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 동향

사진, 지구를 대신하여 인류에게 경고하다
- (2)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posted 2021.12.20


올여름 ‘예사롭지 않은’ 무더위를 접하면서 우리는 지구의 미래를 더욱 걱정하게 됐다. 지구에서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지구 종말을 가리키는 시침이 점점 빨라져 파국이라는 운명의 시각에 다다를 것이라는 우려감이 초절정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경고하고 비판하는 여러 목소리가 있다. 사회 각계각층 그 누구도 표면적으로는 이를 외면하지 않는다. 하지만 메아리처럼 이내 사그라든다. 그러나 예술, 그중 미술, 그중에도 사진은 지금을 가장 적나라하게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때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다가도 비유와 은유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원인을 고찰하고 미래를 예언한다. 환경문제를 언급할 때 한 마디 구호보다 더 강한 시각적 충격파를 던지는 사진 장르가 갖는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르포와 창작, 그 사이에서 가장 크고 거대한 공명을 일으키는 장르라 하겠다.


《월간미술》은 환경문제를 주제로 한 사진 작업을 선보인다. 11인의 작가는 각자의 방법으로 환경문제를 주제로 구현하고 있다. 최근 환경문제를 사진 작업을 통해 공론화하고 이를 아카이빙 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아카이브 사이트(ecophotoarchive.org)를 구축한 재단법인 숲과나눔 이사장 인터뷰를 통해 예술이 어떻게 환경문제를 고민하고 있고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도 살펴본다. 이번 기획에 참여한 한 작가의 말대로 환경문제는 우리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의식은 행위를 할 때 해결될 수 있다. 지구가 보내는 경고는 결국 우리 인류가 이전부터 스스로에게 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경고의 위임자를 자처한 사진의 프레임을 들여다본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강홍구, 작가


편집자로부터 주문받은 글의 주제는 환경 사진의 여러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환경 사진에는 왜 예측 가능한 작품들만 주로 눈에 보이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관해서였다. 하지만 글을 쓰려다 보니 이는 환경 사진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진, 혹은 미술 전체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문에 글의 내용은 점점 범위가 넓어져 사진과 미술의 현재 상황과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먼저 사진 혹은 미술을 직업으로 삼은 작가와 작업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작가를 직업으로 삼을 때 무엇보다 작품을 판매하거나 관련된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게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너무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작업을 해서 먹고 사느냐 아니냐는 작업을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다르게 만든다.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건 좋은 일이지만 작업에 대한 치열함은 감소하기 마련이다. 물론 함정은 늘 있다. 먹고살기 위해서 작업으로 구매자들에게 아부하거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마도 직업으로서의 작가는 진짜 프로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의 하나이다.
또 쓸만한 프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작업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런 인식 능력이 없다면 좋은 작가가 되기 어렵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미술이나 사진의 역사, 우리를 둘러싼 지금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상황으로 이루어진 좌표, 혹은 인식론적 지도를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그 위에 자신과 작업의 위상, 목적, 방향 등이 어떤지를 정확히 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사진에 관한 몇 가지 명사를 나열해보자. 제주 4·3, 광주 5·18, 분단, 디엠지(DMZ), 소나무, 도시 재개발, 일상, 코비드19, 꽃, 노인, 환경, 고궁, 장승, 문무인석, 역사, 아줌마, 아저씨, 어머니, 동물··· 등등의 단어들을 보면 어떤 사진이 떠오르는가? 당신은 그런 사진들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가령 제주도를 찍는다면 4·3, 제주 자연 풍경, 바다, 중산간, 해녀, 곶자왈 등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아니면 같은 소재를 다루었다 해도 확실히 남과는 다른 자신만의 해석과 개별적인 시선이 유지되고 있는가? 그것은 일종의 자뻑 수준이 아니라 여러 사진을 같이 뒤섞어 걸어 놓아도 단박에 눈에 띄는 수준인가 아닌가? 그냥 손쉬운 예로 제주를 들었을 뿐 다른 대상들도 마찬가지다.


