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영국의 아카이브 전문가들이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아트 아카이브’에 관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국내 참가자들은 자신이 속한 기관이나 독립 기획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국내 아트 아카이브의 현주소와 당면 과제를 소개하는 한편, 영국 측의 아카이브 실무 담당 전문가로 이루어진 현지 발제자들은 영국 아트 아카이브의 활용 사례를 소개했다. 서로 다른 아트 아카이브의 역사와 문화, 운영 환경을 가진 두 전문가 집단이 한 자리에 모여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아트 앤 아카이브(Art and Archives) 라운드테이블”은 프로젝트 비아와 ARLIS/UK & Ireland(the Art Libraries Society)의 공동 기획으로 이루어졌다. ARLIS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문화 예술 분야 전문 사서와 아키비스트들이 모여 활동하는 일종의 실무자 네트워크 조직이다. 국내 아키비스트 및 큐레이터로 구성된 총 여섯 명의 비아의 리서치 트립 참가자들은 일정에 따라 런던의 크고 작은 시각예술 아카이브 기관의 현장을 방문하였고 이를 모두 마친 마지막 날, ARLIS의 아트 앤 디자인 아카이브 위원회(CADA: Committee for Art & Design Archives)가 주최한 라운드테이블에 참여했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 미술계에 불어온 아카이브 열풍으로 기록물을 활용한 각종 아카이브 전시와 작품의 등장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러나 전시 기획 콘텐츠로써 아카이브의 의미와 가치가 제대로 조명되고 있는지와 예술 자료 수집과 보존, 관리 체제와 운영 실태에 대한 실질적인 관심과 지원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아직 물음표이다. 일단 유의미한 기록물들이 한데 모아져야 하고 이를 보관할 수 있는 물리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하며 체계적인 운영 체제와 관리 매뉴얼 그리고 이를 다룰 전문 인력도 필수적이다. 큐레이터가 아니라 아카이브를 전담하는 아키비스트가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본래의 자료 가치를 보존하고 파생적인 활용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아카이브의 탄탄한 형식과 내용을 구축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막 아트 아카이브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구축하기 위한 기본적인 토대를 닦아가는 초기 단계로 들어섰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술연구센터를 개관하면서 본격적인 미술 아카이브 구축 및 연구 사업, 정보 열람 서비스를 시작하였고, 국내 주요 아카이브 실무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아트아카이브협회가 발족한 것도 지난해 말이다.
라운드테이블 첫 번째 섹션의 포문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이지은 아키비스트와 백남준아트센터의 박상애 아키비스트가 이러한 국내 국공립 아트 아카이브의 태동과 지형도를 간략히 설명하는 것으로 열었다. 이와 함께,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의 정호경 학예연구사가 국내 대표적인 미술 전문 사립 아카이브 기관으로서 김달진미술자료연구소 및 박물관 역할과 활동에 대해 소개했다.
한편, 영국의 아키비스트들도 아카이브를 활용하는 각자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발표를 이어갔다. 아키비스트이자 영화제작자인 개빈 클락크(Gavin Clarke)는 국립극장(The National Theatre)에서 11년간 아키비스트로 재직하다 최근 독립적으로 아카이브 컨설팅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이 경력을 바탕으로 공연예술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과정의 특수성과 새로운 형태의 프로젝트나 다큐멘터리 제작의 기초가 되는 공연 예술의 잠재적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셔널 갤러리 리서치 센터(The National Gallery Research Centre) 의 대표 알랜 크룩햄(Alan Crookham)은 ‘아카이브 큐레이팅’에 초점을 두고 갤러리의 아카이브가 어떻게 연구 프로젝트와 전시의 디스플레이로 활용되고 있는지 설명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는 아티스트의 관점도 들어볼 수 있었다. 내셔널 아카이브나 BBC 영상 아카이브 등 주로 본인이 직접 리서치 과정을 거쳐 영상 작업을 만드는 루스 맥레난(Ruth Maclennan)은 다양한 형태의 자료 조사 결과물이 작품으로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국내 참가자들의 발표 내용이 일차적으로 아카이브를 만들어 가는데 필요한 운영 체제와 구조, 즉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제반 여건에 무게를 두었다면, 영국 측의 발표는 아카이브 콘텐츠에 접근하여 새로운 기획이나 프로젝트로 탈바꿈시키는 아카이브 ‘활용’에 대한 다양한 방법론이 더 부각되었다.
