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리옹비엔날레(2013. 9. 12~2014. 1 5))가 ‘그 사이에... 갑자기, 그리고(Entre-temps... Brusquement, et ensuite)’라는 주제로 리옹현대미술관을 비롯해 공장, 교회 등 총 5개의 공간에서 개최됐다. 올해 초청된 큐레이터는 아이슬란드 출신의 군나르 크바란(Gunnar B. Kvaran). 그는 현대미술의 거장부터 신진작가까지 총 70여 명의 작가를 초청해 전 세계의 복합적 서사를 간직한 작품을 소개한다. 이번 리옹비엔날레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지, 국제 비엔날레들의 범람 속에서 비엔날레의 역할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비엔날레의 출범부터 총감독을 맡고 있는 티에리 라스파이(Thierry Raspail)는 3회마다 새로운 주제어를 정하고, 초빙된 큐레이터는 그와 관련된 전시를 기획한다. 2009년에 제시돼 올해까지 지속된 주제어는 ‘전달(Transmission)’. 2009년 후 한루(Hou Hanru)는 ‘일상의 스펙터클’, 2011년 빅토리아 누트론(Victoria Noorthoorn)은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주제로 각기 다른 미학적 비전과 시각적인 스펙터클을 선사했다. 아시아 큐레이터의 사회적 성향을 띤 전시와, 남미 여성 큐레이터의 역동적이고 화려한 전시에 뒤를 이어 올해 크바란이 ‘이야기’ 자체를 주제로 내세운 것은 필자가 언급한 것처럼 해묵은 듯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수순 같기도 하다.
리옹비엔날레의 특징은 독특한 총감독(artistic director) 제도에 있다. 1991년에 첫 회를 시작한 리옹비엔날레는 지금까지 총감독 티에리 라스파이가 이끌어 오고 있다. 그는 그르노블미술관 큐레이터와 아프리카 말리의 바마코미술관장에 이어 1984년에 신설된 리옹현대미술관(MAC Lyon) 관장에 취임한 이래 지금까지 약 30년 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프랑스의 독특한 인사 체제로 볼 수 있는 이러한 장기적 ‘독재’는 전문성과 연속성을 위해 책임자에게 전적으로 권한을 위임함으로써 강력한 독창성과 권위를 발휘할 수 있다는 커다란 이점을 지니고 있다. 반대로 기대 수준의 카리스마와 실력을 지닌 인물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 불합리한 전횡이나 지리멸렬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위험을 수반한다. 라스파이의 경우 직접 리옹현대미술관과 리옹비엔날레를 창설한 인물인 만큼 처음부터 이러한 위험 요인을 가진 인물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스스로 매너리즘이나 권위의식에 사로잡히는 우를 범하는 대신 철저하게 리옹에 기반을 둔 동시대 미술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헌신해 왔다. 특히 리옹현대미술관 소장품 정책에 있어 주요 작가의 핵심적 이슈를 포괄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을 수집하는 ‘포괄적 작품(Oeuvre générique)’ 컬렉션 방식은 그의 성향이 잘 드러나는 것으로 평가 받는다. ‘포괄적 작품’이란 지금까지 한 작가의 모든 예술적 시도를 그것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문제의식 안에 종합한 작품을 가리킨다. 이러한 핵심적 계기를 제공하는 작품을 수집함으로써 예술가를 범주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소장품을 구성하고 있다.1)
아마도 이러한 노력의 저변에는 파리와 지역 사이에 놓인 모든 분야에서의 차별성, 특히 프랑스 제2의 도시이지만 문화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는 리옹의 예술적 선양에 대한 욕구가 다른 요인들과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열리는 유일한 비엔날레로서(2012년에 열린 파리 ‘라 트리엔날레’는 아직 안정적인 비엔날레 제도권의 궤도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리옹비엔날레는 지난 22년 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 주었다. 하랄드 제만를 위시해, 장 위베르 마르탱, 디종 르 콩소르시움, 니콜라 부리오, 제롬 상스,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후 한루 등 당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전시 기획자들이 국제전의 큐레이터를 맡으며 리옹비엔날레는 프랑스의 현대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핵심 전시로 자리 잡았다.
