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예사롭지 않은’ 무더위를 접하면서 우리는 지구의 미래를 더욱 걱정하게 됐다. 지구에서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지구 종말을 가리키는 시침이 점점 빨라져 파국이라는 운명의 시각에 다다를 것이라는 우려감이 초절정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경고하고 비판하는 여러 목소리가 있다. 사회 각계각층 그 누구도 표면적으로는 이를 외면하지 않는다. 하지만 메아리처럼 이내 사그라든다. 그러나 예술, 그중 미술, 그중에도 사진은 지금을 가장 적나라하게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때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다가도 비유와 은유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원인을 고찰하고 미래를 예언한다. 환경문제를 언급할 때 한 마디 구호보다 더 강한 시각적 충격파를 던지는 사진 장르가 갖는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르포와 창작, 그 사이에서 가장 크고 거대한 공명을 일으키는 장르라 하겠다.
《월간미술》은 환경문제를 주제로 한 사진 작업을 선보인다. 11인의 작가는 각자의 방법으로 환경문제를 주제로 구현하고 있다. 최근 환경문제를 사진 작업을 통해 공론화하고 이를 아카이빙 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아카이브 사이트(ecophotoarchive.org)를 구축한 재단법인 숲과나눔 이사장 인터뷰를 통해 예술이 어떻게 환경문제를 고민하고 있고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도 살펴본다. 이번 기획에 참여한 한 작가의 말대로 환경문제는 우리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의식은 행위를 할 때 해결될 수 있다. 지구가 보내는 경고는 결국 우리 인류가 이전부터 스스로에게 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경고의 위임자를 자처한 사진의 프레임을 들여다본다.
글 최연하 EcoPhotoArchive기획자
몇 년 새 세계 문화예술계의 화두는 단연 ‘환경’과 ‘인류세’였다. 특히 COVID-19이 초래한 팬데믹은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가 인류 생존과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며 환경문제를 모두의 과제로 부각했다. 과제이긴 하지만 너무 광범위하고 해법이 제각각이어서 수행이 막연하기만 한 그야말로 ‘숙제’가 돼버린 환경문제. 필자는 이 글을 준비하며 환경을 주제로 작업하는 작가들과 ‘카톡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른바 환경 미술, 환경 사진을 생각하면 어떤 주제, 소재가 떠오르나요?”라는 물음에, “해양쓰레기, 빙하, 북극곰, 펭귄, 후쿠시마, 미세먼지, 새만금, 사대강”이란 응답이 중복적으로 나왔다. 미디어에 자주 노출된 환경 이슈였고, 작가들의 최근 작업에서 중첩되어 드러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환경 사진의 소재로 이미 익숙해진 사진-이미지로 고착된 것이다. 작품이 친숙해지면 관객은 더는 해석을 하지 않고, 단선적인 해석에 그치거나, (해석의)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기이한 상황에 봉착한다. 우리가 환경을 다룬 시각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지금! 모색해야 하는 이유다.
환경문제는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굉장히 다양한 이슈와 연관되어 있다. 빙산의 가시적인 형태에 비유하자면, 기후위기는 빙산의 일각이고 그 밑에 환경 정의, 사회정의를 비롯한 정치·경제 시스템과 불평등, 여성 문제… 등이 견고하게 뿌리를 내린 형국이다. ‘환경(environment)’이라는 말이 인간을 중심으로 주변의 모든 것과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니 환경을 둘러싼 문제 또한, 모든 것과의 관계망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놀랍게도 환경의 ‘중심’에는 바로 **“인간”**이 있고 그 주위에 존재하는 자연과 사물 등은 인간의 주변적 대상으로, 세계의 **“주체”**인 인간의 위치를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와는 결이 조금 다른 ‘생태학(ecology)’이라는 용어를 살펴보자. ‘ecology’에서 접두어인 에코(eco)의 어원은 ‘오이코스(oikos)’로 ‘집, 가정, 경제(economy)’를 의미한다. 풀이하자면 집의 경제(살림)를 살피는 것이 ‘에콜로지(ecology)’인 것이다. 에콜로지를 한자어로는 우주(宇宙)로 번역할 수 있겠다. 우주(宇宙)는 ‘집’을 뜻한다. 동양 사람들은 우주의 삼라만상이 한 지붕 아래 존재한다고 여긴 것이다. 에콜로지(ecology)와 우주(宇宙)는 인간의 삶의 터전인 ‘살림 공동체’을 살리고 돌보게 하는 생태학적 상상력이 시작되는 귀한 지점이다.
