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영화의 장르적 구분이 여전히 유효할까? 요즘 세대의 관람자는 비디오 아티스트 또는 필름메이커라는 직업적인 구분에, 혹은 화이트 큐브와 블랙박스라는 장소적 특성에 얽매이지 않으며 미술관이든 영화관이든 흥미로운 작업물이라면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 미술관 내 영상관을 별도로 운영해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은 최근 MMCA필름앤비디오 프로그램으로 《영화로, 영화를 쓰다》라는 제목의 상영전에서 차학경, 수전 손택 등의 작품을 상영한 바 있고 올해로 9회를 맞은 서울시립 북서울시립미술관의 “타이틀 매치” 전시에는 영상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임흥순과 오메르 파스트가 초청되었다. 한편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보더리스 스토리텔러’라는 섹션 아래 김희천, 무진형제 등의 작가 작품을 상영하고 동명의 책을 연계·발간하기도 했다.
이에 올해 더아트로에서는 “전시장의 영상들” 기획기사 시리즈를 준비하였다. 이번 기획기사에서는 지난 2019년 영상 이미지를 어떻게 볼 것인지 고찰하는 전시 《미디어펑크: 믿음 소망 사랑》을 기획했던 김미정 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의 ‘거울과 스크린 사이를 읽기’ 글을 필두로 하여, 서사를 이끄는 매체로 영상 이미지를 다양하게 변용하는 작가 4인(팀) 김웅용, 류한솔, 박선호, 업체eobchae를 소개한다. 오늘날 장르와 공간을 오가며 등장하는 영상 이미지에 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박선호는 사적 기억-정보-시각 이미지로 구성된 꾸러미를 만들어 내는 일에 호기심을 가진다. 구술 기록을 기반으로 미시사와 거시사, 개인사와 사회사를 엮고 당대의 사회, 경제, 정치사를 개인의 삶과 연결하여 미술 작품의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을 관찰하는 일에 마음을 쓰며 기획하거나 글 쓰거나 편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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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관심 있는 작업주제 혹은 소재가 궁금합니다.
본인 또는 본인과 가까운 개인에서 비롯한 미시적이고 사적인 이야기와 사회로부터 출발한 거시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가 교차하는 작품을 제작해왔습니다. 희미하거나 힘없는 것들, 외톨이 입장에 처한 것들을 그러모아 보곤 합니다. 최근 2~3년간은 한 사람의 생이 사회∙문화적 상황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질문하며 작업해왔습니다. 또한, 이미지, 기억, 소리의 작동방식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다양한 매체 중 영상 이미지를 일부 작업의 수단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직접 보고 들은 것, 경험한 것으로부터 작품을 시작하다 보니 강하게 체험한 것들을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을 찾으려 했습니다. 초기에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리서치한 이미지와 자료를 정리하고 나열하여 보여주기 위해 영상매체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작업을 진행하면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제가 강렬하게 느낀 감정, 상황,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시각과 청각을 활용하되 영화와 다른 방식이 되길 바라며 영상과 그 외의 것들을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님 작업 전반에서 ‘이미지가 지니는 고정된 의미체계를 향한 의문’을 읽을 수 있는데요. 작년에 진행된 개인전 《하드카피리스트》에서 특히 그러한 태도가 도드라집니다. 이처럼 이미지의 생산 과정과 작동방식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와 그것이 영상매체를 작업의 수단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와 관련이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스위스에서 약 일 년간 생활하며 보고 들은 것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나의 언어가 아닌 네 가지의 공용어를 쓰는 스위스의 문화적 배경, 20대 아시아 여성인 나에 대한 인식 등을 바탕으로, 자신이 어떤 체계에 포함되지 못하는 상황이나 하나로 분류하기 곤란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을 때 고정된 의미체계가 사실은 인위적이고 임의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이 이미지의 작동방식에 관한 물음으로 확장되었습니다.
2015년에는 미디어를 통해 생산되고 유통되는 이미지에 특히 주목하게 되었는데요. 당시 유럽은 파리 테러, 영국의 브렉시트 선언, 가자지구 분쟁 상황으로 소란스러웠고 뉴스 타임라인에 수많은 이미지가 떠다녔습니다. 이때 ‘내가 경험한 적 없지만 두려움을 느끼는 이미지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경험과 체험으로 이 이미지를 뚫고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이 시기에 저가 항공과 기차로 필드 트립을 다니며 보고 들은 것을 캠코더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자연스레 영상 작업을 제작하게 된 것 같아요. 내부가 아닌 먼 거리에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일이 많았고 이것이 현재 작업의 큰 관심사나 문제의식을 구축했습니다.
