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에게 있어 리서치는 짓고자하는 건물의 설계 기반을 견고히 다지기 위해 뜨는 첫 삽과 같다. 이 단계의 중요성을 주목한 프로젝트 비아의 리서치 트립 지원은 열정을 가지고 고군부투 하고 있는 기획자들에게 희소식으로 다가갔다. 그 중 해외기관가 공동협력 기획하여 지원하는 큐레이토리얼 워크숍의 첫 번째 장소는 런던이었다. 이 런던행 티켓을 잡은 6명의 큐레이터들은 6일간의 뭐크숍에서 어떤 것을 얻고 느꼈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큐레이터는 전시에 대한 발상을 시작으로, 이후 리서치로 전시 조직을 구상하고, 실천 가능한 범위를 타진하여 결과물을 완성시킨다. 스스로 찾아 나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구할 수 없는 게 이 직업의 숙명적 결과다. 이렇게 일한 지도 10년이 지난 지금, 그간 내가 몸담았던 대안공간, 갤러리, 독립 프로젝트를 통해 많은 전시들을 기획해왔지만 전시 결과물을 가지고 큐레이팅의 질을 판단할 수는 없었다. 큐레이팅을 하면 할수록 그 시작과 끝 사이 보이지 않는 과정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니, 이는 바로 리서치와 네트워킹 구축이다. 이들의 부재는 마치 건축가가 주변 콘텍스트에 대한 고려 없이 아이디어만으로 건축물을 하나의 조각품처럼 제작해내는 상황과 같다. 그간의 기금과 지원금이 큐레이터의 결과물, 주로 전시형태를 지원한 반면, ‘프로젝트 비아’는 큐레이터의 프로젝트 실행을 위한 사전 리서치 트립을 지원한다. 큐레이팅의 ‘결과’보다는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지원이 놀랍고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번에 내가 참여한 런던에서의 큐레이토리얼 워크숍은 테이트 모던의 아시아-태평양 미술연구소(Tate Research Centre: Asia-Pacific)를 파트너로 하여 심포지엄 참관, 워크숍 및 런던의 주요 미술기관 방문 등을 통해 국내 큐레이터의 해외 네트워킹 강화를 목표로 하고 있어 리서치와 네트워크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심화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런던에 모두 잘 도착하셨나요?’ 워크숍 전날 프로젝트 비아 담당자로부터 메시지가 날아오고, 선정된 6명의 큐레이터가 모두 런던에 모였다. 베이징 아트미아재단의 고원석, 독립기획자인 전유신, 갤러리 화이트블럭의 임종은, 작가이자 독립기획자기도 한 윤주희, 비영리전시공간협의회의 박정연이 나와 6일간 일정에 동행한 선정자들이다. 6명의 큐레이터는 각자 다른 배경과 주제로 리서치 트립을 계획하고 있지만, 이번 런던 워크숍을 지원한 만큼 아시아 큐레이터로서의 정체성 모색과 세계 속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의지와 포부를 공유하고 있었다. 10월 19일, 런던에서의 우리의 첫날은 일 년 중 런던 미술계를 가장 뜨겁게 달구는 ‘프리즈 아트페어(Frieze Art Fair)’를 관람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아트페어 측은 컨템퍼러리 아트를 선보이는 ‘프리즈(Frieze London)’와 모던 시기까지의 ‘프리즈 마스터즈(Frieze Masters)’ 두 페어를 차별화시킴으로써 침체된 미술시장 분위기를 전략적으로 극복하려 했다. 따라서 프리즈에서는 미술시장에 식상해진 주류 작품보다는 더 감각적이고 파격적인 디스플레이의 작품들이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았으며, 국제무대에 생소한 젊은 작가들을 솔로 쇼로 구성한 갤러리들과 남미, 동유럽, 아랍권의 갤러리가 오히려 좋은 반응을 얻는 분위기였다.
둘째 날, 주요 전시들을 관람하며 프리즈 기간 주목된 런던의 현대미술 동향을 전체적으로 살피고, 셋째 날 테이트 아시아-태평양 미술연구소가 주관한 심포지엄 ‘역사를 재고하며: 아시아 태평양 근현대 미술에서의 전통(Negotiating Histories: Traditions in Modern and Contemporary Asia-Pacific Art)’을 참관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워크숍 일정이 시작됐다. 한국, 중국, 일본,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각국에서 온 10명의 미술사학자, 큐레이터들은 각기 다른 자국의 문화, 사회, 역사적 콘텍스트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전통이 어떻게 계승되고 변화하는지를 논의했다. 한국 발제자였던 우정아 교수는 최정화 작가의 작품세계를 플라스틱 매체가 보여주는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국 모더니티에 접근하여 이목을 끌었다. 겐지 카지야(Kenji Kajiya) 교수는 일본의 근대건축 시기 시도된 신석기 문화 계승을 재조명해 정체성 모색을 고고학적인 범주로 확장시키고자 했다. 중국 발제자들의 경우, 변화된 사회 정치체제에 의해 급류 타듯 여러 양식들이 지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소실된 전통의 계승을 정신의 형식, 매체 등 여러 측면으로 고찰해보였다. 전통에 대한 논의는 이미 글로컬리즘 구조에서 자주 언급되었으나, 이번 심포지엄에서 각 지역의 문화, 예술, 사회, 역사, 지리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 실증적 연구 사례들은 오리엔탈리즘이나 후기 식민주의 판타지로부터 한층 진척된 의미로 다가왔다.