1) http://www.mac-lyon.com/mac/sections/fr/collection/projet_scientif/oeuvre_generique 소장 작가로는 존 발데사리, 조지 브레히트, 얀 파브르, 로베르 피유, 요아킴 페퍼, 루치오 폰타나, 일리야 카바코프, 조셉 코수스, 피터 무어, 올리비에 모셋, 장-뤽 파랑, 클라우디오 파르미지아니, 사르키스, 로렌스 와이너, 라 몬테 영, 마리안 자질라 등이 있다.
리옹비엔날레의 또 다른 특징은 주제의 선정 방식에 있다. 티에리 라스파이는 큐레이터들에게 3회의 비엔날레마다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1991년에는 ‘역사(Histoire)’였으며, 1997년에는 ‘전지구(Globale)’, 2003년에는 ‘시간성(Temporalité)’이었으며 2009년부터 이번 비엔날레까지는 ‘전달(Transmission)’이었다. 물론 이러한 화두를 큐레이터가 그대로 사용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주제 안에 녹여내도록 고려하게 된다. 연속성을 강조하는 총감독의 정책이 국제전 큐레이터와 상호작용을 통해 비엔날레에 반영되는 것, 이것이 리옹비엔날레의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2013년 리옹비엔날레의 큐레이터를 맡은 군나르 크바란은 ‘전달’을 ‘이야기’로 해석했다. ‘스토리’, ‘내러티브’ 혹은 ‘이야기(récit)’로 풀어낼 수 있는 이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크바란은 3명의 예술가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누보 로망(Nouveau Roman)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알랭 로브-그리에(Alain Robbe-Grillet), 오노 요코, 그리고 같은 아이슬란드 출신이자 서사구상(Figuration Narrative) 운동의 일원이었던 에로(Erró)가 그들이다. 이 3명의 작가들은 크바란의 멘토이자 그가 롤랑 바르트로부터 영감을 이어받은 ‘시각적 글쓰기’의 핵심적 예시를 제공한 인물들이다. 특히 오노 요코의 퍼포먼스 기록물인 〈Cut Piece〉(1964)는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내러티브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퍼포먼스는 관객들이 한 명 씩 작가의 옷을 가위로 찢어나가는 행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진 이 작품은 전적으로 관객에게 맡겨진 사건의 전개로 인해 매번 새로운 서사와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군나르 크바란은 아이슬란드 출신으로 레이캬비크(Reykjavik) 시립미술관장과 노르웨이의 베르겐미술관장을 역임했으며, 2001년부터는 오슬로의 민간 현대미술컬렉션인 아스트룹 피언리(Astrup Fearnley) 미술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미술관에서 크바란이 초대한 대표적인 작가들로는 파브리스 이베르, 로버트 고버, 제프 쿤스, 매튜 바니, 톰 삭스, 앤 리슬가드, 비야니 멜가드 등의 1980~90년대 주요 작가들이 있으며, 중국, 인도, 브라질의 현대미술 작가를 소개하는 그룹전을 기획한 바 있다. 이번 리옹비엔날레는 출품작 중 80%가 신작이라고 밝히고 있다. 현 시점에서 흘러나오는 세계 곳곳의 새로운 이야기를 비엔날레에 소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과거 군나르 크바란과 전시를 개최한 경험이 있는 작가들이 그대로 리스트에 들어와 있다. 심지어 이들의 영향력 있는 구작이 대거 포함돼 이번 비엔날레는 마치 약 20여 년에 걸친 크바란의 기획 이력을 소개하는 회고전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과거에 그가 미술관 개인전에 초대했던 작가들이 그대로 리스트가 만들어져 있는 점은 비엔날레의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처럼 보인다. 특히 그가 기획한 전시들 가운데 상당수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등의 국제적 큐레이터들과의 협력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가 취하는 큐레이팅의 관점을 짐작하게 한다.
