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영국 런던 리젠트 파크에서 제1회 ‘프리즈 아트페어(Frieze Art Fair)’가 열리기 바로 전날 밤, 페어의 공동 창립자인 매튜 슬로토버(Matthew Slotover)는 악몽을 꿨다. 전시를 위해 공들여 세웠던 미니멀한 순백의 초대형 가건물이 사라지고, 대신 만국기 장식을 주렁주렁 매단 뾰족 지붕 서커스 텐트가 서 있는 꿈이었다. 10년 전 슬로토버의 악몽은 페어 성공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겠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그의 꿈은 꽤 예언적이다. 수백억 원짜리 예술작품 수천 점을 한데 모아놓고 흥정과 거래가 이뤄지는 ‘프리즈 아트페어’는 그 자체로 거대한 “돈과 예술의 서커스”(영국 일간 [가디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번째 ‘프리즈 아트페어’가 지난 10월 17일부터 20일까지 런던 리젠트 파크에서 열렸다. 올해엔 2000년 이후 현대미술 최신작을 선보이는 ‘프리즈 런던(Frieze London)’에 150곳, 동서고금의 걸작들을 선보이는 ‘프리즈 마스터스(Frieze Masters)’에는 130곳 갤러리가 참여했다. 관람객은 6만 명을 넘겼다. 프리즈는 2006년 이후 미술품 거래액을 공식 집계하지 않지만 블룸버그 통신은 프리즈가 열리는 1주일인 ‘프리즈 위크’ 동안 런던에서 프리즈와 함께 진행되는 10여 개 아트페어와 경매시장을 통해 총 13억 파운드(약 2조 2천억 원) 규모의 미술품 거래가 이뤄진 것으로 추정했다.
“개막 첫날 그림을 다 팔았다는 식으로 주장하면 뉴스에 오르내리긴 좋겠죠. 하지만 그런 건 사실 여부 확인도 어렵고 큰 의미도 없어요. 이곳 프리즈에선 수집가도 갤러리스트도 좀 더 세련되고 문명화된(civilized) 방식으로 서로를 만나죠.” 개막 하루 전인 16일 ‘프리즈 마스터스’의 VIP·미디어 프리뷰 현장.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의 파비안 랭(Fabian Lang) 세일즈 디렉터는 근래 재조명되고 있는 미국 인물화가 알리스 닐(Alice Neel, 1907~1984)의 작품들로 꾸민 부스에서 “‘프리즈 마스터스’는 마스트리히트 아트페어(TEFAF Maastricht Art Fair)와 흡사하지만 훨씬 덜 혼란스럽고 정돈돼 있다”고 말했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현대미술잡지 ‘프리즈’의 발행인들이 시작한 이 아트페어는 본래 현대미술 작가들의 최신작을 소개하는 시장이다. 하지만 올해는 최신작 중심의 ‘프리즈 런던’보다 작년에 시작된 동서고금 걸작별로 전시한 ‘프리즈 마스터스’가 더 주목받았다.
두 전시는 전시장 분위기부터 달랐다. 명품을 휘감은 부유한 컬렉터들이 여유롭게 부스 사이를 오가며 갤러리스트와 그림값을 흥정하는 마스터스 전시장은 마치 회원제 명품숍처럼 보였다. 올해는 특히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블럼 앤 포(Blum and Poe)가 6년 만에 프리즈에 돌아왔고, 뉴욕의 매리언 굿맨(Marian Goodman)도 런던에 새 갤러리를 열며 4년 만에 프리즈에 복귀했다. 이곳 미술계에선 “영국의 경제 회복 속도가 미국이나 대륙 유럽보다 빨라 세계 갤러리들이 다시 런던의 시장성에 주목하는 것 같다”는 희망 섞인 관측도 나온다.
이번 ‘마스터스’에는 작년보다 30곳 늘어난 130개 갤러리가 참여했다. 영국과 이탈리아 등의 고미술품 전문 갤러리들이 대거 합류해 고대 이집트부터 중세 유럽, 20세기의 거장들까지 고금의 걸작을 총망라한 전시 진용을 갖췄다. 중세 종교화와 교회제단 장식 사이를 걷다 보면 박물관에 들어온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 불쑥불쑥 프랜시스 베이컨, 알베르토 자코메티, 루이즈 부르주아 같은 현대 거장들의 작품들도 만났다. 마티스의 잉크 드로잉 20여 점을 들고 온 ‘토머스 깁슨 파인 아츠(Thomas Gibson Fine Art)’나 17~18세기 일본 춘화(春畵)로만 부스를 꾸민 ‘제바스티안 이자르(Sebastian Izzard)’처럼 한 작가 혹은 테마에 집중하는 갤러리들도 많았다. 전체적인 전시 아이템의 폭과 깊이도 한층 다양해졌다.
