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영화의 장르적 구분이 여전히 유효할까? 요즘 세대의 관람자는 비디오 아티스트 또는 필름메이커라는 직업적인 구분에, 혹은 화이트 큐브와 블랙박스라는 장소적 특성에 얽매이지 않으며 미술관이든 영화관이든 흥미로운 작업물이라면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 미술관 내 영상관을 별도로 운영해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은 최근 MMCA필름앤비디오 프로그램으로 《영화로, 영화를 쓰다》라는 제목의 상영전에서 차학경, 수전 손택 등의 작품을 상영한 바 있고 올해로 9회를 맞은 서울시립 북서울시립미술관의 “타이틀 매치” 전시에는 영상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임흥순과 오메르 파스트가 초청되었다. 한편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보더리스 스토리텔러’라는 섹션 아래 김희천, 무진형제 등의 작가 작품을 상영하고 동명의 책을 연계·발간하기도 했다.
이에 올해 더아트로에서는 “전시장의 영상들” 기획기사 시리즈를 준비하였다. 이번 기획기사에서는 지난 2019년 영상 이미지를 어떻게 볼 것인지 고찰하는 전시 《미디어펑크: 믿음 소망 사랑》을 기획했던 김미정 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의 ‘거울과 스크린 사이를 읽기’ 글을 필두로 하여, 서사를 이끄는 매체로 영상 이미지를 다양하게 변용하는 작가 4인(팀) 김웅용, 류한솔, 박선호, 업체eobchae를 소개한다. 오늘날 장르와 공간을 오가며 등장하는 영상 이미지에 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업체eobchae는 김나희, 오천석, 황휘로 구성된 오디오-비주얼 프로덕션이다. 두산갤러리(2022, 서울), 뮤지엄헤드(2022, 서울), 백남준아트센터(2019, 서울), 공간사일삼(2017, 서울), 미디어극장 아이공(2017, 서울)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프리즈 필름(2022, 서울), 아르코미술관(2022, 서울), 하이트컬렉션(2020, 서울), 세화미술관(2020, 서울), 일민미술관(2020, 서울),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2018, 서울), 플랫폼엘(2018, 서울) 등 다수의 그룹전 및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2021년 제12회 두산연강예술상을 받았다.
간단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업체eobchae라는 활동명이 다소 독특합니다.
업체eobchae는 프로그래머 김나희, 시청각 미디어를 두루 다루는 황휘, 일종의 인하우스 기획자 오천석으로 이뤄진 콜렉티브이자 프로덕션입니다. 업체eobchae의 ‘업’은 일, ‘체’는 일을 위해 모인 몸통, 말 그대로 업체고요. 훗날 프로덕션으로 전개하려는 기업가적 야심을 품고 출범했습니다.
각자 역할을 잠시 소개한다면, 김나희는 시장에서 파생된 신기술을 매체나 담론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합니다. 기술적 요소의 리서치와 구현, 웹 개발 전반을 주로 맡고 있고 전시 설치의 청사진도 그립니다. 황휘는 업체eobchae 내에서 사운드와 영상을 제작합니다. 프로덕션의 방향성을 짜고 필요한 소스를 배분 및 수합해 최종적으로 편집합니다. 마지막으로 오천석은 리서치와 스크립트 작성, 콜렉티브 안팎의 커뮤니케이션과 각종 서류 작업을 맡고 있습니다.
황휘 님은 사운드 작업을 선보이기도 하고 김나희 님은 nahee.app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따로 또 같이 활동하고 계신데 업체eobchae로서 결과물을 도출할 때와 개인적으로 작업을 진행할 때 작업방식에 있어 어떤 점이 유사하고 또 다른지 궁금합니다.
