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 동향

우리는 한국인이다: 문화 에이전시는 권력이다.

posted 2015.12.23

해외에서 바라본 한국의 문화 예술계는 어떤 모습이까? 호주는 아시아와의 연계를 가장 적극적으로 고민해 온 나라 중 하나이다. 한국과 호주 양국에서 활동해 온 필자 데이비드 플렛져는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국가 경제 및 정책적 측면에서 고찰했다. 분단과 국가 정체성의 문제, 아시아에 닥친 IMF위기, 예술지원 정책과 한류의 유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며 한국 문화의 정체성과 힘을 분석했다. 이 원고는 호주 커런시하우스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플랫폼페이퍼#38]에 최초로 게재된 글을 필자가 재 집필한 것이며, 호주 시각예술잡지 아트링크(Artlink)와 더아트로가 공동으로 발행하는 '한국미술특별호'(Vol35:4, Dec)에 실린 기사이다.




아시아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는 개념이 호주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우리의 외교 정책은 (유색민의 이민을 허용하지 않는) 백호주의에 가려져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문화적 민족적 다양성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고, 자연히 ‘아시아’의 정의를 불명확하게 만들었다. 이 같은 정책은 2012년 발간된 “아시아 세기 속 호주 백서”를 통해서 일정 부분 완화됐다. 이는 호주 정부가 발표한 보고서로, 호주의 역사와 정체성에 있어서 아시아가 얼마나 중요한 지 기술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인도네시아, 인도, 중국, 일본과 맺은 무역, 협력 협정은 고프 휘틀과 폴 키팅1)이 상상한 미래를 떠올리게 했다. 호주의 미래가 아시아의 미래와 떼려야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1) 두 명의 개혁가이자 수상인 고프 휘틀(Gough Whitlam, 1972-5)과 폴 키팅(Paul Keating, 1991-6).


불행히도, 새로운 협약에는 문화의 역할에 관한 암시가 매우 두서없이 나열돼 있었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다른 개발국과는 달리, 호주는 아시아와 연계하여 생각하지 않는 일종의 ‘사각지대’에 위치해 있다. 예를 들어, 국제적인 협약에서 싱가포르, 홍콩, 일본의 문화 에이전시의 가치는 높으며, 현재 큰 인상을 주고 있는 곳은 인도네시아이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 동안 이루어진 한국의 문화적 콘텐츠의 성공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박찬경, 만신, 2013. 한국민간신앙, 샤머니즘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형태로 다룬 영화이다. 무형문화재 만신 김금화의 삶을 통해 종교와 여성의 억압과 용서를 다룬다. 사진제공: 박찬경 박찬경, 만신, 2013. 한국민간신앙, 샤머니즘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형태로 다룬 영화이다. 무형문화재 만신 김금화의 삶을 통해 종교와 여성의 억압과 용서를 다룬다. 사진제공: 박찬경

호주 vs 한국, 한류, 그리고 월드컵


한국은 문화적 활동을 통해 소프트 파워를 행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호주와 비슷하다. 이러한 궤적은 종종 호주의 21세기 아시안 내러티브의 주인공을 한국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우리의 것과 교차하고 경쟁한다. 물론 한국과 호주의 역사, 지리, 정치적 진화 과정, 문화 등은 본질적으로 매우 다르지만, 한국의 성과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뤄진 것인지 간략하게 분석해보는 것은 매우 유용할 것이다. 특히 국가 정체성의 가치를 담은 이야기, 혹은 예술의 중요성을 규정하고 표현하는 이야기의 경우에 말이다. 내가 처음 한국에서 일을 시작했던 1993년은 40년 만에 처음으로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대통령이 된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때 당시, 국가들은 제1세계, 2세계, 3세계로 분류되고 있었다. 한국은 몇 십 년 동안 지속되어온 전쟁, 침략과 침입, 독재정부의 후유증과 같은 제2세계 국가의 지표를 드러내고 있다. 대중스타인 싸이의 교외 지역, 강남은 일반적인 수입으로는 매매할 수 없는 꿈의 주택지이다. 오늘날 한국은 아시아 지역의 실세다. 어떻게 한 세대 만에 한국은 이러한 변화를 일궈낼 수 있었을까?


