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 행사

타이완 미술의 글로벌 신호탄

posted 2020.04.06


이현 기자


타이베이당다이(台北當代). 타이완 현대미술의 ‘핫 스폿’으로 떠오른 국제 아트페어가 제2회를 맞아 올해 글로벌 미술시장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타이베이 난강전시센터(1. 17~19)에서 전 세계 유수 갤러리 99곳이 참여하고 총 4만여 명이 관람했다. 아트바젤홍콩을 성공적으로 이끈 매그너스 렌프루의 총괄 아래, 중화권을 무대로 활동해온 큐레이터 로빈 팩햄이 공동 디렉터로 합류했다. 오늘날 아시아 아트씬에서 타이완은 어떤 위상을 차지하며, 타이베이당다이의 역할은 무엇인가?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타이베이 미술 현장의 열기를 직접 전한다.



“See Art, Love Art, Buy Art.” 짧고 굵은 캐치프레이즈를 명시한 대형 현수막이 타이베이 난강전시센터(Nangang Exhibition Center) 홀1 외벽에 내걸렸다. 지난 1월 16일 VIP 프리뷰와 베르니사주(vernissage)를 기점으로 전 세계 아트 피플의 시선이 타이완 아트씬에 집중됐다. 타이베이당다이(台北當代). 한자 그대로 오늘날 타이완의 당대미술을 집중 공략하는 국제 아트페어가 2회째 개막했다. 이제 갓 오픈한 신생 아트페어지만, 타이완의 대표적인 현대미술 이벤트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아트마켓의 중심지로 부상할 가능성도 엿보인다.


컬렉터, 타이완 미술의 힘


출범 해에 갤러리 90곳이 참여하고 관객 2천 8백 명이 방문했다면, 올해는 99개 갤러리와 방문객 4만여 명을 기록하며 대폭 성장했다. 여기에 타이베이 전역은 각종 미술 행사로 꾸며졌다. 원아트타이베이(ONE ART Taipei, 1. 17~19), 아트퓨처(ART FUTURE, 1. 17~19), 와앗츠스튜디오오프닝(WHAAAAAT’S STUDIO OPENING, 1. 17~19) 등 위성 아트페어가 동시다발로 개최됐다. 현지 미술관과 갤러리 관계자들은 이 기회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며 타이완을 국제 미술계에 알릴 활주로로 삼았다. 타이완에 현대미술 ‘붐’을 일으킨 타이베이당다이의 파워는 무엇일까?


타이베이에 기존의 아트페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2년 타이완갤러리협회(Taiwan Art Gallery Association)가 설립한 아트타이베이(Art Taipei)는 매년 가을에 열리는 연례행사로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장터다. 하지만 타이베이당다이는 아트페어의 ‘황금 열쇠’를 손에 쥔 디렉터 매그너스 렌프루(Magnus Renfrew)가 창설하고 스위스 글로벌 금융기업 UBS가 후원해 일찍이 화제를 모았다. 렌프루는 아트바젤홍콩의 전신인 아트홍콩을 2007년 첫 회부터 이끌었고, 아트바젤을 운영하는 MCH그룹이 아트홍콩을 인수한 후 2012~14년 아트바젤홍콩 파운딩디렉터를 맡으며 국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제2회 타이베이당다이 공동 디렉터 매그너스 렌프루(왼쪽)와 로빈 팩햄(오른쪽).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제2회 타이베이당다이 공동 디렉터 매그너스 렌프루(왼쪽)와 로빈 팩햄(오른쪽).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2회째는 1984년생 젊은 큐레이터이자 편집자인 로빈 팩햄(Robin Peckham)이 공동 디렉터로 합류해 새로운 물결을 예고했다. 팩햄은 베이징의 롱마치(Long March)스페이스와 보어스-리(Boers-Li)갤러리에서 경력을 쌓고 중국 미술잡지 『LEAP』의 편집장(2014~18)을 역임했다. 2014년 베이징 울렌스현대미술센터에서 <Art Post-Internet>전을 공동 기획했으며, 홍콩K11아트파운데이션(2015), 베이징의 엠우즈미술관(2015)과 포선파운데이션(2018) 등에서 열린 전시에 기획으로 참여하는 등 지난 15년간 중국, 홍콩, 타이완을 기반으로 활동했다.


