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현대미술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데에는 이 나라의 많은 예술가와 예술가 그룹의 활발한 활동에 기인한다. 제한된 인프라와 기금제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활동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는 반면, 자신들의 고국을 넘어 스스로 혹은 집단적으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중견 작가들은 종종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예술 행사 및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전시회에 초대되곤 한다. 한편, 많은 신진 작가들은, 다양한 국가 소재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노력하며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예술가들과 네트워킹을 하고 해외 예술 커뮤니티에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선보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한다.
이처럼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의 숫자가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업과정을 소개 할 예술 공간은 여전히 매우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개인전을 개최하는 공간이 아닌, 특정 갤러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미술 전시회를 기획 구성하는 공간은 드물다. 이 글을 통해, 나는 인도네시아 소재 몇몇 예술 공간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자신들의 고유한 비전과 경영 전략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자신들의 고유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을 '육성'하고자 하는 공간을 소개하려고 한다. 또한 지역마다 상이한 인도네시아 예술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해 현지 주요 예술 도시 3곳인 자카르타, 반둥, 족자카르타를 소개하려 한다. 이미 10년 이상 한국 미술 현장에 잘 알려진 루앙루파(Ruangrupa)와 체미티 아트 하우스(Cemeti Art House) 같은 오래된 공간은 인도네시아 현대 미술 현장에 꾸준히 기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디아.로.구에(Dia.lo.gue)
끄망(Kemang)으로 알려진 자카르타 남부의 갤러리 지구는 참신한 카페, 바, 레스토랑, 부티크, 크리에이티브 회사에서 만들어 내는 새로운 트렌드가 샘솟는 곳이다. 자카르타 소재의 대부분의 상업 갤러리가 위치한 곳이기도 한 이 지역은 도시 속에서 가장 '서구'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 가운데 비상업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면서 힙스터들의 아지트로 유명한 공간이 바로 디아.로.구에(Dia.lo.gue)이다. 전시 공간, 카페, 상품 매장으로 구성된 이 공간은 2011년 문을 연 이래, 시각 예술, 패션, 건축과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이곳의 설립자는 현지의 선도적인 디자인 회사인 르보예(LeBoYe)의 창립자인 이그나시우스 헤르마완 탄질(Ignatius Hermawan Tanzil)과 그의 아내인 엔젤 탄질(Engel Tanzil)이다. 이들이 내세우는 비전의 창의성은 갤러리 이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인도네시아어인 ‘디아, 로, 구에’는 한국어로 ‘그/그녀, 당신, 그리고 나’라는 뜻으로, 즉 디아.로.구에(Dia.lo.gue)에서는 누구나 서로 자유롭게 대화(dialogue)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예술적 비전을 가장 잘 드러내는 연례 프로그램으로 엑시(스)트 (Exi(s)t)가 있다. 현지의 저명한 예술가인 에프엑스 하르소노(FX Harsono)와 헤르마완 탄질(Hermawan Tanzil)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인큐베이터 개념의 본 프로그램은 예술가가 되고자 희망하는 참가자에 한해, 자신들의 현재 진로를 종료(exit)하고, 인도네시아 예술계에 입문(exist) 하도록 장려하는 프로그램이다. 참가자들은 3개월간의 준비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멘토십과 집중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젊은 예술가로서 새로운 길을 걷게 되는데, 주목할 점은 연구를 기반으로 한 창작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동시에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작품에 매진하도록 독려 받는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카르타 예술가들에게만 열려있는 본 프로그램은 올해로 4회를 맞이하며 해마다 그 지원자의 수가 늘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의 개최문의도 많다고 한다.
슬라사 수나리오 아트 스페이스(Selasar Sunaryo Art Space)
자카르타는 자본과 문화 경제의 중심으로 전국에서 온 작가들의 쇼케이스 장이라고 한다면, 반둥은 예술과 최신 담론이 활발하게 생산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교육 기관인 반둥기술대학(Institute Technology of Bandung, 주요 전공 및 연구 분야를 비추어 보았을 때 한국의 KAIST에 해당)을 중심으로, 동대학 순수예술 및 디자인 학부 졸업생들은 인도네시아 현대 미술 현장을 선도하고 있다. 이 지역 예술 공간인 슬라사 수나리오 아트 스페이스(이하 SSAS)는 현대 미술의 촉진, 인큐베이팅 및 전시공간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젊은 반둥 기반 예술가들은 SSAS에서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경력을 시작할 뿐만 아니라 본 갤러리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을 넘는 활동에 지원받고 있다.
SSAS는 비영리 공간으로 1998년 설립되었다. 설립자인 슬라사 수나리오(Selasar Sunaryo)는 인도네시아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시니어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설립 취지는 자국의 예술 문화 발전 및 대중을 위한 예술 교육 발전을 촉진시키는데 있다고 한다. 공간은 실내외를 포함 다양한 기능을 갖춘 다섯 곳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컨대 전시 공간, 퍼포먼스와 비디오 스크리닝을 위한 원형 극장, 방문작가 및 레지던시 거주 작가를 위한 대나무 하우스, 토론과 워크숍이 가능한 전통지붕으로 지어진 다목적 공간, 상품 매장과 카페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공간은 주변 자연과 조화가 되도록 설계되었으며 반둥의 경치를 관람할 수 있는 다고 언덕(Dago hill)의 경사면에 위치해 있다. 지난 17년 동안 외부 지원 없이 자체적 자금으로 운영되고 있고, 전체 직원 서른 명 모두 각자 전문성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 공간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좋은 시사점을 주는 공간이라 하겠다.
