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토쿄에서는 모리미술관(Mori Art Museum)과 아시아-태평양 테이트리서치센터(Tate Researtch Centre: Asia-Pacific)가 공동으로 주최한 국제 심포지엄, "트라우마와 유토피아: 아시아의 전후와 현대미술의 상호작용(Trauma and utopia: interactions in post-war and Contemporary art in Asia)" 이 열렸다. 일본에서 개최된 만큼 '트라우마' 와 '유토피아' 는 일본의 현대 문화를 요약하는 키워드로 제시되었고, 이로부터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미술가들이 각각 자국의 현대사를 국제적인 맥락 속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지정학적 변화에 대응했는가를 모색하고자 하는 기획이었다.
심포지엄은 총 네 개의 세션으로 구성되었다. 14편의 발표가 진행되었고 각 세션이 끝난 후에는 사회자와 발표자들간의 토론과 질의응답 시간이 주어졌다. 테이트미술관의 큐레이터이자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로 선정된 이숙경, 모리미술관 수석 큐레이터인 카타오카 마미(Kataoka Mami), 런던예술대학(University of the Art London)의 와타나베 토시오(Watanabe Toshio) 교수, 도쿄 소피아대학(Sophia University)의 하야시 미치오(Hayashi Michio) 교수 등이 사회자로 참석했다. 먼저 모리미술관의 난조 후미오(Nanjo Fumio) 관장과 테이트 리서치 센터의 디렉터인 나이젤 르웰린(Nigel Llewellyn)이 인사말을 통해 이번 행사의 의의를 설명했다.
발표장이었던 토라노몽 힐즈(Toranomon Hills)의 같은 층에서는 모리미술관이 주최한 또다른 포럼인 도시환경 디자인과 라이프 스타일의 혁신을 논의하는 “혁신적 도시 포럼(Innovative City Forum)”이 진행 중이었다. 난조 후미오는 인사말에서 현대미술의 학제적 연구를 장려하는 의미에서 이웃 발표장으로의 월경(border-crossing)을 독려하기도 했다. 실제로 첫날 심포지엄 일정 후에는 두 심포지엄의 참석자들이 함께 모리미술관에서 전시중인 대만 작가 리 밍웨이(Lee Mingwei)의 개인전을 관람하고 자유롭게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이젤 르웰린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미술의컬렉션과 연구에 주력했던 테이트미술관이 처음으로 ‘아시아-태평양’이라는 특정 지역을 타이틀로 내건 리서치 센터를 열게 된 데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기존의 유럽 중심적인 모더니즘의 담론적, 실질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미술관의 선택이 바로 아시아 현대미술에 대한 적극적인 리서치였다고 밝혔다.
첫날의 기조 발제에서는 건축 평론가인 야츠카 하지메(Yatsuka Hajime)가 1868년 메이지 유신에서부터 태평양 전쟁을 거쳐 패전과 미군정을 지나 현대에 이르는 일본의 건축사를 개괄했다. 그는 단게 겐조(Tange Kenzo)와 ‘메타볼리즘(Metabolism)’을 주장했던 이소자키 아라타(Isozaki Arata), 쿠로카와 키쇼(Kurokawa Kisho), 기쿠다케 기요노리(Kikutake Kiyonori) 등의 일본 현대건축사를 대표하는 건축가들을 예로 들며 ‘일본화’와 ‘서구화’라는 양립 불가능한 두 이상이 특히 전전(戰前)과 전후(戰後)를 거치며 끊임없이 갈등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둘째 날에는 사진작가인 하타케야마 나오야(Hatakeyama Naoya)가 테이트 리서치 센터의 연구원인 마젤라 먼로(Majella Munro)와의 대담 형식으로, 지난 2011년 3월 11일의 동일본 대지진 이후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후쿠시마 지역에서 촬영한 풍경 사진을 보여주었다. 지진 이전과 이후의 풍경을 비교하는 작가 자신의 사적인 회고와 피해지역 주민들의 반응을 설명하는 담담한 어조에서 사진이라는 기록의 매체를 통해 재난과 트라우마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하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기조 발제를 통해 일본의 현대 문화, 그리고 트라우마와 유토피아라는 심포지엄 주제에 구체적인 시대적 틀과 주제가 더해진 느낌이었다. 1945년의 원폭과 패전, 그리고 지진, 쓰나미, 원자력 발전소 폭발이 더해졌던 21세기 대재앙 사이에는 군국주의와 민주주의, 개발지상주의와 환경운동, 민족주의와 개인주의 간의 갈등이 있었다. ‘재건’이라는 유토피아적 희망의 끝에는 분열과 파괴, 폭력이라는 절망의 트라우마가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체 발표의 과반수를 차지했던 일본 현대미술에 대한 연구에서는 이와 같은 역사적 문제의식이 공통적으로 내재하고 있었으나, 이것이 드러나는 방식은 매체, 관점, 그리고 세부적인 주제의식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첫 번째 세션은 ‘유토피아를 지향하며(Towards Utopia)’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발표가 있었다.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Stony Brook University)의 이솔(Lee Sohl) 교수가 플라잉시티의 ‘청계천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서울 도시개발에 얽힌 정치적 논의를 소개했고, 시드니 기술대학(University of Technology, Sydney)의 프랜시스 마라빌라(Francis Maravillas)는 2000년에 조직된 자카르타의 미술가 그룹 ‘루앙그루파(Ruangrupa)’의 활동을 소개했다. 컬럼비아 대학(University of Columbia)의 니나 호리사키 크리스틴스(Nina Horisaki-Christens)는 1960년대 도쿄의 반정부 학생운동을 촬영했던 다큐멘터리 사진가 키타이 카즈오(Kitai Kazuo)가 10년 후에 고즈넉한 시골풍경 사진 전문가로 변모한 것을 예로 들면서 1970년대 중반 이후 전원 풍경에서 일본인의 정체성을 찾고자했던 시대적인 상황을 소개했다.
