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서 비엔날레가 있다면 공연예술에서는 페스티벌이 있다. '퍼포마(Performa)' 는 페스티벌의 모델이 결합된 비엔날레이다. 장기간을 하나하나의 작업으로 채우는, 즉 그때 보지 않으면 놓치고 마는 페스티벌의 시간성과 비엔날레가 추구하는 아젠다의 제시를 결합했다는 뜻이다. 미디어아트비엔날레, 사진비엔날레 등 장르 특성화된 비엔날레를 종종 볼 수 있지만, '퍼포먼스' 에만 할애된 비엔날레는 2005년에 시작한 퍼포마가 처음이었다.1)
꼭 ‘페스티벌’이나 ‘비엔날레’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더라도 퍼포먼스를 다루는 연례적 프로그램은 사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기관을 중심으로 많이 전개되고 있다. 테이트나 모마처럼 학예실 내에 퍼포먼스 분과가 특성화된 곳은 물론, 극장을 갖춘 퐁피두센터는 현대무용과 실험음악을 꾸준히 공연하고 있고, 카르티에재단 같은 사립기관에서도 정기적인 퍼포먼스 프로그램을 열고 있다. 이러한 기관의 프로그램과 퍼포마가 차별화되는 지점은 일단 규모다. 뉴욕 전역의 50여 개 장소에서 ‘퍼포마’가 열리는 1개월 여 동안 매일 하루에 3개에서 많게는 7~8개까지 퍼포먼스와 함께 토크, 스크리닝 등이 배치돼 열기의 군불이 꺼지지 않는다. 과연 ‘퍼포먼스’가 현재 예술 내에서 가장 뜨거운 장르라는 인상을 심어줄 법하다. 공연예술 분야로 보면, 최대의 페스티벌인 아비뇽과 에든버러를 비롯해, 쿤스텐페스티벌이나 플레이그라운드 등 조금 더 실험적인 면모를 가진 퍼포먼스 프로그램은 늘 어디서나 열리고 있다. 국가 간 이동이 용이한 유럽 내에서는 여러 극장과 페스티벌이 공동으로 작품의 제작비를 충당하고 있고, 하나의 작품이 제작되면 여러 도시를 투어하면서 유통의 경로를 확보하기 때문에 페스티벌이 지속적으로 열릴 수 있다.2)
1) 2013년 짐바브웨에서 아프리카의 동시대 퍼포먼스와 라이브 아트를 다루는 <아프리퍼포마 비엔날레>가 신설됐다.
2) 이렇게 생성된 유럽 퍼포먼스 아트씬을 통해 1990년대 이후 무용, 연극의 전 방위적인 작가들, 이를테면 자비에 르 루아, 제롬 벨, 리미니 프로토콜, 로메오 카스텔루치 등의 작가가 성장했다.
공연예술은 일반적으로 미술에 비해 많은 인력과 장치가 동원되는 만큼 이렇게 유통의 경로를 확보하고 공동제작에 참여하지 않으면 페스티벌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섬이나 마찬가지인 한국의 환경도 그러하지만 뉴욕의 퍼포마도 페스티벌로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고립된 환경에 놓여 있다. 공공기금도 없고 상업성에 잠식되어 이렇다 할 실험적인 작품을 내놓지 못하는 미국의 공연예술 환경에서는 적절한 파트너를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특정한 기반 시설도, 고정된 정부 보조금도 없는 퍼포마가 후원금과, 작가와의 네트워크, 뉴욕 시내의 여러 예술 기관들(특히 미술관)과의 협력으로 26억 원의 운영비를 충당하고, 100여 개의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임에 틀림없다. 여기에는 뉴욕 아트씬에서 한동안 상실된 퍼포먼스의 끈을 다시 연결하고자 한 창립자 로즐리 골드버그(Roselee Goldberg)의 강한 의지가 동력이었다. 유럽의 퍼포먼스씬이 무용과 연극, 음악 등의 장르 내에서의 실험과 갱신을 통해 점차 이웃한 예술의 형식으로 확장되면서 미술관, 갤러리의 관객과 만나게 된 반면, 1960~70년대 플럭서스와 해프닝, 개념미술의 본산이었던 뉴욕은 퍼포먼스에 있어서만은 유예된 상태에 머물렀다.