이번 비엔날레는 리옹비엔날레로서는 이례적으로 일반적인 미술관 전시에 가까울 만큼 연출의 박진감이나 독창성 대신 시각적 비례에 따른 배치에 머무는 평면성을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해, 각각의 작가들이 독립적인 ‘방’에 ‘전시’되어 있는 것처럼 배치되어 있고, 동선에는 어떤 리듬이 결여되어 있다. ‘이야기’라고 하는 테마는 마치 1980~90년대 대학에서 토론하던 비선형적 내러티브와 의도적 조합, ‘글쓰기(Écriture)’, 설치미술이 강조하는 ‘동시적 읽기’ 등의 개념으로 환원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한마디로 교과서적인 전시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도록에서 읽게 되는 큐레이터 서문(Statement)은 기획자가 살아온 이력과 이번 비엔날레의 기획을 의뢰받는 장면, 그리고 전시 기획 준비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세하게 밝히고 있어, 전시 기획을 뒷받침하는 담론적 쟁점들이 매우 빈약할 수밖에 없음을 재확인시켜 준다. 심지어 “전 세계에서 우리는 동일하고 지배적인 서사에 종속되어 있으며, 동일한 긴장감과 흥분을 제공하는 픽션들에 파묻혀 있고 (…) 신자유주의적 거래와 미술시장의 프리즘을 통해서 모든 예술가들의 정체성이 단일화되어 간다고 말할 때, 사실은 동시대미술이 더욱 파편화되고 복합적이 되어 가고 있다”2)는 그의 말은 미술시장에서 영향력 있는 작가들의 구작을 소개하는 자신의 큐레이팅을 합리화하는 것처럼 읽히기까지 한다. 오히려 총감독인 티에리 라스파이가 두 개의 글 〈게임의 법칙〉 〈내게 이야기를 해줘〉(도록의 큐레이터 서문 앞에 게재된 이 글들은 실질적인 기획 서문으로 읽힌다)에서 리옹비엔날레의 기획 의도와 ‘이야기’에 대한 깊이 있는 이론적 역사, 동시대적 담론 전개의 흐름 그리고 서사적 작품의 적확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어 실질적인 전시의 타당성과 논쟁적 맥락을 제공하고 있다.
2) 리옹비엔날레 전시 카탈로그 《Entre-temps... Brusquement, et ensuite》, 2013, p. 32 3) 2011년 열린 제11회 리옹비엔날레(9. 15~12. 31)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빅토리아 누트론이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그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탄생했다.(Une terrible beaute est nee)’ 는 주제로 비엔날레의 상투성을 극복했다는 평을 받았다. 유럽,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 총 78명의 작가가 참여해 미(美)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해석한 작품을 전시했다.
리옹비엔날레는 크게 ‘국제전’과 아티스트 레지던스 기반의 아마추어 프로젝트인 ‘베두타(Veduta)’, 그리고 예술가 컬렉티브와 신진갤러리, 대안공간 등이 참여하는 ‘레조낭스(Resonance)’로 이루어져 있다. 베두타는 ‘집’이라는 의미에 맞게 일반인들이 아파트와 같은 주거 공간에서 작업하고 전시하는 자발적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레조낭스는 신진작가들을 프로모션하는 대안적 기관들의 작은 네트워크 기획전으로 진행된다. 이번에는 쉬크리에르 옆의 창고 공간을 개조해 ‘팔레드도쿄(Palais de Tokyo)’가 레조낭스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상당히 흥미로운 작가들이 소개됐으며, 특히 올리비에 베르(Olivier Beer)는 작품 〈Composition for Tuning an Architectural Space〉을 통해 두 명의 카운터 테너가 건축물의 벽면에 대고 저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노래를 부름으로써 특정한 주파수에 반응하는 공간의 특이성을 발견하는 독특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 전시에는 팔레드도쿄의 감독인 장 드 르와지(Jean de Loisy)4)가 직접 오프닝에 나타나 작가들의 프로모션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번 리옹비엔날레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지은 로에 에드리지(Roe Ethridge)의 포스터 인물사진과 브루스 하이 퀄리티 재단(Bruce High Quality Foundation), 마데인 컴퍼니(MadeIn Company), 밍 웡(Ming Wong) 등은 비엔날레 전체에 흥미로운 공간을 창출해 내는 작품을 보여 주었다. 또한, 이미 많은 곳에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라이언 트레카틴 & 리지에 피치(Ryan Trecartin & Lizzie Fitch)의 정형적 설치작품과 양 푸동(Yang Fudong)의 〈Fifth Night〉(2010)에서 이어지는 〈About the Unknown Girl-Ma Sise〉는 작품의 질적 수준과 상관없이 비엔날레의 트렌드를 느끼게 한다. 누드의 흑인 댄서가 등장하는 리리 레이나우드-드워(Lili Reynaud-Dewar)의 아름다운 영상 설치 작품 〈I’m intact & I don’t care〉(2013)와 입자화된 사물들로 채워 나가는 내면적 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한 히라키 사와(Hiraki Sawa)의 영상 작품 〈Did I?〉(2011)는 그 자체로 몰입을 불러일으켰으며, 피터 베히터(Peter Wachlter)의 시니컬한 애니메이션 〈Heat Up The Vehicle〉(2013) 역시 전시의 흐름을 풀어 주는 유머를 제공했다.
