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 동향

나는 그것을 바라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의 일부이다.

posted 2021.05.04


김주옥


사진과 영화로 대표되는 아날로그 미디어 이후 우리는 디지털미디어를 통해 (뉴)미디어아트를 만났고, 그 후 프로덕션 매핑, 미디어파사드 등 여러 미디어 기술을 예술 안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최근 여러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실감형 콘텐츠는 관람자의 촉각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 혼합현실(MR, Mixed Reality)을 체험할 수도 있게 하며 현실과 가상이라는 용어로 존재하던 것들을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게 만들었다.1)


얼마 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ㄱ의 순간》 전시에서 유독 많은 관람객이 머물러 북적거리던 방을 보았다. 그곳에는 강이연 작가의 〈GATES(분)〉 작업이 실행 중이었고 사람들은 스크린 막을 둘러싸고 4면의 벽, 바닥, 천장 등을 고루 주목하며 피부를 타고 움직이는 이미지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몸소 체험한다’라는 말이 이렇게 촉각적일 수 있는지, 그리고 체험한다는 것이 이토록 오감을 자극하는일인지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이미지는 내 몸을 감싸기도 하고 나에게서 멀어지기도 했다. 나의 신체는 그 프로젝션 된 이미지를 통해 변화했고 나는 그 공간 안에 놓여 왔다가 머물다가 다시없어지는 반복되는 동적 이미지를 통해 내 신체의 일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 움직이는 이미지는 이내 공간까지도 변형시켰다. 그러한 작용은 공간 일부분을 주목하게 했고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그곳에서는 하나이자 여러 개의 공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나이자 여러 개인 공간, 그리고 그 속에 놓인 내가 변화하는 경험 속에서 우리는 여러 층의 레이어를 가진 멀티-스페이스, 다중우주를 느낀다. 여기서 필자는 ‘내가 공간에 놓인’ 경험을 한 것이다. 이것은 미디어의 특수한 기술적 요소와 형식적 측면을 논하는 문제를 벗어나 내가 작품을 감사하는 또 다른 태도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보는 것과 내가 그 공간에 놓인 것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강이연 〈GATES〉 프로젝션 매핑 설치, 듀얼스크린 가변크기 5분 10초 2020 〈ㄱ의 순간〉(2020.11.12~2.28,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시 전경. 사진제공 월간미술.

강이연 〈GATES〉 프로젝션 매핑 설치, 듀얼스크린 가변크기 5분 10초 2020 《ㄱ의 순간》(2020.11.12~2.28,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시 전경. 사진제공 월간미술.

그동안 우리가 작품을 감상할 때 내 앞에 놓인 작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뉴)미디어아트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작품과 내가 상호작용(interaction)하는 체험을 했다. 이처럼 지금까지 관람객은 작품이라는 대상과 분리되어 그것을 바라보거나 그것과 내가 교류했던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강이연 작가의 작업은 기존의 프로젝션 매핑의 형태를 보이지만 공간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그 시시각각 달라지는 공간 속에 우리를 위치시킨다. 이 경험에서 우리는 프랑수아줄리앙(Francois Julien, 1951~)이 저서 《풍경에 대하여-풍경으로 살아가기, 또는 이성이 지나친 것》2) 에서 ‘풍경’과 ‘산수’를 비교하며 동서양의 사유체계를 비교문학적 시선에서 분석한 대목을 떠올린다. 우선 줄리앙은 유럽적 사고에서 풍경에 ‘대하여’ 사유하게 된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했는데 그는 어떤 것에 ‘대하여’ 사유한다는 것은 이미 ‘주체’와 ‘대상’이 구분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또한 풍경을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해석하는 것, 풍경은 시각적 작용이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모양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생각도 서구의 풍경에 대한 사유 방식이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해체된 모습을 중국에서 고대 풍경을 사유하는 태도를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 중국에서는 ‘풍경’이라는 말 대신 그것을 산수(山水) 또는 산천(山川)이라 부르며 세상을 긴장상태에 들게 만드는 근본적인 극성(極性)과 관련함을 말해 준다고 보았는데, 다시 말해 줄리앙이 말하고자 하는 풍경에 ‘대한’ 사유는 과연 이 주체-대상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관한 물음이다.3) 그래서 그는 이 책을 통해 풍경에 ‘대하여’ 말한다는 표현은 다분히 주-객, 주체-대상을 나누는 사고라고 보는 것이다.4)


