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 행사

다시,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posted 2021.06.10


김준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오랜 기다림 끝에 ‘광주비엔날레 2021’(4.1~5.9)이 개막했다. 팬데믹 상황으로 두 번이나 연기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뒤 공동체 의식을 ‘반성’하고 ‘성찰’하며 새로운 가치를 ‘발굴’한다는 가치를 내걸고 시작했다.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는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이다. 흔히 ‘미개함’으로 치부되던 영성을 인류가 현재 맞닥뜨린 위기를 타개할 방안으로 제시한 것. 어쩌면 직면한 위기의 원인과 답을 과학적 사고가 지배하기 이전 오랫동안 우리 인류를 건사했던 다른 인식론에서 찾아보고자 한 것은 아닐까? 사실 그것은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인류의 역사를 살필 때 ‘참’과 ‘거짓’이라는 일원론에 근거한 이분법적 인식에선 보이지 않았거나 애써 외면한 가치였다.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그것의 복권과 새로운 가치체계 창출을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더불어 광주비엔날레의 창립 의의가 비로소 전시에 녹아든 양상을 발견한 것은 역사적 성과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광주비엔날레 1갤러리 전시전경. 이미지 월간미술 제공.

광주비엔날레 1갤러리 전시전경. 이미지 월간미술 제공.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에 열리는 예술공론장의 의제로 정신성(spirituality)의 예술을 선택한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다. 철지난 예술권력들이 버티고 있고, 어디서나 사회-정치적인 의제가 요동치는 국제미술행사에 이렇듯 이단적인 주제를 소환하는 일은 지엽적이거나 산발적이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하여 비서구의 정신성을 전면적이고 전격적으로 다룸으로써 광주비엔날레는 더욱 확실하게 차별화한 광주의 메시지를 제시했다. 애도와 치유, 위안, 공존 등의 메시지를 담은 길상화복과 제의의 도상들을 통하여, 그리고 우주와 생명과 브레인을 성찰하며 자연과 사회와 인간에 대하여 새로운 정신성을 제안하는 과학예술을 통하여, 이 전시는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적 맥락을 창출하며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새로운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마음, 영혼 그리고 정신


암흑 속을 활공하는 빛의 드로잉으로 우주적 신비를 연출하며, 명시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황홀한 정신성의 찰나를 연출하는 과학예술. 이번 전시의 최고 득의작인 릴리안 린의〈중력의 춤〉이다. 문학과 연금술, 초현실주의, 불교시, 물리학 등의 영향을 배경으로 예술활동을 해온 릴리안 린은 시적 언어와 움직이는 빛, 구체시와 키네틱 조각을 결합한다. 여성신화적 서사를 기반으로 하는 그의 예술은 과학이론과 융합적 기술 기반으로 더욱 확장해왔다. 융합의 예술을 지향해온 그의 성취는 이번 전시의 출품작에서 우주의 힘을 추상언어로 시각화하는 빛 드로잉으로 더욱 빛났다. 그것은 물리적 실재를 기반으로 비가시적인 에너지를 시각화하는 데, 블랙홀과 중력 등의 과학적 서사를 그 너머 정신성의 영역으로 투사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정신성과 예술이라는 의제를 다루고 있는 이번 전시는 마음과 정신을 구분짓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사실 한국어에서 한글단어와 한자단어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마음과 정신은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보인다.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이라는 이분법들을 생각해볼 때, 몸이나 육체나, 마음이나 정신이나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예술감독들이 국제공통어인 영어로 소통했으니, 영어 단어를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영어 단어 마인드(mind)는 ‘이성적인 사고를 위한 능력’이고, 스피리트(sprit)는 ‘인간 영혼의 본질’이다. 스피리트는 마인드에 비해 직관적이고 감성적이다. 따라서 ‘마인드 라이징’과 ‘스피리트 튜닝’이라는 구문을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으로 번역한 뜻을 잘 헤아려 볼 일이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이성과 감성을 구분짓는 경계는 큰 의미가 없다. 현대의 브레인 연구가 인지과학으로 집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음과 정신을 구분해놓은 기획의도에 따라 살펴보자면, 마인드는 인간의 목적의식에 맞게 조절 가능한 실재이다. 인간의 모든 인지작용은 마음작용의 범주 안에 들어있다. 뇌는 감각적인 기억에서 출발해 감정과 느낌 그리고 생각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인간은 마음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 스피리트는 영혼의 문제와 직결하는 것으로서 인간 신체와 별개로 작동한다거나 작동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그 가능성의 영역을 위하여 인간은 초월, 직관, 무의식 등과 같은 비이성적이며 감성적이고 때로 불가해한 개념을 창출했다.


