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회 아트바젤이 지난 6월 16일부터 19일까지 4일간 개최됐다. 세계 최대의 아트페어가 개최되는 이 시기, 스위스의 작은 도시 바젤은 전세계에서 몰린 콜렉터들과 미술인들로 성황을 이룬다. 하지만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앞두고 열린 올해 아트바젤은 세계의 정치, 경제, 외교적 불안정성을 껴안고 출발해 어느 때보다 차분한 분위기로 치러졌다. 떠오르는 젊은 작가보다는 중진, 원로 작가의 작품들이 부스를 채웠으며, 콜렉터들도 실험적 작품보다는 시장에서 입증된 작가의 작품들을 신중히 선택하는 모습이었다. 미술세계 바깥의 외풍으로 경제 지표가 흔들릴 때 미술시장은 속도를 줄이며 안전 주행을 시도하는 것이다.
6월 13일 월요일, 본격적인 아트바젤(Art Basel, 스위스 바젤 2016. 6. 16~6. 19.), VIP 오픈을 하루 앞두고 먼저 개막하는 '언리미티드(Unlimited)' 섹션의 오프닝 행사를 향하는 택시의 창문이 빗방울에 얼룩져 갔다. 이맘때면 늘 비가 내리는, 보석, 시계, 미술작품 등 ‘초고가품’ 박람회의 도시 바젤에서, 내로라하는 부자들은 택시 하나를 두고 옥신각신하고, 미술관에서는 호텔 우산과 고가의 우산이 돌고 돌며 뒤바뀐다. 스위스의 이 작은 도시에서 한시바삐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는 이유도, 되도록 비에 젖지 않고 말쑥해야 하는 이유도, 모두 아트바젤 기간에 열리는 수 백 개의 미술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이 택시도 젊은 신진 작가를 위주로 한 위성 아트페어 리스테(LISTE)의 오프닝을 이미 한 바퀴 돌고 난 뒤 올라탔다.
아트바젤의 트레이드마크인 ‘언리미티드’는 2000년부터 시작됐으며, 기존 페어의 부스에서 선보일 수 없는 대규모 조각, 설치, 회화, 퍼포먼스 작품 등을 일망타진한다. 허쉬혼미술관(Hirshhorn Museum)의 큐레이터 지아니 예처(Gianni Jetzer)가 5년째 기획해 왔으며, 올해는 작년보다 14점 많은 88개 작품을 선보이며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16,000㎡에 이르는 무지막지한 공간이 대형 작품들과 미술인들이 뒤섞여 비좁아 보일 지경이었다. 아트바젤에서 추후 발표한 세일즈 리포트에서도 언급됐듯이, 올해 페어에서 큰 손들이 움직인 곳은 이 곳이었다.
돌아보면, 아시아 특히 중국 주식시장의 폭락으로 출발한 올해 초, 뉴욕 봄 경매에서 소더비의 총 거래액이 작년 대비 절반 이하까지 추락하는 등 미술시장은 살얼음판을 걸었다. 아트바젤은 브렉시트(Brexit) 국민투표를 앞두고 정치, 경제, 외교적 불안정성을 껴안고 출발해 더욱 염려가 가중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미술시장이 폭삭 가라앉지는 않았다. 콜렉터들은 실험적인 구매보다는 중진 및 원로 작가를 중심으로 안정적인 선택을 이어갔고, 갤러리들도 신중해진, 혹은 소위 ‘건강해진’ 미술시장의 동향성을 읽고 그에 맞는 메뉴판을 꾸렸다.1)
주제 없는 비엔날레와 같은 ‘언리미티드’는 그 규모상 ‘준비된’ 작가의 작품이 선보여지기 마련이고, 페어 측도 매번 보도자료에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출품작을 강조한다. 미국 작가 로버트 그로스베너(Robert Grosvenor)의 대형 미니멀리즘 조각 작품 ‘무제-노랑(Untitled-Yellow)’(1966)은 1967년 LA카운티미술관(LA County Museum of Art)의 “60년대 미국 조각(American Sculpture of the Sixties)”전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이번 아트바젤을 위해 부활해 새하얀 공간을 노란 사선으로 분할했다. 미국 개념미술 작가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사전적 정의 시리즈의 출발점이자 작가의 첫 갤러리 전시작이기도 한 사진 작품 ‘제목있는-개념으로서의 개념으로서의 예술(Titled-Art as Idea as Idea)’(1968)은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무(nothing)’의 10가지 사전적 정의를 제시하는데,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물욕과 소유욕이 넘실대는 현장에 위치하면서 아이러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종이분쇄기를 통과한 듯한 네 여성의 얼굴이 중력을 상실한 채 회전하고 있는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의 가로 14m 회화 작품 ‘네 명의 뉴 클리어 여성들(Four New Clear Women)’(1982)과 아시아 콜렉터에게 천사백만 달러(약 162억 원)에 팔린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각도기’ 시리즈 중 가로 15m에 육박하는 ‘다마스쿠스 게이트, 늘어난 변형(Damascus Gate, Stretch Variation) I’(1970)은 각각 큰 벽면을 통째로 장식하고 있었다.
