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기의 아토마우스(Atomouse)는 한국 팝 아트의 최고의 아이콘으로 오랜 시간 사랑 받고 있다. 지난 20여년 간 이동기의 작품 세계는 진화를 거듭해왔고, 그를 지켜보는 우리도 더불어 변화해 왔다. "내 작품은 궁극적으로 '균형'에 대한 것이다. 내 작품들은 세상의 모든 복잡한 요소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 안에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추상과 구상, 물질과 정신, 동양과 서양, 내부와 외부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라는 그의 말은 시간이 더해 갈수록 빛을 발한다. 때는 바야흐로 구 미디어와 뉴미디어가, 선진국과 개도국이, 각기 다른 디지털 기계들이 함께 결합되어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는 컨버전스(conversions 융합)의 시대가 아닌가?
그가 우리에게 음악을 들려준다. 일명 [달콤쌉싸름한 교향곡]은 이동기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깔아놓은 전주곡이다. 그림 안에는 진지한 음악가의 얼굴과 녹아내리는 노란 아토마우스의 얼굴이 동시에 보인다. 그 옆에는 똑 같은 표정의 늑대 얼굴이 보인다. 갓 태어났을 때 아토마우스는 늑대를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던 사실을 연상시킨다. 산, 뇌의 단층 촬영 사진, @, $, 만화적인 기호들 좀처럼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다양한 이미지와 기호들이 동시에 나열되어 하나의 화면을 이루고 있다.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과 찾을 수 없는 것, 아토마우스와 아토마우스가 아닌 것이 공존하며 만들어내는 세상이다. 그것은 제목처럼 ‘달콤한’ 동시에 ‘쌉싸름’하다. 순수한 “단일성”을 갈망하던 모더니즘의 시대는 오래 전에 종언을 고했다. 이동기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서로 이질적이고, 때로는 상반될 수도 있는 여러 요소들이 충돌하고 결합해서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지는 컨버전스 시대의 달콤 쌉싸름한 교향곡이다.
[브래인 스캔]은 이동기의 방법론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SF 만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그림 속 인물은 많은 선들이 연결된 커다란 헬멧을 쓰고 있다. 머리 속에서 진행되는 모든 능동적-수동적 반응, 의식적-무의식의 진행 면밀히 검사하고 있는 중이다. 앞서 언급한 [달콤쌉싸름한 교향곡] 시리즈의 작품들이 보여준 다양한 이미지의 나열은 이러한 뇌를 스캔한 결과이다. 광고 이미지, 신문기사, 만화의 한 컷, 소설의 한 구절과 영화의 한 장면, 흥얼거리다 저절로 따라 부르는 노래 가사 등등…… 다양한 자극과 많은 정보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축적, 삭제, 왜곡, 변형되는 공간이 우리의 뇌이다. 우리의 두뇌에 쌓여있는 다양한 문화적인 지층을 풀어내려는 노력은 이동기를 단순한 팝 아티스트 이상으로 만든다.
1993년 등장하여 한국 팝 아트의 첫 문을 연 아토마우스는 문화적인 컨버전스를 보여주는 한 전형이다. 아토마우스는 미국 만화 미키 마우스와 일본 만화 아톰이 결합하여 태어난 한국산이다. 작가 이동기는 반도국가인 대한민국은 대륙의 문화와 대양의 문화가 함께 흘러 들어 오는 지역임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한국은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고, 그만큼 문화적인 교류와 세대 교체도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복잡한 문화의 충돌과 혼융이 복잡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태어난 아토마우스는 국적불명의 문화적인 혼혈아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한국의 문화적 혼성상태를 보여주는 시대적인 증거물이다. 아토마우스의 최근의 행보는 극단적으로는 자기 소멸을 목표로 하며, 이런 다양한 혼성상태를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60년대의 미국 팝아트와 다른, 1990년대 이후에 발흥한 한, 중, 일 팝 아트의 공통적인 특징은 캐릭터화이다. 아토마우스 뿐 아니라 위에민준의 ‘웃는 남자’, 팡리쥔의 ‘대머리 건달’, 무라카미 다카시의 ‘DOB’’ 등 많은 작품들에서 캐릭터화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는 애니메이션 영화, TV 시리즈물, 영화 등이 우리 삶에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캐릭터화는 팝 아트의 기본 기능인 대중문화 이미지의 수집에 용이하다. 동시에 캐릭터는 사회의 단면을 필연적으로 반영하며, 또 매우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무의식의 산물인 아토마우스는 개인의 얼터이고(alter ego)이면서 동시에 그 개인을 형성시킨 사회, 문화적 배경을 드러내 보여 준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20여 년간의 세월을 쌓아오면서 한국 사회에서 태어나 자라온 아토마우스는 이제 ‘우리’와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역사(미술사)를 되짚어 이해하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타인들을 이해하는 성숙함을 일깨우는 존재가 되었다.
