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김홍주

posted 2012.07.17

자연(自然)이라는 말이 '스스로 그러함'을 의미하듯이, 김홍주의 그림은 꽃이 피듯이 그렇게 캔버스 위에서 피어난다. 왜 꽃이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단순하다. 꽃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란다. 사실 근작을 살펴보면 꽃은 더 이상 이름을 알 수 있는 '그 꽃 the flower'이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냥 '하나의 꽃a flower'이다. 잔디밭을 그린 것은 너무 평면적이어서 구체적인 공간감과 방향감이 없는 거의 추상에 가까운 무엇인가가 되었다.




김홍주/작가1945년 충청북도 회인 출생,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7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5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으며 한국미술대상전 최우수 프런티어상(1978년), 프랑스 카뉴 국제회화제 특별상(1980년), 제6회 이인성 미술상(2005년)을 수상했다.



두 겹의 꽃, 두 겹의 세계

눌변의 수사학, 달변의 침묵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시인 김소월은 단조로우면서도 명료한 운율로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반복해서 노래한다. 꽃이 피고 지는 단조롭고도 명료한 반복 과정에서 그는 우주의 시간을 바라보았다. 피고 지는 꽃의 시간, 자연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거시적으로 보면 자연의 운동은 순환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 반복처럼 보이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어떤 것도 완벽하게 동일하지 않다. 이게 자연의 섭리이고 신비이다. 소박한 어구의 반복으로 무한한 우주의 섭리를 노래한 짧은 소월의 시는 눌변의 수사학이고, 달변의 침묵이다.


자연(自然)이라는 말이 ‘스스로 그러함’을 의미하듯이, 김홍주의 그림은 꽃이 피듯이 그렇게 캔버스 위에서 피어난다. 왜 꽃이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단순하다. 꽃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란다. 사실 근작을 살펴보면 꽃은 더 이상 이름을 알 수 있는 ‘그 꽃 the flower’이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냥 ‘하나의 꽃 a flower’이다. 잔디 밭을 그린 것은 너무 평면적이어서 구체적인 공간감과 방향감이 없는 거의 추상에 가까운 무엇인가가 되었다. 무심한 듯이 펼쳐지지만, 그의 화면은 꽉 찬 존재감으로 충만하다. 거시적으로 보면 꽃의 형태가 보이고 무수한 붓질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시적으로는 어떤 붓질도 반복적이거나 동일하지 않다. 이게 김홍주 그림의 섭리이다. 김홍주의 일련의 작품들은 이중이미지로 두 겹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김소월의 시처럼 김홍주의 그림 역시 눌변의 수사학이고, 달변의 침묵이다.


김홍주는 김홍주다


김홍주는 김홍주다. 1945년생인 그는 미술사적인 분류에서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만 속한다. 김홍주의 작업은 10년을 주기로 달라져왔다. 그 달라짐은 자연처럼 자연스러웠다. 그의 변화는 한국미술사의 흐름과 함께 하지만, 결코 대다수가 갔던 길을 가지는 않았다. 그의 역사는 한국회화사 및 회화사 전체에 대한 지극히 화가다운 질문과 해법 찾기로 이어지고 있다. 1970년대 그는 당시에 가장 파격적인 흐름인 개념미술가 집단인 S.T그룹과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이들은 당시 한국 화단을 지배하던 모노크롬 회화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었다. 그러나 어떤 개념이나 목표를 정해 놓고 하는 일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 그림은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확실해졌다. 그림은 손으로 하는 것, 그림은 그리는 것 자체라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짧은 개념미술 시기를 지나 1970년대 중반부터 그는 거울이나 나무로 된 창틀에 사실주의적으로 인물을 그리면서 회화로 돌아왔다. 이 당시 많은 화가들이 캔버스에 사물을 정교하게 그리는 극사실주의적인 그림들을 그렸으나, 그는 과감하게 오브제를 그림에 도입했다. 그는 고승을 연상시키듯 엄숙한 표정의 인물을 정교하게 그린 뒤, 그 위에 실을 이용해서 치렁치렁한 수염을 매달아 놓았다. 일견 유머러스해 보이는 이 작품은 극사실주의의 ‘사실주의’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현실과 똑 같은 것은 현실이면 충분하지, 그림이 현실과 똑같을 필요가 있는 것일까?



