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인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대전에서 만난다. 《이것에 대하여》(6. 2~7. 26 대전시립미술관)전은 MMCA 컬렉션 중 해외의 현대미술 작가 35명의 작품 42점을 선별했다. 이 전시는 소장품의 기능, 정체성 등의 근본적인 의미를 묻고, 국제 미술 동향과 한국 미술의 상호 관계를 추적한다. 필자 이인범은 이 전시에서 한국 미술의 동시대성을 향한 ‘욕망(서구 콤플렉스까지)’을 포착한다. 그는 미술관의 수집 정책과 소장품 전시의 철학은 우리 문화예술의 정체성을 투명하게 비추는 ‘거울’이라 설파한다. 그리고 묻는다. MMCA는 과연 거시적, 메타적 수집 정책을 펼치고 있는가?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이것에 대하여》전이 열렸다.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김주원과 학예연구사 홍예슬이 기획을 도맡았지만, 출품작 전체는 국립현대미술관(이하 MMCA) 소장품으로 구성되었다. 전시는 첫 섹션 〈‘동시대성’을 향하여〉로 시작해, 〈모더니즘의 안과 밖〉, 〈형상성의 회복 이후〉, 〈평행하는 세계〉 등 4개 섹션으로 나뉘어 진행되고, 여기에 아카이브 코너가 덧붙었다.
출품작은 MMCA 소장품 중 MMCA 자체 전시 일정과 작품 보존 상태 등을 고려해 선정한 해외 현대미술 작가 35명의 작품 42점으로 이뤄져 있다. 규모 면에서 대단하달 수 있는 전시는 아니다. 그런데 누구든 알 만한 거장의 이름이 여럿 눈에 띈다. 스페인의 안토니 타피에스, 프랑스의 피에르 술라주, 클로드 비알라, 루이스 부르주아,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독일의 요제프 보이스, 게르하르트 리히터, 미국의 로버트 라우센버그, 장-미셸 바스키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윌리엄 켄트리지 등 이름만으로도 오늘날 세계 미술계에서 당당한 발언권을 가진 이들이다. 광주를 비롯해 카셀, 베니스 같은 국제 미술제로 화제가 된 레바논, 팔레스타인 등 중동 지역 출신의 왈리드 라드, 사이먼 놀포크, 콘스탄티노 시에르보, 요게쉬 바브, 러시아 태생의 안톤 비도클 등 비서구권 작가들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들 작품을 《이것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묶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시인 발디미르 마야코프스키(Valdimir Mayakovsky)의 시집『이것에 대하여(About That)』(1923) 제목을 그대로 따와 “현대미술의 지형과 미술관 소장품의 타임라인을 관통하는 예술적 실험 정신”이 무엇인지 주목하고자 했다.
이상 기획자가 전시와 작품을 둘러싼 객관적 사실에 의거해 기술한 전시 개요다. ‘2차 세계 대전의 참극이 안겨준 충격과 그 폐허와 잔상을 어떻게 추슬러야 하는가’라는 과제에 직면해 미술사적, 정치 · 사회적 사건의 전면에 나섰던 출품작 구성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들을 향한 야심 찬 기획 의도와 전시 제목, 익숙하지 않은 전시 조직 방식이 호기심을 자아낸다. 그런데 왜 대전시립미술관에서 MMCA 소장품전이 열린 것일까? 지역 공공 미술관이 국립 미술관 소장품을, 그것도 해외 현대미술 작품을 재맥락화하는 일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것에 대하여>로 하려는 말은 무엇일까?
동시대성을 향하여
미술관 입구에는 지난 세기 러시아 구축주의 작가들이 실험했던 로고타이프 양식의 전시 현수막이 관객을 맞이한다. 그밖에도 알게 모르게 기획자가 가미한 듯 보이는, 관람객에게는 가벼운 압력으로 느껴질 만한 감각적 디스플레이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전시를 어떻게 봐주길 기대하는지, 전시를 통해 성취하고 싶은 게 과연 무엇일지, 호기심을 배가시킨다. 첫인상이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은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대표 작가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Michelangelo Pistoletto)의 조각작품 <에트루리아인>(1976)이다. 이것은 하나의 작품이기 이전에, 관객이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동선상의 벽면에 설치된 대형 거울에 ‘반영된 이미지’로서 맞닥뜨리게 된다. 이내 등신대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복장을 하고 등을 보이며 ‘거울’을 향해 왼손을 든 채 그 손끝을 응시하는—한낱 작위(作爲)이자 표상(表象)일 뿐인—한 남성 입상 청동 조각과 엉켜 엉겁결에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이어 콜롬비아 작가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의 옆으로 부풀려진 비례의 남녀가 카페에서 춤을 즐기고 있는 일상을 그린 〈춤추는 사람들〉(2000)을 마주한다. 어두운 방에서 조명을 받으며 시각적 환영을 불러일으키지만, 피스톨레토의 조각과 더불어 더욱 화이트 큐브와 삶의 세계, 예술과 일루전, 환상과 현실의 틈을 오가며 그 모든 경계를 무력화하는 듯하다. 매력적인 도입이다.