두 번째 세션은 ‘정치의 퍼포먼스(Performing Politics)’라는 주제 아래, 서로 다른 퍼포먼스에 내포된 몸의 정치적 의미를 재고했다. 글래스고대학(University of Glasgow)의 루시 위어(Lucy Weir)는 일본의 안무가, 히지카타 타츠미(Hijikata Tatsumi)의 부토(Butoh)에서,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귄터 브루스(Günter Brus)와 루돌프 슈워츠코글러(Rudolf Schwarzkogler)의 행위예술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폭력과 희생의 메타포가 패전에 대한 집단적인 트라우마의 발현이라고 보았다. 뉴욕주립대(State University of New York)의 락히 발라람(Rakhee Balaram)은 오노 요코(Yoko Ono)의 ‘컷피스(Cut Piece)’가 공연되었던 1964년, 2003년, 2012년의 장소와 시대적 차이를 통해 그녀의 신체가 표출하는 서로 다른 문화적 의미를 추적했다. 킹스턴대학(Kingston University)의 프랜 로이드(Fran Lloyd)와 스테판 바버(Stephen Barber)는 공동 연구를 통해 일본의 퍼포먼스 그룹, ‘덤 타입(Dumb Type)’을 주제로 발표했다. 그들이 특히 덤 타입의 후루하시 테지(Furuhashi Teiji)가 에이즈에 감염된 이후의 작업에 집중하여 에이즈라는 질병에서 유래하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트라우마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역시 덤 타입을 연구한 코난대학 인간과학연구소(Konan Institute of Human and Sciences)의 이시타니 하루히로(Ishitani Haruhiro)는 후루하시의 뒤를 이어 덤 타입의 무대 감독과 디자인을 맡았던 타카타니 시로(Takatani Shiro)의 작업을 중심으로 자연의 기계적 재현이라는 문제를 다루었다.
이튿날 진행된 세 번째 세션은 ‘트라우마 이후의 풍경(Post-traumatic Landscape)’을 다루었다. 앞서 언급한 하타케야마와의 대담 이후, 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Houston)의 나카모리 야스후미(Nakamori Yasufumi)가 이소자키 아라타의 ‘전자 미로(Electric Labyrinth, 1968)'에 대해 발표하고, 뒤이어 교토예술대학(Kyoto City University of Arts)의 카지야 켄지(Kajiya Kenji)가 원폭 이후의 히로시마 여행 가이드를 소개했다. 1945년 원폭과 3.11 대지진이 빚은 참상은 ‘폐허’가 심미적 풍경이 되는 역설을 낳은 셈이다. 특히 히로시마 여행 가이드는 1949년 주로 미국인 관광객을 위해 제작되었던 것인데, 원폭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피해지의 사진이 주를 이루었고, 따라서 이러한 엄청난 파괴와 살상의 흔적이 수익의 자산으로 변모했던 현실의 기괴함을 드러내주었다.
마지막, 네 번째 세션에서는 ‘현재를 바꾸다(Transforming the Present)’라는 제목으로 한, 중, 일 세 나라의 현대미술이 소개되었다. 보두인대학(Bowdoin College)의 페기 왕(Peggy Wang) 교수는 전통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글로벌 시대의 시공간 개념에 대한 불안과 강박이 복합적으로 드러난 추안숑의 ‘신산해경’을 소개했다. 일본 현대미술 연구자인 토미 레이코(Tomii Reiko)는 1960년대에 개념미술을 주장했던 마츠자와 유타카(Matsuzawa Yutaka)가 비물질과 무형의 예술, 불가능성과 미지의 세계를 추구하게 된 배경에는 태평양 전쟁의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음을 설명했다. 필자는 서도호의 작업이 자극했던 ‘한국성’ 혹은 ‘전통’에 대한 막연한 향수를 글로벌리즘과 노마디즘이라는 현대적 상황에 대한 불안의 증후로 재해석했다.
유토피아에는 이상향과 더불어 존재하지 않는 ‘비(非)장소’의 의미가 함께 들어있다. 어쩌면 이상향으로서의 유토피아를 욕망한다는 것 내부에 이미 현실을 파괴하거나 극도로 부정하는 폭력과 재앙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시아 현대미술의 다양한 면면을 조명했던 이틀 동안의 심포지엄을 관통했던 주제, ‘유토피아와 트라우마’는 전쟁과 자연재해, 질병 같은 가시적인 공포와 산업화, 글로벌리즘이라는 사회적 명령이 지배하는 현대의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동전의 양면처럼 느껴졌다.
심포지엄 "Trauma and Utopia: Interactions in Post-war and Contemporary Art in Asia"정보: http://www.mori.art.museum/eng/tau/
사진촬영. Tayama Tatsuyuki
Photo Courtesy. Mori Art Museum, Tokyo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UCLA 미술사학과에서 1960년대 개념미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조교수로 있으며 조선일보에 칼럼, '우정아의 아트스토리'를 연재하고, [Artforum International]에 주기적으로 전시리뷰를 기고하고 있다. 현재 전쟁과 재난 같은 집단적인 비극, 죽음과 상실 등의 트라우마를 재현하는 현대미술의 다양한 매체에 대한 연구서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