 사례들과 같은 설정이면서도 기계적 연동으로 하나의 새로운 미디어를 창안한 것이라고 할 만하며, 그만큼 미디어아트로서의 개성과 표현의 독자성도 확고하다. 또 다른 유형은 미디어 장치를 개조하거나 재조립하여 새로운 이미지 장치로 전용하는 경우인데 이러한 사례는 한국에서 1990년대까지 잘 나타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공성훈의 〈추락〉(1996)은 스스로 제작한 슬라이드 프로젝터 12대를 사용한 작품인데, 이를테면 멀티슬라이드 프로젝션이란 기술은 시각 미디어의 발전사에서 소외되면서 지금은 거의 미디어 고고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야 될 장치가 되었지만, 당시 작가는 이 기술을 훌륭하게 구사해 개성적인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김영진의 〈액체-투명한 상실의 그림자〉(1995~2008)도 작가의 꾸준한 연구를 통해 고안된 프로젝터로 실시간 프로젝션으로서는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장치이며, 그 예술적 연출력도 뛰어나다.
공성훈 〈비행〉 핸드메이드 슬라이드 프로젝터_1990년대 한국 비디오아트의 유형 중 하나는 기존에 생산된 미디어 장치를 개조, 재조립해 새로운 이미지 장치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당시 회화 전공 후 공대로 재입학한 공성훈은 자체 제작한 슬라이드 프로젝터로 ‘멀티슬라이드 프로젝션’이라는 고유한 이미지 프로세싱을 고안해냈다. 다수의 프로젝터가 분절된 신체의 이미지 슬라이드를 빠른 속도로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공성훈의 ‘멀티슬라이드 프로젝션’과 김영진의 ‘실시간 프로젝션’은 매우 드문 케이스로 남았지만, 1990년대 후반은 빔 프로젝터가 성능과 가성비의 향상을 토대로 예술가를 위한 도구로 전용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때부터 나타난 새로운 경향은 때마침 성능이 향상되어 보급되기 시작한 비디오 빔 프로젝터가 전시장에 들어오면서 미디어아트의 전시 양상이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박현기는 1997년 이후 전시장의 천장에서 바닥 혹은 바닥에 놓인 오브제에 영상을 투사하는 〈만다라〉, 〈무영탑〉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리고 김창겸은 실물 오브제 위에 투사한 영상으로 ‘오브제와 이미지의 정교한 정합(整合)’을 실현해냈다. 〈Water Shadow〉 연작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설치작업에서 그가 실현한 가상과 실재 공간이 ‘영상이라는 피부를 입은 오브제처럼 절묘하게 봉합된 리얼리티’는 관객으로 하여금 실재와 허상 사이에서 길을 잃게 만든다. 작가는 우리들을 이 ‘만남‘의 사이로 끌어들이고 그 틈과 차이를 읽어내도록 유도하는데, 실제로 관객이 만나게 되는 것은 실재와 허상의 교차에 의해 환기되는 합성된 리얼리티의 다양한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박현기의 〈무영탑〉의 연출방법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구자영의 작업은 이전부터 ‘실재와 가상’, ‘존재와 허상’의 경계를 애매하게 만드는 데서 출발해왔다. 그의 연작 <창문>(1998)은 사물의 영상이 그 피사체, 즉 대상 위에 반복 투사되면서 마술처럼 겹겹이 중첩된 상(像)이 만들어내는 실상과 허상의 미로에 선 관객으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들고, 그들의 의식은 제3의 공간 즉 사이 공간(interspace)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1999년에는 서울시가 본격적으로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을 기획, 이듬해 미디어아트비엔날레(2000)가 처음으로 개막한 후, 지금까지 7회에 걸친 행사를 치르면서 세계적인 대규모 미디어아트 전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또 민간에서는 미디어아트 전문기관을 표방하는 ‘아트센터나비’가 1999년에 개관하여, 국제적인 미디어아트의 허브로 상설 운영되고 있다. 2000년 문예진흥원에서 발간한 문예연감에서는 그동안 주류가 아닌 실험예술의 한 유행으로 간주해왔던 미디어아트를 미술의 주류 장르 중 하나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즈음에서 국내에서도 비디오아트라는 용어는 사용 빈도가 줄어들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기
이상에서 보았듯이 한국의 비디오아트는 주변 환경의 빈곤함 속에서 미미한 흐름을 지탱하면서도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해왔고, 뉴미디어와 정보화라는 시대적 세례를 받으면서, 또 백남준이라는 기연(奇緣)을 만나며 성장, 확장되어 왔다. 그리고 ‘비디오’ 그 자체를 예술적 표현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독자적인 미학을 추구했던 작가들이 (백남준을 제외하면) 거의 미술대학 출신들이었고, 그 때문에 초기 한국의 비디오아트는 미술의 확장이라는 문맥에서 수용되고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의 ‘미디어아트‘에는 영화, 음악, 연극, 인문학 등 미술 이외의 전공자들이 많아지고, 이런 경향은 2000년대 이후에 더욱 뚜렷해져 기술, 과학, 철학 등 학제 간 교류 양상도 선명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융합과 통섭이 궁극적으로는 가시화를 매개로 했을 때, 비로소 수월해지거나 가능해진다는 점이 매우 주목할 만하다. 즉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있거나 있다고 믿거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모든 현상을 가시화하는 일이야말로 시각예술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의 토대라고 생각되며, 비디오아트에서와 같은 탐구열이 새로운 장에서 계속되어야 할 것임을 시사한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