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사고팔 수 없는 것이 있을까. 모든 것이 금전적으로 환원되는 가운데 왜 유독 예술은 ‘순수’라는 근대적 수식어를 앞에 달고 자본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가. 미술시장은 왜 유명 작가의 완결된 작품만을 거래하는가. 작가가 전시를 위해 쏟는 시간과 노동력은 왜 금전적 보상으로 책정되지 않는가. 더 이상 미래의 성공을 기대할 수 없는 미술계 구조라면 각자 지금까지 투자한 개인의 인적자본과 노동력을 적은 금액이라도 가시화하면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정말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최소한의 지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미술도 그 대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일정 시간 미술계 안에서 이러한 질문들이 축적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젊은 작가들의 활동 중심에 ‘신생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신생공간 주체들이 모여 함께 답을 찾아보려 도모한 것이 2015년 굿-즈였다.1)
겨우 2년이 흘렀지만 그간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것이 변하였다. 다수의 신생공간이 ‘종료’를 알렸지만 새로운 이름의 공간이 그 이상으로 많이 등장했고, 굿-즈는 일회적인 행사로 그쳤지만 각기 특성을 달리한 굿-즈의 후예들이 세분화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작년 가을 이후 연말까지 차례로 열린 취미관(2017.10.13.~11.10), 퍼폼2017(2017.11.1~11.5), PACK F/W 2017(2017.11.29~12.17), 더 스크랩(2017.12.13.-12.17) 등이 그것이다.
이 행사들의 기획자 중 상당수가 신생공간과 굿-즈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굿-즈가 15개의 신생공간과 6명의 개인작가가 기획하고2)
약 80여 명의 작가가 전혀 다른 형태의 작업을 가지고 판매에 참여한 행사였기에 모두에게 단일한 경험과 교훈을 남겼을 리 없다. 그중 방향성을 같이 한 몇몇 사람들끼리 새로운 행사를 기획해 실현해가기 시작했다. 먼저 취미관(TasteView, 趣味官)은 서브컬처의 파생상품인 굿즈를 현대미술에 차용하고자 했던 기획 취지를 비롯해 여러 면에서 굿-즈를 떠올리게 한다. 행사가 열린 취미가는 대표적 신생공간이었던 상봉동 반지하를 전신으로 하며, 행사를 기획한 취미가의 구성원 전원이 신생공간 및 굿-즈의 기획 경력을 가지고 있다.3)
1) 2010년을 전후로 기존 서브컬처 외에 문화예술 전반에서 특정한 취미를 공유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일련의 판매 행사가 열리기 시작했다. 2009년 처음 열려 올해 아홉 번째를 맞은 독립출판 및 디자인 영역의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비롯해 인디음악 영역의 레코드 폐허, 제과제빵 영역의 과자전 등이 대표적이다. 굿-즈 역시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2) 공간413, 괄호, 교역소, 구탁소, 굿즈, 미연씨, 아카이브 봄, 시청각, 인스턴트 루프, 지금여기, 비디오릴레이 탄산, 커먼센터, 케이크갤러리, 스튜디오파이, 합정지구, 물질과 비물질(김종소리), 권순우, 이수경, 조대원, 윤향로, 손주영이 행사의 기획에 참여했다.
3) 취미가는 반지하의 돈선필과 박현정, 교역소의 황아람, 굿-즈 및 여러 신생공간의 공간구성을 담당한 김동희, 굿-즈를 비롯한 여러 신생공간의 기획을 주도한 권순우 등 다섯 명의 구성원이 공동 기획한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 중에도 강동주, 김민경, 김정태, 노상호, 돈선필, fldjf studio(박보마), 박현정, 손주영, 송민정, 엄유정, 우주만물, 윤향로, 이윤성, 이은새, 조익정, 한진, 호상근 등 다수가 굿-즈에 참여했다.
진열장을 제공해 개인 소장품을 위탁 판매하는 일본 아키하바라의4)
렌탈케이스처럼 약 35명(팀)의 참여 작가에게 각각 규격화된 유리 진열장 하나씩을 배정하고 그 안에 다양한 형태로 자신이 원하는 작업을 전시하도록 하는 제시 방식 역시 굿-즈와 일정 부분 유사하다. 그러나 콤팩트한 공간에서 캡션이 적힌 안내문의 번호와 대조해 가며 입구에서 출구까지 연속적으로 나열된 취미관(趣味官) 앞을 지나는 동안 자신의 ‘취미관(Taste View)’과 맞는 작업을 골라 계산대로 향하는 일련의 쾌적한 쇼핑경험은 굿-즈는 물론 기존 미술 행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형태다. 한편, 3주간 6명씩 작가 라인업을 달리해 마포구 일대 세 곳의 장소를 이동한5)
PACK F/W 2017 역시 유리 진열장을 사용했다. PACK F/W 2017의 유리 진열장은 그 형태와 의도가 조금 다르다. 각 변이 40cm인 하나의 정육면체 안에 작품 하나를 넣도록 되어 있는 총 30개의 전시큐브는 — 행사의 제목에 F/W 2017이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 — 새로운 작품을 최대한 돋보이게 하는 일종의 진열장 기능을 하는 것은 물론, 조립과 보관이 용이해 장소의 이동에 최적화된 일종의 모듈로서 행사의 핵심적인 장치다. 그밖에 자물쇠로 잠긴 큐브를 열어 작품을 꺼내고 구입한 작품을 포장대에서 포장해 해당 큐브의 자물쇠와 열쇠를 추가적인 굿즈로 가져갈 수 있게 한 일련의 과정은 미술작품을 일종의 ‘신상’으로 여겨지게 한다.