넷째 날은 이번 워크숍의 하이라이트로, 6명의 한국 큐레이터들의 발제와 테이트 모던의 디스플레이 책임자 메튜 갈(Matthew Gale), 리서치센터의 이숙경 큐레이터, 퍼포먼스 프로그램의 카푸친 페로(Capucine Perrot)의 발제가 상호 이뤄졌다. 질의 응답자로는 워크숍 참여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초청한 화이트채플갤러리(Whitechapel Art Gallery)의 다니엘 허만(Daniel F. Herrmann), 빅토리아앤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의 로잘리 킴(Rosalie Kim), 더쇼룸(The Showroom)의 에밀리 페식(Emily Pethick), 영국문화원(British Council)의 엠마 지포드미드(Emma Gifford-Mead), 전 아르놀피니(Arnolfini) 관장인 톰 트레버(Tom Trevor)가 논의에 진지함을 실었다. 발제 내용은 미술관 컬렉션의 디스플레이 전략과 배경, 아시아-태평양 미술연구소의 의의와 국제적 전망, 그리고 터빈홀, 탱크 등을 통해 급진적으로 선보여온 퍼포먼스 장르 등 테이트 모던에서 현재 주목하고 있는 논점들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었다.
이후 6명의 한국 큐레이터의 발제는 개개인의 큐레이팅 배경과 프로젝트들, 그리고 리서치 트립을 통한 향후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우리의 발제 후 질의응답은 개별 발표에 대한 의견보다는 국내 미술계의 동향과 시스템에 대한 질문들로 이어졌다. 특히 독립큐레이터, 비영리 공간 등을 위한 펀딩 구조에 관심이 컸는데, 정부기관과 지자체에 의해 다양한 경로로 구현된 국내 시스템에 놀라워하며 영국의 미약한 공공기금 구조를 비교하기도 했다.
국제무대에서 큐레이터로 생존한다는 것은, 곧 기획의 실천을 위한 다양한 네트워킹과 펀딩 능력과도 직결된다. 실제로 런던에서 우리가 방문한 비영리 공간들은 여러 경로로 펀딩 시스템과 네트워킹 구축에 힘을 싣고 있었다. 그 예로 개스웍스(Gasworks) 레지던시의 경우 옥션 회사인 소더비가 건물세를 지원하고 있는 등 크고 작은 회사부터 기업체까지 다양한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외 유명작가들을 다수 발굴한 비영리공간으로서 30년이 넘은 맷츠 갤러리(Matt’s Gallery), 옛 공장 건물을 개조한 치즌헤일 갤러리(Chisenhale Gallery)는 개관 후 대안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꿋꿋하게 유지하며 미술시장의 영향력에 개의치 않고 여전히 급진적 형식의 전시와 실험을 지속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했던 테이트 라이브러리/아카이브는 전시 도록과 책자, 각종 기사들뿐 아니라 한 작가의 낙서 종이부터 소소한 소지품까지 엄밀한 보존 방식을 거쳐 상세히 분류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라이브러리의 책자만도 현재 약 25만여 점, 작가의 작업에 관련한 아카이브만 100만여 점 이상을 소장하는 세계적 규모였다. 2주마다 미술관 큐레이터들과의 회의를 거쳐 신규 아카이브 소장품들을 선정하고, 전시될 아카이브 또한 협력하여 진행한다고 하니 아카이빙은 과거의 유품을 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쇼를 미리 구축하는 큐레이팅의 주요한 자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런던에서의 6일간의 워크숍은 동시대 미술시장의 경향(‘프리즈 아트페어’), 주류 미술관의 신경향과 변화 모색(테이트 모던), 동아시아 미술의 전망과 기대(테이트 아시아 태평양 리서치센터), 비영리공간과 레지던시의 실험들(개스웍스, 매츠 갤러리, 치즌헤일 갤러리), 과거와 현재의 자료를 통해 미래를 수집하는 아카이브(테이트 라이브러리/아카이브 센터) 등 여러 다양한 측면에서 현재의 동향들을 살피고, 이와 관련해 동시대 한국미술을 비교, 점검해볼 수 있었다. 개인이 접촉하려 했다면 불가능했을 여러 네트워킹이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적극적인 프로그래밍을 통해 마련된 점은 참여한 큐레이터로서 아주 고무적이고 의미 있는 자리였다. 또한 라운드 테이블에서 상이한 문화적 콘텍스트에 대해 현지 큐레이터들과 나눈 대화 또한 의미가 컸다. 이러한 과정들이 국제무대로 진출하고자 하는 국내 큐레이터들에게 논의에 대한 연구를 진척시킬 큰 경험이 될 것이다. “프로젝트 실현되면 꼭 소식 전해주세요. 런던에서 다시 봐요.” 리서치 중인 ‘모바일 홈(Mobile Home)’ 프로젝트 발표 후 몇몇 큐레이터들이 건넨 말은 리서치에서 나아가 프로젝트를 실현해야 하는 내게 큰 격려의 말이 되었다. 프로젝트 비아의 지원이 지속적인 프로그램들을 통해 국내 큐레이터의 국제적 경쟁력을 키우고, 이들이 벌린 다양한 ‘판’들을 통해 확장된 네트워크로 뻗어나가길 기대해본다.
심소미는 서울과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독립큐레이터로, 도시문화에 대한 비평적 개입으로서 전시와 공공프로젝트 및 리서치를 수행해 오고 있다. 주요 기획 전시로 <리얼-리얼시티>(아르코미술관, 2019), <환상벨트>(돈의문박물관마을, 2018), <마이크로시티랩>(서울시 곳곳, 2016) 등이 있다. 경기문화재단의 경기도 순회 공공미술프로젝트 <2018 공공하는 예술>의 예술감독을 역임했으며, 2018년 <제11회 이동석 전시기획상>을 받았다. 현재 계간 『문화/과학』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