퍼포마는 미술사 안에서 퍼포먼스를 새롭게 발견하고 역사를 연장한다는 점에서 다른 공연예술의 페스티벌과 차별화된다. 미술 기반의 작가가 주로 초청되는 것을 비롯해 구체적으로 퍼포마는 2009년 이후 매 에디션 마다 역사적 참조점을 정해 비엔날레의 주제로 삼고 있다. 2009년은 미래주의, 2011년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2013년은 초현실주의였다. 퍼포먼스의 역사를 정리한 로즐리 골드버그의 저서 『Performance Art: From Futurism to the Present』3)의 시작점 및 전개와 일치한다.4) 또 하나 퍼포마의 특이점은 작가의 퍼포먼스 제작을 지원하는 ‘퍼포마 커미션’ 프로그램이다. 시각예술에 기반을 둔 작가의 퍼포먼스 작업 제작 전반을 지원한다.5)
‘퍼포마 커미션’이 비엔날레의 주요 프로그램이라면, ‘퍼포마 프로젝트’는 뉴욕의 주요 예술기관과의 공동기획으로 제작된 프로그램이고, ‘퍼포마 프리미어’는 다른 나라나 도시에서 이미 제작됐어도 퍼포마에 초청해 뉴욕에서 초연하는 작품들이다. 2013년까지 총 5회의 에디션을 진행하는 동안 퍼포마는 규모의 확장과 함께 그 구성에서도 기존의 비엔날레 모델을 차용한다.6)
3) 『행위예술』이라는 제목으로 1989년 동문선에서 번역, 출간됐으나 현재는 절판.
4) 2009년에는 클라우스 비센바흐와 함께 미래주의 선언이 발표된 1909년을 기점으로 퍼포먼스 역사를 정리하는 아카이브 전시 <100 years>를 MoMA P.S1에서 개최했다.
5) 쉬린 네샤트, 아르토 린제이, 오머 파스트, 아이작 줄리언 등 현재까지 총 41개의 ‘퍼포마 커미션’ 작업이 제작됐다.
6) 비엔날레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만 한시적으로 운용되는 ‘퍼포마 허브’는 안내소의 역할과 함께 ‘퍼포마 인스티튜트’라는 리서치와 교육, 토크의 장소로 활용된다. 또한 지난 해는 ‘Pavillion without Walls’이라는 타이틀로 특정 국가의 퍼포먼스 씬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을 신설하여 노르웨이와 폴란드의 작업을 선보였다. 뉴욕 내 기관과의 네트워크뿐 아니라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비엔날레의 성장을 모색하는 것으로 보인다.
