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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리뷰: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 역사가 부당하면 역사를 바꿔라

posted 2019.09.04


남선우 미학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 역사가 부당하면 역사를 바꿔라1)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 내 한국관 전경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 내 한국관 전경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해오던 것들, 주어진 이외의 것이 있다고는 여기지 못했던 것들이 있다. 윤리의식, 합리성, 정체성, 그리고 언어와 역사까지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렇다고 하는 것, 그리고 내게 주어진 것에는 많은 부분이 누락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큰 배제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일 것이다. 내가 제외된 역사를 미래의 거울이라며 달달 외고 이미 주어진 규범 안에 어떻게든 나를 끼워 맞추려고 노력하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울지 모르나, 누군가에게는 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는 채로 살아가는 상황과 다름없다.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서구 중심으로 구조화되고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 기술된 역사에서 배제된 존재들을 서사의 주체로 세워 근대사를 재서술하고자 했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김현진은 서구 중심의 모더니티를 비판적으로 재고하는 전시와 공연, 출판 프로젝트들을 지속해왔다. 그 연장선에서 이번 전시는 정은영, 남화연, 제인 진 카이젠 등 동료 여성 작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이 재인식 과정에 복합적이고 비판적인 젠더 의식이라는 관점을 한층 부각시킨 양상을 보인다.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영상설치, 사운드, 가변크기.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영상설치, 사운드, 가변크기.

기술했다시피 이 전시는 다각적인 젠더 의식을 가지고 그간 서구와 남성이라는 존재를 중성화하고 일반화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역사 쓰기’의 방식을 다시 살핀다. 또 그러한 인식의 전회를 드러내기 위해 개별 작업뿐만 아니라 전시 전체의 구조, 동선, 리듬 등 다양한 경로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건물의 상부에는 ‘역사가 우리를 망쳐놓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선언적인 문구가 황금색으로 쓰여 있고, 그 아래 원형의 유리벽 안쪽에서는 국극배우 이등우의 모습, 즉 정은영의 작업이 전시공간 바깥을 향해, 멀리서도 보일 정도의 크기와 해상도로 입장 전의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강력한 외관과는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비엔날레 본전시를 비롯한 여러 국가관이 입구부터 거대하고 스펙터클한 작업으로 관객의 시각을 잡아끌며 관객 또한 전시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었던 반면, 이 공간의 첫 번째 시야에는 흰 가벽이 자리하고 있으며 어떤 강제적인 동선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관객은 다만 보행 습관을 따라 오른쪽으로 갈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소리와 진동에 이끌려 왼쪽으로 갈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검은색 커튼을 걷을지 등 동등한 설득력을 가진 다수의 동선 중 하나를 선택할 뿐이다. 곡면으로 설계된 벽과 등고선처럼 단차를 둔 둥근 관람석들, 그리고 곡선 레일에 달려 있는 각기 다른 두께와 질감의 커튼 등 공간 전체의 구조와 디테일에서도 합리적인 관람 위치와 작업의 시각성을 강조하는 직벽의 화이트큐브와는 다른 접근을 찾아볼 수 있었다.


전시를 주도하는 감각 또한 규범적인 감각으로 인정돼 온 ‘시각’이 아니다. 물론 영상작업을 하는 세 작가가 참여한 전시에서 시각성을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 전시는 다분히 청각적이고 촉각적인 요소를 활용해 그간 시각일원적으로 제공되곤 했던 전시의 감각을 다면화시킨다. 입구부터 흥미로운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발산하는 정은영의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에서는 바닥에 설치한 육중한 스피커가 삼면을 가득 채운 프로젝션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 스피커가 귀로만 듣는 청각이나 손끝으로만 느끼는 촉각이 아니라 온몸으로 울림을 느낄 수 있는 촉각적 사운드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보는 이를 과도하게 압도하며 점멸하는 3면의 영상에 둘러싸인 관객은 명료하고 이성적으로 스크린을 파악하는 주인의 위치를 잃어버리지만, 청각을 넘어 온몸의 촉각을 자극하는 사운드를 통해 작업을 새로운 방식으로 감각하고 즐기게 된다. 이는 육체적인 것과 여성적인 사고를 억압해 온 남성 중심적 철학사에서 이성적이고 규범적인 유일한 감각이라 치켜 상정한 시각성에 반해 뤼스 이리가레가 제시한 여성적인 것, 즉 촉각성의 의미를 실체적으로 인지하는 순간이다.2)