‘프리즈 런던’은 마스터스 전시장을 나와 리젠트 공원의 가로수 숲길을 15분 정도 가로질러 걸어야 한다. 그 길 중간에 만나는 조각공원은 프리즈의 또 다른 자랑거리다. 11세기 사자 석상, 13세기 가고일 등 중세 조각과 석상들부터 주디 시카고와 헬렌 채드위크 등 20세기 작가들까지 어림잡아 30여 점 작품들이 너른 풀밭 위에 자리 잡았다. 국제갤러리가 선보인 김홍석 작가의 2012년 작 < Love > 는 공원 입구 명당을 차지하며 많은 관람객들이 줄을 서며 사진을 찍을 만큼 꽤 인기를 끌었다. 리젠트파크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프리즈 런던’ 전시장은 컬렉터와 일반 관람객들이 섞여 북적였다. ‘프리즈 마스터스’가 회원제 명품숍이라면 ‘프리즈 런던’은 번화가 백화점에 가까운 모습이다. 가고시언(Gagosian Gallery) 부스의 제프 쿤스, 페로탱(Galerie Perrotin) 부스의 무라카미 다카시처럼 값비싼 인기 작가들은 고객의 발길을 붙들어 매는 일종의 미끼 상품 역할이다.
아트페어는 본질적으로 미술품 거래 시장이다. 페어 주최 측은 ‘프리즈 런던’ 참여 갤러리를 작년 175곳에서 올해 152곳으로 줄였다. ‘마스터스’ 규모를 대폭 키운 것과는 정반대다. 또 전시장엔 설립 10년 미만 갤러리들의 독립 프로젝트 전시인 ‘포커스(Focus)’ 섹션, 신진 갤러리의 대표작가 1인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프레임(Frame)’ 섹션 등을 마련했다. 아무래도 돈이 덜 되는 컨템퍼러리 최신작 페어의 규모를 살짝 다이어트하면서 시장으로서의 효율은 높이려는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다. 현대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준다는 원래 취지를 놓지 않으면서, 갤러리들은 시장성 있고 ‘팔릴 만한’ 작가 1~2명에게 집중하도록 유도했다. 이른바 될 성싶은 중저가 작가들을 입도선매하도록 컬렉터들을 유혹하는 ‘1석 3조’의 전시 포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프리즈의 미디어 스폰서인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런 변화를 “야단법석(buzz)과 사업(business) 사이의 균형 잡기”라고 표현했다.
프리즈는 또 올해 일반 티켓 공급량을 25퍼센트 줄이면서 VIP티켓도 함께 줄였다. 지난해 6만 7천여 명의 관람객 가운데 80퍼센트 이상이 그림을 사지 않는 ‘윈도 쇼핑객’이었다는 조사 결과에 따라 구경만 하는 관람객 수를 좀 줄여보겠다는 속셈이다. 덕분에 전시 공간은 넓어지고 편의 시설은 늘어났으며, VIP들은 더 여유롭게 감상과 구매 상담을 할 수 있게 됐다. 16일 ‘VIP프리뷰’에서 프리즈 공동창립자 어맨더 샤프(Amanda Sharp)는 “프리즈는 젊은 신진(emerging) 작가와 갤러리들이 제대로 조명 받도록 하는 것과, 기존의 경험 많은(established and experienced) 갤러리들에게 제대로 된 시장을 주는 것 모두 중요하게 여긴다”라고 말했다. ‘현대미술의 최전선’이라는 프리즈 본래의 명성을 지키면서 기존 거대 갤러리들을 위한 시장으로서의 기능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뜻. 집토끼 산토끼 다 잡겠다는 야심찬 선언이자 합리적인 돈의 논리다.
