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이스탄불비엔날레(9. 14~10. 20)의 큐레이터 훌리야 에르뎀지(Fulya Erdemci)는 올해 초 “엄마 나는 바바리안 인가요?(Mum Am I Babarian?)”라는 질문을 던지며 야심찬 포부를 밝힌바 있다. 그러나 개막하기 3개월 전 비엔날레의 계획을 전면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터키 전역에서 일어난 시위에 수백만 명의 시민이 참여하고 사상자가 발생해 예술이 가져야할 동시대적 역할과 현대적 ‘공공(Public)’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수면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1600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거주하고 비엔날레와 디자인비엔날레가 개최되는 곳이지만 이스탄불은 여전히 표현의 자유에 목말라 있다. 이번 비엔날레는 도시의 모든 공공기관을 제외한 사립공간을 전시공간 삼아 터키가 맞닥뜨린 사회상을 현대미술로 풀어낸다. 예술이 대중이라는 집단 내에서 가질 수 있는 프로파간다와 사회와의 관계, 미술축제인 비엔날레가 가져야 할 지시성 등. 전방위의 질문이 교차한 현장을 현지를 직접 방문한 필자를 통해 집중 조명한다.
비엔날레가 지니고 있는 지적인 실험성과 생산성은 이미 그 의미가 쇠퇴한지 오래다. 비엔날레협회에서 집계한 전 세계 135개의 비엔날레, 트리엔날레와 매해 개최되는 아트페스티벌까지 더하면 그 수가 200여 개에 육박한다. 사실 대부분 비슷한 주제와 중복되는 작가들, 비슷한 프레임 안에서 구성된 최근의 대형 아트 이벤트는 보도자료 만으로도 어떤 전시일지 예측할 수 있을 정도다. 그동안 미술사에서 열외로 취급됐던 비서구권 지역의 현대미술 현장에서는 ‘후기식민주의’ 이론을 내세우거나 ‘글로컬리즘(glocalism)’라는 기치 아래, 각기 지역적 특색과 뿌리 찾기에 나섰고, 이에 따른 다양한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정치적 선전 문구 같은 거대 담론을 구체화할 만한 학술적인 리서치와 대안적인 메시지는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중, 올해 초 제13회 이스탄불비엔날레의 큐레이터로 선정된 훌리야 에르뎀지(Fulya Erdemci)가 발표한 다소 도발적인 타이틀은 국제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Mum, Am I Babarian?” 누가 엄마고 누가 바바리안이란 말인가? 이 전시 제목은 터키의 저명한 시인 랄레 뮐듀(Lale Muldur)의 1998년 저서에서 차용한 것이다. 여기서 바바리안은 고대 그리스어 ‘바바로스(barbaros)’를 어원으로 그리스 시민이 아닌 타자를 문명화되지 않은 사람으로 비하해 일컫는 의미에서 파생된 단어다. 다시 말해 바바리안은 한 특정 집단의 패러다임에 상응하지 않는 다른 집단을 비하하고 배척하는 집단 우월주의와 편협한 이기심이 뿌리깊이 박혀 있는 단어로 주체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다. 여기서 랄레 뮐듀는 시문학이라는 절제된 표현 방식으로 언어가 가지는 공공의 패러다임에 대한 이슈를 제기한다. 이에 에르뎀지는 비엔날레를 통해 절제되고 제한된 자율성을 지닌 현대미술이라는 매개체로 터키를 비롯한 현대 도시가 직면한 급격한 사회적 변화에 대한 이슈를 제기하고 고찰하고자 했다. 즉, 그는 동시대적인 현상에서 바바리안의 정의를 제도권의 영역에 들지 않는 약자, 즉 비서구인 이교도인 소수자 은둔자 무정부주의자 등의 단어로 정의하고 여기에 더하여 인습과 제도에 변화를 시도하는 사회 활동가, 아티스트와 대중으로 확장시킨다.