강렬한 도입부 덕분에 이어지는 익숙하지 않은 작품, 결코 사연이 만만치 않은 작품, 알량한 예술을 거부하며 그저 물질이기를 자처했던 작품까지, 관객이 전시를 ‘예술이 빚어낸 현실’로 인지하도록 한다. 세계 대전의 트라우마 속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그토록 경계 지우고자 했던 물성(物性)을 인간 스스로와 동일시하는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apies)의 (1991),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의 〈회화〉(1985), 자아 과잉의 허구로 가득한 회화의 형식 자체를 신랄하게 허물어뜨려 그것들을 그저 그렇고 그런 평면이나 원초적 사물로 되돌리는 클로드 비알라(Claude Viallat)의 〈무제〉(1966), 장피에르 팡스망(Jean-Pierre Pinceman)의 〈무제〉(1969)…. 이 처절하고 심각한 작품들에 탐닉해 들어가는 내가 놀랍다. 혹시 이 전시가, 이것이 만들어낸 사태가 너무 미학화된 것은 아닐까? 그 아름다움이, 그 진실이 조금은 두렵기까지 하다.
첫 섹션 〈‘동시대성’을 향하여〉의 풍경은 이 전시가 궁극적으로 삼은 목표가 무엇일지 궁리하게 한다. 그것은 서구 현대미술의 뜨거움일까? 아니면 그것과의 거리 두기일까? 전시가 서구 현대 작가와 작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배치된 작품과 그 행간 사이에서, 그리고 기획자의 언어 여기저기서 묻어나는 것은 흥미롭게도 오히려 ‘한국 미술의 동시대성을 향한 욕망’이라는 점이다. 그 열망은 “포스트식민과 냉전이라는 복잡한 사회·정치적 자장 안에서 (…) 전개된 1960~70년대 한국 실험미술과 1970년대 단색화”, “1960년대 이탈리아의 아방가르드 운동인 ‘아르테 포베라’나 미국의 ‘미니멀리즘(minimalism)’, 1970년대 프랑스의 ‘쉬포르 쉬르파스(support surfaces)’와 일정 부분 교차되는 (…) 반(反) 회화, 반 예술적 실천들이 한국 현대미술에 선별적으로 접속, 수용되어 왔던 사실”과 같은 관람 동선 사이사이에 제시되는 글에서도 드러난다. 아카이브 코너에 비치된 자료를 살펴보면 이를 더욱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서구 미술, 우리 안의 타자
그렇다면 전시가 출발점 삼는 ’동시대성’이란, 해방 후 우리 미술계가 처음 자신의 얼굴을 국제 미술계에 내밀며 접촉면으로 삼게 된 유럽 미술이 아닌가? 35년간의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이후 조국 해방의 환희를 맛보지도 못한 채 이어진 남북 분단과 이념적 분열, 6·25 전쟁으로 난파된 역사적 현실과 집단적 트라우마를 선결 과제로 맞닥뜨렸을 때, 젊은 미술인들이 자유로운 이 땅의 주체로서 꿈꿨던 첫 ‘미학적 이상향’, 즉 서구의 현대미술 말이다. 비록 전시장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우리 미술이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를 고스란히 계승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지배했던 재현 미학을 부정할 수 있는 환상의 지름길로 인도했던 바로 그것들 말이다.
