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NFT 아트씬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필자는 2021년 초, NFT아트가 한국에 상륙하던 극 초기의 상황을 자세하게 서술한다. 그 발단은 음성 소셜미디어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작가들이 ‘집단 지성’으로 민팅에 성공하던 순간이었다. 그는 NFT아트를 ‘에펠 탑’에 비유한다. 준공됐을 때만 해도 기괴한 흉물로 취급받던 에펠 탑이 지금은 ‘전환기의 산물’로 꼽히는 것처럼, NFT아트도 새 시대가 도래한 증거일지 모른다. NFT는 과연 2020년대의 ‘랜드마크’ 아트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코로나19 시대의 도래, 암호 화폐의 부상, 그리고 디지털 페인팅을 기본 소양으로 탑재한 예술가 세대의 등장이 맞물려 탄생한 NFT아트는 미술을 둘러싼 환경과 미술시장의 움직임을 재편하고 있다. 이 메타버스 속 예술은 수많은 향유자에 의해 시간, 장소의 구애 없이 감상되고 소비되며, 빅뱅 후 급팽창한 우주처럼 빠르게 그 세를 불리는 중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인 2021년 1~2월, 입소문을 타며 인기를 끌고 있는 음성 기반 SNS 클럽하우스에 예술가,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그래픽디자이너, 소프트웨어 개발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곳은 NFT에 관심과 흥미를 가진 이들이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단절 속에서 NFT에 대해 함께 말하고 듣고 배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들이 클럽하우스에서 벌인 활동, 흐름은 한국 예술의 현재이자 한국 NFT아트의 시작이었다.
기존 가입자의 초대와 추천으로 입장할 수 있는 클럽하우스의 폐쇄성은 사용자 간의 신뢰를 조성했다. 애플리케이션에서 나눈 대화를 녹음하거나 다시 들을 수 없는 클럽하우스의 특수성은 사용자가 대화방에서 오고 가는 말과 주제에 몰두하게 했다. 이것을 기반으로 클럽하우스는 점차 ‘원시적 NFT 커뮤니티’로 작동해 갔다. 커뮤니티 구성원들은 스스로 길을 만들거나 관련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집한 뒤, 각자 알게 된 것들을 다른 구성원들과 자발적으로 공유하며 서로를 돕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이곳에서 발생한 시도와 시행착오가 문자화되고 이로 인해 생성된 텍스트가 누적되고 정제되면서 NFT 커뮤니티는 카카오톡 오픈 채팅으로 확장되었다. NFT 커뮤니티 구성원들은 클럽하우스 대화방과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을 오가며 NFT 관련 최신 정보, 노하우 등을 나누는 것은 물론, NFT 아트작업과 활동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한국에서 NFT아트로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클럽하우스에 초대받지 못한 예술가들의 NFT아트 진입을 촉진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한국의 NFT예술가들은 마치 학창 시절 갓 발매된 신작 게임의 정보와 공략법을 친구들과 공유하며 해당 게임을 반 전체에 널리 알리듯 NFT아트를 전파했다. 그들에게 NFT아트는 도전해볼 만한 놀이였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대다수의 주류 예술가에게 NFT아트는 이해 불가한 대상, 터무니없고 어처구니없는 비현실이었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NFT아트는 말이 안 된다. 컴퓨터에서 언젠가 그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 아니냐.”라고 말하며 NFT아트를 “사기”라고 비난했다.
한국 NFT 아트씬의 태동
반면 한국의 회화작가 이윤성은 클럽하우스, 카카오톡 오픈 채팅 등 한국 NFT 커뮤니티가 성립된 초기부터 활동하며 국내 NFT아트의 흐름을 이끌었다. 그는 특정 갤러리에 소속되지 않았기에 독립적 활동이 가능했고, 이는 창작자 스스로 작업을 기획하고, 만들고, 홍보하고, 판매하는 NFT아트의 특성과 맞아떨어졌다. 이러한 배경이 기존의 예술계에서 활동해 오던 회화작가인 그가 NFT아티스트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또한 그는 지속적인 NFT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NFT 아트컬렉터의 피드백을 작품에 빠르고 적극적으로 반영하며 수요자의 신뢰를 얻었다.