훌리야 에르뎀지는 암스테르담의 공공미술 전문 기관인 SKOR(Foundation for Art and Public Domain)의 디렉터를 지냈고, 지난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터키 국가관을 맡았다. 또한 지난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이스탄불비엔날레의 디렉터를 역임하다 올해는 직접 큐레이터로서 메가폰을 잡았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이스탄불 전역을 비엔날레의 현장으로 탈바꿈시켜 현대미술을 통해 “정치적 토론의 장으로서 공공의 영역에 대한 관념을 재인식시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기존의 화이트큐브식 전시에서 벗어나 이스탄불 시내 곳곳에 산재된 공공장소에서 ‘도시주의(Urbanism)’ 맥락이 강한 프로젝트를 선보임으로써 예술이 가지는 동시대적 역할에 대해 터놓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매우 바람직한 이야기지만, 이제는 특별히 색다르지도 참신하지도 않은 개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터키 정부의 일방적 도시개발 정책에 의한 국민 간의 대립과 갈등이 최고조에 오른 현재 터키의 사회상을 감안한다면, 에르뎀지의 전시는 실로 대담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터키의 현 정부는 시민의 동의 없이 시민의 휴식처이자 탁심광장의 유일한 녹지공간인 게지공원을 밀어 버리고 오스만 시대의 탁심 군사기지(Taksim Military Barracks)를 재현하는 건축물과 호화스런 주상복합빌딩을 짓는 도시개발 계획을 추진했다. 이에 지난 5월 28일 터키 시민들이 이스탄불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심광장에 위치한 게지공원에 모였다. 공유지 재개발 계획을 시민의 동의 없이 진행했다는 점, 게다가 자연환경과 시민복지 등의 문제를 철저히 검토하지 않았다는 점에 분개한 50여 명 가량의 환경운동가들이 정부에 개발 중단을 요청하는 작은 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터키 정부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최루탄과 무력을 동원한 강제 진압으로 대응했다. 이 사건은 터키 전역의 국민들을 자극시켜 결국에는 수백만 명의 시민운동으로 확산되었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고 심지어 7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비극을 낳았다.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 중에는 환경운동가를 포함한 지식인 단체, 도시계획 연구가, 아티스트, 축구 팬 클럽(터키에서 축구는 국민 스포츠에 속한다), IT전문가, 무정부주의자, 소수의 반정부 정치인, 노동조합원, 학생, 외국인 등 매우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정부의 눈치를 살피는 국내 미디어들은 시위에 대한 아무런 보도도 하지 않은 채 방관했으나 해외 미디어나 인터넷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급속하게 퍼져나가 게지공원 시위는 전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러한 파장은 올해의 이스탄불비엔날레에 큰 타격을 미쳤다. 현대미술을 통해 이야기하려던 이슈가 비엔날레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터키인들에게 고찰되고, 또 실제로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비엔날레 측의 입장에서는 예기치 못한 성과이자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위 뒷북을 치는 격이 됐다. 또한 예정대로 공공의 장소에서 진행을 하려면 정부와 타협해야 하고, 시민의 자율적인 표현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정부에 허가를 구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비엔날레의 콘셉트에 반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2007년부터 비엔날레를 후원하고 있는 터키의 대기업 코치(Koc Holding)에 대한 시민들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지난 2011년 비엔날레 기간에 ‘개념미술연구소’라는 터키의 한 아티스트 그룹이 코치의 설립자인 베흐비 코치가 1980년에 친필로 작성한 편지가 담긴 브로슈어를 제작해 이스탄불비엔날레 앞에서 배포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브로슈어의 타이틀은 그해 비엔날레의 타이틀을 차용한 ‘Untitled Letter’였는데, 편지의 내용은 코치 기업이 1980년에 있었던 피의 군사 쿠데타에 경제적 후원을 하겠다는 것으로 이는 국민들의 신경을 자극시켰다. 이로 인해 올 1월부터 야심차게 기획해 진행하고 있던 공공 프로그램인 <공공의 연금술>도 ‘개념미술연구소’를 비롯한 일부 시민의 강력한 항의와 저지로 인해 중단됐다. 정부에 아첨하는 코치의 후원으로 진행되는 행사에서 공공을 생각한다는 콘셉트 자체가 이율배반적인 행위로, 비엔날레에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드리우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비엔날레 오픈을 얼마 남기지 않은 올해 여름, 진퇴양난의 순간에 직면한 에르뎀지는 기존의 계획을 전면 취소 및 수정하는 결단을 내렸다. 에르뎀지에 따르면, “현재 터키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게지공원 시민운동은 비엔날레가 고찰하고자 한 ‘현대 도시에 존재하는 공공의 장소에서 실제로 시민이 가질 수 있는 물리적이고 실질적인 영역의 지적이고 물리적인 권리’에 대한 이슈를 더욱 실질적이고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비엔날레를 공공의 장소에서 개최하는 과정의 여러 가지 제도적 절차는 현재 시민들이 싸우고 있는 권리에 반하는 행위이며 올해 비엔날레의 목표와 어긋나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공공의 장소에서 개최하고자 했던 비엔날레의 기존 방식을 포기하는 것 자체가 시민의 강력한 정치적 발언과 행보를 지지하고, 올해의 비엔날레의 목표와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비엔날레측은 기존의 전시공간에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공공성’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를 진행하고 시민과 공감하며 지지할 것이다.”
