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베를린비엔날레(5. 29~8. 3)가 열렸다. 베를린의 예술과 문화 생산 활동의 거점인 서베를린과 베를린-미테의 박물관 및 현대미술 기관 4곳에서 작가 53명(팀)의 작품을 선보였다. 제7회 행사가 쏟아 낸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로 존폐 위기까지 겪은 후 주최 측은, 다시 ‘미술’ 그 자체에 주목했다. ‘열린 결말’을 위해 아예 주제를 없애는 대신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역사적 정체성을 전시의 키포인트로 삼았다. 현대미술의 생산과 그것이 전시/소비되는 장소의 관계를 재맥락화하려는 시도다. 타국의 작가는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을까? 유행처럼 자리 잡은 인류학적 유물과 현대미술을 병치하는 전시 방식은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본질적으로 우리는 오늘날 현대미술의 가치를 어디에 두는 것일까? 질문에 관한 답변은 베를린비엔날레의 로고처럼 비어 있다.
제8회 베를린비엔날레를 보기 전에 필자는 지난회 총감독 아투르 지미옙스키(Artur Zmijewski)의 정치적인 비엔날레의 충격을 떠올렸다. 과연 이번 비엔날레의 총감독 후안 가이탄(Juan A. Gaitan)1)은 이전 비엔날레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 그리고 중남미와 베를린이라는 지역적 맥락을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지 궁금했다. 베를린비엔날레는 KW인스티튜트의 클라우스 비젠바흐(Klause biesenbach)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ich obrist), 낸시 스팩터(Nancy spector)와 함께 1998년에 설립했다. 통독 이후 독일의 사회 정치적 변혁기를 관통하는 동시대 예술 행사로 유럽의 어느 비엔날레보다 사회정치적인 성격을 전면에 드러내는 대표적인 전시 행사로 알려져 있다. 창립 당시 주제로 〈Berlin | Berlin〉을 제시, 베를린비엔날레가 변화하는 도시 환경에 주목하고 동시대 예술의 사회정치적 경향을 드러내는 행사임을 표방했다. 특히 제7회는 비엔날레라는 제도에 ‘오큐파이(Occupy) 운동’과 같은 비제도적인 예술행동주의를 수용하면서 한 도시의 정치적 역동성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비엔날레는 예술계의 혹독한 비판을 견뎌 내지 못하고 행사의 존폐까지 거론하는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1) 제8회 베를린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은 후안 가이탄은 콜롬비아계 캐나다인으로서 멕시코와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브리티시 콜롬비아대에서 예술과 예술사를 캐나다 밴쿠버의 에밀리카연구소에서 미술과 디자인을 전공했다. 큐레이터로서 전문성을 발휘하게 된 것은 2006~2008까지 샌프란시스코의 캘리포니아 미술대학에서 겸임교수를 하면서부터다. 그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있는 위테드위뜨 현대미술 센터(Witte de with center for contemporary art)에서 큐레이터를 역임했다.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Material Information〉전을 기획했으며, 미술과 공예에 있어서 예술가의 노동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모리스와핼렌벨킨아트 갤러리에서 객원큐레이터로서 일하면서 여러 국제적인 미술잡지에 기고하고 있다.
베를린비엔날레가 표방했던 사회정치적인 성격의 비엔날레는 지난 비엔날레에서 그 종착역에 도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제51회 베니스비엔날레 폴란드 국가관의 큐레이터이자 폴란드의 정치적 예술 그룹 ‘크리티카 폴리티차냐(Krytyka Polityczna)’의 멤버이며 같은 이름의 저널의 디렉터였던 작가 아투르 지미옙스키와 조안나 와르자(Joanna Warsza), 그룹 보이나(Voina)가 월가 시위대의 정치적 이슈들을 전면에 내세워, 전시라기보다는 정치적 토론과 시위의 현장을 방불케 했다. 반면, 2012년 당시 같은 독일에서 벌어졌던 세계적인 미술 행사인 카셀도쿠멘타를 기획한 캐롤린 크리스토프 바카기예프(Carolyn Christov Bakargiev) 감독은 미술사와 고고학을 전공한 전시기획자답게 사회정치적인 예술을 제고하고 그 현실에서부터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전시를 만들어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지미옙스키의 베를린비엔날레가 정치만 난무하고 예술이 실종된 비엔날레라는 혹평을 들어야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런 비판을 의식해서였을까? 이번 비엔날레는 성찰적인 성격이 강했던 2012년 카셀도쿠멘타와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가 백과사전적인 전시 형태를 선보인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가까웠다. 아마도 유럽 내 국제 미술 행사에서 이러한 경향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또한 예술감독의 결정에 비중을 많이 둔 지난 7회와 달리, 이번 비엔날레는 전시기획을 분장하는 큐레이터 팀을 운영하여, 별도의 주제 없이 베를린에 흩어져 있는 역사적 공간을 연결하고 리서치 하는 방식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다 보니 비엔날레라는 전시로서의 일관성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역사적 맥락에 치중하는 포스트 개념미술 성향의 작업이 주로 출품되었다. 작품의 형식적 실험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사운드를 실험하는 작가, 개념미술과 공예적 작업의 경계에서 작업하는 작가를 많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큐레이터 팀에는 달렘박물관2)에 진열된 악기를 베를린의 실험음악가인 타렉 아투이(Tarek Atoui)와 리히텐베어크의 버려진 수퍼마켓에서 전등을 옮겨 설치한 올라프 니콜라이(Olaf Nicolai), 이미지의 생산과 매장에 관해 이론적으로 접근한 카탈리나 로자노(Catalina Lozano), 이중의 삶을 다룬 나타샤 진왈라(Natasha Ginwala), 이미지 발굴하기에 집중했던 마리아나 뭉구이아(Mariana Munguia), 1837년 이름 없는 작가가 그린 프랑스 순교자 장 샤를 코르네의 처형 장면을 새긴 티셔츠를 어린이들에게 입혀서 촬영한 베트남 작가 얀 보(Dan Vo)가 참여했다.