지난해 프리즈에선 미로가 2천만 달러, 피카소가 900만 달러에 팔렸다. 올해 프리즈 개막을 앞두고는 최근 새로 발견된 소(小)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Younger·1564~1638)의 1611년 작 <베들레헴의 호구 조사(The Census at Bethlehem)>를 사기 위해 9명의 VIP 컬렉터들이 달려들었고, 600만 파운드(약 102억 원)에 예약이 끝났다는 뉴스가 화제였다. 마스터스의 디렉터 빅토리아 시덜(Victoria Siddall)은 한 인터뷰에서 “프리즈는 새 것을 렌즈로 옛것을 들여다보는, 다른 아트페어들과 차별화된 접근 방식을 갖고 있다. 문화적으로뿐 아니라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아트페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프리즈 공동 창립자인 슬로토버는 “2000년대 중반의 거품 경제 시기 수준은 아니어도, 미술시장은 세상이 생각하듯 경제 위기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고 최상급 갤러리들은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술계에서도 부자들은 갈수록 더욱 더 부자가 된다”고 했다. 프리즈가 올해부터 영국의 전설적 패션 디자이너 브랜드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과 공식 스폰서 계약을 맺고, 프리즈 주간 런던의 알렉산더 맥퀸 숍에서 프리즈 아트상품을 전시, 판매하기 시작한 것도 현대미술에 대한 소비자의 수요를 읽은 영리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싹쓸이(sweep)예요 싹쓸이. 프리즈 기간에는 다른 건 모두 묻혀버려요. 신문도 방송도 온통 테이트(Tate), 헤이워드(Hayward), 화이트채플(Whitechapel) 같은 유명 미술관, 갤러리와 그들의 작가 이름으로 뒤덮이니까요.” 영국 내 유명 초상화가 존 킨은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프리즈가 세계 최대 현대미술 축제로 손꼽히는 행사이긴 하지만 거대 갤러리와 값비싼 작가들이 독점하는 ‘그들만의 리그’인 것도 사실이다. 마치 ‘선댄스 영화제(Sundance Film Festival)’와 같은 기간 열리는 ‘슬램댄스 영화제(Slamdance Film Festival)’처럼, 매년 프리즈 주간 런던에는 프리즈의 독점에 반기를 든 갤러리와 작가들이 뭉쳐 여는 대안 아트페어도 함께 열린다. 대표적인 것이 이름부터 ‘또 다른(the other)’인 ‘디 아더 아트페어(The Other Art Fair)’. 2011년 시작돼 올해 3년째로, 런던 북동부 벤처·예술지구 올드 트루먼 브루어리에서 400명이 넘는 작가들이 참여한다. 다른 대안 아트페어인 ‘모니커(Moniker)’와 함께 열리고 있다.
프리즈뿐 아니라 아트 바젤 등 초대형 아트페어마다 쫓아다니며 반짝 전시를 여는 ‘움직이는 미술관(Moving Museum)’ 운동도 시작됐다. 런던·베를린·뉴욕의 신진 갤러리 22곳이 조직한 ‘선데이 아트페어(Sunday Art Fair)’, 시각장애인을 위한 세계 최초의 촉각 미술전을 표방하는 ‘터치 아트페어(Touch Art Fair)’ 등도 눈길을 끈다. 프리즈 위크 크리스티(Christie's)는 현대미술 작품을 프린트해 일련번호를 매긴 한정판으로 저렴하게 전시, 판매한 ‘멀티플라이드(Multiplied Art Fair)’전을 열었고, 동물을 다룬 작품만 따로 모은 ‘애니멀 아트페어(Animal Art Fair)’도 리젠트 파크 인근에서 함께 열렸다.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은 최근 10년 사이 영국 내 최대 규모의 《파울 클레 회고전(The EY Exhibition: Paul Klee - Making Visible)》을 시작했고, 같은 날 덜위치 픽처 갤러리(Dulwich Picture Gallery)는 제임스 휘슬러(James Whistler,1834~1903) 등 미국 출신 화가들을 재조명하는 《런던의 미국인전(An American in London: Whistler and the Thames)》을 개막했다. 코톨드 갤러리(The Courtauld Gallery)는 《젊은 뒤러(The Young Dürer: Drawing the Figure)》전을,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에서는《고대 콜롬비아의 황금 유물 특별전(Beyond El Dorado: power and gold in ancient Colombia)》과 함께 현지에서 큰 화제가 됐던 일본 춘화전 《춘화 : 1600~1900년대 일본 예술에서 성과 쾌락(Shunga: sex and pleasure in Japanese art)》이 관람객을 만났다.
[사진제공]이태훈
조선일보 문화부에서 미술과 종교 분야를 담당했다. 무라카미 다카시, 장 샤오강, 피터 린드버그, 김종학 등을 인터뷰했고, 국내외 전시와 아트페어를 취재하고 기사로 썼다. 현재 영국 연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