다시 말해 기존 공공장소에서 진행하려 했던 장소 특정적 프로젝트를 전면 취소하고 대신 급조된 5곳의 사립공간, 보스포러스 항구에 위치한 거대한 웨어 하우스 ‘앤트레포 NO3’, 19세기에 지어진 ‘갈라타 그리스 초등학교’, 탁심광장 근처의 쇼핑 거리에 위치한 사립 미술기관 ‘살트 베이올루’와 ‘아르테르’, 마지막으로 작가들의 운영하는 ‘대안공간 5533’과 협업해 화이트 큐브 형식의 전시로써 작품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수정됐다. 별반 공공성이 느껴지지 않는 실내공간에서 열리는 엘리트적 전시의 형태로 공공의 영역에 대한 이슈를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부정 교합’에 대해 비엔날레측은 전시장을 무료로 전면 개방해 공공성의 개념을 실천하려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지난 26년의 이스탄불비엔날레 역사상 처음으로 비엔날레가 공공의 영역으로 나가지 못한 대신, 비엔날레의 장소 자체를 대중의 영역으로 근본적 전환을 이루겠다는 의지가 담긴 움직임이었고, 동시에 지난 비엔날레에 2배인 23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성과를 올렸다. 전시에서는 참여 작품을 통해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였다. 올해의 참여 작가 선정에 있어 에르뎀지는 총 88명의 작가 중 상당수를 비서구권 작가로 구성했다. 이러한 의도된 지역적 구분은 서구를 중심으로, 다시 말해 앵글로색슨(Anglo-Saxon)인종 위주로 형성된 현대미술의 권력 구조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번 비엔날레가 중요시 하는 ‘공공의 영역’이라는 물리적 개념 때문일까. 시대착오적 영역 나누기라는 생각 또한 피할 수 없었다.