이처럼 취미관과 PACK F/W 2017은 참여 작가들에게 규격화된 동일 비율의 공간을 제공하지만, 어쩔 수 없이 판매가 잘 되는 작가와 그렇지 않은 작가의 격차는 벌어지고 수익금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점에서 더 스크랩은 다소 획기적이다. 더 스크랩은 신생공간 중 사진 전문 공간을 표방했던 지금여기(nowhere)의 기획자들이 주축이 되어 새로운 방식으로 사진을 전시하고 판매하기 위해 만든 플랫폼이다.6)
100여 명의 작가를 섭외해 그들이 각 10점씩 내놓은 1,000여 점의 이미지를 데이터 용량 순서로 번호 매기고 A4 크기로 프린트해 전시장의 규격화된 선반에 진열한다. 5장(3만 원)과 10장(5만 원) 단위의 구입권을 산 관객들은 어떠한 텍스트 정보 없이 오로지 이미지만으로 사진을 선택하게 된다. 그렇게 일종의 쇼룸에서 선택을 마친 관객은 번호가 적힌 리스트를 스토리지룸에 제출하고 자신이 ‘스크랩’한 이미지를 한눈에 확인한 후 각 이미지의 설명이 적힌 종이와 해당 프린트가 담긴 패키지를 수령해 귀가한다. 이는 이케아(IKEA) 매장에서의 쇼핑을 경험해 본 사람에게는 매우 익숙한 일련의 과정이다. 행사가 종료된 후 100명의 작가들은 전체 판매액의 n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을 똑같이 나눠 갖는다. 작가들에게 적은 금액의 돈이 균등하게 돌아가지만7)
프린트, 액자, 설치 등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이미지만을 제공하기에 대부분의 작가들이 별 불만 없이 배분된 판매액을 일종의 작가 사례비로 여기게 된다. 오늘날 사진을 이미지로 가볍게 스크랩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에게 작가가 생산한 이미지를 그다지 비싸거나 어렵지 않게 물질로 소장할 수 있게 하는 행사의 기획은 적절하고 유쾌하다. 특히 모든 절차가 구조화된 시스템으로 인해 예산만 있다면 얼마든지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스크랩의 가장 큰 강점이다.
4) 아키하바라는 1970~80년대 세계 최대의 전자제품 거리로 유명했으며, 1990년대 산업지형이 변화하면서 비디오게임, 애니메이션 등을 중심으로한 소위 ‘오타쿠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편집자주.
5) 굿 -즈의 기획에도 참여한 바 있는 공간413(리사익)이 주축이 되어 기획(김윤익, 김보리 ,심혜린, 이미정, 이중용, 공석민의 기획팀 외 윤율리, 추성아가 협력 큐레이터로 참여)한 팩은 1주차에 합정동 무대륙에서 엄유정, 이승찬, 장다해, 추미림, 최윤, 한진, 2주차에 망원동 한 상가 1층에서 구나, 남미혜, 박아름, BB/백수현, 양예빈, 이지수, 3주차에 상암동 문화비축기지에서 문이삭, 서윤정, 서혜연, 우한나, 이희준, 조혜진이 참여했다.
6) 첫 해인 2016년에는 지금여기의 김익현, 홍진훤 외에 이승훈, 김혜원, 압축과 팽창(김주원, 안초롱), 이민지, 이기원, 이의록, 물질과 비물질(김종소리), 이정민이 기획으로 참여했고, 2017년에는 김익현, 홍진훤, 압축과 팽창(김주원, 안초롱), 이정민이 함께 기획했다. 디자인은 물질과 비물질, 공간은 김동희, 시공은 괄호, 음악은 박다함이 참여했다.
7) 첫 해 3일간 1,600여 명이 다녀가고 5,300여 장의 사진이 판매되었다. 그 결과 총 3,000여만 원의 수익이 났고 103명의 작가들은 약 27만 원의 돈을 배분 받았다.