퍼포마는 미술관, 극장, 거리 등 다양한 공간을 활용하는 퍼포먼스의 특성상 뉴욕 전역에 흩어져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전시의 형태라면 아무리 기간이 길어도 하루 이틀 안에 전반을 훑어 볼 수 있는 데 반해, 11월 중 24일 간 진행되는 100여 개에 가까운 작업을 모두 보기란 뉴욕에 거주하는 사람에게도 무리다. 단기간의 방문으로 페스티벌의 면모를 일반화하고 섣불리 평가하기란 부당해 보인다. 필자가 본 14개의 퍼포먼스는 하나의 기획 관점으로 정리하기에는 서로 너무 다른 형식과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수보드 굽타가 매일 직접 인도 전통 요리를 만들고 관객과 음식을 나눠 먹는 < Celebration >이나 퍼포마 기간 내내 조금씩 작업을 만들어 가는 파웰 알타머의 < Biba Performa > 는 커뮤니티의 형성에 중심을 둔 작업이었다. 필름의 물성 자체를 조각, 설치의 장치로 사용하면서 영상의 대사를 객석 내 다양한 위치에서 배우가 직접 낭독하는 로자 바르바의 < Subconsious Society Live >는 영상 내 인물의 심리적 상태를 영상 바깥의 장치로 분리해 표현하는 퍼포먼스였다. 신문과 뉴스에 등장한 유명인의 말을 뮤지컬 코러스의 형식을 사용하여 공연한 캘리 스푸너의 < And You Were Wonderful, On Stage >는 구어(口語)를 사용하는 퍼포먼스의 새로운 형식을 소개해 주었다. 그 밖에 영국 작가 에디 픽의 인간-조각의 도발적인 동작을 소개한 < Endymion > 이나 기존의 설치작업을 넘어서 본격적인 그리스 희극을 차용한 정극 연출에 뛰어든 알렉산더 싱의 < The Humans > 는 많은 주목을 받았으나, 시각적 화려함 이상의 감흥을 전달하지 못했다.
1960년대 이후 꾸준히 작업을 해 온 조안 조나스와 벤자민 패터슨 같은 노장의 퍼포먼스는 앞서 소개한 작가들보다 훨씬 명확한 메시지와 감동을 전달했다. 몸과 스크린에 투영된 이미지의 중첩과 변형으로 세계를 보는 단선적인 방식에 질문을 던지는 조안 조나스의 시적인 퍼포먼스나 위트 있는 형식에 진지함을 담아 자신의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퍼포먼스를 회고전 형식으로 공연한 벤자민 패터슨의 작업은 모두 과도한 장식 없는 담백한 목소리였다. 이는 또한 동시에 휘트니미술관, 뉴뮤지엄 등 뉴욕의 주요 기관에서 열리는 퍼포먼스와 연계한 다양한 전시와 함께 1960~70년대 뉴욕의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의 역사 안에서 퍼포먼스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비엔날레나 페스티벌이 가지는 축제적 성격은 단기간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순간적으로 논의를 촉발시키기에 유효한 장치이다. 퍼포마가 시작된 2005년이 퍼포먼스라는 예술 형식에 관심이 환기된 분기점이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비엔날레가 표방하던 실험성과 효력에 의문이 제기되는 요즈음 퍼포마 역시 규모의 미학과 확장일변의 장치로 과연 지속적인 실험의 효력을 담보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반자본적 기치의 표상이던 뉴욕의 아방가르드 퍼포먼스 유산을 모토로 삼기에는 역시 시대가 많이 변한 것이 사실이다. 가볍고도 직접적이면서도 관객과 공유 가능한 경험으로 인식의 전환을 시도하는 퍼포먼스의 장점이 유지되기에 이 같은 거대한 몸체가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공연 예술의 덩치 큰 페스티벌이 작가에게 스펙터클한 작업을 실현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퍼포마 역시 메이저 기관과의 협력으로 대형 작업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장의 역할을 지속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대형 프로덕션에서 소규모 프로덕션까지 모든 퍼포먼스의 카탈로그를 망라하는 페스티벌의 반대편에 시선을 돌려야 할 때다. 작은 규모, 소수의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섬세하게 관점을 제시하고, 현재를 읽어내는 퍼포먼스 페스티벌, 비엔날레 혹은 무어라 이름 붙여도 좋은 어떠한 시도들 말이다.
퍼포마 홈페이지: http://performa-arts.org/
퍼포마 PERFORMA13 홈페이지: http://13.performa-arts.org/
*본 기사는 프로젝트 비아(Project VIA)의 지원으로 아트인컬처(아트인아시아)와 더아트로가 함께 기획·게재하는 글입니다.
김해주는 전시 기획자이며 2022년 부산비엔날레 전시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