렌프루는 중화권 미술 현장에 잔뼈가 굵은 인재를 섭외해 지역 미술계의 신뢰를 얻고 리더십을 확장하려는 목적으로 팩햄을 영입했다. “나는 로빈과 오랫동안 교우하면서 그가 대중화권 문화 지형에 방대한 지식과 경험을 축적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대 표준 중국어인 보통화(Putonghua)로 소통하는 그의 능력은 타이베이당다이가 지역 커뮤니티와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고 네트워크를 심화하는 데 큰 도움을 주리라 확신한다.” 실제로 팩햄은 행사 기간 내내 공식 석상에서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하며 타이완 미술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렇다면 렌프루는 왜 홍콩에 이어 타이완을 아시아 아트마켓의 차세대 플랫폼으로 삼았을까? 타이완이 동남과 동북아시아에 모두 걸쳐 있는 지리적 이점도 한몫했겠지만, 우선 그는 ‘타이완 컬렉터’를 키포인트로 지목한다. “타이완 컬렉터들은 홍콩 아트페어의 성공을 이끈 중추 역할을 맡아왔다. 아트홍콩과 아트바젤홍콩의 참여 갤러리들 역시 이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2년 전 경매회사 필립스(Phillips)는 홍콩의 현대미술 판매 기관 중 30%가 타이완으로 이동해갈 것을 전망했다.소더비(Sotheby’s)와크리스티(Christie’s) 역시 경매의 위탁자와 구매자로서 타이완 컬렉터의 존재감에 주목한다. 이미 갤러리와 아트페어에서 작품을 구매하고 있는 컬렉터와 함께, 거대한 잠재력을 지닌 새로운 컬렉터를 끌어들이면서 마켓을 확장하고자 했다. 타이완의 지역성도 핵심 요소로 고려했다. 타이베이는 아시아에서 갤러리가 가장 많이 설립된 도시이자 주요 비엔날레의 개최지이기도 하다. 단순히 제2의 아트바젤홍콩을 유치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타이베이당다이를 통해 많은 사람이 지역의 배경과 문화를 다시 발견하도록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싶었다.” 또한 복잡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타이완의 미술품 세금 정책은 예술 거래의 중심지로 도약하는 조건이 됐다.


마이클 린의 미디어 파사드 작업. 타이베이당다이와 타이베이101의 커미션으로 제작했다.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마이클 린의 미디어 파사드 작업. 타이베이당다이와 타이베이101의 커미션으로 제작했다.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VIP 오프닝 하루 전인 15일 오후 6시에는 난강전시센터에서 준비 중인 본전시에 앞서 특별 프로젝트를 공개했다. 타이완을 상징하는 마천루인 세계금융센터 타이베이101과 첫 공동 커미션을 맺고, 타이완 작가 마이클 린(Michael Lin)의 미디어 파사드 작업을 외벽에 투사했다. 타이베이101 근처 한 건물의 야외 파티 장소에 VIP 인사들이 모이자 일순간 모든 조명이 꺼지고 101층 높이의 빌딩에 ‘台北101 台北當代’ 문구가 새겨졌다. 구름이 맑게 갠 밤하늘에 빨강, 노랑, 초록, 파란색 조명이 만화경 같이 아른거리는 고리를 생성하며 타이베이 야경을 알록달록 수놓았다. 도시 랜드마크와 협업을 모색한 시도는 단순히 상품을 사고파는 시장을 넘어 문화 교역의 주무대로 발돋움하려는 야심 찬 의지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도시 전체가 축제의 열기로 후끈


16일 목요일 오후 2시, 제2회 타이베이당다이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난강전시센터 전시홀 입구에 진을 치던 VIP 고객, 기자단, 각계 미술인이 우르르 입장했다. 행사는 ‘갤러리(Galleries)’, ‘영 갤러리(Young Galleries)’, ‘솔로(Solos)’, ‘살롱(Salon)’, ‘인스톨레이션(Installations)’ 등 5개의 섹터로 구성됐다. 입구를 지나 가장 먼저 마주하는 메인 섹터 ‘갤러리’에는 총 75개 갤러리가 참여했다. 데이비드즈워너(David Zwirner), 가고시안(Gagosian), 리손(Lisson), 리만머핀(Lehmann Maupin), 화이트큐브(White Cube), 하우저앤워스(Hauser & Wirth), 페이스(Pace), 페로탕(Perrotin) 등 서구 메이저 갤러리가 대거 집결한 모습은 아트타이베이에서 보기 드문 진풍경이었다. 타이베이 갤러리는 이치모던(Each Modern), 린앤린(Lin & Lin), 아시아아트센터(Asia Art Center), 마인드세트아트센터(Mind Set Art Center), 치니(Chini), 티나컹(Tina Keng), TKG+ 등 총 14곳이 출품했다. 주최 측은 홈그라운드 갤러리의 참가 수를 점차 늘리고 타이완 젊은 작가를 조명해나갈 것을 밝혔다. 한국은 국제, 아라리오, 원앤제이, 조현 총 4곳이 ‘갤러리’ 섹터에서 자리를 빛냈다.