더 스크랩이 사진에 특화되었다면, 퍼폼은 영상, 퍼포먼스, 공연 등 시간 기반의 비물질 예술에 집중한다. 굿-즈에 참여했던 작가 중 일부가 미술계 내 시간 기반 예술의 생산, 소비, 유통에 고민하며 2016년 처음 기획하였다.8)
첫해와 이듬해 예매부터 도록과 굿즈 등에서 다른 행사와의 차별화를 꾀하며 변화를 주었고,9)
개인 관객 외에 단체나 기업에 행사의 공연을 판매하는 일종의 쇼케이스를 지향하고 있다. 특히 퍼폼은 단기간의 연례행사 외에 영상과 퍼포먼스에 주력하는 소규모 상주공간을 만들어 지속성에 힘을 싣고 있다. 이는 퍼폼이 기존의 페스티벌 봄과 같은 대형 행사의 전례를 어떻게 반면교사 삼아 나아갈지 기대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이렇듯 이들 행사는 전시와 판매를 겸하는 플랫폼이라는 표면적 공통점을 지니지만 각기 다른 정체성과 지향점을 가진다. 행사를 기획한 작가들 대부분이 미술을 자본으로 교환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적극 인정하거나 좀 더 위악적으로 과장하여 상품화하는 제스처를 보인다. 그러한 점에서 그들에게 판매는 행사의 목적이지만 본질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최소한의 소통의 증표이자 지속의 동력인 것이다. 수익을 내는 것이 그들 행사의 본질이라면 사실상 지속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작가 미술장터 지원 프로그램으로 받은 3~5천만 원은 행사를 진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산일 뿐, 해당 사업의 요건 상 판매 수익은 전액 참여 작가들에게 돌아가고 행사를 기획한 작가들은 최소한의 인건비도 책정하기 쉽지 않다. 그들 대부분 여전히 노동력을 갈아 넣고 있고 다음이 있을지 걱정한다. 미술장터는 현재로서 그들에게 효율적인 지원 플랫폼이지만,10)
해당 지원금이 사라지면 그들은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들 대부분 그 전에 지원금에 의존하지 않고도 행사를 지속하기 위한 방법을 계속해서 모색하고 있다. 해당 지원금이 주로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소요된 이유이자 공간 대관료를 최소화하기 위해 도시의 공실을 찾아다니는 데 노력을 쏟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주어진 조건 아래서 가능한 최선의 선택지를 찾는 것이 어쩌면 이들에게 본능처럼 내재화되어있는지 모르겠다.
8) 굿-즈에서 소 해체 퍼포먼스로 주목받았던 김웅현과 시간 기반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실험으로 평가받았던 상태참조와 수정사항을 기획한 교역소의 김영수를 중심으로 기획이 시작되어 2017년에는 김웅현, 조의주, 송지현이 공동 기획했다. 2016년 첫 해에는 탈영역 우정국에서 3일간, 2017년 두 번째 행사는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아트선재센터, 갤러리 호아드, 통의동 보안여관 등지에서 5일간 열렸다.
9) 첫해에 텀블벅(tumblbug)으로 예매를 받았던 것에 이어 이듬해는 1회/5회/10회권을 정액화하여 홈페이지에 예매 및 결제 시스템을 구축했고, 행사의 공연 중 하나였던 가위바위보 카드게임의 카드를 도록으로 만든 데 이어 이듬해는 usb로 도록을 제작했다. 도록뿐 아니라 공연들과 관계된 독창적인 다수의 굿즈들이 관객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혹자는 신생공간을 한때 지나간 유행으로 폄하한다. 하지만 필자는 신생공간이 그저 특정 시기 ‘새로 생긴 공간’이 아니라 ‘공간을 새로 만드는’ 특정한 방식이자 태도라고 본다. 주어진 사회적 조건에 적응하고자 어쩔 수 없이 생겨난—1980년대 이후 출생 작가들에게 주로 보이는—이러한 방식과 태도는 계속해서 새로운 공간과 예술실천을 만들어낼 것이고, 그러한 그들의 시도는 특정 공간의 물리적 존속이 아니라 일정 방식과 태도를 견지한다는 의미에서 지속가능하리라 본다. 이들의 무모하지 않은 시도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며, 그러한 시도가 현재로서는 미술계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흥미롭게 만들어 주는 최선의 선택지라 생각된다.
사진을 비롯한 동시대 미술 전반에 관한 비평과 강의를 하고 있다. 미학 석사와 영상학 박사를 받았고, 미술잡지 기자와 갤러리 큐레이터로 일했다. 박사논문 '한국 미술생산장의 구조 변동과 행위자 전략 연구'(2017)를 비롯해 지속적으로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