사진을 찍는 일은 쉽거나 쉬워 보이지만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거나 의미 있게 하는 일은 지극히 어렵다. 우리 시대의 다른 문제를 다룬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청년 문제, 건설 노동자와 하도급 노동자의 삶과 죽음에 관해서는 어떤가? 이런 첨예한 문제들에 관해 사진 혹은 사진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잘해야 문제가 생기면 현장에 가서 찍는 여러 사진가 중의 하나, 혹은 항의 시위와 대책회의 등의 갈등 현장만 찍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 말해 문제가 잠재되고 발생하는 현장에는 접근할 생각도 없고 하지도 못하는 것 아닌가? 내가 본 청년의 어려움과 문제를 거의 직접적으로 다룬 작업은 극히 드물다. 많은 사람이 영화 ‘기생충’을 언급했지만 청년들과 소외된 사람들의 주거 상황에 관해서는 뉴스에도 자주 나오는 쪽방촌 정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깊이 있게 탐사하지도 보여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문제의 당사자인 젊은 작가들이 찍은 사진의 상당수는 애매모호한 감상적 시각이 감성이라는 이름 아래 일본이나 서구의 어떤 작품들과 유사한 분위기로 연출되고 찍힌 경우가 너무 많았다.
환경, 해양환경 문제 등을 다룬 사진에서도 끝없이 클리셰가 되풀이된다. 해양 쓰레기, 북극이나 남극의 얼음과 그것이 녹는 풍경 등이 새로운 시선도 감동도 없이 작가만 바뀌어 촬영되고 전시된다. 편집자가 내게 글을 주문하면서 말한 ‘훌쭉해진’ 북극곰 사진 등은 사실 사진계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걸 찍는 것은 위험도와 예산 면에서 상당한 규모의 후원이 없으면 개인이 시도하기 쉽지 않아서다. 아마도 자주 눈에 띄는 것은 많지 않은 사진이 거듭해서 노출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른바 예술 사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새롭지 않은 시선과 더불어 사진에 대한 낡은 관습이나 믿음이 문제가 된다. 그런 믿음들은 대개 결정적 순간 따위의 외피를 쓰고 있다. 그 외피는 사실 사진사나 몇몇 유명 작가의 이론 따위를 방패 삼아 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종류의 관습이나 언명들은 깨부수거나 무시하라고 있는 것이지 추종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진 아닌 다른 미술 분야는 어떨까? 지금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설치나 영상작업은 뭔가 클리셰를 벗어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이번에도 몇 개의 명사를 살펴보자,
역사, 분단, 디엠지, 아카이브, 문서들, 정보의 집합, 한국적, 단색화, 열심히 그린 과일과 꽃, 디지털, 팝아트적 풍경, 표현주의적 인물, 불타는 예술혼, 사적 고백··· 따위의 단어들을 보면 어떤 작품과 작가가 떠오르는가? 사진의 현실과 크게 다른 게 있는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작품이 팔리는 작가들은 대개 비슷한 작업을 평생 하고 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젊은 작가들도 마찬가지여서 몇 점 보고 나면 더는 볼 필요도 없는 상품이나 제품이 된다. 물론 그것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지만.


아마도 가장 나쁜 경우는 우리나라의 고통스러운 역사나 현대사를 알리바이로 사용하는 경우일 것이다. 그런 알리바이는 대규모 기획전, 비엔날레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나는 고통스러운 역사를 다루었다. 그러므로 내 작품은 의미가 있다” 정도가 기본자세인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작업들에서 개인적 공감과 새로운 어떤 것을 만난 적은 극히 희귀하다.
비디오나 영상은 어떨까? 내 눈에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영상은 미술관 내에서 상영되거나 알려지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상 문법을 잘 알고 새롭게 보여주는 작업은 거의 없고, 진짜 경쟁상대인 영화나 다른 영상들과 벌이는 다툼에서는 게임이 되지 않는다.
설치는 어떨까. 설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빤해 보인다. 미술관이나 갤러리 밖에 나오면 안에서 본 것보다 훌륭한 설치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것은 물론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현실 안에서 더 훌륭한 설치, 사진, 영상과 그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사진이나 미술이 다시 시작해 볼 수 있는 바탕이 아닐까.


〈에코포토아카이브〉에서 구축한, 지구촌 모두 엮인 당장의 문제, COVID-19에 대한 기록을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원인이 증명되지 않은 가운데 지난 2020년 2월 이후 전 세계를 동결시킨 팬데믹은 우리에게 총체적인 과제를 던졌다. 새로운 형태의 관계 맺기 방식인 온택트(On-tact) 문화, 택배(deliver)노동과 그로 인해 플라스틱 쓰레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점, 코로나시대에 필수품이 돼버린 플라스틱 섬유로 만든 마스크는 일주일에 2억 장 넘게 버려지며 미세플라스틱 문제의 주범으로 등극했다. 코로나를 겪으며 새로운 타자 구성과 접촉공간의 변모에 대한 생태적인 성찰을 하게 되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를 촬영한 작가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주목했다. 코로나 재난으로 더욱 가속화된 변화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고정남은〈Personal Life〉에서 혼자 여행하고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더는 타자와 대화하지 않고 스킨십(Un-tact)도 없이 ‘혼자놀이’에 빠진 기이한 풍경이 고정남의 사진 속에서 펼쳐지는 가운데, 홀로, 외롭게, 나무에 의지한 노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오석근은〈창밖의 풍경만이 내가 볼 수 있는 세계라면〉을 통해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스마트폰을 비롯한 PC를 매개로 만날 수밖에 없는 풍경을 제시하고 있다. 가상공간과 가상관계망으로 이뤄진 비대면 공간은 씁쓸하기만 하다.


