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시장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지난 9월, 예술경영지원센터는 아시아 지역 미술을 전문으로 다루는 아트아시아퍼시픽(Art Asia Pacific)과 함께 회화, 설치, 조각, 영상 등 다양한 장르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담아 한국 현대미술 작가를 조망하는 도서 『Extreme Beauty: 12 Korean Artists Today』를 출간하였다.
『Extreme Beauty』는 국내외 미술계 전문가들의 비평을 통해 각 작가의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연령에 따른 차이와 장르적 구별을 뛰어넘은 이러한 구성은 동시대 한국 미술이 지닌 다양성과 역동성을 고스란히 반영한 결과다.
이에 더아트로는 『Extreme Beauty』를 접하기에 앞서 책에 소개된 작가들의 작업 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연속기사 “비하인드 더 뷰티”를 준비했다. 작가 자신이 가장 의미 있게 생각하는 본인의 작품을 소개하고 그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인터뷰를 통해 해당 작품의 의미와 작가의 작품세계를 더욱 생생하게 느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줄글의 형식을 본떠 이어 붙인 진주알과 뜨개질로 만든 꽃이 눈에 띈다. 고산금 작가의 작업이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텍스트를 활자나 소리의 형태로 읽어 들이는 그는 그 속에서 세상의 다양한 시각을 포착하여 작업에 활용한다. 원본 텍스트를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마치 정교한 수공예 작품을 연상시키는 그의 작업은 붓 대신 손을 사용할 뿐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해독할 수 없는 진주알과 뜨개의 배열에 담긴 작가의 ‘손맛’ 때문일 것이다.
작업을 시작할 때 어떠한 준비 과정을 거치시는지 궁금합니다.
준비과정이 있다기보다 일상에서 겪는 경험들이 자연스레 준비과정이 돼요. 제게 조금 특이한 부분이 있다면 경험을, 이미지로 기억하지 않고 읽은 글과 연결되는 텍스트로 기억한다는 점일 것 같은데요, 가령 저는 넷플릭스 같은 OTT 플랫폼을 이용할 때도 영상물을 눈으로 보지 않고 라디오처럼 소리로 들어요. 뉴스를 듣거나 책을 읽음으로써 들어오는 정보는 모두 외부의 자극이 제게 유입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텍스트가 제게 와서 닿는 것처럼 제 작업도 저에게서 출발해 타인에게 향하기보다 타인으로부터 시작해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제 감정이 투입되면서 작업을 시작하기 때문이죠. 제 작업의 이런 방향성을 반영해서 2016년에 진행했던 개인전의 전시 제목이 《Hommage To You》이기도 했어요. 이렇듯 저는 사람들에게 화두를 던지기보다 사람들에게서 받아서 작업하는 작가예요. 보통은 글을 읽다가 자연스레 느끼는 모호한 감정으로부터 작업이 출발합니다. 그래서 저는 텍스트를 소재로 감정을 표현하는 작가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가령 BTS의 노래 중 하나인 “작은 것들을 위한 시(Boy with Luv)”라는 곡의 가사에서 사랑이라는 소재를 느끼는 식이죠. BTS의 노래와 같이 대중가요를 기반으로 한 작업에서는 정서적 교감과 함께 한 시대의 문화적인 흐름을 포착하고자 해요. 텍스트가 담긴 매체의 특성에 따라 작업도 달라지지요. 소설을 토대로 작업할 때는 인문학적인 속성에 주목하고 신문이나 법전을 읽을 때는 행간에 담긴 정치적인 요소를 중점적으로 읽어냅니다. 저는 한 시대의 여러 측면을 읽어내는 코드로 텍스트를 이용하고 있어요.
오랜 기간 작가 활동을 이어오면서 지금까지의 작업 중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거나 작가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사실 저에게는 제 모든 작업이 소중해요. 모두 이유가 있어서 시작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를 꼽기가 무척 어렵지만,〈The New York Times〉(2000)를 소개하고 싶어요.〈The New York Times〉는 2000년 “The New York Times” 지면에 발표된 6⋅15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기사 전문의 텍스트를 진주 구슬로 치환한 작품이에요. 기사 원문이 6⋅15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이 작품은 종종 정치, 사회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해석되기도 하지만 사실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긴 작업이기도 해요.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될 당시 저는 뉴욕에 머물고 있었고 한국을 떠난 지 거의 10년이 되었어요. 뉴욕에 간 이후로 오랜 기간 한국을 다시 찾지 않았으니 한동안 이방인이었던 셈이에요. 미국의 뉴스에 기대어 한국의 소식을 들었기에 외부인의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봤던 때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저는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나라가 정말 통일이 되는 줄 알았어요. 세계가 남북정상회담에 주목하고 있었고 미국 신문의 전면에 한국 음식인 불고기나 김치, 그리고 나아가 북한 여성의 인권에 대한 기사가 본격적으로 실리기 시작했었거든요. 한국에 대한 향수를 느끼면서 2년간 미국에서 발행되는 남한과 북한, 정상회담에 대한 기사들을 전부 모았어요. 결국 통일은 이뤄지지 않았지만요. 그러니까 이 작품은 당시의 정치, 사회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한동안 이방인으로 생활했던 저의 정체성과 이방인으로서 한국을 바라보았던 관점, 그리고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통일에 대한 환상을 담은 복잡다단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해당 작업이 작가님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도 궁금합니다.