역사나 규모면에서 국내와 영국의 아트 아카이브 현황과 사례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영국은 테이트(Tate)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 내셔널 갤러리(The National Gallery) 등을 통해 오랜 시간 축적된 방대한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하는 노하우를 이미 갖추고, 이를 전시와 작품 또는 교육으로 연결시키는 확장된 개념으로 아카이브 활용하기를 실험하는 단계에 있다. 주요 대형 미술 기관 밖에서도 다양한 주체들이 특화된 주제와 차별화된 방식으로 대안적인 아카이브를 만들고 공유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반면, 국내 아트 아카이브의 현실은 앞서 언급했듯이 활용 단계 전에 선행되어야 할 기초적인 기록화 작업들이 산재해있다. 이러한 아카이브의 구축과 활용의 선후 관계에 대한 논의는 양국의 발제가 모두 끝난 후 이어진 토론에서도 조명되었다. 박상애 아키비스트는 국내 미술계에 유행처럼 번진 아카이브 개념의 등장이 프로젝트 기획이나 창작 소재로만 소모되는 경향을 염려하면서, 기관 아카이브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자료를 수집, 보존, 관리하는 기본적인 토대 마련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아키비스트 빅토리아 레인(Victoria Lane)은 아카이브를 활용하는 다층화된 접근 방법과 아이디어, 전략이 오히려 더욱 풍부한 내용의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카이브의 구축과 활용, 두 가지 축이 상호보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이를테면, 프로젝트 비아 참가자들의 개별 프로젝트와 행보에서 이 같은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김해주 큐레이터는 국립현대무용단 2014년 시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기획 중인 《결정적 순간들: 공간사랑, 아카이브, 퍼포먼스》에 대해 발표했다. 이는 소극장 ‘공간사랑’에 관한 기록물 중심의 전시로 파편적으로 남아 있던 ‘역사와 기억’의 자료들을 한데 모으고 현재의 시점으로 재구성하는 전시이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공간사랑은 1970–80년대 새로운 형식의 실험 무용 공연이 이어졌던 곳으로 한국현대무용 역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공간이다. 이어서 우현정 큐레이터는 동대문시장에서 찾은 좋은 디자인의 물건을 수집하여 전통 시장에서 발견한 디자인의 가치, 윤리적 디자인의 의미를 재조명한 기획 전시 《시장의 재발견》을 소개했다. 이는 아카이빙 행위를 접목한 창작 과정이 어떻게 특정 지역 문화를 새로운 관점으로 기록하고 재해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큐레이팅과 아카이브의 공생 관계와 접점에 관한 국내외 정보를 전달하는 온라인 리서치 플랫폼 ‘미팅룸(meetingroom)’의 황정인 편집장은 시각예술 아카이브에 관여하는 아키비스트, 큐레이터, 아티스트, 보존 처리 전문가와 같은 전문가 집단이 생각을 공유하고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공립기관의 굵직한 시각예술 아카이브 조성도 중요하지만 기관 밖에서 일어나는 소규모 아카이브의 구축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실험적인 창작 활동이나 연구의 촉진도 중요하다. 그래야 크고 작은 아카이브 기관을 운영하는 주체층이 두터워지고 전문성 있는 수집 분야의 스펙트럼도 넓어질 수 있다. 이번 라운드테이블에 초대된 관객들 중에는 독립적인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진행한 전문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영국의 조각가 배리 플라나간(Barry Flanagan)의 온라인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주도한 미술사가 조 멜빈(Jo Melvin)은 아티스트의 실제 작품과 기록물 사이의 시각적, 인지적 연결고리를 만드는 시도가 아카이브 시스템 내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틈새와 공백을 채워가는데 있어 효과적인 방법론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와 함께, 큐레이터 아타나시오스 벨리오스(Athanasios Velios)는 동료 큐레이터와 함께 진행했던 영국의 개념미술가 존 레이덤(John Latham)의 온라인 아카이브 프로젝트와 관련 전시 기획 사례에 비추어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그는 특정 기관의 논리에서 벗어나 보다 창의적이고 과감한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독립 아카이브의 큰 장점이라고 술회했다. 