가고시안 부스 전경. 카타리나 그로스(Katharina Grosse)의 형형색색 설치작품 <무제>(2016)를 선보였다.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가고시안 부스 전경. 카타리나 그로스(Katharina Grosse)의 형형색색 설치작품 <무제>(2016)를 선보였다.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오픈 직후부터 쾌재를 부른 갤러리는 뉴욕의 데이비드즈워너였다. 뤽 튀망(Luc Tuymans)의 회화작품이 불과 몇 시간 안에 대부분 팔리고, 그중 하나는 150만 달러(약 18억 원)에 거래되면서 올해 페어 최고가를 기록했다. 2019년 터너 프라이즈 공동 수상자인 오스카 무리요(Oscar Murillo)의 추상화 <무제>는 38만 달러(약 4억 5천만 원)에 판매되고 네오 라우흐(Neo Rauch), 레이몬드 페티본(Raymond Pettibon), 볼프강 틸만스(Wolfgang Tillmans)의 작품도 순식간에 거래가 진행됐다. 갤러리 관계자는 “상당수 작품을 타이완 컬렉터가 구매해갔다. 이 중에는 이번 타이베이당다이에서 새로 만난 고객도 있다.”고 설명했다.


하우저앤워스는 라시드 존슨(Rashid Johnson)의 콜라주 평면작업 를 47만 5천 달러(약 5억 6천만 원), 제니 홀저(Jenny Holzer)와 키스 타이슨(Keith Tyson)의 페인팅을 각각 35만 달러(약 4억 원)와 13만 달러(약 1억 5천만 원)에 팔았다. 타이베이에 지점을 둔 뉴욕 갤러리 숀켈리(Sean Kelly)와 홍콩의 갤러리드몽드(Galerie du Monde)는 1981년생 젊은 타이완 작가 우치충(Wu Chi-Tsung)의 작품을 모두 ‘완판’시켰다. 타이베이 지역 갤러리들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티나컹과 TKG+는 오픈 날 중국 작가 쑤샤오바이(Su Xiaobai)의 출품작을 모두 판매했고, 린앤린은 리우웨이(LiuWei)의 신작 풍경화를 57만 달러(약 7억 원)에 거래했다. 아시아아트센터는 행사 이틀간 작가 9명의 작품 총 22점으로 66만 달러(약 8억 원)의 수익을 올렸다.


줄리안 오피  2019_국제갤러리 출품작.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줄리안 오피 2019_국제갤러리 출품작.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작년 양혜규 단독 출품으로 부스를 꾸렸던 국제갤러리는 올해 강서경, 박서보, 양혜규, 하종현, 바이런 킴(Byron Kim), 엘름그린 & 드라그셋(Elmgreen & Dragset), 장-미셸 오토니엘(Jean-Michel Othoniel), 줄리안 오피(Julian Opie), 다니엘 보이드(Daniel Boyd) 등의 그룹전을 선보였다. 국제갤러리 관계자는 “첫해에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둬 이번에도 기대를 안고 참여했다. 개막과 동시에 강서경의 시리즈 2점이 큰 호응을 얻으며 바로 거래됐다. 2018년 아트바젤 ‘발로아즈 아트 프라이즈(Baloise Art Prize)’를 수상하고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참여하면서 작가의 인기가 아주 뜨거워졌다.”고 전했다. 이외에도 줄리안 오피의 라이트박스 평면작품이 91만 5천 달러(약 11억 원), 바이런 킴의 회화가 7만 달러(약 8천 6백만 원)에 팔렸다.