관련 용어를 살펴본 이유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환경(운동)단체 수만큼 그리고 생태학자의 수만큼이나 환경과 생태학에 대한 견해와 주장이 분분한 상황을 단적인 예로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생태학적 입장이 천차만별이지만 크게 두 개의 입장으로 정리하면 첫 번째, 인간이 환경의 중심이니, 당연히 인간에게 유리해야 하고, 주변의 자연환경은 덜 파괴되는 가운데 ‘지속가능’한 ‘녹색성장’을 위해 ‘친환경적’인 가치관으로 자연-환경-대상을 바라보자는 표층 생태학(shallow ecology)적인 입장이 있다.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관점이다. 또 한편에는 ‘생태 중심적’인 입장을 들 수 있다. 생태계(eco-system)의 원활한 유지를 위해서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땅과 강, 바다를 포함) 간의 상호관계를 살피며 지구-유기체 환경을 돌보려는 입장이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이 모든 문제(두 차례의 전쟁과 자본주의 문명의 팽창, 거대한 산업 중심의 생산체제로 전환 등)가 비롯되었으니, 인간/자연, 인간/동물의 이분법적인 대립을 해체할 뿐만 아니라, 남성/여성, 부자/빈자, 강자/약자… 등으로 분리하여 ‘자연스럽게’ 자연 지배를 정당화했던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자는 것이다. 지배 구도를 해체해 억압받던 소수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인간 또한 생태계의 일원일 뿐이니 자연과 관계를 새롭게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태 중심적인 입장은 인간 중심적 가치관이 일으킨 병폐들을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는 인간에 의한 인간지배로부터 비롯된다’(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고 지적할 정도로 급진적이기도 하다.
표층생태주의, 심층생태주의, 마크르스생태주의, 여성생태주의, 사회생태주의, 급진생태주의, 에너지생태주의, 이상주의생태주의… 등 많은 생태 ‘주의(~ism)’는 공통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생태적인 조화와 공존에 주목한다.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단어, ‘조화’와 ‘공존’은 개별 주체가 ‘생태적인 가치’를 내면화하지 않으면 실체가 모호하고 애매해서 실천의 불가능을 낳기 마련이다. 환경운동가들이 정치적인 운동 방향을 상정하고 구체적인 구호를 외치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생태적으로, 지구의 문제를 전지구적으로 상상하고, 동조하고, 연대하는 데 ‘예술실천’만한 힘을 필자는 이제껏 보지 못했다. 시끄러운 구호보다 한 컷 사진의 고요한 힘, 나의 일상을 영위하는 데 환경문제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기에 당장 생각하지 않았지만, 예술작품을 통해 ‘내가 타자이고 다른 존재가 나’임을 알 수 있는 깨달음의 시간을 비로소 갖게 된다. 나와 세계가 관계 맺는 방식을 달리하는 데 예술은 엄청난 뇌관의 역할을 한다. 궁극의 깨달음에 닿으면 세상에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 구체적인 자기 윤리가 생성되기에 생태의식을 형성하는 데 (아주 무용(無用)한 방식으로) 예술은 더욱 유용(有用)하다.