김홍주_Untitled_acrylic on canvas_225x200cm_2007
김홍주_Untitled_acrylic on canvas_225x200cm_2007


그가 선택한 오브제가 거울이나 창틀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당시 한국 극사실주의의 선언 같은 작품이 고영훈의 [이것은 돌이다]라는 작품이다. 고영훈의 이 작품은 재현이론에 대한 선언적인 반박이었던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뒤집은 것으로 재현된 이미지의 진실성을 주창하면서 사실주의의 정당성을 선언한 그림이다. 재현이론은 회화를 “세계를 비추어 보는 창”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때 예술가의 위치는 암묵적으로 창의 안쪽으로 설정되어있다. 즉, 르네 마그리트의 1933년 작 [인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이라는 작품이 암시하듯이, 창 안쪽의 있는 작가가 내다 본 창 밖의 세상을 그린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낡은 나무 문짝 위에 그려진 화가 김홍주의 자화상은 창 안에서 창 밖을 보고 있다. 여기서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미술사에서는 관람객이 바라보는 것은 작가가 바라보고 재현한 결과물로써의 세상이었다. 이 세상의 객관성은 작가가 원근법적인 시각 구조에 의거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림으로써만 회화는 세상을 제대로 재현한 진실된 것이 된다. 그러나 1979년에 그린 김홍주의 자화상인 [무제(Untitled)]에서는 바로 창 밖을 바라보는 작가가 그려져 있다. 관람객은 김홍주라는 인물뿐 아니라 작가적 상황 자체를 바라보게 된다. 현실은 무한한데, 다만 창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작가가 진실을 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거울 위에 인물화를 그린 그림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회화의 개념을 직설법적으로 떠오르게 한다. 깨어진 거울은 만화경처럼 왜곡된 상만을 전하거나, 더럽게 먼지가 끼여있어 제대로 세상을 비추지 못한다. 김홍주는 서양화의 재료로 그림을 그리지만, 그는 회화를 바라보는 서양식 관념을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비슷한 시기에 그린 풍경화는 가까이서 보면 산과 밭인데 멀리서 보면 뒤집어진 남자의 얼굴인 이중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런데 김홍주의 이중화는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보고 전체를 통해서 부분을 다시 읽는 자유로운 존재의 운동감을 전제로 하며, 심지어는 화면을 거꾸로 걸어야만 다른 형상이 포착되기도 한다. 서양화의 논리에서는 현실을 재현하는 회화와 현실을 약호화하는 갖가지 기호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그러므로 지도가 제 아무리 정확하게 현실의 지구의 모습을 담았다 해도 그것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다. 그러나 김홍주의 세계에서는 문자 뿐 아니라 지도에 사용되는 축약적인 기호 역시 회화적인 이미지의 세계로 편입된다. 아름다운 꽃만이 아니라 작은 풀섶, 이름없는 벌레 들도 모두 무위 자연의 세상이 듯, 김홍주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이미지의 세계로 포섭된다. 이 세계로 진입하는 유일한 입장권은 “화가가 그렸다”라는 행위 자체이다.