비서구의 전근대는 서구중심의 근대성이 직조해낸 이성과 합리의 틀을 넘어 인간의 원초적인 감각기제들을 복원하는 계기점일 수 있다. 인간의 지적인 능력을 말하는 지성을 확장하기 위하여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것처럼,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 내재하는 직관적인 잠재력을 복원하자는 것이다. 문명의 진화는 과학기술의 합리성에 기대어 진보의 신화를 쌓아왔지만, 그것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나타난 지 오래다. 문명사적인 전환을 위해서 과학 너머 정신성의 문제를 재검토해보자는 제안이 나오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새로운 감각과 사유를 제공하는 것처럼 지성을 넘어서는 정신성의 어떤 대목에서 새로운 대안을 발견하자는 것이다.


광주비엔날레 2갤러리 전시전경. 이미지 월간미술 제공.

광주비엔날레 2갤러리 전시전경. 이미지 월간미술 제공.

마음을 떠올려 정신을 조율하기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Minds Rising, Spirits Tuning)〉의 키워드는 서구와 비서구의 이분법이라는 기본 구도에서부터 출발한다. 물론 이 전시에서는 비서구의 생활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삶과 죽음의 서사가 펼쳐지지만, 그 강렬한 이질성으로 인해 오히려 역으로 서구화의 길을 걸어온 문화적 전지구화가 또렷해지기도 한다. 비엔날레관의 다섯 개 전시장에서 펼쳐진 각 섹션은 “1) 함께 떠오르기 / 2) 산, 들, 강과의 동류의식 / 3) 욕망 어린 신체, 분과적 경계 너머 / 4) 돌연변이에 관해 / 5) 행동하는 모계문화” 등을 소주제로 하여 자연과 인간, 중심과 주변, 남성과 여성, 삶과 죽음 등의 이분법적인 경계를 넘나드는 문제의식들로 충만하다.


샤머니즘박물관과 가회민화박물관의 컬렉션들이 빛났다. 각종의 길상화들은 물론이고 부적이나 샤먼의 상징을 담은 그림 등의 문화인류학적인 유물들이 현대미술 작품들과 어우러져 독창적인 방식으로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치유의 예술을 선보였다.코라크리트 아루나논드차이의 〈죽음을 위한 노래〉는 삶과 죽음의 서사로서 트마우마 치유로서의 예술을 보여준다. 그것은 개인의 것에서 집단의 것에 이르기까지 공유하는 내용이다. 김상돈은 한국 전통 상여의 형상과 색채, 조각과 설치의 요소들을 차용하여 동시대의 현실을 이야기했다.


광주비엔날레 3갤러리 전시전경. 이미지 월간미술 제공.

광주비엔날레 3갤러리 전시전경. 이미지 월간미술 제공.

