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냄새 나는 작품을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정연두는 1969년에 태어났다.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가진 채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고 디지털 미디어의 사용이 보편화된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이다. 21세기의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가 보여주는 모든 판타지는 손으로 만든(handmade) 것으로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이 살아있다.
21세기에 가속화되고 있는 뉴디어의 등장과 보급은 우리의 관념, 철학, 삶, 사회의 운영 원리 모두를 바꾸는, 현재 진행형의 혁명이다. 뉴미디어의 발전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TV가 처음으로 보급되던 1960년대에 ‘바보상자TV가 일방적인 메시지 전달로 대중들을 우중화시킬 것이라는 경고의 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백남준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뉴미디어인 TV에 상호소통적인 성격을 부여하고자 했고, 뉴미디어에 대한 다른 시각은 백남준을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만들었다. 신문, 영화, 광고 등의 매스미디어뿐 아니라 최근에는 매스미디어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팝아트적 경향의 강화로 미술에서까지, 주인공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영웅, 완벽한 미인, 천재들이다. ‘제 2의 백남준’이라 불리는 정연두는 평범한 인간이 주어가 되는 미디어 작품을 만든다. 정연두는 매스미디어 밖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서 예술적인 가치를 발견한다. 유치원 아이들, 미래를 꿈꾸는 청소년, 오래된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노인들 등 저마다의 삶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사람냄새 나는 작품을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정연두는 1969년에 태어났다.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가진 채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고 디지털 미디어의 사용이 보편화된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이다. 21세기의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가 보여주는 모든 판타지는 손으로 만든(handmade) 것으로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이 살아있다. 평범한 사람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따뜻하고 담담하다. 그는 어떤 이론적인 선입견이나 어떤 자기감상도 섞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세상에 열광한 사람도, 절망한 사람도 아니다. 인간 조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미망에서 깨어난 공감, 헛된 공상을 버린 호기심 같은 것”이라고 츠베탕 토도로프가 묘사한 17세기 풍속화가의 시선을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정연두는 이런 감수성을 바탕으로 매스미디어가 현실에 덧씌우는 화려한 이미지를 벗겨낸다. 이 과정에서 평범한 ‘우리’는 매스미디어적 욕망에 사로잡힌 ‘우중’이 아닌 자신의 삶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정립할 수 있게 된다.
정연두의 전체 작품은 획일화된 대량 생산 시스템 속에서 침몰한 개개인을 호명하여 의미 있는 '한 인간'으로 돌려놓는 휴머니즘 프로젝트이다. [내 사랑 지니(Bewitched)](2001년) 시리즈는 여러 장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꿈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실현시켜주는 프로젝트이다. [원더 랜드(Wonderland)] 시리즈는 유치원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사진이라는 사실적인 매체로 실현하였다. [보라매 댄스 홀]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나온 중년의 이웃들이다. [수공 기억(Handmade Memory)]시리즈에서는 6명의 노인들이 나와서 자신들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회고한다.
청소년들의 꿈은 미래의 것이고, 아이들의 그림은 상상 속에 있는 것이고, 배 나온 중년들은 현실을 잊고 열정을 잠시 불태울 뿐이며, 노인들의 기억은 적당히 윤색되어 있어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는 꿈과 현실, 가짜와 진짜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삶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이런 하얀 거짓말들을 정연두는 따뜻한 웃음으로 끌어안는다. 자신들의 일상과 전혀 상관없는 서양식 사교댄스에 진지하게 몰입하는 한국인들의 표정은 코믹하기만 하다. 남들이 웃으면 또 어떠랴? 춤을 추는 그 순간에는 적어도 그들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로맨틱한 댄서가 되어 정열을 불사르고 있는데. 가짜로 만들어진 배경막과 소품들 사이에서 관람객들이 직접 기념사진을 찍는 작품인 [타임 캡슐 (Time Capsule)]은 한 편으로는 옛날 사진관식 사진 촬영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면서, 동시에 꿈과 현실, 가짜와 진짜가 함께 공존하는 삶을 예술적으로 환기시킨다.