작품의 기반이 되는 텍스트를 선정할 때는 개인적인 감정과 기억이 매우 중요해요. 물론 타인을 토대로 작업을 할 때도 있는데, 그리 쉽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제 작품이 추상적으로 표현되는 것 같기도 해요. 제가 저의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거나 설명하는 데 능숙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래서 텍스트를 차용하는가 싶기도 하고요. 앞서 언급했듯이〈The New York Times〉는 저의 감정이 깊이 관여하지만, 결코 제 개인적인 이야기만은 아니에요. 나의 이야기이자 당신의 이야기이고, 곧 우리의 이야기가 되죠. 저는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제 관점에서 기록했지만, 거기에는 진주알을 붙이는 노동력이 투입돼요. 노동은 시간성이 있는 행위이고,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어떤 공간에 속한다는 뜻이죠. 그러니 노동을 통해 만들어 낸 결과물인 작품은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해요.〈The New York Times〉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앞으로 나아가자는 가치를 서로 논하고 소통할 수 있는 화젯거리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요.
작업과정에서 생긴 특별한 에피소드나 작품에 얽힌 비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2020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모두의 소장품》이라는 전시를 진행했어요. 서울시립미술관이 SNS에 제 작품을 올렸는데 아래 이런 댓글이 달린 게 기억에 남아요. “내가 말했잖아, 이거야.” 이게 대체 무슨 뜻인가 싶어서 그 밑에 달리는 글들을 한참 봤더니 친구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이전에 온라인에서 대화를 나눴는데 무언가 뜻을 전달하기 어려웠고, 그에 맞는 답을 제 작품에서 찾았던 모양이에요. 그 광경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비대면으로만 소통했잖아요. 더군다나 요즘은 전화보다 문자로 자주 소통하고요. 주로 텍스트로만 의사를 전달하니 그 뜻이 정확하게 전달이 안 돼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분은 텍스트의 불완전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가 작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도 바로 그런 거예요. 전 오랜 기간 텍스트를 기반으로 작업하면서 끊임없이 텍스트가 전달하는 의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왔어요. 원문의 텍스트를 지우고 그 자리에 여러 해석을 담아내는 작업 방식을 통해서요. 텍스트가 내포하는 의미는 마치 절대적이고 고정된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텍스트는 그것을 읽어내는 사람에 따라 무궁무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어요. 때로는 원문 텍스트를 만들어 낸 사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말이에요. 전 그래서 텍스트는 어떤 것의 실체라기보다 현상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제가 한 시대의 다양한 현상을 명확한 언어나 이미지가 아닌 지워진 텍스트를 통해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요.
작가님 작업에서 두드러지는 지점은 ‘수공예적 방식’입니다. 대다수가 디지털화된 오늘날, 때로는 지난하게 여겨질 만큼 아주 작은 부분까지 사람의 손을 거쳐야 완성되는 작업방식을 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엄밀히 말하자면 제가 특정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하는 것에 가깝죠. 앞서 언급했듯이 노동과 연결해 생각해보자면, 노동은 하면 할수록 점차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행위가 정교해지는 특성이 있어요. 행위가 정교해지면 좋은 대상을 판별할 안목을 얻게 되고요. 그 과정에서 오는 성취감은 절대 기계가 대신할 수 없어요. 어쩌면 제가 수작업을 지속하는 이유가 회화를 전공했기에 특유의 ‘손맛’을 알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회화에서 붓 터치가 생명이듯, 작품과 몸 사이에 직접적인 접촉이 있어야 그 사람의 고유한 제스처가 담기기 때문이죠. 제 작업도 같은 결을 유지해요. 그림을 그리듯 손을 쓰는 것, 그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것이 작가님 삶에는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듣고 싶습니다.
작업은 제게 일상, 그 자체예요. 전 작품을 만드는 행위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일상의 여느 일들과 같은 노동일 뿐이에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과 상상을 어떤 대상으로 구체화하는 것에는 절대적인 노력이 필요해요. 힘들 때도 물론 있죠. 그렇지만 일찍 퇴근하는 날에는 기분이 좋은 일반 회사원들처럼 저 역시도 작업이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될 때는 기뻐요. 큰 작업을 할 때는 힘들어서 울기도 하고요. (웃음) 이처럼 제게 작업은 일상이에요. 작품이 사람들과 이어주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는 점에서 사회와 소통할 기회이기도 하고요.
고산금은 이화여자대학교 회화과와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2016년 갤러리바톤 개인전을 포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성곡미술관 등 국내 주요 미술관 및 북경 C5 아트 베이징(C5 Art Beijing), 로마 카를로 빌로티 뮤지엄(Museo Carlo Bilotti, Italy) 등 해외 유수의 미술 기관에서도 활발한 전시를 이어왔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포항시립미술관, 서울대학교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