부지현 <궁극공간> 2018_아라리오갤러리 ‘인스톨레이션’ 섹터 출품작.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부지현 <궁극공간> 2018_아라리오갤러리 ‘인스톨레이션’ 섹터 출품작.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아라리오갤러리는 권오상, 이우환, 코헤이 나와(Kohei Nawa) 등 10여 명의 아시아 작가 위주로 라인업을 구성했다. 특히 갤러리 부스에서 수용하지 못하는 대규모 설치를 행사장 곳곳에 공개하는 ‘인스톨레이션’ 섹터에 부지현 작가의 <궁극공간>을 전시했다. 붉은 빛과 연기, 폐집어등이 천천히 움직이는 작품은 2018년 아라리오뮤지엄인스페이스에서 열린 개인전 출품작이기도 하다. 최근 갤러리2를 인수한 조현화랑은 1회째 행사에도 출품한 강강훈, 김종학, 박서보, 이배는 물론, 갤러리2 소속의 젊은 작가 권세진, 김수연, 박주애, 손동현, 이은새, 이해강, 전현선의 작품을 망라하며 한층 다채롭게 꾸몄다. 조현화랑 측은 “작년에는 대만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면, 이번엔 시각적으로 다양한 콘셉트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소개했다. 지난해에 김태윤, 박민하, 오승열 등의 작업으로 추상적 형태를 강조했던 원앤제이는 올해 김수영, 서동욱, 이세현의 회화작품으로 부스를 꾸리면서 구상에 좀 더 집중했다.


아시아 마켓의 신흥 교두보를 꿈꾸다


개관 8년 이내의 갤러리를 대상으로 한 ‘영 갤러리’ 섹터에는 타이베이, 상하이, 도쿄, 홍콩, 뉴욕의 갤러리 7곳이 참여해 새로움에 갈증을 느끼는 컬렉터의 입맛을 충족시켰다. 한국에서는 2017년 이태원에 오픈한 휘슬김경태, 김태윤, 박민하, 에이메이 카네야마의 작업을 출품했다. 그중 박민하와 에이메이 카네야마의 회화가 2점씩 판매됐다. “신생 갤러리가 한 곳에 몰려 있으면 관객이 가볍게 지나치기 쉽다. 타이베이당다이는 ‘영 갤러리’ 섹터를 행사장에 골고루 분포시키면서 젊은 갤러리도 동등한 관심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이경민 대표) 휘슬은 ‘인스톨레이션’ 섹터에도 참여했다. 타이베이 도심에 설치된 가로 90m 길이의 초대형 디지털 스크린인 동(Dong)갤러리에 김태윤의 작품을 상영했다.


한 갤러리가 작가 1명만 소개하는 ‘솔로’ 섹터도 타이베이당다이에서 경험할 수 있는 색다른 볼거리다. 도쿄의 와다파인아츠(Wada Fine Arts)는 현대인의 각박한 삶을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하는 테츠야 이시다(Tetsuya Ishida)의 회화와 설치, 런던의 바스티안(BASTIAN)은 미니멀아티스트 댄 플래빈(Dan Flavin)의 라이트아트를 선보였다. 교토의 소쿄(Sokyo)갤러리는 키미요 미시마(Kimiyo Mishima)의 세라믹 작품을 전체 ‘솔드 아웃’시켰다. 한국은 박영덕화랑백남준과 함께 일했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시기의 비디오아트로 부스를 꾸려 좋은 반응을 얻었다.


1월 18일 진행된 ‘아이디어 프로그램’ .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1월 18일 진행된 ‘아이디어 프로그램’ .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한편 팩햄이 공동 디렉터로 투입되면서 동시대미술의 담론을 공유하는 ‘아이디어 프로그램(Ideas Program)’이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타이완의 저명한 논평가 장티에-치(Chang Tieh-chih)와 공동 기획한 포럼 . ‘기술’, ‘생태’, ‘팝’, ‘전통’ 4개의 주제를 중심으로 3일간 17개의 토크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기자가 현장에서 만난 참여 갤러리 운영진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타이완 컬렉터는 확실히 다르다.” 작품을 알기 위해 적극적으로 다가와 장시간 살펴보고, 갤러리와 충분한 대화를 나누며 작가를 깊이 있게 조사한 다음 지갑을 연다는 것. 실제로 행사 전반부보다 후반부에 판매가 대거 이뤄졌는데, 처음 부스에 방문했던 컬렉터가 마지막 날 다시 돌아와 거래를 성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시아 아트마켓의 ‘슈퍼 루키’로 떠오른 타이베이당다이. 대만 현대미술의 오늘을 가늠하고 내일을 여는 아트 허브로서 긴 봄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 이 원고는 아트인컬처 2020년 2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아트인컬처와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