비엔날레는 새로운 모험인 동시에 프로모션의 경로이며 트렌드 세팅의 장이기도 하다. 이번 리옹비엔날레는 이미 세팅이 끝난 작가들의 비중이 과도하게 커진 감이 있지만, 그 도정에 있는 작가들의 신작들을 소개하는 기능 역시 비엔날레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리옹비엔날레는 기존에 주 전시공간으로 사용해 온 리옹현대미술관과 쉬크리에르(Sucriere) 외에 2011년에 사용되었던 ‘불루키언 재단’(Fondation Bullukian), 생-쥐스트 교회(l’Eglise Saint-Just), 안티카이 난방공장(la Chaufferie de l’Antiquaille)등이 추가됐다. 특히 생-쥐스트 교회에는 톰 삭스(Tom Sachs)의 거대한 미니어처 설치 작품인 〈Barbie Slave Ship〉이 전시됐다. 과거 수많은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를 착취하면서 미국의 부를 이루는데 기여한 거대 노예선을 교회 내부 한복판에 전시한 이 작품은, 과거 노예들을 수용했던 배 하부의 공간에 벌거벗은 바비 인형들을 눕혀 놓았다. 포르노와 장난감, 종교와 정치, 숨겨진 시스템과 그 사이의 연결고리들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이번 비엔날레의 가장 커다란 스펙터클을 제공하고 있다.
4) 장 드 르와지는 미술사학자이자 큐레이터로 퐁피두센터와 팔레드도쿄 위원회, 카르티에 재단 등 프랑스 문화 기관의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제임스 터렐, 빌 비올라, 아니쉬 카푸어의 등 세계적인 작가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베니스비엔날레(1993, 2011)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 본전시 서유럽관을 기획한 바 있다.
오늘날의 비엔날레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한 지역에서 전세계 예술적 창조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거대 전시는 많은 비용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여 개가 넘는 많은 지역에서 비엔날레와 같은 거대 전시를 열 수 있게 된 것은 20세기 후반 가능해진 교통과 통신의 발달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중요한 특징은 많은 예술가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고, 그로 인해 국제적인 예술의 교류와 프로모션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의 특징 외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것은 바로 비엔날레 스스로 새로운 창작과 실천에 있어 변화의 계기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미리 주어진 어떠한 원칙도 없다. 매 순간이 기회인 셈이다. 리옹비엔날레는 같은 기간 동안 열리는 베니스, 아테네, 이스탄불비엔날레와 비교의 선상에 놓이게 된다. 다른 많은 전시의 요소들과 더불어 관객들은 비엔날레가 무엇을 해내는지 보게 될 것이다.
*본 기사는 프로젝트 비아(PROJECT VIA)의 지원으로 아트인컬처와 더아트로가 함께 기획·게재하는 글입니다.
계원디자인예술대 프로젝트아트 책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서울대 서양화과, 파리 국립장식미술학교, 파리 국립1대학 조형예술과 D.E.A를 졸업했다. 제1회 아시아프(2008)과 2012년 서울국제미디어비엔날레 총감독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