1990년대 후반에 시작된 꽃 그림도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풍경 그림이나 배설물 그림에서는 분리되어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던 이중의 이미지가 꽃 그림에서는 하나로 결합되어 더 은밀해지면서 세련됨이 더해졌다. 그는 모필이 몇 가닥 안 되는 얇은 동양화 붓으로 작업을 한다. 동양화 붓의 섬세한 세필은 캔버스 위에 더딘 걸음을 걸으며 작가의 손맛을 캔버스에 고스란히 남겼다. 붓의 부드러움이 서양화 재료인 아크릴 물감의 명료한 원색을 만나니 캔버스에는 화사함이 더해졌다. 김홍주의 환상적인 꽃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전체적인 형태를 잡고 그리기는 하지만 하루에 한 뼘씩 부분을 그려 나가는 작가에게 작업의 결과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부단한 노동의 결과로 생겨난 이 촉각적인 붓질의 길을 더듬어 가면서 그는 다른 세상을 만난다. “꽃잎의 세세한 잎맥을 그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그리는 것이 꽃이 아니라 길이거나 강이거나 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전체 형태로서의 꽃은 문득 근접한 관찰에서는 섬세하고 가느다란 필선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김홍주_Untitled_acrylic on canvas_162x162cm_2002
김홍주_Untitled_acrylic on canvas_162x162cm_2002


무위자연을 닮은 그림


그는 무엇이 되고자 하지 않았고, 무엇을 그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그렸다. 그는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몰두했다. 무수히 반복된 가느다란 필선의 축적은 그런 몰두가 캔버스에 남긴 흔적이다. 평론가 김원방은 ‘그린다’라는 행위 자체의 몰두, 무수히 반복되는 세필의 흔적을 보면서 김홍주가 “재현을 거부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냈다”고 지적한다. 재현적 회화를 무력화시켰다는 점에서 김홍주를 ‘회화의 적’이라는 반어적인 명칭을 부여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김홍주는 재현을 중시하는 서구적 회화의 반대자이다. 관점을 달리하면 김홍주는 가장 한국적인 특성을 가진 회화의 고안해낸 새로운 회화의 창안자이다.



김홍주_Untitled_acrylic on canvas_225x200cm_2007
김홍주_Untitled_acrylic on canvas_225x200cm_2007


우리는 김홍주에게서도 이런 미덕을 발견한다. "결과를 예상하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그리다 보면 결국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은 관람객의 몫이다. 추우면 옷을 입고, 더우면 옷을 벗듯이 자연스럽게 그리는 것이다. 무슨 효과를 내려고 그리는 것이 아니다. 어떤 대상을 그리듯이 다 똑같다." 김홍주의 이런 태도는 한국적인 미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1945년에 태어난 그는 근대화되기 이전의 한국의 정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최순우는 한국 미술은 ‘자연과 예술을 하나의 (동일한) 격’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최순우가 ‘자연과의 조화’를 최고의 덕목 자체뿐 아니라 그것에 이르는 과정에도 주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물 자체만큼 그 조화조차 의식적으로 추구하지 않는 행위, 말 그대로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한국미술이다. 여기서 창작과정은 서구적으로 신비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즉한 인간의 노동처럼 반복적인 것이고, 창작은 나날의 일과와 같이 더디게 진행되며 변화하는 것이며 여러 주변적인 요인을 자연스럽게 포함해간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김홍주가 캔버스에 남긴 무수한 붓질들은 이러한 노동의 집산이다. 이 노동의 집산이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그러함’이라는 자연의 관념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김홍주의 그리기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한국미의 최고의 덕목을 현대화한 작품이다.

이진숙 / 미술평론가

이진숙은 서울대학교 독문학과에서 문학전공으로 학사, 석사 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러시아국립인문대학교 미술사학부에서 말레비치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예술의 전당에서 <러시아 미술과 문학 사이>,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사>를 진행하고 있다. 동덕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 중앙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월간 [톱클래스]에서 ‘이진숙이 만난 우리 시대 미술가’를, [중앙 SUNDAY]에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국내에 소개가 미진했던 러시아 화가들을 알리는 『러시아 미술사』(민음in 2007)와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 대한 비평집 『미술의 빅뱅』(민음사, 2010), 아트 에세이 『아름다움에 기대다』가 있다. http://blog.daum.net/kmedic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