황휘: 저는 HWI라는 이름의 음악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로 노래 부르는 제 목소리를 DAW(Digital Audio Workstation)와 보컬 이펙터로 잘게 쪼개고 변형해 청각적으로 쾌감을 주는 사운드를 만드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HWI로 활동할 때나, 업체eobchae의 사운드트랙을 만들 때나 주로 쓰는 도구가 컴퓨터와 목소리뿐인 점은 같아요. HWI의 음악이 그 자체로 작동한다면, 업체eobchae의 사운드는 서사적 설정을 작동시키도록 기능하죠. 그럼에도 업체eobchae의 이름으로 발표했던 사운드 작업을 한데 모아 “The Decider’s Chamber”라는 제목의 앨범으로 발매하기도 하는 등, 두 영역이 오버랩되는 지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김나희: 작가로서 개인 작업을 선보일 땐 인간의 성에 대한 관심과 기술에 대한 친화력을 바탕으로 웹 기반 프로젝트를 주로 진행합니다. 대표적인 프로젝트로는 nahee.app과〈대디 레지던시〉를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nahee.app은 제 가상 자아이면서 성욕을 지닌 프로그램으로, 근미래 기술 환경의 알고리즘과 네트워크 프로토콜로 성적 경험을 사변적으로 서술하고 공유하는 프로젝트입니다.〈대디 레지던시〉는 실제 세계의 제 신체와 가족 계획을 토대로 새로운 가족을 꾸려보려는 시도인데요,〈대디 레지던시〉에서 저는 몇 년 뒤 정자 기증을 통해 아이를 낳고, 이 아이를 선발된 부모인 ‘대디’들과 아티스트 레지던시의 형태로 키우려는 계획을 발표하고, 부모 선발 오픈콜을 다양한 방식으로 홍보하고 있어요. 이러한 얼개를 업체eobchae의 프로덕션에 접합해 여러 가능세계를 파생시키기도 했죠.
김미정 큐레이터님의 글을 잠시 인용하자면, 업체eobchae 작업 전반에서 “미래를 향한 속도와 그 기대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느껴집니다. 작업의 소재 혹은 주제를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세 명이 지닌 개인적 관심사의 공통분모와 산업계 동향이 겹치는 주제를 선정합니다. 현재에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어떤 경향을 감각적으로 증폭시킬 여지가 다분할 때, 모두가 선뜻 동의하는 것 같아요. 먼저 큰 방향성을 셋이서 논의하고 기술에 눈 밝은 김나희가 작업에 적용할 구체적 소재를 제안해요. 어쩔 수 없이 구현 불가했던 경우를 제외하면 보통은 그 방향으로 갔어요. 셋 모두 평소 의견이 굉장히 강한 편인데 논의할 때 이견이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쉽게 설득 가능한 점이 오히려 놀랍죠.
과거 황휘 님의 한 인터뷰에 따르면, 업체eobchae의 작업이 사운드에 앞서 대본에서 시작된다는 구절이 인상적입니다. 작업을 위한 일종의 스토리라인이 사전에 존재한다는 것으로 해석되는데요, 어떠한 과정으로 서사가 발전하고 또 완성되는지 듣고 싶습니다.
가장 넓은 범주의 사안과 내밀한 충동이 만나는 지점에서 서사의 모티프가 나와요. 특정 기술 경향의 일반적 작동 원리를 리서치하고, 이를 행위체로 삼아 상황을 만들고요. 기술적 원리에 기반하되 실소가 나올 만큼 의외의 전개로 이어지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대본을 완성하고 사운드 작업을 거친 후 영상 편집을 진행하는 순서로 작업이 이뤄진다고 추측해볼 수 있는데요, 보통 사운드를 가장 마지막에 작업하는 영상 제작 방식과는 다른 지점인 듯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작업하는 이유가 특별히 있으신지요?
순전히 테크니컬한 이유인데, VFX 로드가 크다 보니 영상의 길이를 어느 정도 고정해두는 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사운드를 선행하면서 분위기를 어느 정도 가늠하는 이유도 있고요. 일종의 몸풀기랄까요. 다만 실사 기반의 비디오를 제작할 때는 순서가 바뀌기도 합니다. 작업 플로우가 매번 똑같지는 않아요.
최근 두산갤러리《eoracle》전시에서 선보인〈eoracle〉작품을 일례로 들어 구체적인 협업방식과 작업과정을 설명해주신다면요.