NFT가 업계의 각광을 받을수록 NFT아트를 둘러싼 여러 가지 우려는 끊이지 않았다. 특히 NFT는 소유권, 거래 이력, 계약 조건 등이 명시되므로 NFT작품의 판매와 소비가 만천하에 드러난다는 점, NFT아트는 실물이 아닌 파일 형태로 존재하는 비물질 작품이므로 그 가치를 기존의 잣대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은 여전히 뜨거운 이슈다.
이윤성을 비롯한 일군의 NFT예술가들은 이러한 우려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초의 메타버스 NFT 아트전시 개최라는 역사를 이루어냈다. 그는 이더리움 기반의 가상 현실 플랫폼 크립토복셀에서 부동산을 구매한 뒤 누갤러리(Nu Gallery)를 열고 90여 명의 NFT예술가를 초대해 (2021)를 20일간 열었다. 이 전시는 특정 의도나 목적 없이 NFT예술가 일인의 흥미와 유희의 연장선상에서 출발한 지극히 개인적인 행사였다.
가상 공간에서의 전시와 활동이 불러일으킨 파급 효과는 컸다. 더욱이 전시 첫날과 마지막 날에 행해진 메타버스 파티에 수많은 NFT예술가가 접속했고, 이것이 SNS를 통해 널리 퍼지며 NFT아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증폭했다. 이로 인해 다양한 NFT아티스트가 NFT 아트컬렉터들에게 알려졌고, 이 예기치 않은 홍보는 NFT작품의 판매로까지 이어졌다.
한편 미술전시를 경험하고 작품을 구매하는 것은 오프라인 세계에서도 아주 흔하지는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NFT아트의 경우, 이를 관람하고 구매하기 위해 익혀야 하는 용어에 대한 낯섦까지 더해져 그 문턱이 마냥 낮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이것은 크롬 브라우저에 메타마스크 지갑을 만들고 업비트에서 이더리움을 출금해 오픈시에 처음으로 민팅한 제네시스 드롭 작품입니다”라는 긴 문장은 클럽하우스와 카카오톡 오픈 채팅을 통해 NFT아트를 경험했던 이들에게는―기술적 이해도와 무관하게―친근하고 익숙하다. 그러나 NFT아트에 진입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문장은 보그체로 대표되는 전문 용어(jargon)의 무분별한 사용례처럼 느껴질 수 있다.
용어를 비롯한 NFT아트의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진입 장벽은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인 디스코드를 중심으로 구축된 새로운 커뮤니티의 활성화로 이어졌다. NFT예술가들은 디스코드에 직접 커뮤니티를 개설한 뒤 자신의 NFT아트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 등을 공지하며 기존의 NFT아트 소비자, 이제 막 NFT 시장에 발을 들인 뉴비를 대거 끌어들이게 된다. 이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구성원들은 뉴비를 가르치기도 하고, 다른 이들과 NFT아티스트의 작품을 구매하기 위한 정보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 구매한 NFT작품을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함으로써 지지하는 NFT예술가와 NFT 커뮤니티를 홍보했다.