메인 전시장인 앤트레포 입구에 설치된 커다란 기중기는 마치 건설 현장을 연상시켰다. “이게 뭐지?” 하는 순간, 기중기에 매달린 초록색 구형의 추가 건물 외벽에 강한 충격을 가하는 작품은 아이세 에르크멘의 . 1995년부터 줄곧 비엔날레의 장소로 사용된 이 건물은 보스포러스 항구 지역의 대대적인 개발로 인해 내년부터는 이 자리에 쇼핑몰과 호텔 등이 들어선다고 하니 터키가 직면한 현실과 이번 비엔날레의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듯 했다. 전시장 입구로 들어서면 조르주 멘데즈 블레이크의 붉은색 벽돌 담장 을 통해 또 다른 상징적 메시지를 볼 수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유명한 동명 소설 『The Castle』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불안정하게 쌓인 벽돌들은 소설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조차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만큼 직설적인 작품이다. 무기산업과 국제적인 미술기관 사이의 긴밀한 경제적 연관성을 위트 있는 강의로 풀어 낸 히토 스테이얼의 비디오와 교통신호 중간에 도로 한복판을 막아서고 운전자를 향해 저글링 퍼포먼스를 벌이는 신시아 마르셀르의 , 크리스토프 셰퍼가 지난 1994년부터 시작해 실제 시위에 참여하며 게지공원 시리즈까지 완성한 은 터키가 앓고 있는 사회현상을 현장성 있게 담고자 한 큐레이터의 의도가 잘 살아 있는 작품 중 하나였다. 특히, 이집트 여성작가 애말 케나위의 은 15인의 이집트 남성들을 동물처럼 기도록 하고 마치 양떼처럼 몰며 카이로 시내를 활보한 퍼포먼스 작업이 담긴 비디오로, 당시 이 퍼포먼스를 지켜보고 있던 카이로의 남성 시민들로부터 맹렬한 항의를 받았다. “예술이라는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영역이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을 상기시키는 실험성 짙은 작품이다. 또한 하릴 알틴데르의 는 정부의 지역 개발 정책과 가장 큰 갈등 관계에 있는 집시(로마)타운인 술루쿨르 지역의 청소년 랩퍼들을 담은 뮤직 비디오다. 그 지역이 가진 독특한 특색과 더불어 수준 높은 음악성이 잘 어우러졌지만 터키의 시민 사이에 일고 있는 광기어린 울분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오싹함도 느껴졌다.
두 번째 메인 전시장이라 할 수 있는 갈라타 그리스 초등학교는 이번 비엔날레의 메시지를 가장 용의주도하게 보여 준다. 장소의 특성상 화이트큐브에서 벗어난 설치 중심의 전시를 보여 주었다. 인지 에비네르의 퍼포먼스가 가미된 설치작품 < Co-action Device: A Study >는 대중의 직접적인 참여와 경험이 가능한 현대미술의 생산 방식이 유기적으로 진화하고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또한 2008년 방콕의 재개발 지역에서 실제로 행해졌던 지역 주민들의 손전등 시위를 담은 베르티유 박의 < Safeguard Emergency Light System >은 아이러니하게도 터키가 직면한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와 감동을 자아냈다. 그밖에 이스탄불 쇼핑의 거리에 위치한 살트와 아르테르의 작품은 위의 두 곳과 연장선상에서 어렵지 않은 소통이 가능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살트의 입구에 설치된 터키 경찰관의 모형은 권위에 대한 위협을 나타내기보다는 다소 식상함을 자아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올해의 비엔날레는 전시 개막 이전에 이미 현대미술을 통해 풀어보고자 했던 과제와 목표가 달성됐다고 볼 수 있다. ‘터키판 아랍의 봄’이라고도 불리는 게지공원에서 시작된 시민운동을 주도한 터키인들 사이에서 “정치적 토론의 장으로써 공공의 영역에 대한 관념”은 이미 그들의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뼛속 깊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가상의 명제가 실제의 상황에 전복되어 후퇴한 형국에 그치고 만 것이다. 이번 이스탄불비엔날레는 예술이 가지는 사회적인 가치와 역할이 뜬구름 잡는 망상인지, 결국에 미술은 ‘재현’하기 놀이에 입각한 지적인 유희에만 그치는 것인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에르뎀지는 터키의 특수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물리적인 공공미술이 아닌 공공의 미술, 즉 공공을 주체로 삼았다. 즉, 공공장소에서 펼쳐지는 장소 특정적인 작품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특정적인 영역으로 깊게 연계하며 관계를 맺는 것이 진정한 공공미술이라는 이야기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과연 현대미술이라는 영역이 그러한 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 놓고 실험해 보자는 취지였다. 비록 실제적으로 구현하지는 못했지만, 현대미술이 유토피아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현실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개념적 발판을 마련한 것이야말로 이번 이스탄불비엔날레의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사진제공] 이스탄불 비엔날레
*본 기사는 프로젝트 비아(PROJECT VIA)의 지원으로 아트인컬처와 더아트로가 함께 기획·게재하는 글입니다.
서울, 런던, 두바이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독립 큐레이터. 《사우디현대미술전 NABATT: a sense of being》(2010 상하이), 《우리[WOO:RI]》(2012 프라하) 외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