그렇다면 시각과 사유의 이분법이 해체되는 순간은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될까? 이는 흡사 강이연 작가의 〈GATES〉 작업에서 보이는, 전시 공간 한가운데에 놓인 스크린 막을 통해 이미지가 프로젝션 되고 그것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비물질이라는 컴퓨터상의 데이터가 물질화되는 변환을 의미할 수도 있다. 비물질과 물질을 오고 가며 양극이 하나이자 동시에 물로 분리되었다가 합쳐지면 주-객과 주체-대상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기도 하다.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분법적 분리 속에서 형성된 서양의 풍경 개념은 르네상스 시대 회화와 함께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지평선으로 구분되는 풍경은 ‘바라보기’와 표현대상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볼거리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일찍이 중국에서는 풍경을 산수로 부르며 이는 나와 자연이 분리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 ‘바라보는’ 대상이 아닌 자연이 나의 일부로서 나와 자연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과 나는 함께 태어난다”라고 말한 장자(莊子)의 말처럼 나와 세상은 공동의 자연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존재와 나는 하나라고 보는 견해이다. 또한 맹자(孟子)는 모든 존재는 나와 연루되어 다시 나타나 합의로 표현된다고 보았다. 이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지워 버려 우리의 휴머니즘에 대한 개념을 무너뜨린다.5) 풍경은 내 안에서 만들어지며 나 또한 풍경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떄문이다.6)


‘실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작업의 체험은 마치 물아양망(物我兩忘)과 물아일체(物我一體)와 같이 내가 공간에 놓이며 동시에 나의 몸이 스크린의 막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이미지가 나의 몸을 타고 움직이며 나의 몸은 계속해서 달라지고 나는 더는 그것을 보지 않고 그것의 일부가 되는 체험과 같다. 또한 기존 회화에서 이미지가 놓인 액자 속 공간은 에르곤(ergon)이고 그 액자 경계 밖의 부분은 파레르곤(parergon)이었다. 하지만 〈GATES〉작업의 공간 안에 놓인 스크린 막은 앞과 뒤의 구분을 불명확하게 하고 프레임의 경계를 해체한다. 계속해서 에르곤과 파레르곤의 영역은 변하고 합쳐지며 해산되고 이 둘은 교모하게 연합하여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지고 내 오감, 특히 촉감을 통해 몰입하는 경험을 하게 하는데 이러한 체험을 통해 만들어 낼 수 있는 사유는 그 사유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행위를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무언가를 바라보려 하지만 이미 내가 그 안에 있으므로 나는 그것을 바라볼 수 없다. 나는 그것의 일부가 되었고 실상 존재함을 느끼지만, 그 존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계속해서 나를 통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1)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디지털 실감 영상관(www.museum.go.kr/site/main/content/ digital_realistic)을 운영하며 문화유산을 소개하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멀티버스(Multiverse)’라는 다원예술 퍼포밍아트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멀티버스〉는 올해 2월에 시작하여 12월까지 진행될 예정인데 이미 사전예약이 모두 완료되어 관객들의 관심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확인할 수 있다.
2)이 책의 원제는 ‘Vivre de paysage ou L'impensé de la Raison’이고 2014년에 프랑스 Edition Gallimard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리고 2016년에 한국에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프랑수아 줄리앙, 《풍경에 대하여 - 풍경으로 살아가기, 또는 이성이 지나친 것》, 김설아 옮김, 아무르문디, 2016.
3) 위의 책, p. 19.
4) 풍경을 통한 비교문학적 분석은 필자가 오현경 작가의 〈운포구곡가〉(2017), 〈수취인불명〉(2017)과 〈불 - 온전한 풍경〉(2018) 작품을 비평하면서도 썼던 방법이다. 오현경 작가가 풍경을 다룬 비디오 작품에서도 이러한 주체와 객체,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지점을 설명할 수 있다. 바라보는 관찰자적 주체가 아닌 나로 인해 만들어지는 경험적 형태의 공간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동서양의 시각적 체계를 통한 사유 방식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5) 위의 책, p. 230.
6) 위의 책, p. 229.


※ 이 원고는 월간미술 2021년 3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월간미술과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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