그러니까 정작 전시가 서구 현대미술을 통해 겨냥하는 동시대성이란 다름 아니라 그 아방가르드적 부정성을 전유하고자 한 한국의 ‘현대’미술이라는 것 아닌가? 그렇기에 〈모더니즘의 안과 밖〉, 〈형상성의 회복 이후〉, 〈평행하는 세계〉 섹션으로 이어지며 서구 현대미술의 전개를 살피는 재미는 더욱 증폭된다. 서구 현대미술이 내걸었던 여러 실험적 형식과 태도는 우리 한국의 현대미술 흐름의 생성과 변화에 어떻게 교직(交織)되어 왔는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어떤 것은 생략되고 어떤 것에는 더 몰입했는지, 소란스런 이슈들로 넘쳐난다. 예컨대 매체 특정성이나 서구 모더니즘의 ‘순수미술’ 신화, 자본주의 체제 속 미술이 물신 숭배로 치닫는 현상과 그에 대한 냉소, 기존의 미술이 신비화했던 가치와 권위를 해체하려 했던 다양한 실천과 방법, 정치 · 사회적 소수자의 해방과 소외된 삶을 위한 제안,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매체를 탈피한 해방감과 이 모든 서사에서 사진이나 영상 등 뉴미디어가 행사하는 막강한 위력까지. 이처럼 전시가 주목하고자 하는 서구 현대미술 저변의 실험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전통을 한국 동시대미술과 견주어 확인하는 긴장감은 마지막 작품을 관람하는 순간까지 내려놓기 쉽지 않다.
전시 배후에는 분명 한국 현대미술 흐름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평행하는 세계〉 섹션에 설치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작품 〈위안부〉(1997)가 그 좋은 예다. MMCA의 커미션으로 제작된 작품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이슈인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 문제를 〈평행하는 세계〉의 동시대성과 장소성의 한가운데에 위치시킨다. 이미 ‘동시대성’으로 공유되기 시작한 세상,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 시장 경제’ 체제의 구성체로 한데 묶인 이 세계에서 서구와 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 사이에 긋는 경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전시가 엮어낸 지난날 국제 미술의 동향과 이에 반응했던 한국 미술을 대비시키는 재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에 대하여》전이 구성해내는 서구 동시대미술의 내러티브가 유럽 및 미국의 유력 미술관 전시와 액면 그대로 비교될 일은 아니다. 뉴욕 MoMA가 되었든, 파리 퐁피두센터나 런던 테이트모던이 되었든, 전시를 통해 동시대미술을 단지 현상적으로 재현하겠다는 무모한 시도를 하지는 않듯 말이다. MMCA 컬렉션을 재맥락화한 이 전시와의 비교 대상이 필요하다면, 이로써 전시의 의의를 밝히려 한다면 오히려 그동안 이 땅에서 열린 숱한 서구 현대미술전 혹은 MMCA 자체 소장품 전시가 해외 작품을 취급했던 방법의 틈 사이에서 길어 올려야 한다.
하나 분명한 것은 이 전시가 여러 면에서 우리 근현대사에 숨은 ‘서구 콤플렉스’와 ‘새것 콤플렉스’를 고스란히 다시 불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실험성이나 아방가르드적 태도를 따지고 들기는 하지만, 서구 현대미술을 그 기원으로 되짚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전시는 근대화 이래 우리에게 지속적인 화두일 수밖에 없었던 서구의 문화 · 예술 수용 방법론이라는 숙제를 다시 꺼내 부여잡고 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전시가 이 과제에 ‘방법적’ 접근을 새롭게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시는 20세기 초반 일찍이 기념비적 아방가르드를 경험했지만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치르는 가운데 혼돈에 빠진 예술을 구원하려 다시 소환한 반-회화, 반-예술, 아방가르드 등 서구 현대미술의 주요 변곡점에 주목하되, 역설적으로 이 땅,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관 MMCA가 수집한 컬렉션을 끌어들여 복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안의 타자’를 우회로로 삼아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예술이 처한 현실이자, ‘동시대 한국 미술의 진상(眞相)’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전시가 취하는 태도는 방법적이다.
너의 시로 어둠을 두드리라
러시아 혁명기 아방가르드 시인 마야코프스키의 시집 제목을 그대로 전시 제목에 끌어 온 것 또한 매우 전략적이다. 아니 선언적으로 다가선다. 이 전시로 도모하고자 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꿈같지만 그만큼 더 선명하게 과시해주니 말이다. 마야코프스키는 『이것에 대하여』에서 “진실”을, “아름다움”을, “이제부터 나를 보라!”, “너의 시로 어둠을 두드리라”고 외친다. 또 다른 시 「Order to the Army of Art」에서는 “거리를 붓 삼고 광장을 팔레트 삼으라”고도 말한다. 한국의 근현대미술사란 결국 서구가 고안한 ‘미술’ 개념을 우리식으로 풀이하고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다시 백지상태로 돌아가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의 공동체를 위한 예술이, 예술가의 역할이 어떠해야 할지 묻고 또 되물어야 할 때 아닌가? 오늘날 대중 소비문화의 한 아이템으로 전락한 예술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이미 죽음을 맞이한 지난 시대의 미술을 숭배하는 장엄한 무덤은 필요하지 않다. 거리에, 전차 선로에, 공장에, 공방과 노동자의 집에 존재하는 인간 정신이 살아있는 공장이 필요하다.”(Valdimir Mayakovsky, “Meeting ob iskusstve”, iskusstvo Kommuni No.1 , 7 December 1918)는 그의 말이 생생하기만 하다.