드라마 없는 삶의 드라마 만들기는 매스미디어적인 전횡에 대한 일종의 안티 블록버스트 전략이다. 매스미디어에 길들은 현대의 관람객들은 미디어가 제공하는 화려한 이미지와 판타지를 상품으로 소비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현실을 망각하도록 강요 받는다. 오늘날의 대중들은 [반지의 제왕], [매트릭스] 등의 영화와 [리니지],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의 세계 속에서 환상을 고해상의 리얼리티로 체험한다. 정연두는 수백억, 수천억을 쏟아 부어 만든 이 영화와 게임들의 횡행 속에 망실된 우리의 진짜 삶을 예술적으로 구해낸다. 정연두가 사용하는 안티블록버스터 전략을 위해 사용하는 전술은 ‘트리밍 안하기’와 ‘편집 안하기’ 이다. ‘트리밍 안하기’는 가짜를 가짜로 드러내고, ‘편집 안하기’는 진짜를 진짜로 드러내는 방법이다.
영화나 드라마의 야외 촬영지를 뜻하는 용어인 [로케이션] 이름이 붙은 시리즈 작품은 ‘트리밍 안하기’ 전술이 직접적으로 구사된 작품이다. 이 시리즈의 작품에서는 우리가 여러 미디어를 통해서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 연출된다. 일반적인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이 ‘가짜’ 세상을 ‘진짜’처럼 보이고자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이런 장면이 하나의 ‘설정’이고 ‘가짜’라는 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작품 [로케이션 #19 Location # 19]는 누구든지 한 번쯤 꿈꾸어 보았을 휴양지에서의 로맨틱한 만남이지만, 결국에는 조작된 이미지의 세계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 장면을 진짜처럼 보이게 하길 원한다면 그는 배경막 부분을 트리밍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정연두는 ‘트리밍 안하기’라는 네가티브 전술을 구사하여, 어설픈 가짜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낸다.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Documentary Nostalgia)]는 그는 우리가 매스 미디어에서 보는 최종적인 이미지가 얻어지는 과정 자체를 작품화하였다.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세팅되고 촬영된 이 영상물의 세 번째 장면인 [농촌 풍경]은 전시장 안에 흙 길이 깔리고 논바닥 모양의 천과 벼 모양의 소품으로 가을 농촌 세트를 만드는 과정을 "무삭제"로 보여준다. 정연두의 이 작업은 배우 존 조르노가 잠을 자는 6시간을 찍은 앤디 워홀의 [잠(sleep)]을 연상시킨다. 앤디 워홀의 이 작품은 실제 시간과 영화 상영 시간을 일치시켰다. 이런 작품들은 블록버스터 영화나 뉴스 등의 편집된 세상에 길들었던 우리의 수동적인 감상벽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사실 경쟁이 치열할수록, 편집의 강도는 높아진다. 선정적인 제목 설정과 그에 따른 기사 편집은 기사의 조회수와 그에 따른 광고 단가를 높이려는 자본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임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드라마틱하지 못한 평범한 우리의 삶은 상품적 가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격이 형성되지 못하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정연두의 작품 속에서는 진행을 위한 여러 가지 소리는 들리지만, 장면을 편집하기 위한 '컷'소리는 단 한번도 들리지 않는다.
정연두의 작품에서는 ‘시시한 일’만 일어난다. 세계를 악에서 구하는 영웅담도 가슴을 찢어놓는 사랑이야기도 없다. [씨네메지션(Cine Magician)] 시리즈에서 보는 것처럼 정연두의 세계에서는 마술사의 마술조차도 소박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듯이 우리 사는 세상에는 인생에는 편집이 없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견뎌내야 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적 행위의 반복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꿈, 기억, 로맨스, 판타지 등을 손으로 만들면서 정연두는 우리에게 말을 건다. 드라마틱하지 않아도, 근사하지 않아도 그래도 견딜 만 하지 않은가? 손으로 만든 세상에는 손의 온기가 남아있는 법이다.