2) 복합박물관인 달렘은 20세기 초와 1960년대 소장품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3개의 서로 다른 기관들이 묶여있다. 그중 하나는 2019년 공사가 끝나는 대로 훔볼트포럼과 함께 새로 건립하는 박물관에 들어가게 될 ‘아시아예술과 박물관(The Museum for asian Art)’과 마야와 파푸아뉴기니 민속학적 유물들을 다량으로 보유한 ‘인류학박물관(The Ethnology Museum)’이고 마지막 하나는 앞으로 이 공간에 남아 있게 될 ‘유럽문화박물관(The Museum for European Culture)’이다.
제8회 비엔날레는 알렉산더 훔볼트로 대표되는 중남미 연구 기관과 문화인류학적 유물을 전시하는 달렘박물관이 있는 베를린 서남부의 리히텐베르크(Lichtenberg) 지역에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 KW인스티튜트 혹은 뮤지엄 인젤 홈브로이히가 있는 미테 지역은 ‘역사적 베를린의 중심’이 되고, 리히텐베르크는 베를린의 남부이면서 지구상의 남부와 훔볼트 포럼과 이웃한 달렘박물관과 연결된다. 도시를 전 세계의 작은 모델로 간주해 전 지구화된 동시대 예술을 주목하는 방식의 전시기획은 이미 카셀도쿠멘타에서 여러 차례 사용했던 개념이다. 여기서 도시의 중심은 ‘텅 빈 중심’ ‘생각 하는 머리’ 등으로 은유된다. ‘텅 빈 중심’의 상징은 이번 비엔날레의 횟수인 숫자 ‘8’의 중간을 텅 비어 있게 디자인한 심벌 로고에도 나타난다. 예술 감독 후안 가이탄은 비단 베를린뿐 아니라 전세계 메트로폴리스들은 중심이 비어 있는 상태로 변화하고 있으며 도시의 중심은 외부에서 온 관광객의 공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근대도시 형성에 있어서 다른 유럽의 도시처럼 베를린도 타 문화권과의 만남에서 제국주의적 역사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도시 문제에 주목하는 기획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과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 알리 수보트닉(Ali Subotnick)이 감독을 맡은 제4회와 카트린 롬베어크(Kathrin Romberg)가 〈밖에서 기다리는 것들(What is Waiting Out There)〉을 주제로 한 제6회 전시와도 연결된다. 이전 비엔날레에서 기획자들은 가정집을 포함한 일상적인 공간이나 이주민들이 밀집해 있었던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지역에 전시를 열면서 도시 공간에서 발생하는 일상적 변화에 예술적으로 개입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베를린의 중심부에는 뮤지엄 인젤홈브로이히 등 통독 수도에 걸맞은 문화 기관이 집중되고 있다. 이러한 공간적 환경이 생산하는 제국주의적이고 유럽중심주의적인 문화는 유럽의 오랜 역사적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대적으로 도시의 주변부는 중심 바깥으로 밀려난 기관들이 위치하는 공간이 되기 쉬운데, 베를린 서남부 주변부에 있는 달렘박물관과 하우스 암 발트제(Haus Am Waldsee)가 대표적이다. 후앙 가이탄이 전시 서문에서도 밝혔다시피, 이번 비엔날레는 통독 이후 격변하는 대표적인 메트로폴리스로서 베를린이 어떻게 내부적으로 변해 가는지 주목하며, 이 변화가 글로벌화된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성찰한다. 한 도시의 역사는 제도화된 공간들의 배치와 운영에서 드러난다. 예술은 이 공간들과 연결된 지식과 정보 그리고 상상력과 관계된다.