예술가들은 들리지 않는 《무당개구리의 울음(The Call of the Toad)》(귄터 그라스)2)을 녹음하고, 세상의 슬픔에 안테나를 세우며 지금의 위기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한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거나 사라진 것을 가시화하기 위해 예술가들은 기록을 멈추지 않고 재현하고 상상하고 예측한다. 최근에 오픈한〈에코포토아카이브〉(재단법인 숲과나눔 제작)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업을 보면서 그들의 생태학적 의식이 어떻게 구현됐는지 살펴보면 나와 세계의 연결망을 다시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선희는〈묻다〉시리즈에서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로 살처분된 동물들을 파‘묻은’ 것에 대해 ‘묻고’ 있다. 그 방식이 아주 은밀하고 조심스러워 한참을 들여다보게 한다. 천만 이상의 생명이 눈을 뜬 채 생을 다한 4,700곳의 불온한 땅에 피어난 애도의 무늬, 지금은 사라진 동물의 삶의 시간을 끔찍한 무늬로 제시한다. 찰스 패터슨이 《동물 홀로코스트》3)에서 “동물과의 관계에 대해서 인간은 모두 나치다.”라고 한 말은 옳다. 찰스 패터슨은 허먼(M.Hermen)의 말을 빌려 이렇게 기술한다. “인간은 모든 생물종 가운데 최악의 범법자인 자신들이 창조의 제왕이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인간이 아닌 동물(Nonhuman animal)과 인간인 동물(human animal)과의 윤리적 관계에 대해 문선희는 참담하게 질문을 던진다. 생태계에서 다른 종을 멸실시키는 존재는 ‘인간인 동물’이 유일할 것이라고.
강홍구와 박부곤, 박형근은 ‘땅의 윤리’를 제시한다. ‘땅의 윤리’는 환경윤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의 환경주의자, 알도 레오폴드(Aldo Leofold, 1897~1948)의 대표 저서인 『샌드 카운티에서의 일년(A Sand County ALMANAC)』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 책은 미국의 환경운동사에서 중요한 기폭제가 되는데, 레오폴드가 토지에 대한 윤리적 고려의 중요성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땅을 단순한 소유 재산이 아닌 생태학적 대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 ‘정복자로서의 인간’이 ‘경제적 자원’으로 이용하기 위해 ‘소유한 상품’으로서의 토지가 아니라 토지를 다른 동식물, 토양, 물 등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 공동체’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지-땅을 사랑과 존중으로써 대할 때, 인간과 자연 간의 사회적 통합 혹은 공동체 의식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레오폴드가 살아서 21세기 도시 재개발과 난개발을 기록한 사진들을 보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강홍구는〈그린벨트〉,〈오쇠리 풍경〉,〈사라지다: 은평 뉴타운에 관한 어떤 기록〉,〈안개와 서리〉, 〈녹색연구〉등 일련의 풍경연작을 통해 인간이 만든 마을이 다시 인간에 의해 폐허가 되고 사라지는 풍경을 씁쓸하게 제시한다. 박부곤은 국토 개발의 현장을 주로 대형카메라 장노출로 촬영한다. 땅이 경험하고 기억한 수많은 자국을 기록하기 위해 필요한 프로세스였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땅속에는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꿈이 숨 쉬고 있을 것이다. 파괴와 생성을 거듭하는 땅의 현재와 땅속에 매장됐을 과거의 도시를 사유하게 하는 작업이다. 박형근은 시화 방조제 공사와 간척사업으로 초래된, 보이지 않는 생태계의 교란과 지형의 변화를〈Fishhooks〉연작에서 보여준다.〈만안(萬安)〉프로젝트는 뉴타운 개발로 멸실될 위기에 처한 안양시 만안구의 ‘결코 편안하지 않은’ 주거환경과 일상을 기록했다.
〈에코포토아카이브〉에서 구축한, 지구촌 모두 엮인 당장의 문제, COVID-19에 대한 기록을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원인이 증명되지 않은 가운데 지난 2020년 2월 이후 전 세계를 동결시킨 팬데믹은 우리에게 총체적인 과제를 던졌다. 새로운 형태의 관계 맺기 방식인 온택트(On-tact) 문화, 택배(deliver)노동과 그로 인해 플라스틱 쓰레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점, 코로나시대에 필수품이 돼버린 플라스틱 섬유로 만든 마스크는 일주일에 2억 장 넘게 버려지며 미세플라스틱 문제의 주범으로 등극했다. 코로나를 겪으며 새로운 타자 구성과 접촉공간의 변모에 대한 생태적인 성찰을 하게 되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를 촬영한 작가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주목했다. 코로나 재난으로 더욱 가속화된 변화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고정남은〈Personal Life〉에서 혼자 여행하고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더는 타자와 대화하지 않고 스킨십(Un-tact)도 없이 ‘혼자놀이’에 빠진 기이한 풍경이 고정남의 사진 속에서 펼쳐지는 가운데, 홀로, 외롭게, 나무에 의지한 노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오석근은〈창밖의 풍경만이 내가 볼 수 있는 세계라면〉을 통해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스마트폰을 비롯한 PC를 매개로 만날 수밖에 없는 풍경을 제시하고 있다. 가상공간과 가상관계망으로 이뤄진 비대면 공간은 씁쓸하기만 하다.