1990년대 후반부터, 한류는 인접 국가들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인기를 끌었다. 예술가와 장인들이 이끄는, 한국의 드라마, 잡지, 영화, 패션, 대중음악, 그리고 연극까지, 5천만의 인구를 가진, 반으로 잘려진, 아시아 지역의 변덕스러운 지리정치학적 위치에 놓인 국가에서 기대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 넘었다. 중국 역시 홀딱 반했다. 이 물결의 뒤에 끊임없이 정체성의 위험으로부터 괴롭힘을 받았던 한국은 완전히 국제화할 작정으로 밑바닥부터 끝까지 변화했다. 한국의 이 같은 성공에 가속도를 붙인 두 가지 요인은 일본과 공동개최한 2002년 월드컵, 그리고 국제화의 과정 속에서 문화의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쪽으로 기운 국가의 정치적 태도의 변화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거스 히딩크는 한국에서 국가적인 영웅이다. 국가대표팀의 코치로서 히딩크는 2002년 월드컵 경기에서 한국팀을 4강에 오르도록 했다. 이는 공동주최자였던 일본보다도 더 뛰어난 결과였다. 국가가 스포츠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이 국가 정체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일반적인 가설은 호주의 예술가 커뮤니티에서는 매우 싫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준결승전에서 작가들과 문화계 종사자들은 서울의 길거리에 나와 흥분감을 표현했고, 오랜 숙적과도 같은 일본을 물리치며 얻게 될 더 큰 영광을 기대하였다. 보통 관례나 전통과는 달리, 나이에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한국 국기를 잘라 만든 코스튬을 차려입고 길거리에 나와 응원했다. 국기를 리폼하여 옷을 만드는 것은 이전에 반역죄로 여겨지던 것이지만, 이 경우에는 허용되었다. 세대 융화를 와해시키던 방해물은 그날 밤 사라졌고 같은 힘으로 다시 표면위에 떠오르지 않았다. 더 중요하게는, 20세기 초반 반도를 무자비하게 점령했던 일본과의 불편한 관계는 한 번의 페널티 샷이 이뤄지는 순간 증발했다.


박찬경, 만신, 2013. 사진제공: 박찬경 박찬경, 만신, 2013. 사진제공: 박찬경

‘우리는 한국인이다’


두 번째 요인은 글로벌 경제에서 매우 공개적으로 역할을 했다. 1997년 한국은 아시아인이라면 모두들 알 IMF 사태, 아시아의 경제가 무너지면서 파산선고를 받았고, 한국 정부는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뛰어나게 재건립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10여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경제 모델을 만들어냈다.2) 여러 전략들 가운데 하나는 예술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한국의 정치적 문화는 그것이 경제적인 동기 부여가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한국인의 특성과 감성이 설명되고, 소통되고 또 인정되어야 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문화적인 분야를 지원했다. 국가적으로 생산적인 경쟁이 이뤄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였고, 성장하고 있는 국내외 관객을 대상으로 한국 문화를 적극 홍보했다. 국제적인 협업과 방문 등을 지원하는 새로운 정책을 만들고 지원 기금을 만들기도 했다.


2) http://en.wikipedia.org/wiki/1997_Asian_financial_crisis


이 같은 전략을 뒷받침하는 주요 계획으로는 한국 영화의 생존을 돕고, 국내 영화 산업의 국제적인 성공을 위해 스크린 쿼터를 실시한 것이 있다. 한국종합예술학교의 설립을 통해 프로페셔널한 예술 커뮤니티에 활기를 불어넣을 만큼 수많은 전문가가 배출됐다. 또한 광주 아시아문화중심도시 프로젝트는 도시계획과 예술적 생각을 한데 모은 의욕적인 콘셉트로 출범했다. 아시아의 정체성에 관한 지역적인 질문을 던지며 그것을 주제로 한 작품 활동을 지원한다.3) 이러한 프로젝트가 추진된 가장 강력한 이유는 사실상 정체성이다. 더 명확히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짓기 위해서 스스로를 규정하고, 그 가치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호주 작가인 후안 다빌라(Juan Davila)는 호주에 지난 30년 동안 자문을 해왔다. “우리는 주변적인 ‘타자’가 아닌, 우리 스스로를 다르다고 여기는 담화를 만들어 내야한다. 이것은 지속되는 모순이다.4)


