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커 문화'를 향한 예술가의 관심이 뜨겁다. 오픈 소스를 기반으로 기술과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문화와 3D 프린터 등 디지털 기기의 보급이 맞물려, 세계 곳곳의 '메이커 스페이스' 들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려는 시도들로 활기를 띠고 있다. 이러한 메이커 문화의 시작점이 된 유럽의 메이커 스페이스들을 소개한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산업 프로세스이자 새로운 예술 제작 프로세스를 가능하게 하는 창작 기지, 베를린 씨-베이스(C-base), 팹 랩(Fab Lab), 베타 하우스(betahaus)를 작접 방문했다.
최근, 미국과 유럽의 몇몇 국가들이 기존의 예술 공간과는 다른 새로운 창작 공간 구축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이들의 창작 활동이 다분히 과거와는 다른 창작 프로세스에 기인하며 기능적이고 생산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세대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최근 국내에서도 이러한 흐름들은 발견된다. 무한상상실, 창작공방/공작소, 콘텐츠 크리에이티브 랩 등 다양한 명칭의 새로운 공간들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공간을 중심으로 기존의 일방향적 교육과는 다른 차원의 프로그램들이 선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과거에는 창작에 관련된 활동은 예술 분야에 위임되었다. 만드는 행위는 그것이 생산적 목적을 전제하지 않는 한, 예술가의 몫이었고 그 결과물은 미술관과 갤러리를 통해 전시되어왔다. 그러나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또는 기술적인 성취가 높지 않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아이디어와 의지만 있다면 누구라도 크리에이터 혹은 메이커가 될 수 있는 공간, 그것이 현재의 메이커 스페이스(Maker Space)이다.
핵(Hack)은 본래 ‘거칠게 난도질하다’라는 의미이며, 이러한 뜻을 기반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해커(Hacker)’라는 개념이 성립되었다. 타인의 컴퓨터에 몰래 침입하여 그 속의 정보를 빼가는 이들을 일컫는 이 말은 ‘해커 스페이스(Hacker Space)’와는 전혀 무관하다. 사실 핵이란 말은 50년대부터 메사추세츠공과대학교(이하:MIT)에서 통용된 은어로 ‘작업 과정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즐거움 이외에는 어떠한 건설적인 목표도 갖지 않은 프로젝트 혹은 그에 따른 결과물’ 이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해커 스페이스라고 부르는 공간들은 그러한 순수한 즐거움을 목적하는 이들이 모이는 장소로서 다분히 현재의 메이커 스페이스들의 목적과 부합한다.
제 1호 해커 스페이스로 알려진 씨-베이스(C-base)는 이러한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공간이다. 매 달 일정 멤버십 비용을 지불한 해커들이 한 곳에 모여 개인 프로젝트 및 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해커들 간의 커뮤니티를 자생적으로 이루고 있다. 500명이 넘는 멤버들이 활동하며, 베를린에서 열리는 트랜스 미디알레(Transmediale) 페스티벌과도 연계되어 흥미로운 워크샵을 진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메이킹과 관련된 기술 외에 기술에 기반이 되는 철학적 이슈들에 대해서도 함께 다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여타 메이커 스페이스들과 씨-베이스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다른 곳들과는 다르게 순수하게 멤버십 비용으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정부 및 다른 기업들의 지원을 받는 경우에도 그것이 씨-베이스의 ‘공유에 입각한 공동제작’이라는 기본 정신에 위배된다고 판단이 들면 허용하지 않고 있다. 아울러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공동 운영 방식 또한 타 기관과는 차별되는 지점이다. 씨-베이스는 기본적인 운영진과 더불어 공동 운영진 및 연구원들이 합심하여 전체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들은 다섯 개의 링이 합쳐져 전체 기관의 프로그램 및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는 의미로 이것을 ‘링 시스템(Ring System)’ 이라 부른다.
만약, 씨-베이스가 유럽의 창작 공간을 대변한다면, 조금은 다른 맥락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메이커 스페이스, 팹 랩 베를린(Fab Lab Berlin) 또한 눈여겨보아야 할 공간이다. 제조(fabrication)의 접두사인 'fab'과 실험실을 뜻하는 ‘lab’을 합성하여 만든 ‘팹랩(Fab Lab)’은 MIT 미디어랩의 프로그램에서 시작되었다. 미디어랩은 이전부터 주변의 민간 커뮤니티들과의 협조적인 프로젝트들을 진행해 왔는데, 사회가 점점 더 자본주의에 입각한 산업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발생하는 부조리한 상황들을 타계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른 바 ‘아웃리치(outreach)’ 프로그램이라 명명했던 이러한 대안적 시도가 팹 랩의 시초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대량 생산으로는 제작할 수 없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려는 시도들로 가득 찼다. 특히 최근에는 3D 프린터와 디지털 기기들을 이용한 시도들이 점점 더 활기를 띄고 있어 현재는 전 세계 36개국에 130곳 정도의 팹 랩이 운영되고 있다.