차분하고 고요한 이번 비엔날레는 베를린 서남부의 하우스 암 발트제에서 시작된다. 지하철역에서 내리면 멕시코플라츠 (Mexikoplatz)를 지나 아르헨티니쉐 알레(Argentinische Allee)를 따라 난 전형적인 독일 도시 외곽의 주택가를 가로질러 하우스 암 발츠제에 도착한다. 이 빌라는 섬유공장을 운영했던 유태인 헤르만 크노블로흐(Hermann Knobloch)가 1922~23년에 도시 외곽에 지었다. 크노블로흐는 1926년 이 집을 팔고 1936년 런던을 걸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해 1945년 아르헨티나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 공간은 이후에 여러 형태로 사용되다가 2004년에 동시대 조형예술을 소개하는 쿤스트 페어라인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다양한 공공조형물을 소장하게 되었다. 맷츠 라이더스탐(Matts Leiderstam)은 빌라 1층의 그리 넓지 않은 갤러리 공간에 스톡홀름과 베를린국립박물관의 소장품 앞뒷면을 함께 볼 수 있도록 설치했다. 소장품 관리를 위한 검열 번호와 소장품 분류표들은 이 작품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관리되는지 한눈에 드러냈다.
이 공간을 지나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발코니 뒤편으로 나가면 야외에 자리 잡은 카페테리아와 커다란 나무가 우거진 숲과 호수를 만나게 된다. 밖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자연 공간에는 아르헨티나 작가 칼라 자카그니니(Carla Zaccagnini)의 사운드 작업 〈흑인들의 5중창(Le Quintuor des Nègres)〉이 울려 퍼진다. 야외 카페테리아에서 한적하게 차를 마시는 사람을 뒤로하면 넓은 호수를 감싸는 미지의 숲에 도달한다. 이 숲은 훔볼트가 여행했던 아마존의 깊은 숲을 연상시킬 만큼 이국적으로 보인다. 호수로 내려가는 언덕에는 관객의 발길을 사로잡는 슬라브스와 타타르스(Salvs & Tatars)3)의 사운드 설치작업을 만날 수 있다. 비스듬하게 양편으로 등을 기대고 누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설치된 작품에서는 아타튀르크 시대의 경전을 아랍어로 기도하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전원적인 공간은 베를린의 도심으로부터 물러나 수백 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변화하는 베를린의 역사적 나이테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3) 슬라브스와 타타르스(Salvs & Tatars)는 베를린 장벽의 동쪽으로부터 중국의 만리장성의 서쪽을 아우르는 유라시아 지역의 정치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콜렉티브 그룹으로, 포스터와 출판 및 설치와 조각, 미디어와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작업을 수행한다.
하우스 암 발트제에서 세 정거장만 이동하면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주요 장소인 달렘박물관에 도착한다. 아시아와 파푸아뉴기니, 중남미의 문화인류학적 유물들을 소장한 이 박물관은 훔볼트 포럼과 함께 다수의 연구소가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해마다 주요 기획 전시를 발표하는 대표적인 문화인류학 박물관이다. 비엔날레 큐레이터 팀은 박물관에 진열된 소장품들을 그대로 둔 채로 중남미 전시실 쪽에 작품을 설치했다. 인류학적 유물과 동시대 예술이 뒤섞인 이 전시 공간의 상태는 이번 비엔날레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풍경이다. 이 박물관의 입구에는 올라프 니콜라이의 전등 작업이 설치되어 있었다. 박물관의 내부 인테리어로 착각할 수 있을 만큼 개념적 독해를 요구하는 동시대 예술 작품과 작가를 알 수 없는 역사의 한 시기에 만들어진 유물들이 내뿜는 에너지가 충돌하고 있었다.
박물관 한쪽 공간에는 사운드를 실험하는 그룹들과 함께 악기 소장품을 실험한 타렉 아투이와 마치 훔볼트가 수집했던 중남미 식물을 연상시키는 콜롬비아 작가 알베르토 바라야(Alberto Baraya)의 조화가 진열된 작품, 서로 다른 시대의 박물관의 조형물을 복제하여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오브제로 삼아 논쟁점을 제시하는 멕시코 출신의 작가 마리아나 카스틸로 데발(Mariana Castillo Deball), 전 콜롬비아 시대(Pre-columbian)의 황금 장신구 전시실을 7과 8.6 헤르츠의 주파수 리듬으로 투사하여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연출한 카르스텐 횔러(Karsten Höller), 수퍼맨의 고향이자 모국어인 크립톤어(krypton)를 활용해 영상과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멕시코 출신의 작가 카를로스 아모랄레스(Carlos Amorales)의 작업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모든 작업들은 미지의 역사에 대한 맹목적 탐험 정신을 보여 준다.
