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릴레이 인터뷰 : 현시원 묻고 주재환 답하다(1)

posted 2012.11.16

더아트로는 미술계 인사를 아우르며 그들의 활동과 시각을 알아보는 릴레이 인터뷰를 마련했다. 정용국 작가→이대범 독립큐레이터, 미술평론가→현시원 독립큐레이터에 이어 이번에는 현시원 독립큐레이터가 주재환 작가를 선정하고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다음 인터뷰의 상황까지 고려해가며 인터뷰 대상을 선정해야 하는 이 코너는 다음 인터뷰이가 누가 될지 예측할 수 없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간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진솔한 이야기들을 따라가보자.




주재환 / 작가1960년 홍익미대 서양화과 1년 중퇴, 1980년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미술계에 등장한 이래 민중미술운동에 참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인전 4회, 주요 단체전 수십 회에 출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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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랑할 건 내가 버린 쓰레기뿐"

현시원(이하 현): 제가 선생님 작업을 보면서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은 '웃음'이었어요. 1980년대 다른 민중미술 작업들에 비해서 '웃음'이 느껴진다는 게 너무 좋았거든요.

주재환(이하 주): 무거운 걸 가볍게 한다든가 쓴 맛을 단 맛으로 바꾼다든가 그런 성향이 내게 많은데, 유화 같은 건 무거운 것도 많이 있어. 그러니까 한 가지로 규정하기 좀 힘든 거 같애.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에서 나오니까 양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널뛰기 같아. 나 자신도 모르게.



주재환_내가 자랑할 건 내가 버린 쓰레기뿐_쓰레받기, 비닐쓰레기봉투_2012
주재환_내가 자랑할 건 내가 버린 쓰레기뿐_쓰레받기, 비닐쓰레기봉투_2012

: '웃음'의 이면에는 선생님의 작품 '웃음소리'나 '밀항자의 웃음'처럼 안에 녹아든 분노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 작가마다 인생 역정이 다 다르잖아. 내 경우는 이제 나이가 70대 초반이야. 유아기 때면 1940년대라고, 유아기 시절은 일제 강점기란 말이야. 일본 경찰들이 칼 차고 말 타고 다니는 기억들이 가끔 나. 다섯 살 때 해방 됐잖어. 그때 내 기억에는 안방에서 어른들이 쭉 모여 앉으셔서 옛 라디오를 경청하시더라고. 일본 천황이 항복하는 육성을 듣고 있는 거야. 해방 후에 국민학교 들어가서 4학년 때 6.25 전쟁 터졌잖어. 창경궁 거기 종로 4가 쪽에 우리 집이 있었어. 그 때 기억은 북한 탱크가 들어와서 대포를 쐈는데 그 대포알이 우리 집에 박혔어. 우리 집이 길가에서 철물 가게를 했거든. 20살이 안된 큰 형님 벌의 인민군이 북한말로 "할머니~ 물 한 잔 주세요" 하니까 할머니가 물에다 설탕 타서 준 기억도 나고 그래. 인민군 치하에서 석 달 동안 있었잖아. 그때 미군 비행기들 와서 폭격 엄청 했어. 석 달 후에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됐고, 몇 달 있다가 1.4 후퇴, 중공군이 개입해서 피난을 가게 되었지. 대전 아래 옥천 외갓집에 가서 학교도 못 다니고 버스 정거장 가서 행상을 했어. 계란 사세요. 뭐 이렇게 지내다가 9.18 수복이라잖아. 그때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

: 직접 계란을 파신 거예요?

: 그럼. 알바한 거지. 하하. 내 작품이 왜 이렇게 나왔는지 배경을 설명하려면 유년기부터 일제 식민지 소년기 때에 동족상잔을 겪었잖아. 그리고 홍대 서양화과에 들어간 60년도에는 4.19 혁명이 터졌잖아. 그때 광화문 일대를 헤매고 다녔어, 구경하느라고. 그러다가 5.16 쿠데타 터지고 박정희 18년 집권한 거 아니야. 경제발전에 노력했지만 민주화를 파괴해서, 인혁당 사건 등 끔찍한 사건들이 많잖아. 그런 와중에 또 전두환이가 80년에 집권해 광주학살을 자행했잖아. 우리 미술동료들이 현실 비판하자고 미술회관에서(현 아르코 미술관) '현실과 발언' 창립전 할 때 불온하다고 해서 결국에는 조명을 다 꺼버려서 촛불 나눠주고 전시한 거 아니야. 우리나라 전시 사상 촛불 전시는 처음 일거야. 그러니까 정상적인 길이 아니라 지그재그하는, 더러운 골목길을 유년기·청년기·장년기를 걸어온 거 같애. 그리고 내 성격이 명랑한 편이야. 뭐가 닥치더라도 뭐 골방에 들어가지 않고 소화하고 하다보니까 풍자적인 작품이 나오는 것 같고. 일부 유화 같은 거는 어둡고 묵직하게 나오는 거 아닌가 생각하는 거지.

: 홍대 서양화과 1년 다니시고 그만두셨지요?

: 난 한 학기. 그 당시에는 서민층이 상당히 빈곤했잖아. 등록금 마련하기가 힘들어서 중퇴한 거지. 그때 생각에는 등록금이 있으면 그걸로 물감 사서 그리는 게 낫지 뭐 학교 가서 배우느냐 그런 객기도 있었지. 그러니까 가정 형편 반 객기 반 이렇게 섞인 거 같아.

: 어린 시절에 꿈이 신문기자 아니면 천문학자 되고 싶다고 말씀하셨었지요?