3) http://www.cct.go.kr/english/hcac/vision.jsp
4) 후안 다빌라(Juan Davila), 작가 노트 ARC/ 파리시립현대미술관, ‘다른 대륙에서: 호주 꿈과 현실’, 전시 카탈로그, 파리 1983, p 102 재인용. 크리스 맥오리페, ‘꿈에서 살기’, Meanjin #3 2012 p 63.


20세기 한국에서는 이 같은 모순이 일본과 미국의 연이은 점령 기간 동안 저항의 내러티브로서 전파되었다. 매우 다른 방식들로, 두 번의 점령은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위협했지만 사회의 다양한 층위에서 목적의식을 주입하였다. 지역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은 결과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 같은 회복력은 현재 한국의 글로벌 에이전시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방 안에 있는 코끼리-북한과의 분리-는 이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방정식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아는 것은 불가능하나, 점령의 시간이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에서 분리가 이뤄지고, 비탄이 만들어지고, 또 비탄을 정복하고, 새로운 삶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정체성이 구축됐다. 한국은 문화가 동시대적 정체성을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했고, 예술가를 중재인, 의사전달자, 번역가로서 가치 있게 여겼다-독특한 갈등을 겪고 있는 나라의 세속적인 샤먼처럼 말이다.




부드러운 힘


당연히 한국의 문화적 무기고에는 틈이 있게 마련이다. 문화예술 산업에 비해서 창조적 산업에 특혜를 주는 것이다. 전통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강조가 점차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그 와중에 동시대미술의 고유한 가치의 이상 안에서 작업하는 작가 개인에 관한 경제적인 지원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예술적, 문화적 생산물의 성격을 규정짓는 문화적 파벌주의는 지역별, 정치 단체, 상급자에 의해서 우선적으로 결정되며, 학벌 역시 영향을 미친다. 이 같은 요인들은 어떤 정당이 권력을 잡고 있든지 상관없이 문화적 위계질서를 만들며, 전통미술과 동시대미술의 가격에 영향을 끼친다. 한국의 문화 분야의 결정적인 특징은 그것의 선천적인 관료주의적 성격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나의 첫 번째 일 가운데 오랜 감명을 남긴 사건이 있다. 작품 제작을 위해 추가적인 리허설 장소를 섭외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 때 행정 직원이 웃으면서 나에게 “여기는 인도가 아니에요. 우리는 인도보다 훨씬 더 관료주의적이랍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 작가들에게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은 이제 흔해졌지만, 큰 문화 기관에서는 이러한 태도의 흔적을 확연하게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 코멘트는 비평이라기보다는 한국에서 겪은 차이에 관한 개인적 고찰에 가깝다. 이것은 지난 20년 동안 섬세하게 다듬어져서 구현된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특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의심의 여지없이 매우 모던한 중간 단계의 권력 모델로 자신의 방식에 맞게 그 힘을 부드럽게 행사하고 있다.


※이 글은 2013년 8월 작성되어 [플랫폼 페이퍼] #36 한국 챕터에 실린 데이비드 플렛져의 글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예술가를 재평가하기’ 라는 글을 확장하여 쓴 것이다. 멜버른의 커렌시 하우스 출판사에서 발행하였으며, 호주 아트링크에 재 게재되었다.

※ 이 원고는 호주 아트링크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협력으로 발행되었으며, 아트링크의 ‘한국미술 특집호’(KOREA contemporary art now,V.35:1, Dec. 2015)에 먼저 출판되었다.

데이비드 플렛져 / 작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한 초창기 호주 작가이다. 도쿄, 쿠알라룸프르, 상하이, 홍콩, 서울, 춘천에서 작업활동을 진행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참여한 첫번째 비한국인 스태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