이 전시의 빛나는 대목 중 하나는 정신성 주제에 부합하는 뮤지오그래피에 있다. 공간 전체를 단일한 시각서사로 엮어내면서 각각의 작품이 나름의 존재감을 갖게 했다. 공간을 구획하여 동선을 분절하고 다시 연결하면서 칸을 막는 방식이 아니라, 거리두기, 조명 등으로 공간감을 조성하고, 반투명의 천으로 닫힌 듯 열린 공간을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비디오클립들의 아우성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큰 미덕이었다. 시각과 청각의 자극으로 인해 어안이 벙벙해지곤 하는 비엔날레표 전시공간과는 확연히 차별화한 공간조성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전시가 고요하고 밋밋하게 관객을 맞이한 것은 아니다. 길상화, 불화, 굿당그림, 부적 등 종교적 제의의 이미지들은 그 자체와 삶과 죽음을 넘어들며 강렬한 드라마를 제공한다. 이러한 연출은 잘 짜인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으면서도 돌발적인 매개변수들 속에서 흩어졌다가 다시 조여드는 감각의 굴곡을 만들어냈다. 응시와 일견 사이를 적절하게 오가면서 전시 전체를 음미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관객은 적절하게 전시의 문맥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할 수 있었다. 비엔날레들이 일시적인 감각의 탈각을 초래하곤 하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그러한 이질감 대신 정서적 감응의 시공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차별화에 성공했다.


광주비엔날레 4갤러리 전시전경. 이미지 월간미술 제공.

광주비엔날레 4갤러리 전시전경. 이미지 월간미술 제공.

광주 너머의 광주정신
여기, 광주를 과거의 우리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 모두의 것으로 소환하는 배치의 미학이 있다. 남미의세실리아 뱅골리아는 자국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작가인데, 광주에서 미술운동을 하다가 고문후유증으로 고통을 안고 사는 광주의 화가 이상호와 대구를 이루는 공간배치로서 회심의 장면을 연출했다. 필리핀 작가 시안 데이리트는 현재의 필리핀 군부독재를 주제로 한 작품을 출품했다. 과거와 현재가 얽힌 동아시아와 민주주의 인권 서사가 교감하고 연대하는 예술공론장으로서 광주비엔날레가 더욱 빛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연대의 장에 정치적 이유를 들어 이상호 작품 철거를 주장하는 일각의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언론의 보도에 이어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예술인들의 연대서명까지 나오는 상황이니, 광주 5·18은 1980대년의 일로 끝난 게 아니라 2021년 오늘을 사는 한국과 아시아와 전지구의 일이라는 게 새삼 실감난다.


광주비엔날레 5갤러리 전시전경. 이미지 월간미술 제공.

광주비엔날레 5갤러리 전시전경. 이미지 월간미술 제공.

협력큐레이터로서 아시아 지역 연구와 작가선정에 참여한 큐레이터 박주원에 따르면, 예술감독들과 큐레이토리얼 팀은 ‘광주 5·18을 이미지화하는 작업’보다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광주의 역사와 기억들을 공감하게 하고, 그것이 광주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들은 ‘광주가 고립되길 원하지 않으며, 비슷하게 반복되는 인간사회의 역사라는 데 공감’하고자 했다. 미얀마와 같은 제3세계를 보면서 한국은 이미 그 단계를 지났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미얀마의 문제는 오늘날 우리 현실의 문제이기도 하다. 광주가 과거에 얽매여 고립되지 않고 동시대의 공감 속에 지속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광주정신’이라는 이름으로 광주 5·18의 정신성을 되새기는 이유다.
‘광주 5·18은 끝난 게 아니’라는 생각은 광주 너머의 광주를 내다보는 지혜다. 그것은 광주시민들이 그 기억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미얀마와 같은) ‘타자의 고통과 상처에 공감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나아가 그들과 연대함으로써 치유의 길을 여는 데 있다는 통찰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전시는 광주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광주를 깊이 다뤘다. 그것은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까지도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광주라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예술공론장이기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한다. 그것은 4·16을 목도한 온 국민에게 집단트라우마가 존재하듯이, 1980년의 비극을 경험한 광주시민들에게 남은 집단트라우마를 성찰하는 일이다.


광주비엔날레 호랑나무가시폴리곤, 광주극장 전시전경. 이미지 월간미술 제공.

광주비엔날레 호랑나무가시폴리곤, 광주극장 전시전경. 이미지 월간미술 제공.