정은영은 2009년 〈분장의 시간〉, 2010년 〈마스터클래스〉 등을 시작으로 여성국극이라는 장르와 그 수행자인 배우 리서치를 통해 젠더의 수행성과 정동의 경험을 탐색하는 프로젝트를 영상, 퍼포먼스, 아카이브, 공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해왔다.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통해 그 동안 발굴해 온 퀴어 미학의 계보는 이번 전시에서 트랜스젠더 뮤지션 키라라, 장애 여성 연출가이자 배우인 서지원, 레즈비언 연극배우 이리, 그리고 드랙킹 아장맨으로 이어진다. 규범화된 공연계에 대항하는 네 예술가의 모습은 기존의 문법으로 포착하기 어려우며, 키라라가 작곡한 전자음악 속에서 대사가 거의 없이 빠른 속도로 서로 겹친다. 화면을 가득 메운 그들의 춤 같은 움직임에 얹힌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 여기에 관객의 신체가 겹치는 비언어적 상황이 어리둥절하지만 질탕하게 제시된다.


남화연, 〈반도의 무희〉, 2019. 멀티채널 비디오 설치, 가변크기.

남화연, 〈반도의 무희〉, 2019. 멀티채널 비디오 설치, 가변크기.

불명료한 언어와 시각 바깥에서 발생하는 감각은 남화연의 공간과 작업에서도 계속된다. 작가가 〈반도의 무희〉에서 주인공으로 삼은 실존인물 최승희는 한국 최초의 코스모폴리탄 무용수로서 경직된 국가주의가 만든 경계에 교란을 가하면서도 ‘동양무용’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했던 복합적인 인물이다. 일본인 스승에게 쓴 최승희의 편지와 여러 관련 자료를 줄기로 한 메인 영상은 투명한 유리창 앞에서 베니스의 바다 풍경과 어우러져 제시되어 있으며, 작업을 완성하는 나머지 네 편의 영상은 유기적인 곡선과 많은 단차를 갖게끔 설계한 전시공간 곳곳에 수평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앉은 자리에서 내려다봐야 하거나 관계적인 것과는 높이를 달리한 위치에서 영상들은 고양과 하강의 느낌을 자아낸다. 여기에 너무도 생생한 해상도 때문에 도리어 촉각적인 꽃의 흔들림, 그리고 소리 없이 제시되어 오히려 그 울림을 상상하게 하는 무용수의 뜀 동작, 혼합된 언어로 읊조리는 대사와 부분적으로만 발췌한 자료들이 뒤섞여 〈반도의 무희〉는 한 눈에 파악할 수 없는 복합적 감각을 만들어낸다. 전시장 뒤뜰에 조성된 〈이태리의 정원〉 또한 뚜렷한 형태나 시각적 스펙터클을 제시하지 않지만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작은 노랫소리와 식물의 자연적인 흔들림이 어우러진 산책로가 곡선의 지층에서 발생한 감각을 바깥으로 연장한다.


한편 남한에 있다가 서양으로 나가 동양춤을 ‘수입’했고 북한에서 생을 마감한 최승희가 전통과 규범이 지배하는 무용계와 견고한 국경으로 나뉜 사회에 가한 균열과 진동은 여성 디아스포라의 월경(越境)과 기억 문제를 다루어 온 제인 진 카이젠의 작업으로 연결된다. 효에 관한 미담으로만 알려져 있던 바리 설화를 다시 읽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별의 공동체〉는 바리가 가지고 있는 숨은 전복성, 즉 운명을 주체적으로 극복하고 이분법적 세계의 분리를 허무는 역할을 자처하는 면모를 들려주는 사이사이, 역사가 망쳐버린 몇몇 디아스포라 여성의 삶을 조명하며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언어를 부여한다. 영상의 내용과 화면, 소리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순안 심방(무당의 제주 토착어)은 바리처럼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며, 굿을 통해 목소리를 잃은 이들의 할말을 대변해 준다.