앞서 잠시 언급하셨는데 작가님 작업 상당수가 사적인 기억에서 비롯하여 수집한 정보에서 출발합니다. 그렇다면 기억과 정보를 모으는 작가님만의 수집 기준 또는 방식은 무엇인가요?
이상하거나 매력적이라 느껴지는 것을 모아둡니다. 그나마 기준이 있다면 ‘사적인 경험 안에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되풀이되며 출몰하는 이야기와 단서들’을 수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분류에 해당하는 것은 사적일 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지만, 추상화가 가능하기에 제가 흥미롭게 여기는 듯합니다.
또한, 〈진주와 헉스테이블 가족〉이나 〈여성과 가전〉 등의 작품을 살펴보면 다양한 시각 자료를 기반으로 작업을 전개해 나가시는데 이처럼 작업에 활용하는 이미지는 어떠한 기준으로 선택하시는지도 듣고 싶습니다.
다루는 소재, 주제 등 작업의 개념적∙구조적 제반 조건에 해당하는 자료부터 톤앤매너 등 시각적 효과를 다루는 자료까지, 매우 다양한 기준에 따라 분류하고 선택합니다. 언급하신 두 작업은 저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에 관한 호기심에서 출발했습니다. 〈진주와 헉스테이블 가족〉은 제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의 현재(제작 당시)와 연결된 자료 그리고 〈여성과 가전〉은 그 인물이 살았던 과거(당대)와 연결된 자료를 선택했습니다.
작가님 개인 사이트 내 소개에 따르면 본인을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묘사하셨는데요. 영상 작업에서도 텍스트 형태로 구조를 먼저 만든 다음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시는지 구체적인 작업방식을 부연해주신다면요.
‘글을 쓰거나 모은 뒤 스스로 편집하는 사람’이 더 알맞은 것 같습니다.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는데요, 여러 출처의 자료를 한데 모아 영상을 구성하는 방식 또는 콘티에 맞게 영상을 촬영한 뒤 편집하는 방식입니다.
전자의 경우 메모장이나 노트 등에 기록한 글들을 하나의 문서 파일로 합칩니다. 기본적인 교정을 진행한 뒤 문장과 문장 혹은 문단과 문단 사이 여백을 만들어 프린트합니다. 출력한 문서를 조각조각 오린 뒤 빈 종이 위에 순서를 바꿔가며 글 조각들을 이리저리 배치합니다. 며칠간 시퀀스를 읽어보며 어느 정도 흐름이 생겼다고 느껴지면 편집 프로그램으로 텍스트(자막)와 영상 소스를 붙여 나갑니다. 작업과정을 처음-중간-끝으로 거칠게 분류한다면 중간 영역에 해당하는 이미지가 계속해서 바뀌고 여기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편입니다.
반면 스태프와 함께 촬영할 때는 반드시 콘티를 준비합니다. 장면을 묘사∙기술하거나 그림으로 그리는 등 시각적 전개 방향을 미리 정합니다. 편집을 진행하며 필요시 텍스트나 내레이션을 보충합니다. 최근 작업에서는 엑셀 스프레드시트에 리서치 자료에서 발췌한 텍스트를 순차적으로 정리해 텍스트(소리) 시퀀스를 세팅한 다음 원테이크로 촬영하고 아주 최소한으로 편집하여 마무리했습니다. 이 경우 계획과 실행 사이 큰 변동이 없습니다.
어떠한 작업방식을 택하시든, 영상 작업 과정에는 편집 행위가 필수적으로 수반됩니다. 작가님이 선택한 특정 장면이 또 다른 의미체계를 부여받는데요, 그렇다면 편집 과정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흐름을 만드는 동시에 간섭을 만드는 것입니다. 흐름은 관객이 자연스럽게 작업에 접속할 수 있게 만드는 최소한의 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업을 구상하거나 설계할 때는 언어로 작품을 또렷하게 구조화하거나 정리할 수 있도록 신경 쓰는 편입니다. 그러나 편집할 때는 앞서 또렷하게 설정한 것을 조금씩 허무는 것 같습니다. 관객이 작품에 접속할 수 있도록 만들지만, 단정 지어 말하거나 주장하는 일은 지양하려 합니다. 미술이 정보나 지식의 차원으로 수렴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에요. 이를 위해 소리(소리 있음/없음, 음악/내레이션/현장음의 사용 등)를 활용합니다. 후편집 과정에서 소리를 조율하고 편집하며 구체적이지 않은 또는 설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효과를 더하려 합니다.