사진의 기록성과 사실성에 주목한 사진가들의 작업은 사진의 가치를 새삼 일깨운다. 이상일은〈메멘토 모리〉시리즈를 통해 한국 최초의 공해병 발생지역이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환경오염에 따른 주민이주사업이 시행된 온산공단과 그 주변 마을을 불안정한 구도, 흑백 사진의 거친 입자, 강한 콘트라스트로 보여주며 ‘온산병’의 주범인 환경오염 폐수가 농축된 것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 갇힌 먹먹한 사진을 만들었고, 지성배는〈공장지대〉시리즈를 통해 거대 산업사회의 공장 시스템 속에서 (노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기계부품처럼 보이게도 하지만 결국 인간 존재의 따뜻한 복원을 시도한다. 정주하는 한국 원자력발전소의 실태를〈불안, 불-안〉(2003~2007년) 시리즈에 담는다. 불(火)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불안’한 삶의 형태를 보여주며 원전의 위태로움을 제시했다. 이후〈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2011~2012년)에서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의 풍경을 마치 ‘포스트 묵시록적 풍경(Post-apocalyptic Landscape)’처럼 적막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황규태는 예술계에서 아직 환경위기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1960년대에 지구에 닥칠 환경문제와 재난 상황을 예술적인 상상력으로 통찰하며 ‘오래된 예언’을 했다. 1960년대에 작품 창작의 프로세스로 몽타주기법과 필름을 태운 후 인화한 ‘버노그래피(Burnography)’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원자폭탄’과 ‘AI’와 ‘지구온난화’ 같은 주제를 직접 찍을 수(표현할 수) 없었기에 새로운 형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작가는 초기부터 현재까지, 새로운 사진 형식에 급진적인 메시지를 담아 인류에게 닥칠 일들을 예언해 왔다.
지면의 한계상 많은 작가, 작업을 소개하지는 못했다. 이 글의 요지는 예술가들의 생태학적 상상력과 생태의식을 담아낸 예술 창작 활동이, 의무와 책임이 중요한 환경윤리에서, 이제는 의무가 아닌 ‘돌봄과 상생’으로 나아가는 데 부드럽고 특이한 힘을 발휘할 것이고, 그 힘을 연결하고 확장하는 데 예술실천이 무엇보다 귀함을 강조한다. 그것이 곧 생태 중심적인 실천인 것이다. 타자와 대립 대신에 관계성을 회복하고, 권리와 의무 대신에 자연-환경-세계에 대한 배려와 돌봄, 우정과 실천적 지혜를 쌓는 것. 산처럼 생각하고 다시 연결할 때이다. 왜냐면, “이 문제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닌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소크라테스)
1)로버트 베이트먼의 책, 《산처럼 생각하기》에서 가져온 타이틀이다. 로버트 베이트먼은 이 책에서 “우리가 만약 산의 입장에서 시간과 공간을 바라볼 수 있다면,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우리는 더 멀리, 더 넓게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며, 지구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산들이 생겨나는 그 과정을 늘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더 많은 존경심으로 자연계를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에서 바라보는 풍경〉 중에서
2)귄터 그라스(Gunter Grass)의 책 《무당개구리 울음(The Call of the Toad)》에서 무당개구리는 수질이 깨끗한 곳에서만 서식하므로 수질 오염을 측정할 때 기준이 된다. 문명화로 인한 자연파괴를 경고하는 존재이다.
찰스 패터슨(Charles Patterson)(2002). 〈Eternal Treblinka: Our Treatment of Animals and the Holocaust〉. 정의길 옮김(2014). 《동물 홀로코스트》. 서울: 도서출판 휴.
사진, 지구를 대신하여 인류에게 경고하다 - (2)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사진, 지구를 대신하여 인류에게 경고하다 – 작가 11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