1) 브렉시트 이후 열린 런던 필립스, 소더비, 크리스티 6월 경매에서 파운드 약세의 환율 덕을 보고자 (7월 5일 기준, 미국 달러 대비 파운드는 31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아시아와 미국 콜렉터가 특히 높은 응찰율을 보였다. 다만 옥션 스타나 젊은 작가의 작품의 경우, 낮춰진 추정가에도 불구하고 유찰됐으며, 대체로 이미 ‘보증된’ 작가의 작품이 새 주인을 찾아갔다. 이와 같이 미술계 바깥의 외풍으로 경제 지표가 흔들릴 때 미술시장은 속도를 줄이며 안전한 주행을 이어간다.
아시아 작가도 눈에 띄었다. 솔 르윗(Sol LeWitt)의 ‘불규칙적 탑(Irregular Tower)’(1999)이 특히나 반가웠던 이유는 페어장의 반대편 끝 쪽에 양혜규의 블라인드 설치 작품 ‘솔 르윗 뒤집기-23 배로 확장 후 셋으로 나뉜, 세 개의 탑이 있는 구조물’(2015)이 전시돼 서로 조응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아트바젤 홍콩에서 BMW예술여행(BMW Art Journey)의 첫 번째 수상자로 선정된 후 유럽에서 콜렉터들과 조우하는 홍콩 작가 샘슨 영(Samson Young)은 ‘언리미티드’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 ‘캐논(Canon)’(2015)을 선보였다. 작가는 직접 홍콩 경찰 제복을 입고 8m 높이의 사다리차 위에서 시위대 해산에 사용되는 음향대포(LRAD, Long Range Acoustic Device)에 대고 새소리를 냈고, 이 소리의 방향을 직선으로 잇는 페어장의 끝에서는 관객이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작가의 위치와 같은 높이에 마련된 ‘새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근래 민주적 자유를 갈망하는 시위로 들끓은 홍콩의 정치사회 현실을 꼬집었을 뿐만 아니라 전시 공간의 ‘미개척’ 영역을 활용해 독보적인 작품이 됐다.
한편, 듀오 작가 엘름그린&드라그셋(Elmgreen & Dragset)은 부스에 ‘경매회사’를 들여와, 두 개의 실제 경매 현장 녹음본을 경쟁하듯 양쪽에서 동시에 틀어 놓은 사운드 설치 작품 ‘이차적인(Secondary)’(2015)을 선보여 콜렉터들을 아찔하게 했다. AA 브론슨(AA Bronson)은 샤머니즘이 결합된 퀴어화된(queered) 일본 실내 정원 작품 ‘폴리(Folly)’(2015)에 머물며 참여 작가 중 거의 유일하게 오프닝 내내 직접 손님을 맞았다. ‘언리미티드’ 오프닝 전날인 12일, 미국 올랜도의 게이 클럽 테러 사건으로 마음 한 편이 쓰라리던 이들은, 지난해 9월 데이비드즈워너갤러리(David Zwirner Gallery)에서의 첫 개인전 일부를 통째로 옮겨 놓은 볼프강 틸만스(Wolfgang Tillmans)의 ‘뉴욕 설치(New York Installation) PCR 525’(2015)를 찾아가 커밍아웃을 한 대표적인 게이 작가로서의 삶을 자전적으로 풀어놓은 그의 사진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인파가 줄지 않는 ‘언리미티드’ 현장을 간신히 빠져 나가던 중, 바닥에 방수포를 깔고 샐러드를 만드는 앨리슨 놀즈(Alison Knowles)의 퍼포먼스 작품 ‘샐러드를 만들어라(Make a Salad)’(1962)는 그다지 식욕을 자극하지 못했고, 퍼포머들이 자코메티, 에바 헤세, 루이즈 부르주아 등의 조각 작품을 마임으로 표현하는 다비드 바룰라(Davide Balula)의 ‘마임화된 조각(Mimed Sculptures)’(2016)에는 차마 오래 시선을 두기 어려웠다. 