이와 함께 NFT예술가가 열성적 소비자 집단을 확보하기 위해 구체적 로드 맵을 제안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예컨대 무라카미 다카시는 트위터에 그의 NFT 프로젝트 를 홍보하고 그 의의와 목표를 간결하게 설파하는 10여 개의 트윗을, 사업 설명회를 하듯 연속적으로 게시했다. 이에 더해 NFT예술가는 로드 맵 트위터에 셋 이상의 아이디를 함께 적어 리트윗하라는 미션을 NFT 아트컬렉터에게 부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게임 공략법 콘셉트의 프로모션으로 로드 맵 스레드에는 화이트 리스트에 들고자 애쓰는 소비자의 계정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NFT, 동시대의 에펠 탑
누군가에게 이러한 현상은 예술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모습으로 비쳤다. 가치를 의심하게 만드는 수준 미달의 이미지, 그 아래 끝없이 이어진 프로필과 답글, 넘쳐나는 수요로 인한 투기성 거품은 마치 철재 뼈대를 그대로 드러낸 에펠 탑을 연상시켰다. 19세기 말 당시 이 구조물은 에밀 졸라, 기 드 모파상, 장 레옹 제롬, 윌리엄 부게로를 비롯한 예술가 47인이 유력 일간지에 반대 성명을 발표할 정도로 괴이하한 구조를 투명하게 노출하는 ‘흉물’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명쾌하게 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에펠 탑은 예술과 기술의 역사를 바꾼 전환점이 되었다. NFT아트와 그것이 일으킨 과열 현상은 어쩌면 1889년의 에펠 탑 준공과 그로 인한 예술가들의 분노처럼, 우리가 이미 새로운 예술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상황에서 NFT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예술가에게 온라인과 오프라인, 물질과 비물질이라는 이분법적 화두는 낡은 것이 되었다. 대신에 그들은 언제 어디서든 접속 가능한, 보다 안정적인 예술플랫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일견 무가치해 보이는 디지털 이미지를 소비하고 소유하는 이들에 대한 의구심은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컬렉터들은 누구이며 어디서 온 것일까? 디지털 시대 초창기, PC 통신 서비스에 접속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야나미 레이(綾波レイ) 이미지를 밤새도록 다운로드하거나 아니메 오프닝 송을 듣기 위해 MP3 파일 다운로드에 수 시간을 보냈던 이들이 오늘날 한국 NFT 아트컬렉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비록 디지털 문화에 깊이 감화된 그들이 우스꽝스럽게 생긴 원숭이(Bored Ape), 조악한 도트로 그려진 펑크족(Crypto Punk), 3D로 렌더링된 디지털 부동산(The Sandbox) 등을 NFT아트의 기념비로 삼았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유행이나 흐름과 무관하게 타투의 도안, 작품의 에스키스, 도록의 일부, 자신의 셀카 등 다양한 형식을 확장해 새로운 NFT예술을 개척하고 있는 한국 예술가들이 있다.
용기 있게 한 걸음씩
NFT예술의 가장 큰 장점은 예술가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정확하게 기록한다는 데 있다. 가상 화폐 지갑과 연동한 플랫폼이 작품의 일관된 형식과 콘셉트를 보장해 줌은 물론 그 변경이 불가하도록 작품을 고정하기 때문이다.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에서 활동을 시작한 NFT예술가들은 그 과정과 결과를 고스란히 온라인 콘텐츠로 활용하고 이를 다시 또 다른 오프라인 활동을 위한 데이터로 사용하며 NFT아트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
이러한 NFT아트의 낙관적 현재는, 정부나 단체의 지원이 아니라 예술후원자의 지지를 받는 NFT예술가의 탄생이라는, NFT아트의 낙관적 미래로 이어질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21세기 코시모 데 메디치는 스스로 코시모 데 메디치라고 칭하는 래퍼 스눕 독을 비롯한―의 후원을 받아 셀 수 없이 많은 NFT작품을 완성할 것이고, 이는 가상 현실 플랫폼 디센트럴랜드에 위치한 소더비갤러리에 출품되어 수많은 컬렉터를 흥분시키며 예술시장을 무한히 확장할 것이다.
혹자는 과연 이러한 미래가 진정 도래할 것인지 궁금해 한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NFT아트의 전망과 NFT아티스트의 앞날을 묻는다. NFT아트를 향한 시선은 현재 무한한 긍정 혹은 무한한 부정뿐이다. 이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란 극단적 두 입장을 소실점 삼아 한 걸음 한 걸음 용기 있게 천천히 내디뎌 보는 것이다. 어떤 NFT아트가 남고 사라질지, 남은 NFT아트는 어떠한 형태를 취할지를 예측하기란 불가하지만 ‘꾸준히 작업하기’, ‘사진, 영상, 스케치 등 작업 중 생산되는 것들을 잘 정리해 두기’와 같은 평이하지만 구체적인 조언은 여전히 가능하며 유효하다.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겸임교수. 홍익대 목조형가구학과 디자인을 전공하고, 코넬대학교 건축학으로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건축과 출판을 아우르는 프로젝트 SUPERELLIPSE(초타원형)를 설립해 미술가, 사진가, 음악가, 게임 제작자, 그래픽/제품 디자이너 등과 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