제인 진 카이젠, 〈이별의 공동체〉, 2019. 2채널 영상설치.

제인 진 카이젠, 〈이별의 공동체〉, 2019. 2채널 영상설치.

작가가 바리설화를 재독해하는 데 참조한 시인 김혜순은 “여성적 언어가 발화되는 모습은 무당의 말하기와 같은 ‘대신 말하기’로써 실현된다. 대신 말하기를 시도하면, 청자가 시에 개입하는 대화적 구조가 시 속에서 발생한다. 그러기에 여성시의 언어는 구술의 언어다.”라고 말한다.3) 작가 자신, 그리고 전쟁과 이산의 역사에서 상처 입은 여성들의 말로 이루어진 이 작업은 결국 “’몸하는’ 시”를 들려주는 것이다.4)


전시의 제목 ‘역사가 우리를 망쳐놓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시작하는 소설 『파친코』는 재일동포 4대 가족사가 중심축이다. 주인공 순자는 역사에 의해 소외되고 누락된 존재이지만, 역사의 풍파와 질곡을 온몸으로 받고 견딘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과 일본 모두가 감추고 싶어 한 자이니치로서 숱한 부당함과 외면을 당한 존재에게 목소리를 부여한 이 소설의 강력한 첫 문장은 전시의 제목으로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소설의 ‘상관없음’이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식의 무던함을 쌓아 위대해지는 태도라면, 전시의 ‘상관없음’은 주어진 규범에 굴하지 않는 강력한 동력을 가지고 보다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역사를 바꿀 것을 선언하는 듯했다.


비엔날레 본전시 《흥미로운 세상을 살아가기를》 역시 참여 작가의 절반을 여성으로 구성하고 국가 간 균형을 중시했으며, 민족주의와 난민 문제 등에 대한 재고를 제안하는 작업을 다수 초청했다. 그러나 미술을 매체와 이미지 중심으로 다루는 방식에서는 전통적인 미술의 범위와 구도를 지속하는 다소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를 읽을 수 있었다. 국가관들은 이 태도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전시의 관점을 강화하거나 대항적 내러티브와 구조의 전시로 비엔날레의 균형을 맞추어 나갔다. 한국관은 후자의 입장에서 관객을 다각화된 견해와 확장된 감각으로 이끌었으며 서구적, 남성적으로 동일화된 세계 너머에 있는 언어를 취득하고 현재가 세워져 있는 부당한 역사의 구조에 대해 질문했다. 또한 그 질문의 도구인 전시 형식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재고하는 시도와 같은 관점을 공유하는 여성 기획자와 작가의 연대가 돋보이는 전시였다.


  1. 1 글의 제목은 『제노페미니즘: 소외를 위한 정치학』 (라보리아 큐보닉스 저, 아그라파 소사이어티 역, 미디어버스, 2019)의 마지막 문장, “자연이 부당하면 자연을 바꿔라”에서 따온 것이다.
  2. 2 Luce Irigaray, An Ethics of Sexual Difference, Cornell University Press, 1993, p.146. / 김남이, "촉각의 현상학과 이리가레의 여성 주체성", 『여/성이론』, 통권 제31호, 2014. 11, pp.119-121.
  3. 3 김혜순, 『여성, 시하다』, 문학과지성사, 2017, p.189.
  4. 4 김혜순, 위의 책, pp.11-13.

※ 이 원고는 월간미술 2019년 8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월간미술과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남선우

미학, 전 일민미술관 교육담당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