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 공간

New York/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 미국 실험 영화, 보물 창고

posted 2014.12.30

아방가르드 영화나 실험 영화가 블랙박스를 벗어나 미술관의 화이트큐브에서 상영, 전시되는 것은 더 이상 낯선 현상이 아니다. 서울국제실험영화제(EXIS) 상영작이 미술관에서 소개되는 식의 단순한 장소의 이동을 넘어 켄 제이콥스(Ken Jacobs), 마이클 스노우(Michael Snow), 잭 스미스(Jack Smith) 등의 작품이 영화관이 아닌 미술관에서 현대미술 작품과 섞이는 것은 이제 하나의 확립된 전시 방식이 됐다. 미술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일루전과 서사를 중심으로 하는 내러티브 영화보다는 매체 자체의 형식과 구조, 지각을 실험하는 소위 ‘실험 영화’들이 많다. 특히 196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언더그라운드 영화, 구조주의 영화는 당시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퍼포먼스 등이 제시했던 동시대 미술 정신을 공유하고 있었던 바, 이러한 실험 영화들이 현대미술 작품 가운데 놓이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뉴욕 맨해튼에 자리 잡고 있는 앤솔리지 필름 아카이브(Anthology Film Archive)는 바로 196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실험 영화, 독립 영화, 아방가르드 영화들을 아카이빙, 상영, 연구, 복원, 전시하는 공간이다. 영화 관련 종사자나 영화 마니아뿐만 아니라 현대미술 관계자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영화들이 갖는 실험성과 대안성이 1960년대 이후 현대미술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앤솔리지 필름 아카이브의 탄생은 미국에서 반(反)모더니즘적 네오아방가르드 미술이 탄생했던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초 당시 아방가르드 필름을 위한 쇼케이스였던 필름 메이커스 시네마테크(Film-Maker’s Cinematheque)의 디렉터이자 실험 영화감독인 요나스 마커스(Jonas Mekas)는 독립-아방가르드 필름을 정기적으로 상영할 수 있는 영구적 공간을 꿈꾸었고, 이러한 바람은 1970년 아방가르드 영화의 선구적 연구자인 아담스 시트니(P. Adams Sitney)를 비롯해 피터 쿠벨라(Peter Kubelka), 제롬 힐(Jerome Hill) 등과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 입구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 입구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는 아방가르드 영화 아카이브로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 관련 문서 자료 컬렉션도 보유하고 있다. 필름 아카이브 실에는 2만 점 이상의 실험 영화와 7천 점 이상의 비디오아트를 소장하고 있으며, 리서치 라이브러리에는 1만 권의 도서와 250종 이상의 정기 간행물, 5천여 점의 필름 스틸을 보유하고 있다. 아담스 시트니의 ‘아방가르드 영화(The Avant-Garde Film)’ 등을 비롯하여 실험 영화 관련 서적들이 이곳에서 출판됐으며, 조셉 코넬(Joseph Cornell), 스탠 브래키지(Stan Brakhage), 해리 스미스(Harry Smith) 등 미국 실험 영화감독들의 필름도 이곳에서 복원됐다. 매년 평균 25개의 필름을 복원하는데 현재까지 900점의 필름을 복원했다.


또한 마야 데렌 씨어터(Maya Deren Theater)와 코트하우스 씨어터(Courthouse Theater) 2개의 상영관에서 매년 900개 이상의 필름 상영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Sergei M. Eisenstein), 마야 데런, 마이클 스노우, 알렉산더 클루게(Alexander Kluge)와 같은 거장들의 회고전을 비롯해 아시아 영화제, 라틴 영화제, 게이 영화제 등 특정 주제의 영화제와 비디오아트 관련 행사를 연중 끊임없이 진행한다. 1997년에는 백남준, 육근병, 김영진, 문주 등이 참여한 ’서울-뉴욕 멀티미디어 예술 축제(Seoul-NYmax)’가 이곳에서 열린 바 있다.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가 예술영화에 헌신한 첫 번째 기관이자 뉴욕 현대예술의 중요한 문화적 토대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방대한 아카이브와 문서 자료뿐만 아니라 시공간을 뛰어넘어 대안적인 실험 영상을 포용하고 지지하는 저력에 있다.


필자가 2013년 본 기관을 방문했을 당시 뉴욕 ‘퍼포마 13(Performa 13)’의 행사로 조안 조나스(Joan Jonas)의 퍼포먼스 영상 상영과 작가의 강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영화감독 및 영상 작가와의 토크 프로그램은 특별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던 큐레이터로서 작가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컬렉션 큐레이터 앤드류 램퍼트(Andrew Lampert)의 도움으로 필자는 2014년 전시 프로젝트를 위한 자료들을 연구할 수 있었다. 이곳의 아카이브는 대중에게 개방돼 있으나 리서치 라이브러리에 소장된 자료는 연구자 및 관련자에 한해 이용할 수 있다. 영화 및 비디오아트 작가, 연구자 및 기획자에게 앤솔리지 필름 아카이브는 보물과도 같은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사진 제공. 프로젝트 비아

※ 본 기사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프로젝트 비아(PFOJECT ViA)의 지원으로 [아트인컬처]와 더아트로가 함께 기획, 게재하는 글입니다.

배명지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다. 코리아나미술관 책임 큐레이터를 역임했으며, 뉴미디어를 기반으로 퍼포먼스,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등 인접시각예술과 미술과의 소통을 통해 현대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국제기획전을 다년간 진행해온 바 있다. 책임 기획한 주요 전시로는, < 퍼포밍 필름 >(2013) < 마스커레이드 >(2012), < Featuring Cinema >(2011), < Artist's Body >(2010) 등이 있다. 2006년 기획한 < 이미지 극장 >은 현대미술가, 무대미술가, 연출가, 연극배우, 무용가 등이 참여한 프로젝트형 전시로,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수여하는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