2013년에 문을 연 ‘팹 랩 베를린’은 현재 장소를 이전하여 보다 쾌적한 창작 활동이 가능한 터전을 제공하고 있다. 여타의 다른 팹 랩과 마찬가지로, 3D프린터, 대형 컴퓨터 수치 제어기기(CNC Router), 디지털 기기 및 바느질 기계 등과 같은 다양한 실험을 위한 그리고 생산을 위한 장비를 갖추고 기술적 아이디어를 실험하며 실질적인 생산이 이루어진다. 앞서 소개한 씨-베이스와 같이 사용자들에게 요금을 받아 운영되며, 다양한 멤버쉽 제도에 대해 홈페이지에 간단한 공간 사용 요금 및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기술적인 서포트를 제공하며, 워크숍과 커뮤니티를 운영한다는 측면에서는 씨-베이스와 유사하지만, 공간과 그 분위기는 매우 상이하다. 팹랩이 미국적인 합리성으로 무장한 매우 쾌적하고 편리한 공간의 느낌이라면, 씨-베이스는 무언가 긱(Geek)들이 모여 있는 제한적 장소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양상에 있어 그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양한 흐름이 전제되고 인정받는 것 자체가 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공유 정신이기 때문이다.
“함께 일하자(Let's Work Together)!”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2009년 만들어진 베타하우스(betahaus)는 ‘공동 오피스’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만, 과거 인터넷 사용과 다큐멘팅 작업을 위한 이전까지의 오피스 공간과는 달리 메이커 스페이스가 추구하는 여러 덕목 또한 갖추고 있다. ‘목공을 위한 우드샵(The Wood Shop)’과 공동의 하드웨어 작업을 위한 ‘하드웨어 랩(Hardware.co Lab)’, 회의실과 까페, ‘아레나(Arena)’로 불리는 공론의 장까지 메이커 문화와 연결되는 다양한 공간/프로그램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공동 오피스의 기능을 뛰어넘는다. 베를린과 함부르크, 바르셀로나와 소피아에 이르는 4개 도시에 지점을 갖추고 있는 베타하우스는 점점 더 기존의 다양한 시도들을 흡수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메이커 문화의 기초는 유럽의 해커 문화를 통해 형성되었지만, 각 메이커 문화의 기반이 메이커 스페이스가 위치한 국가 및 대륙이 지닌 과거로부터의 수공 형태 및 커뮤니티에 모습들과 연관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만의 메이커 문화를 스스로 형성하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물론, 먼저 메이커 문화의 대중화를 선도한 미국의 흐름이 거세다. 자신들에게 영감을 준 유럽에도 이러한 흐름들은 쉽게 관찰되고 있는 상황이며, 아직까지 시스템화 된 공방 문화가 형성되지 않은 국가들에게 이러한 시스템화 된 메이커 스페이스들은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내에서도 이러한 문화의 전파되고 있다. 다만, 자생적인 메이커들의 흐름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기 보다는 조금은 인위적인 상황으로 전개되어 가는 것이 아쉽다. 결국, 메이커들의 문화는 자신들의 환경적 맥락에서 고유한 모습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디어아트 에이전시 더미디엄(THE MEDIUM) 대표이자 미디어 문화예술 채널 앨리스온(AliceOn) 디렉터이다.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대학원에서 「디지털 매체 뮤지엄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오스트리아 다뉴브대학교(Danube University)에서 미디어아트의 역사(Media Art Histories)에 관하여 연구 중이다. 문화체육관광부 광복 60주년 행사팀장과 아트센터나비 교육팀장, 제8회 주안미디어페스티벌 디렉터를 역임했다. 현재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 특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중앙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홍익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주요 관심 분야는 현대예술과 뉴미디어아트, 게임아트 등이며, 특히 새로운 기술미디어를 통한 인간의 경험, 지각의 확장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는 『뉴미디어 아트와 게임예술』(2013), 『게임과 문화연구』(2008, 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