사진의 기록성과 사실성에 주목한 사진가들의 작업은 사진의 가치를 새삼 일깨운다. 이상일은〈메멘토 모리〉시리즈를 통해 한국 최초의 공해병 발생지역이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환경오염에 따른 주민이주사업이 시행된 온산공단과 그 주변 마을을 불안정한 구도, 흑백 사진의 거친 입자, 강한 콘트라스트로 보여주며 ‘온산병’의 주범인 환경오염 폐수가 농축된 것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 갇힌 먹먹한 사진을 만들었고, 지성배는〈공장지대〉시리즈를 통해 거대 산업사회의 공장 시스템 속에서 (노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기계부품처럼 보이게도 하지만 결국 인간 존재의 따뜻한 복원을 시도한다. 정주하는 한국 원자력발전소의 실태를〈불안, 불-안〉(2003~2007년) 시리즈에 담는다. 불(火)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불안’한 삶의 형태를 보여주며 원전의 위태로움을 제시했다. 이후〈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2011~2012년)에서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의 풍경을 마치 ‘포스트 묵시록적 풍경(Post-apocalyptic Landscape)’처럼 적막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황규태는 예술계에서 아직 환경위기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1960년대에 지구에 닥칠 환경문제와 재난 상황을 예술적인 상상력으로 통찰하며 ‘오래된 예언’을 했다. 1960년대에 작품 창작의 프로세스로 몽타주기법과 필름을 태운 후 인화한 ‘버노그래피(Burnography)’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원자폭탄’과 ‘AI’와 ‘지구온난화’ 같은 주제를 직접 찍을 수(표현할 수) 없었기에 새로운 형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작가는 초기부터 현재까지, 새로운 사진 형식에 급진적인 메시지를 담아 인류에게 닥칠 일들을 예언해 왔다.


잘 알다시피 미술, 사진의 일종의 초토화 뒤에는 당연히 돈이 있다. 그냥 돈이 아니라 거대 자본이 배후에 있다. 요즘 작가나 미술 관계자들을 만나면 상당수는 그냥 누가 얼마나 팔렸고, 잘 나가고, 누가 얼마나 많은 리베이트를 받았냐 하는 이야기가 고작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이 초토에서 벗어날까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즉 미술 혹은 사진은 초대형 국제 아트페어, 비엔날레, 미술관, 갤러리, Non-fungible token, 경매··· 즉 돈에 질식돼 있는 것이다.


작품의 질적 평가와 가격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즉 작업의 본질에 대한 언급과 평가는 거의 없으며, 비평가는 침묵하거나 거들고, 매매가 목적인 딜러와 우르르 몰려가 눈도 아닌 귀로 듣고 작품을 사는 투기꾼들이 있을 뿐이다.


국내외 모두 마찬가지인 이 질식 상태는 코비드19보다 훨씬 세서 감염 안 된 장소와 사람이 없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미술과 사진은 클리셰와 상업적 자본의 지배로 특징 지울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최근에 화제의 중심에 있는 NFTS 기반의 미술, 사진 작품 판매는 예술의 본질과 무관한 투기의 한 측면일 뿐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가상화폐-코인이라는 투기 상품의 미술 버전인 것이다. 아니다, 이 현상이야말로 사진과 미술의 본질이 투기 상품으로 변화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이제 사진과 미술을 이용해 예전 식으로 현실을 총체화하거나 한눈에 파악하려는 시도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뿐만 아니라 영향력도 흔히 말하는 예술성도 바닥을 쳤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사진, 혹은 미술이라는 매체의 생명이 지속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건 우리뿐 아니라 세계 전체가 그렇게 보인다. 옛날식의 세계적 작가나 작품은 소멸된 지 오래고 단지 세계적 시장과 팔리는 작가, 작품들이 있을 뿐이다.


사실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일종의 난센스다. 이미 이런 조류는 지구 온난화와 같아서 돌이킬 수 없어 보인다. 어쩌면 우리가 할 일은 아주 오래전 이성복이 1980년에 쓴 시처럼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를 생각하는 일이나 아닐지 모르겠다. 맨 먼저 할 일은 예전과 같은 사진과 미술의 위상이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리라. 그다음에 이 초토 위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나 아닐까?


숟가락은 밥상 위에 잘 놓여 있고 발가락은 발끝에
얌전히 달려 있고 담뱃재는 재떨이 속에서 미소짓고
기차는 기차답게 기적을 울리고 개는 이따금 개처럼
짖어 개임을 알리고 나는 요를 깔고 드러눕는다 완벽한
허위 완전 범죄 축축한 공포,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성복〈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의 일부


1)로버트 베이트먼의 책, 《산처럼 생각하기》에서 가져온 타이틀이다. 로버트 베이트먼은 이 책에서 “우리가 만약 산의 입장에서 시간과 공간을 바라볼 수 있다면,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우리는 더 멀리, 더 넓게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며, 지구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산들이 생겨나는 그 과정을 늘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더 많은 존경심으로 자연계를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에서 바라보는 풍경〉 중에서
2)귄터 그라스(Gunter Grass)의 책 《무당개구리 울음(The Call of the Toad)》에서 무당개구리는 수질이 깨끗한 곳에서만 서식하므로 수질 오염을 측정할 때 기준이 된다. 문명화로 인한 자연파괴를 경고하는 존재이다.
찰스 패터슨(Charles Patterson)(2002). 〈Eternal Treblinka: Our Treatment of Animals and the Holocaust〉. 정의길 옮김(2014). 《동물 홀로코스트》. 서울: 도서출판 휴.


※ 이 원고는 월간미술 2021년 11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월간미술과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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