: 대학진학 할 때 진로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야. 신문기자 되면 어떨까 또 한 편으로는 천문학 이런 거 어떤가. 또 하나는 이제 화가. 지금 반추해보면 내가 신문기자가 변형이 되어서 출판계에 오래 있었잖아. 천문학 꿈꾸었던 게 그런 우주에 대한 그림이 나오잖아. 소년기에 꿈꿨던 것이 간혹 형상화되는 거 같아. 그런 느낌이 들어.

: 대학 그만 두시고 다양한 직업을 가지셨는데요. 60년대 야경꾼 일을 하셨던 거죠?

: 68년으로 기억나. 북에서 김신조 특공대가 내려왔을 때 내가 서울대학병원 정문 옆 파출소에서 야경꾼으로 일했지. 방범대원들 몽둥이를 나눠주고 긴장상태였지. 야경꾼은 경찰 보조야. 2인 1조가 되어 밤 12시부터 4시까지 순번제로 다니는데 내 기억에는 여섯 명 정도 된 거 같아. 딱딱 치면서 동네 한 바퀴를 돌아. 방범 효과도 있고 집주인들이 혹시 문단속을 안 했다든가 그런 경각심 주는 거. 아주 낭만적인 거지. 하하. 그때 기억나는 거는 창경궁에 동물원이 있었단 말이야. 봄 되면 밤 벚꽃놀이라 그래서 창경원에 벚꽃이 엄청 피었어. 그러면 인파에 막혀 전차가 못 다니는 거야. 거기 사람들이 엄청나게 오는 거야. 밤 12시 넘으면 인적이 끊어지잖니. 호랑이가 울어, 가끔. '어흥' 하고 우는 거야. 도심으로 퍼져나가는 거야. 상상을 해봐. 호랑이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는 걸. 적막한 심야에. 지금 도심에서 호랑이 울음소리 울리면 어떻게 될 거 같애. 그리고 새벽이 되면 미아리 쪽에서 아줌마들이 냄비를 가지고 많이들 몰려와. 내가 사는 원남동 쪽으로. 왜 오냐면 거기에 두부공장이 있는데 극빈층에서 비지 사러 오는 거야, 아줌마들이. 또 시내 쪽에서는 남자애들이 새벽에 서울대병원으로 가. 왜 오는지 알아? 피 팔러 온 거야. 매혈자들이 너무 많으니까 번호표 받으려고. 한 쪽에서 피 팔러 오고 한쪽에는 비지 사러 오고 그게 60년대 풍경이야.


: 두부와 피네요.

: 아 그렇지. 두부는 비싸서 못 사고. 비지가 싸니까. 그렇게 빈곤기를 거친 거야. 비지와 피야.


: 야경꾼은 1년 정도 하신 건가요?

: 한 2년 정도 한 거 같애. 그때 기억나는 거는 통금 위반자들을 파출소에 데려오고 하는데 통금위반해서 잘못했다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다 변명을 해. 어쩌구 저쩌구 변명이 대다수야. 자기 합리화야. 하하하. 그리고 또 하나는 광인들 있었지. 특히 여성 광인들. 심야의 귀신처럼 말이야.


: 야경꾼 하시고 그밖에 다른 일 하시면서 계속 작가가 될 거라 생각하셨어요?

: 그때는 못 했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학력이 없으면 발붙일 데가 없잖아. 그러니까 자녀들 대학에 넣으려고 어릴 때부터 입시 감방에 수감시켜 고문하잖아. 요즘 비정규직 얼마나 많아. 뭐 줄도 없는 사람이 야경꾼도 감지덕지해야지 어떻게. 거기서 뭐 그림을 생각을 해? 허허. 생존이 문제인데. 미술 뭐 그런 거 생각할 여유도 없었고.


: 그럼 언제부터 미술 작업을 하신 거예요?

: 그러면서 70년 초에, 거 이상한 게 있더라고. 몸속에 창작력이 쌓이다보면 이게 자연히 배설되는 것 같애. 몸속에 노폐물이 쌓이면 오줌, 똥으로 빼듯이. 그러니까 창작 욕구도 자연스럽게 발효가 되는 거 같애. 백수로 살 때였는데 갑자기 뭐가 하고 싶어. 그때 내가 왕십리 산동네 살았어. 골방 요만한 데 할머니와 둘이서. 내가 돈이 없잖아. 쪼금 유복한 동창을 찾아갔어. “야! 인마 내가 작품하고 싶은데 니들이 미리 좀 사라. 전시 끝나면 그림으로 주겠다” 지금 돈으로 일인당 한 5만원 같애. 지금 돈으로 한 50만원 모은 거 같아. 하하하. 작품 값을 미리 받은 거야. 청계천 고서방 있지. 거기 돌아다니면서 잡지들 타임지라든가 여성지 있잖아. 화보들. 그런 것들 쭉 싸게 사서 콜라주를 한 거야. 내 기억에는 한 30, 40점 된 거 같애. 4호 정도 크기로.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에 옛날식 술집 '쪽샘'이라고 있었어. 초가지붕의 막걸리 파는 곳이 많이 유행을 했었어. 미술평론가 김인환 형이 전시를 주선해주었어. '쪽샘'에다 걸고 동창 불러서 술 먹고, 그리고서 하나씩 다 줬거든. 거의 40여 년 전 얘기야. 준 놈들보고 한 번 보고 싶기도 해서 찾아보라 했더니 갖고 있는 놈이 하나도 없어 하하. 다 버렸어. 그러니까 너무 아쉬운 거야. 40년 전에 뭘 했는지.


: 콜라주하고 글자도 붙이고 하신 거예요?

: 아쉬운 게 하나 있어. 이상 시하고, 흑백 이미지로 작업한 게 있는데 지금도 그건 보고 싶어. 소장자를 못 찾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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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원 / 독립큐레이터

독립 큐레이터. 전시를 기획하고 이미지나 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