우리는 격동의 근대사를 살아오며 근대화를 서구화와 동일시해왔다. 반면, 이번 전시가 그러했듯 앞으로 ‘미술사 전개 요인으로서의 타자’에게 문을 열어 영접하는 일은 우리 스스로 문화적 정체성을 풍요롭게 하는 지름길일 것이다. 이를 위해 이념적 지향, 연구 방법론과 태도를 보다 더 정교하게 다듬는 일이 필수적이다.
감각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스스로 문화적 정체성을 문제 제기한다는 측면에서, 이번 전시가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그 성패를 떠나 전시 자체가 우리의 미술 현실에 대한 ‘메타-비평’의 성격으로 다가선다는 것이 흥미롭다. “수집 당시 서구 현대미술과 한국 미술 지형 사이의 아방가르드 정의와 쟁점이 평행하거나, 미끄러지고 교차되는 흥미로운 국면을 엿볼 수 있다. 이들 국면과 미술관 수집 정책의 지향점이 조우하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한다는 기획 의도는 차치하더라도, 스펙터클한 효과나 미학적 가치, 각각의 작품이 섬세하게 제안하는 미술사적 이슈를 언급하는 것만으로 이번 전시를 짚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밋밋하다.
작품은 그것을 소유한 자만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리고 해석하는 자의 것에 더 가깝다. 그렇더라도 MMCA 컬렉션에 갇힐 수밖에 없는 이 전시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왜 그럴까?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이번 전시 출품작은 서구 현대미술을 조회하기에도 아슬아슬한 허구이니 말이다. 그 출처인 MMCA가 지금까지 개최했던 소장품 상설전을 떠올려보려 애쓰지만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니 그 모태인 수집 정책, 한 국가를 대표하는 미술관으로서 거시적 관점을 포함한 해외 문화 · 예술 수용에 대한 입장과 전략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내 그 결핍 앞에서 다시 한번 망연자실하게 된다. 그러니 이제 미술관의 가장 핵심적 기능인 ‘이것에 대하여’, 즉 소장품 수집 정책과 활동에 대하여 제대로 물어야 한다. 그리고 지극히 상식적인, 그렇지만 너무나도 지체된 ‘이것에 대하여’ 답해야 한다. 그래야 현대미술의 “역사적, 예술적 가치는 물론, ‘수집’이라는 행위가 포괄하는 다양한 맥락이 제대로 가시화”될 것이니 말이다.
문화적 품격을 위한 철학
주지하다시피 MMCA가 설립된 것은 1969년의 일이지만 ‘국립 미술관’에 걸맞은 전시 및 수집 활동을 고유 업무로 삼게 된 것은 1986년 과천으로 신축 이전하고 난 다음이다. 현재 총 8,563점에 이르는 MMCA 소장품 중 해외 작품은 685점. 그나마 있는 해외 작품도 올림픽을 전후해 수집된 것들 말고는 이렇다 할 게 없다. 장기적 비전을 갖고 접근한 흔적은 어디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가깝게는 1990년대에 들어 불기 시작한 국제 비엔날레 바람에 휘말려 일회적, 과시적 전시의 성패 여부만이 곧 미술 문화라는 인식이 만연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다. 동구권의 몰락과 더불어 전 지구적으로 몰아닥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물결에서 아트페어나 비엔날레를 중심으로 일어난 ‘스펙터클 전시’의 유행과 예술의 물신화 현상의 파고 속에 국립 미술관 수집 정책의 중요성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이 모두 핑계일 뿐이다. MoMA, 퐁피두센터, 테이트모던이라고 우리보다 역사가 월등히 깊거나 신자유주의 물결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경제적 위상이 ‘G7’에 근접한 국가라 평가되고, 매년 해외 미술관 투어 관광으로 지출하는 경비가 수십조 원에 이르는가 하면, 국제 비엔날레 개최에 수백억 원 넘게 퍼붓는 나라의 국립 미술관이라고 하기에 MMCA의 수집 정책과 소장품 상설전시는 균형을 잃어도 너무 잃었다. 타 국가의 문화를 경청하는 철학과 이를 분석하는 첨예한 방법론을 갖추지 못한 나라의 자국민이 스스로의 문화적 품격을 존중할 줄 아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 이전에, 이는 우리 미술의 살림살이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