보통 영상은 방향성을 먼저 논의하고 스크립트가 얼추 마무리되면 협업자 섭외를 시작합니다. 콘티를 짠 뒤 섭외한 협업자에게 스토리보드를 보내요. 목표한 결과물의 구현 방법에 초점을 맞춰 핑퐁식으로 논의하고 최종 소스를 받은 뒤에 본격적으로 편집을 시작합니다. 소요 시간이 예상되기 시작하면 역할을 유연하게 배치하기 시작해요. 이 시기에는 황휘가 대단히 무거운 작업을 집중도 있게 진행해야 하므로 김나희와 오천석이 미팅 등 산발적인 업무를 나눠서 전담하고요. 김나희는 황휘가 공에 맞지 않도록 나머지 두 명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피구’에 빗대더라고요.
웹의 경우 영상과 다른 트랙으로 움직여요. 참여가 쉬워야 하니 화면을 최대한 단순하게 잡으려 하고요. 유저 플로우 기반으로 초기 기획이 나오면 김나희가 개발하며, 다 함께 러프한 QA(Quality Assurance) 과정을 거칩니다.
과거 영상은 영화관 혹은 브라운관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블랙박스’의 공간에서 ‘상영’되어 왔습니다. 이제 다양한 영상 작품이 화이트 큐브에 놓이면서 장르 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한편 오늘날 모바일 기기의 보급, 인터넷 시대의 도래 등으로 어디서든 영상 이미지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요. 그럼에도 화이트 큐브라는 미술관 공간에서 영상 작업을 선보임에 있어 고려하는 또는 고민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업체eobchae가 제작하는 영상은 미술관이 커미션의 주체라 비디오 아트로 쉽게 분류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업체eobchae의 구성원은 미술계를 실질적으로 작동시키는 개개인으로부터 호명될 때를 제외하고는 비디오 아트의 계보나 논리를 거의 염두에 두지 않죠. 그렇기에 지금까지 함께한 큐레이터분들 또한 미술 영상이라는 집합의 원소로 저희의 산출물을 바라봤다기보다는 다루는 테마에 주목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는 미술관의 공간적 맥락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으로 움직여 왔던 것 같고요.
고민되는 지점은, 자율성과 반비례할 수밖에 없는 예산입니다. 업체eobchae의 작업방식은 산업계의 논리와 친연성을 지니는데 미술은 산업이 아닌 만큼 개별 프로젝트에 할당되는 예산이 적죠. 제작 규모는 해마다 배가하는데 이를 뒷받침할 예산을 확보하는 방안이 고민되곤 합니다.
다시 한번 김미정 큐레이터님의 글을 인용하자면, “영상이기에 가능한 발화의 형식”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관련하여 의견을 청해 듣고 싶습니다.
비존재를 구현해야 할 때, 사변적 세계 짓기의 방법론을 관객에게 설득할 장치가 영상이란 생각이 듭니다. 업체eobchae가 고안한 장치는 현실에서 파생되었으나 결국은 터무니없는 기호에 지나지 않을 텐데요, 스크린과 스피커를 경유하면 해상도가 높아지며 대상이 있음 직하다는 설득력이 생기기 시작하죠. 설정이 아무리 터무니없어도 스크린이 명멸하는 동안만큼은 그 세계가 존재한다는 고전적인 합의를 이루고자 할 때, 다시금 영상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최근 눈여겨보는 혹은 좋아하는 한국의 영상 작가(영상 이미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또는 팀)가 있다면 더아트로 독자를 위해 소개해주세요.
황휘, 오천석: 최이다 www.instagram.com/iida_is_iida
김나희: 이상민 www.instagram.com/ilovektlee
업체eobchae는 김나희, 오천석, 황휘로 구성된 오디오-비주얼 프로덕션이다. 두산갤러리(2022, 서울), 뮤지엄헤드(2022, 서울), 백남준아트센터(2019, 서울), 공간사일삼(2017, 서울), 미디어극장 아이공(2017, 서울)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프리즈 필름(2022, 서울), 아르코미술관(2022, 서울), 하이트컬렉션(2020, 서울), 세화미술관(2020, 서울), 일민미술관(2020, 서울),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2018, 서울), 플랫폼엘(2018, 서울) 등 다수의 그룹전 및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2021년 제12회 두산연강예술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