밖에서 잠시 한숨을 돌리는 사이,투명한 우산을 쓰고 흰색 가방을 든 흰색 고릴라로 분장한 한 퍼포머가 부산스러운 촬영팀에 둘러싸여 부리나케 페어장에서 빠져나와 내 앞에 있던 흰색 리무진으로 들어갔다. 옆에서 같이 쉬고 있던 퍼블릭아트펀드(Public Art Fund)의 디렉터 니콜라스 바움(Nicholas Baume)의 귀띔 덕에, 이 작은 소란이 작가 윌리엄 포프.엘(William Pope.L)이 자신의 작품 부스에서 벽에 걸린 회화 한 점을 떼어내고, 그 뒤에 있던 돈다발을 가방에 담아 나온 퍼포먼스란 것을 알았다.
다음 날 14일 화요일에 열린 ‘퍼스트 초이스(First Choice)’ VIP 오프닝, 아트바젤의 메인 섹션인 ‘갤러리즈(Galleries)’를 찾았다. 아트바젤은 물론 프리즈아트페어까지, 굵직한 세계적 아트페어들은 해외 지점을 내며 지역별로 힘을 분산해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게다가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세계 경제와 주춤하는 미술시장에 맞춰 보폭을 줄이며 전반적으로 안정적인 판매를 도모하고자, 페어는 대체로 보수적인 부스 차림을 고수했다. 따라서 유럽 및 북미 작가가 중심이었고, 중견 및 원로 작가가 많았으며,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 매체의 작품 일색이었다. 새로 떠오른 일약 스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국 갤러리 중 국제갤러리는 뉴욕 지점인 티나킴갤러리(Tina Kim Gallery)와 함께 앞뒤가 트인 널찍한 베이지색 1층 부스에서 역시나 권영우, 박서보, 이우환, 하종현 등의 단색화를 비롯해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등 시장의 ‘워너비(wannabe)’ 작품을 선보이며 안전한 ‘순항선’에 함께 올라탔다. 권진규, 윤형근, 이불, 토비 지글러(Toby Ziegler) 등의 작품을 선보인 PKM갤러리는 2층 코너에 부스를 꾸렸지만 이미 안면이 있는 외국 콜렉터들이 박경미 대표를 찾아 꾸준히 방문했다.
전 페어장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부스를 꾸린 갤러리는 이웃나라 일본 도쿄의 타카이시갤러리(Taka Ishii Gallery)였다. 일본 사진 작품의 셀렉션으로 유명한 이 갤러리는 유타카 타카나시(Yutaka Takanashi), 칸스케 야마모토(Kansuke Yamamoto), 코지 에노쿠라(Koji Enokura), 타츠오 가와구치(Tatsuo Kawaguchi) 등 1950~70년대 사진 작품을 원목 액자와 탁자형 진열대에 차분히 전시하고, 부스 중앙에 큰 키의 식물 화분과 스탠드형 거치대에 사진을 건 유키 키무라(Yuki Kimura)의 ‘가츠라(KATSURA)’(2012)를 놓아 정갈하면서도 여유 있는 서재 분위기를 연출했다. 특히 소품과 도록을 배치한 부스 뒤쪽의 말끔한 책꽂이는 디테일한 연출의 정수였다.