그러나 이렇게 기관 밖에서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프로젝트성 활동의 최대 고민거리는 재정의 확보이다. 다양하고 참신한 소규모 아카이브 프로젝트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재정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점에는 양국 모두가 동의했다. 영국도 상대적으로 여러 경로를 통해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위한 지원이 풀린다고 하더라도 단발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애써 만들어 놓은 결과물을 유지하기 힘든 경우가 더러 있다는 문제점도 지적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보완하는 데에는 아카이브 관련 전문가들 사이에 활발한 상호 소통과 협업이 중요한 키워드가 될 수 있다. ARLIS 조직 내부에는 이번 행사를 공동 주최한 아트 앤 디자인 아카이브 위원회(CADA) 외에도 교육, 출판, 기술 및 저작권 자문 등을 담당하는 일곱 개의 위원회가 더 있다. 이들은 해외의 관련 협회와도 교류하면서 국제적인 인적, 지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고, 업무적 연대를 통해 공동 학술 사업이나 교육 연계 프로그램 기획, 아티스트와의 협업 프로젝트 진행 등을 중심으로 그 입지를 다져왔다. 이렇게 실무적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활동들이 기록화 작업의 필수 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각종 기록 정보와 기술이 보다 효율적으로 공유될 수 있도록 돕고, 동시에 아카이브 활용과 해석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한국아트아카이브협회도 현재 협업의 필요성과 사업 모델의 방향성에 대한 기본적인 논의를 진행하면서 실무적 연계를 모색해 나가고 있다. 협회가 앞으로 보다 조직적인 네트워크 확대와 안정적 성장을 통해 국내 아트 아카이브의 활용도 및 연구 촉진에 구심적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라운드테이블 행사가 거둔 가장 큰 성과는 국내의 아트 아키비스트와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국내 전문 인력과 영국의 대표적인 실무자들이 실제로 만나 교류의 물꼬를 텄다는 것이다. 해외 선진 사례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없는 부분을 보완적으로 채워갈 수 있는 지점을 고민하면서 향후 양국 교류의 잠재성을 타진해 보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서로 다른 목적과 역할에 따라 아카이브에 관여하는 아키비스트, 아티스트, 큐레이터 군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동의 현안을 논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했다. 상호 간 업무와 시각 차이에 대한 이해도를 쌓아가는 이런 과정 자체가 보다 창의적인 아카이브 구축과 활용 방법을 적극적으로 고안하게 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 아카이브는 한때의 유행처럼 떠올랐다가 사그라지는 이슈가 아닌, 향후 오십년, 백년 이후 한국 미술의 미래를 그려가는 장기전이다. 동아시아 미술의 큰 지형도 속에서, 나아가 국제 미술계와의 관계망 속에서 주체적인 관점으로 한국 미술 아트 아카이브 구축과 활용을 병행해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사진촬영 / 류창우, 사진제공 / 프로젝트 비아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현대미술이론(Contemporary Art Theory)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동대학원에서 시각문화(Visual Cultures)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팅룸(meetingroom)의 아트 아카이브 연구팀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공저로는 『셰어 미: 공유하는 미술, 반응하는 플랫폼』 (스위밍꿀, 2019)과 『셰어 미: 재난 이후의 미술, 미래를 상상하기』 (선드리프레스, 2021)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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