과거 영상은 영화관 혹은 브라운관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블랙박스의 공간에서 ‘상영’되어 왔습니다. 이제 다양한 영상 작품이 화이트 큐브에 놓이면서 장르 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한편 오늘날 모바일 기기의 보급, 인터넷 시대의 도래 등으로 어디서든 영상 이미지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요. 그럼에도 화이트 큐브라는 미술관 공간에서 영상 작업을 선보임에 있어 고려하는 또는 고민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영상을 만드는 사람의 시간과 영상을 보는 사람의 시간을 겹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드는 사람의 시간’은 작품의 동기, 다루는 내용, 제작 과정을 담는 시간을 뜻하며, 작품 자체의 지속시간(duration)과는 다릅니다. ‘보는 사람의 시간’은 작품 앞에 서 있을, 작품이 미래에 마주할 사람의 시간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작품에 접속하거나 몰입할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작품을 상영하기 위해 알맞은 형식을 고안해 만드는 일에서 제 고민이 드러나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개인전 《하드카피리스트》에서는 영상을 상영하는 서포트(지지대)를 처음으로 제작했습니다. 작품을 제작하고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 이 작품(〈얼룩-2〉)은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한 사람이 아주 천천히 들여다보도록 설치해야 하고, 정면이 아니라 무언가를 통해 들여다보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작품에서 단단하고 차가운 인상을 주고 싶어 스테인리스 스틸 몸통에 아크릴 덮개를 씌운 기물 안에 13인치 랩톱을 올려 상영했습니다.
올해 10월에 참여한 전시 《Combination!: 컬렉션과 아카이브》에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형식을 구현하려 했습니다. 싱글 채널 비디오 〈AB 사이드〉(2021)를 전시장에 놓는 방식을 고민하며 〈고고학 테이블〉(2022)을 제작했습니다. 리서치로 헤아려본 특정 시기의 단면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이 체험을 전달하는 환경을 구현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작업과정이 고고학의 연구 방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여러 개의 층을 가진 테이블을 만들었습니다. 반투명 처리한 아크릴 상판 사이에 OHP 필름에 출력한 리서치 자료들을 겹쳐 놓아 자료와 자료 사이 깊이를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위의 상판에는 촬영한 이미지의 스케일과 꼭 맞는 비율의 미니 태블릿 PC를 마운트하여 영상을 재생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이 제가 미술 전시 공간 안에서 영상을 다루는 고민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미정 큐레이터님의 글을 잠시 인용하자면, “영상이기에 가능한 발화의 형식”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관련하여 의견을 청해 듣고 싶습니다.
답하기 조금 어려운 질문이지만, 보는 것과 듣는 것이 일치하거나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영상이기에 가능한 발화의 형식”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미셸 시옹의 책 《영화의 목소리》(동문선, 2005)를 종종 들춰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 책에서 아쿠스마티크(Acousmatique)에 대한 설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는 ‘음원은 보지 못한 채로 듣는 소리’를 뜻합니다. 화면 안에 보이는 것(이미지)으로부터 흘러나와 들리는 것과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듣는 일이 모두 가능하다는 점이 타 매체와 다르게 영상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발화의 형식이 아닐까요. 이 결합 혹은 불일치의 흐름에서 서사, 픽션, 혹은 또 다른 체험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흐름 그리고 간섭을 만드는 일에 몰입하는 이유와 연결되어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앞으로 조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최근 눈여겨보는 혹은 좋아하는 한국의 영상 작가(영상 이미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또는 팀)가 있다면 더아트로 독자를 위해 소개해주세요.
얼마 전 남화연 작가의 개인전 《가브리엘》에 다녀왔습니다. 작품을 보며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마주한 인간의 겸허함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또한, 작가께서 작품뿐 아니라 전시를 구현할 때도 시간을 다루는 법을 고민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는데요. 매우 또렷한 시간의 구조를 설계하는 동시에 섬세하고 미묘하게 흐르는 감각을 다루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익현 작가의 영상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그중 〈그늘과 그림자〉(2022)라는 작품을 흥미롭게 본 기억이 납니다. 이 작품을 통해 ‘빛’과 ‘연결’이라는 키워드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남화연, 김익현 두 분의 작품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종종 생각에 잠기는데 그 시간이 즐겁습니다. 앞으로도 두 분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성실한 관객이 되려고 합니다.
박선호는 사적 기억-정보-시각 이미지로 구성된 꾸러미를 만들어 내는 일에 호기심을 가진다. 구술 기록을 기반으로 미시사와 거시사, 개인사와 사회사를 엮고 당대의 사회, 경제, 정치사를 개인의 삶과 연결하여 미술 작품의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을 관찰하는 일에 마음을 쓰며 기획하거나 글 쓰거나 편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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