정신의 유물론적 이해와 예술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저술한 20세기 모더니스트 칸딘스키는 ‘회화에서의 화성이론’을 목표로 환원적인 예술론을 펼쳤다. 예술에서 정신성을 소환한 21세기의 광주비엔날레는 환원론의 역방향을 지향하며 예술의 가치 확산을 목표로 했다. 그것은 근대적 예술론을 탈근대적 예술론으로 전환해온 동시대의 공동선이다. 이번 전시가 강렬하게 정신성을 소환한 이유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탈근대적 맥락을 위함이다. 인간의 감각은 인지가능한 감각과 그 이상의 인지불가능한 감각이 있다. ‘맞이하는 영혼’은 논리적 인지 능력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감각을 호명한다.


영혼과 영성이라는 개념은 모호하다. 필자와 같은 유물론자에게 영혼이라는 말은 예술적 소통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방해하는 요소이므로, 특히 종교적 관점에서 말하는 영혼을 예술 창작이나 비평, 해석에 들이대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번 전시가 내세운 개념과 전시의 맥락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것은 비서구 전근대를 소환하면서 그것을 탈근대적인 맥락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혼이나 영성이라는 말보다는 정신이나 정신성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정신, 정신성, 정신적인 것’에 관한 유물론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그것이 예술적 사유와 실천과 소통과 연대하는 지점에서 21세기 버전의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정신성에 대한 과학적 이해야말로 정신성예술의 근본이다. 이 전시가 과학예술을 통하여 정신성에 접근한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마음과 영혼’을 다루는 이번 전시에서 인지과학적 접근으로 정신의 문제를 다룬 것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뇌과학을 통하여 정신성(영성)을 다루는 순간에 발생할 법한 불협화음을 넘어서 동시대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인공지능은 어떻게 인간의 인지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을 통하여 인간 정신의 영역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제시했다. 뇌과학적 관점에서라면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분리불가능하다. 이 명제는 역설적으로 근대적 합리성이 아닌 전근대적인 원형적 사유와 연결된다.


광주비엔날레 구 국군병원, 광주아시아문화전당 전시전경. 이미지 월간미술 제공.

광주비엔날레 구 국군병원, 광주아시아문화전당 전시전경. 이미지 월간미술 제공.

이 전시가 전근대적 정신문화 유산과 첨단의 뇌과학과 인공지능까지를 열거하여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탁월하게 탐구하고 성찰하고자 했다손 치더라도 여전히 걸리는 문제는 영혼이다. 정신이라면 몰라도 영혼이라는 개념을 접하면 어쩔 수 없이 유물론과 관념론으로 나뉘는 존재론적 근본문제 때문이다. 마음과 정신, 이성적 합리와 정서적 감응, 분석과 해석, 통찰과 직관 등 인간의 정신작용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예술적 소통을 실행한다고 하더라도, 영혼이라는 개념 앞에 서면 다시 원점이다.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영혼이라는 개념을 놓고 그것을 과학이나 예술과 대면시켜야 하는 과제를 여전히 안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여전히 이 우주 한구석에서 인간이라는 유한한 생명체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이라는 화두가 남긴 또 다른 질문이자 해답이다. 과학과 예술을 중심으로 역사와 인문을 다루면서, 종교적 제의와 생활문화를 끌어들인 것은 역설의 미학이다. 샤먼과 불교, 동아시아의 세계관에서 정신은 신체와 분리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생각에 기초한 샤먼적 세계관과 제의적 퍼포먼스들은 우주와 생명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서구의 이분법을 넘어서 그 경계를 없애기 위해서 ‘마인드(지성)를 두둥실 떠올려 스피리트(정신성)를 차분하게 조율하는’ 지혜를 찾아 나서는 예술의 여정. 2021년 광주비엔날레가 오늘날의 예술과 사회에 던지는 의미심장한 화두이다.


김준기

국립현대미술관(학예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