베를린의 노이게림슈나이더(neugerriemschneider)는 옅은 갈색으로 통일한 린넨 벽지와 마 섬유 바닥재로 꾸며진 자연적인 분위기 속에서, 부스 바깥쪽 벽에 걸린 거울에 통나무를 기대 놓은 아이 웨이웨이(Ai Weiwei)의 작품이 외부에서 손님을 맞고, 거울 상자에 분재 나무를 심은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의 작품이 부스 안쪽에 놓였다. 삼면이 트인 부스에 자리 잡은 베를린의 쾨니히갤러리(König Galerie)는 모니카 본비치니(Monica Bonvicini), 카미유 앙로(Camille Henrot) 등의 조각들을 배치하고, 단 하나의 대형 벽면에는 카타리나 그로세(Katharina Grosse)의 대형 회화 작품을 날마다 바꿔 걸었다. 주요 작가의 프로젝트성 작품을 선보이는 ‘피처스(Features)’ 섹션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베를린의 벤트루프갤러리(Wentrup Gallery)는 올라프 메첼(Olaf Metzel)의 설치 작품 ‘집결지(Sammelstelle)’(1992)를 선보였다. 한 명씩만 통과 가능한 철제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면 물결 모양의 강판으로 에두른 작은 방에 갇히게 되는 이 작품은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난민의 독일 이민에 대한 이슈를 바탕으로 제작됐지만, 작금의 시리아 난민 정세에도 강한 울림을 전달한다.
아트바젤 ‘특수’에 맞춰 바젤의 여러 미술공간도 일제히 전시를 쏟아냈다. 마지막 날 일정은 이 전시들을 찾아다니느라 바빴다. 바이엘러파운데이션(Fondation Beyeler)은 지난 4월까지 뉴욕 구겐하임에서 회고전을 연 피슐리/바이스(Fischli/Weiss)와, 이번 아트바젤 기간 중 각종 전시와 페어에서 가장 많이 보여진 작가일지 모를 알렉산더 칼더의 작품을 한 데 전시하는 흥미로운 기획을 선보였다. 그 아래층에는 로니 혼(Roni Horn)이 지난 40여 년간 받은 선물 일부를 사진으로 촬영해 전시한 “선별된 선물들(The Selected Gifts) 1974-2015”전을 열어 호응을 얻었다. 독특하게도 대형 미술품 수장고 겸 미술관으로 기능하는 샤우라거(Schaulager)는 카타리나 프리치(Katharina Fritsch)와 알렉세이 코슈카로브(Alexej Koschkarow)의 협업 전시를, 쿤스트뮤지엄 바젤(Kunstmuseum Basel)은 신관 개관에 맞춰 현대 조각 작품의 역사를 되짚는 “이동 중인 조각(Sculpture on the Move) 1946–2016”전을 열었다.
이 수많은 전시 중에서도 아트바젤 기간 동안 미술인들이 한 마디씩은 거든, 가장 주목받은 행사는 쿤스트할레 바젤(Kunsthalle Basel)에서 선보인 독일 작가 안네 임호프(Anne Imhof)의 개인전 “공포(Angst)”와, 함께 선보인 5시간 분량의 퍼포먼스였다. 메인 공간의 중앙에 놓인 자궁 모양 같기도 한 대형 풀(pool)과 이를 둘러싼 회화 작품들, 그리고 작은 공간에 마련된 면도크림 스프레이 통들과 두 마리의 살아 있는 매. 이 괴이한 분위기 속에서 퍼포머들은 내러티브도 굴곡도 전혀 없는 퍼포먼스를 진행했고, 그들의 동작은 매순간 ‘흐르는 이미지’를 생산해 냈다. 퍼포머들은 간혹 스마트폰을 꺼내 스크린을 활용하거나 작가가 메신저로 즉각 전달하는 지령을 읽고 퍼포먼스에 반영하기도 했다. 축적과 전개를 거부하는 이 퍼포먼스는 어떤 상황이나 정보에 통상 ‘참조적’인 작금의 포스트 인터넷 아트와 달리 매우 ‘개인적’이었다.
미술관에서 뒤바뀐 우산을 들고 허겁지겁 호텔로 돌아와 체크아웃을 했다. 문득 호텔 직원이 내년 아트바젤에도 같은 호텔에서 묵을 건지 묻고는, 그렇다면 지금 바로 예약을 해도 좋다고 말했다. 아트바젤은 이미 내년을 달린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과 비교문화학 전공. 월간 “아트인컬처” 기자 역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펴낸 2013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백서』(2014) 정리, 『글로벌 아트마켓 크리틱』(2016, 미메시스) 편집 참여. 현재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국내외 문화예술 전문지에 기고 중. facebook.com/youngjun.tak.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