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1986년 '도이모이(개혁, 쇄신)' 사회주의 경제개방 정책을 채택하여 지금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에 걸쳐 급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9천만 명이 넘는 인구 중 70%에 육박하는 청년층의 비중은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절게 생동하고 있는지 상상하게 해 준다. 1980년대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의 사회적 활동이 점점 활발해짐에 따라 이들이 일컫는 '8X 세대' 라는 용어가 생겨났고, 이 세대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도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8X 세대는 다소 폐쇄적인 베트남의 현대미술계에도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데, 그들이 운영하고 있는 독립 예술 공간을 통해 지금의 베트남아트씬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지역적으로 베트남을 보통 정치, 문화, 역사의 중심지인 수도 하노이와 경제 중심지인 호치민으로 나눈다. 일반적으로 경제가 발달한 대도시에 문화예술 활동과 장소들이 발달하기 마련이지만, 베트남은 특이하게도 경제 중심지인 호치민보다 하노이에 국공립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의 예술 공간이 많다. 그 중 독립 예술 공간을 비교해 보자면, 호치민의 독립 공간은 대체로 자체 자금 조달을 통해 보다 자율적인 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 이는 공간의 특성이 만든 사람들 또는 아티스트 자체 개성에 의존하는 면이 강하다. 반면, 하노이의 경우는 개인의 개성보다 외부환경이나 단체, 공간의 역사 등 주변 상황의 특성을 드러내는 공간이 많다. 이들은 베트남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활용하여 ‘베트남스러움’을 지키는 지역적 성향이 짙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하노이를 배경으로 8X 세대가 주축으로 이끌고 있는 독립 예술 공간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냐산 콜렉티브(Nhasan Collective)
1998년 아티스트 응웬 마잉 득(Nguyen Manh Duc)과 아티스트 겸 큐레이터 쩐 르엉(Tran Luong)은 냐산 스튜디오(Nhasan Studio)를 설립한다. ‘냐산(Nhà Sàn)’은 베트남 소수민족인 므엉(Muong)족의 전통가옥이다. 이들은 베트남 실험예술을 지향하는 새 플랫폼으로 이 가옥의 골조를 있는 그대로 하노이로 가져와 공간을 만들었다. 현재 카페 냐산(Cafe Nhasan)으로 운영되고 있는 이곳은 베트남의 첫 비영리 독립 예술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정부의 예술 검열로 인해 냐산 스토디오는 비공식적 폐쇄조치를 당하고 만다. 그 후, 절치부심하던 이들은 젊은 세대로 구성원을 재편성하고 2013년 하노이 중심 리 꿕 수(Ly Quoc Su)거리에 ‘냐산 콜렉티브(Nha San Collective)’란 이름의 새 공간을 연다. 현지 아티스트와 유학에서 돌아온 8X 세대로 구성된 주 멤버와 협업 전시에 참여하는 유동적 멤버로 구성되어 공간이 운영된다. 마잉 득의 딸이자 주 멤버 중 한명인 프엉 링(Phuong Linh)은 2012년 금천예술공장 레지던시에도 참여한 바 있으며, 다른 아티스트들과 냐산 콜렉티브의 이름으로 2014년 창원조각비엔날레 아카이브형 전시에도 참여했다. 냐산은 라카(Laca: Lyquocsu Art Cafe Area)라는 카페와 마주하고 있는데, 경우에 따라 라카의 공간도 함께 활용하기도 한다. 냐산은 다른 곳과 달리 선대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베트남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과 공간은 많은 주목을 받는다.
만지 아트 스페이스(Manzi Art Space)
만지 아트 스페이스는 20세기 프랑스 식민지 풍 주택을 개조해 2012년 문을 열었다. 베트남 건물의 특성상 좁은 면적의 이 공간에 들어서면 이곳에서 얼마나 예술 활동을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평소에는 카페로 사용되지만 행사가 있을 때는 1, 2층과 테라스까지 알뜰하게 공간을 활용하며 행사 장르에 맞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여느 독립 공간이 갖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해야 하기에 일반인과 관광객에게는 카페로 알려져 있지만, 전시, 공연, 예술모임 등에 따른 굉장히 자유로운 공간 사용으로 독립 예술 공간으로서의 브랜드를 확고히 갖고 있는 곳이다. 또한, 평소 베트남 예술가들이 자주 모이는 아지트로 이곳에 가면 많은 현지 예술가들과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만나게 될 때도 있으며, 직접 작품 구매를 할 수도 있다.
하노이 록 시티(Hanoi Rock City)
하노이에서 가장 큰 호수인 서호(Ho Tay) 부근에 위치한 하노이 록 시티(이하, HRC)는 이름에서 풍기듯 록 공연을 위한 공간으로 2010년 설립되었다. 외국인 멤버를 포함한 베트남 8X 세대 아티스트, DJ, 뮤지션 4인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전시, 패션쇼, 거리예술 등 음악에 한정되지 않고 모든 예술을 다루는 복합공간이 되었다. 서호지역은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주택가로 특히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일반인들의 접근성이 좋은 곳은 아니기 때문에 관심이 적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생소한 공간일 수 있다. HRC는 상시로 바를 운영하고, 공간을 대여하며, 행사에 따라 다르지만 물가에 비해 다소 높은 가격의 티켓을 판매하는 등의 방식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 베트남은 물론 해외 아티스트들과 협업하며 국제 프로그램을 주최하는 등 질적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어 찾아오는 관객들도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거친 느낌의 록 공연부터 실험음악, 퍼포먼스, 시각예술에 이르기까지 한 장르로 HRC의 특징을 정의내릴 수 없는 것, 이 자유로움이 이곳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2013년도 말, 총리 인준 하에 베트남 정부는 현대미술을 인정하고 지원하겠다고 공표했으나, 정부 소속 단체나 기관 이외의 개개인의 지원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의 지원이 미미하고, 문화향유층이 적어 독립 공간들이 백퍼센트 비영리로 운영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공간은 예술활동과 상업활동을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공간의 형태를 가지고 갈 수밖에 없다. 겉으로 뚜렷한 특징이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이는 8X 세대들이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여 의도한 공간 활용법으로, 그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예술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냐산과 만지, HRC는 모두 8X 세대가 중심에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모든 예술장르에 열려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베트남 곳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예술 공간들이 어떻게 이들과 어우러져 베트남의 아트씬을 만들어갈지 미래가 궁금해진다.
냐산 콜렉티브 : http://www.nhasanstudio.org/
만지 아트 스페이스 : https://www.facebook.com/manzihanoi
하노이 락 시티 : http://hanoirockcity.com/
사진 제공: 편형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