SSAS의 프로그램은 광범위한 예술가 그룹의 활동에 기여하고 있는데, 격년제로 치뤄지는 반둥 새로운 출현(Bandung New Emergence)이 젊은 지역 인재를 지원하도록 설계되었을 뿐만 아니라 반둥 현대 미술트렌드의 최신 지형도를 보여준다. 키즈 프로그램(Kids Program)은 다양한 지역 커뮤니티와 협업, 아동의 창의력을 향상시키는데 주목하고 있으며, 다수의 개인전을 통해 중진 및 시니어 작가들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되 짚어보는 계기를 갖게 된다. ’트랜지트(Transit)’ 역시 격년제 프로그램으로 레지던시와 전시를 포함하고 있다. 과도기적 단계에 있는 40세 이하의 작가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본 프로그램은 작가의 중간점검의 특징이 있다. 거주 기간 동안 작가는 신작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게 되고, 거주 완료 후 3-4 개월의 준비과정을 거치고 나면 전시를 통해 개개의 특징적 발전을 선보이게 된다. 그 다음해에는 자카르타의 상업 갤러리에서 개최되는 순회전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미술 시장과 연결되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슬람 왕인 술탄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독립자치구 족자카르타는 예술, 문화, 공예, 전통과 종교가 혼합 된 도시이다. 족자카르타의 현대 미술은 국내 첫 국영 예술 기관이자 현재 인도네시아 예술 이스티튜트(Institute Seni Indonesia Yogyakarta)의 전신인 인도네시아 예술 아카데미(ASRI)에서 출발한다. ASRI의 학생들은 인도네시아의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의식을 갖고 그들의 예술을 통해 문제를 표현해 온 동시에 새로운 매체와 기술을 향한 실험에도 앞장서 왔다. 족자카르타가 수십 년간 수많은 예술 활동으로 활기를 띠게 된 것은 그들의 공헌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이 도시 소재의 많은 예술 공간 중, 갤러리 밀집지역인 수리오디닝그라탄(Suryodiningratan)에 위치한 랑겡 예술 재단(Langgeng Art Foundation)은 족 자카르타 현대 미술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랑겡 예술 재단(Langgeng Art Foundation)
랑겡 예술 재단은 데디 이리안토(Deddy Irianto)에 의해 2010년 설립된 비영리 단체로 그는 중앙 자바 마글랑이라는 도시의 랑겡 갤러리(Langgeng Gallery)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이 단체는 인도네시아 현대 미술의 허브이자 해외 아티스트들과의 교류를 활성화하는데 설립취지가 있다.‘쿼타 쿼타’는 독창적인 프로그램은 ‘전시에 대한 전시’이다. 본 공간 큐레이터이자 재단 고문으로 활약하고 있는 헨드로 위얀토(Hendro Wiyanto)가 창안한 쿼타 쿼타는 지난 2년 동안 전국에서 개최된 전시회에 선보인 특정 예술 작품을 선별, 전시함으로써 적절한 평가 없이, 단순히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현대 미술 관행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는 전시이다. 즉, 헨드로 위얀토는 전국에서 행해지는 예술적 행위들에 거리두기를 제안하는데, 격년제로 개최되는 '플래시백' 개념의 본 프로젝트는 새로운 담론을 자극하고 다른 관점에서 예술의 의미와 메시지를 바라보게 하는데 그 취지가 있다. 올해로 제5회 쿼타 쿼타 시리즈가 개최될 예정이다.
크다이 크분 포럼(Kedai Kebun Forum)
족자카르타에서 현대 미술의 발전에 기여하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자카르타와 반둥 같은 다른 도시에서 찾을 수 없는 족자카르타 현대 미술지도(Yogyakarta Contemporary Art Map)의 출판이다. 2008 년부터 연례로 발행되는 본 미술지도는 오래된 지역 예술 공간인 크다이 크분 포럼에 의해 시작되었고, 현재 활발한 활동을 하는 문화 예술 공간을 소개하고 있다. 본 지도는 각각의 공간에 대한 기본 정보뿐만 아니라 공간의 비즈니스 형태도 함께 제시한다. 예컨데 문화 센터, 갤러리, 미술관, 레지던시, 아티스트 운영 공간, 작가 커뮤니티, 예술 경영 등, 50개 이상의 문화 예술 관련 공간과 각각의 목적이 표시되어 있다. 크다이 크분 포럼은 저명한 예술가인 아궁 쿠르니아완(Agung Kurniawan)과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였고, 2010년부터 족 자카르타 비엔날레 재단의 상임이사를 맞고 있는 그의 아내 유스티나 네니(Yustina Neni)에 의해 설립되었다. 족자카르타 비엔날레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상기의 각 예술 공간 관련자들과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발견한 사실은, 대부분의 현지 예술 공간이 재정 측면에서 유사한 운영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쉽게 목격되듯이, 많은 예술 공간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거나, 초기 계획을 변경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어려운 상황은 각각의 공간을 지탱할 자신만의 전략을 만드는데 일조하게 한다. 기금 모금을 위해 노력뿐만 아니라, 공간을 운영하는 더 효율적인 방법을 강구하는데, 그 한 가지 방법이 다른 공간들과의 협업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예술 공간들 사이의 제휴 프로그램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예술 공간이라고 할 때, 반드시 물리적인 공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더 넓은 의미에서 예술을 다루는 커뮤니티를 뜻한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불모의 상태에서 떠오르듯이, 인도네시아 예술 공간은 자신들의 현 상황을 새로운 기회, 새로운 창조적인 프로젝트를 위한 계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밝은 미래가 보였다.
디아.로.구에 : http://dialogue-artspace.com/
슬라사 수나리오 아트 스페이스 : http://www.selasarsunaryo.com/
랑겡 예술 재단 : http://www.langgengfoundation.org/
크다이 크분 포럼 : http://kedaikebun.com/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