이번 비엔날레도 지난 제13회 카셀도쿠멘타처럼 직접적인 정치성보다는 정치사회적인 사건들이 내면화된 형태로 표출되는 작업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주목할 만한 회화 작업들 중에는 호주의 원주민 예술가로서 카셀도쿠멘타에 참여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고든 배넷(Gordon Bennett)의 자서전적인 노트패드 드로잉(notepad drawing)을 들 수 있다. 그의 작업은 작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직면했던 공동체적 공포와 환경 파괴에 관한 죄책감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콜롬비아의 정치적 현실을 화폭에 표현하는 베아트리츠 곤잘레스(Beatriz Gonzalez)는 도로교통 표지판의 픽토그램적인 경고에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인도의 캘커타 지역에서 시작해서 아잔타 석굴의 불상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인류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종교적인 회화 작업을 수행하는 방글라데시 출신 작가 가네쉬 할로이(Ganesh Haloi)의 작품은 동굴벽화의 아이콘이나 지역의 원시인이 그렸던 인류학적 스케치를 차용해 자신의 유년기의 기아와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 1947년 남인도에서 발생한 시민 학살, 1971년 방글라데시 전쟁의 이야기를 보여 준다.
다시 베를린비엔날레의 본부인 KW인스티튜트로 발걸음을 옮겨 보자. 이곳에는 서구 식민주의의 촉매가 되었던 지하자원의 채굴과 약탈을 연상시키는 암석과 보석을 잘라서 설치한 콩고 출신 작가 오토봉 니캉가(Otobong Nkanga)의 작품 〈반짝임의 추구(In Pursuit of Bling)〉, 냉전 체제의 정치적 상황에서 생산된 만화 이미지를 통해서 집단 무의식적 현실을 찾아내는 미술사가이자 인쇄된 이미지 수집가인 하바나 출신 작가 토넬(Tonel)의 작업 등에서 정치적 해독을 필요로 하는 이미지를 만날 수 있었다. 제7회 비엔날레가 토론과 사회적 실천의 현장이었다면, 이번 비엔날레는 〈크래쉬 패드(Crash pad)〉라는 동명의 공간에서 워크숍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매주 일정한 시간에 참여 작가와 큐레이터 팀이 전시기획 과정에서 있었던 쟁점을 소개하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특히 이 프로그램은 그리스 출신 작가 안드레아스 안젤리다키스(Andreas Angelidakis)가 꾸민 다목적 공간에서 열렸는데, 그리스에서 가져온 각종 문양의 카펫으로 꾸민 공론의 장이었다. 이 공간은 그리스가 유럽에 준 선물로 인식된다. 광장에 모여 서로 다른 입장에 관해 민주적으로 토론하는 역사를 그리스로부터 물려받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종의 ‘미완성 프로젝트’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점검일지도 모른다.
이 공간은 정서적 온기를 함유하고 있었다. 필자가 참여했던 프로그램에서는 달렘박물관에서 가져온 악기를 바탕으로 실험음악가들이 공연을 진행하고 우주적 악기들에서 찾아낸 소리에 대한 워크숍이 진행되었다. 실험을 위해서 고가의 유물 5점을 박살냈다며 너스레를 떠는 실험예술가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최근 KBS파노라마에서 방영 중인 다큐멘터리 〈훔볼트 로드〉에서 보았던 훔볼트의 극단적인 호기심이 떠올랐다. 훔볼트는 수천 종의 식물을 표본 채집하였고 중남미의 수만 킬로미터를 직접 다니면서 지도를 제작하거나 측량했다. 또한 독약의 위해성을 실험하기 위해 독 사발을 마시거나 동물전기를 실험하기 위해 전기뱀장어에 직접 감전되는 실험을 감행했다. 훔볼트로 대표되는 이 과학적 실험의 세기로부터 우리가 물려받은 것은 무엇이고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언젠가 한 악사의 손에 들려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했던 악기들은 더 이상 울지 못한다. 단지 호기심에 가득 찬 후세인들에 의해서 소리 실험기구로 대체될 뿐이다.
[사진제공] 베를린 비엔날레
*본 기사는 프로젝트 비아(PROJECT VIA)의 지원으로 아트인컬처와 더아트로가 함께 기획·게재하는 글입니다.
1969년 강원도 평창 봉평에서 태어나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미디어 예술을 전공하였다. 2006년 광주 의재창작스튜디오 디렉터를 거쳐, 2007년 안산 원곡동에서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의 디렉터를 역임하였다. 2009년 경기창작센터 개관부터 학예팀장으로 일하다 2011년부터 2012년까지 경기도미술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최근 경기문화재단의 문예지원팀 수석학예사로서 문예지원사업, 섬머아카데미 등 교육사업도 기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