작품 [식스포인트(Six Points)] 은 한국, 중국, 인도, 러시아, 이태리, 멕시코 등 6개국의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미국의 거리를 촬영하여 연속적으로 나열한 영상물이다. 각국의 액센트로 버무려진 영어로 나레이션이 나오는 가운데 천천히 시점이 이동해가면서 영상물이 진행된다. 차도에는 뉴욕의 상징인 노란 택시가 보이며, 상가에는 각국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 상점의 간판이 붙어있다. 이 작품은 순수한 가상도 순수한 현실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순수한 미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차라리 이러한 혼성적 거리가 미국 자체임을 보여준다.
근작 [Adolescence]은 성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법한 캠핑과 모닥불의 추억을 재현하고 있다. 한 때 등산광이었던 작가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국 대학생들의 캠핑 모습을 촬영했다. 이 작품들은 어쩐지 카라바지오에서 렘브란트로 이어지는 17세기 회화에서의 빛의 사용을 떠올리게 한다. 추억의 진실성과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이 장면들은 야간 촬영을 위해 정교한 인공 조명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관람객들이 여기서 부자연스러움을 느낄까? 낭만적인 추억 속을 담은 사진으로 정연두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시각적인 환경의 인공성 그 자체이다. 청년기의 멋진 추억을 재현하고 싶었지만, 그를 위해서 우리는 무언가 거짓말을 해야하는(조명을 조작하는) 아이러니에 봉착하게 되었다.
사실 가상을 가장 그럴 듯한 현실처럼 만드는데 동원되는 것 중의 하나는 ‘빛’이다. 빛은 3차원의 현실 공간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첫 번째 환경적 요인이자, 이미지의 중요한 구성적 요소이다. 르네상스 이후의 서양미술사는 가상의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교묘하게 빛을 사용해왔음을 보여준다. 17세기 바로크 화가 카라바지오는 장면의 드라마틱한 성격을 고양하기 위해서 극적인 명암대조법(chiaroscuro)를 사용했다. 아카데미즘 풍 그림은 잘 조정된 빛을 전제로 한다. 스튜디오 촬영 사진과 영화 촬영 역시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는 미명하에서 자연의 빛이 아니라 인공적인 조명에 의지했다. 그러므로 현대의 관람객들에게 이 과장된 빛은 어쩌면 하늘의 햇빛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회화라는 올드 미디어 역시 자기의 세계에 관람객들을 몰입시키고 설득하기 위해서 다양한 장치를 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계속 질문한다. 그 질문의 준거점은 우리의 평범한 삶이다. 그는 “헛된 공상을 버린 호기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정연두는 평범한 사람들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꿈과 희망이라는 하얀 거짓말이라는 가짜가 주어진 현실적 여건과 부단히 섞이는 삶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트리밍 안하기’, ‘편집안하기’ 등의 수공전략으로 가상의 세계가 현실을 압도하는 것을 거부해왔다. 그는 늘 꿈과 현실, 가상과 실재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다. 이런 균형적인 감각을 가지고 그는 모든 존재하는 이미지에 도전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할 것이다. 끊임없는 질문만이 각종 미디어가 쏟아내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표류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정연두의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한다.
이진숙은 서울대학교 독문학과에서 문학전공으로 학사, 석사 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러시아국립인문대학교 미술사학부에서 말레비치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예술의 전당에서 <러시아 미술과 문학 사이>,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사>를 진행하고 있다. 동덕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 중앙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월간 [톱클래스]에서 ‘이진숙이 만난 우리 시대 미술가’를, [중앙 SUNDAY]에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국내에 소개가 미진했던 러시아 화가들을 알리는 『러시아 미술사』(민음in 2007)와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 대한 비평집 『미술의 빅뱅』(민음사, 2010), 아트 에세이 『아름다움에 기대다』가 있다. http://blog.daum.net/kmedic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