예술의 형식적 순수성을 주장하는 어려운 추상미술 앞에서 주눅이 들어 힘없이 등을 돌리던 관람객들을 불러 세운 것은 바로 팝 아티스트들이었다. 그들은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수용함으로써, 소통의 장을 열었다. 아토마우스는 대중문화를 끌어들이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아토마우스는 특유의 기발한 변신 능력으로 미술사의 중요한 전통을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새로운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2000년에 그려진 [꽃밭]의 아토마우스. 여러 색의 다양한 버전으로 그려질 정도로 사랑 받은 작품이다. 아토마우스는 능청스럽게도 15세기 조선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에 등장하는 노인의 고요한 명상의 자세를 흉내 내고 있다! 한국 현대 미술에서 손에 꼽을 만한 아름다운 순간이다. 그 눈빛은 맑고 진지하며, 전체 정조는 평온하고 투명하다. [고사관수도]의 나이든 선비는 청정한 자연 속에 그대로 머물렀으리라. 그러나 알록달록 꽃밭에서 세상을 응시하던 아토마우스는 동산에서 걸어 나와 부지런히 움직이며 역할 놀이를 시작했다. 그는 록스타로, 반가사유상으로, 기타리스트로 부단히 변신했고, 유쾌한 동작으로 그림 속으로 뛰어들었다.
서로 상반되는 것들을 하나의 장면으로 융합하는 작업 중에 가장 대담한 것이 [더블 비전] 시리즈이다. 미술사는 의례적으로 구상과 추상을 나누며 대립시킨다. 말레비치나 칸딘스키 같은 최초의 추상화가들은 구상미술에 대해 미술사에 길이 남을 독설을 내뱉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동기의 그림에서 추상과 구상은 대립이 아니라 공존을 선택했다. [동전 아토마우스]에서는 추상화의 평면성에 호응하기 위해서, 아토마우스는 동전처럼 납작해져서 평면화 되었다. 흑백의 색조는 우리나라의 추상화 흐름인 모노크롬 화파의 단색조를 암시한다.
대립적인 존재를 통합시키려고 균형을 잡는 노력은 그의 초기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다. Men/Women, +/-, sky/earth, human/hero, left/right 같이 대립적인 요소들이 짝을 이루어 한 장면에 등장하는 작품들을 여럿 그렸었다. 그리고 이제 이동기는 스스로를 넘어선다. 세상을 대립적으로 두 쌍으로 파악하는 것은 전형적인 뉴턴식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모더니즘적인 사고였다. ‘가상현실’이 중요한 삶의 요소가 된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는 이런 이분법적인 단순 설정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너무나 많은 다양함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런 다양성을 끌어안는 행위를 작가는 ‘절충주의’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살짝 오해의 여지가 있는 용어이지만,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세상의 복잡함과 혼재성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것들의 융합(컨버전스). 이것이 그가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이다.
아토마우스의 계속되는 역할놀이(role playing game)는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의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 자발적인 ‘타자화’를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타인과 나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이해이다. 타인은 나와 분리되어 있는 낯선 존재가 아니라 나의 다른 가능태이다. 아토마우스는 문득 야구선수, 기타리스트가 되었다가 동시에 피카소, 앤디 워홀, 마르셀 뒤샹이 된다.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가 찍은 사진 속에서 마르셀 뒤샹은 상투적인 초상 사진을 과감하게 거부했다. 현대미술의 중요한 한 장을 연 마르셀 뒤샹은 자신의 정면 얼굴에서만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는 판에 박힌 생각을 떨쳐내고 뒷면 초상 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뒤통수에는 별이 새겨져 있었다. 그 별을 보고 오브제 미술, 개념미술, 행위 예술, 팝 아트 등 많은 현대미술가들이 뒤를 따랐다. 뒤샹이었던 아토마우스는 곧바로 은발 가발과 선글라스의 앤디 워홀로 변신하기도 한다. 타인이 되어보는 역할놀이는 상반된 것들을 자기 속에 융합시키는 아토마우스의 컨버전스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그런데, 아무리 융합도 좋지만 뜬금없이 등 뒤에 커다란 귀가 달리다니! 아니, 놀랄 필요 없다. 이것은 호주 출신 행위예술 작가 스텔락(Stelarc)으로 변신한 아토마우스의 모습이다. 스텔락은 인간과 기계간의 잡종 기획을 통해 신체 확장을 시도해온 실험적인 작가이다. 스텔락의 예술은 미디어비평가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론과 관련이 있다. 1960년대에 이미 맥루한은 미디어를 통해서 인간의 감각이 확장되고, 이러한 감각의 확장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혁명적으로 바꾸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기술의 경계마저 허물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와 행동 기획에는 이미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 등 다양한 디지털 기계의 사용이 개입되어있어 인류의 사이보그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스텔락은 팔에 귀를 이식하는 ‘제3의 귀’라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는 인간과 기계가 신체적으로 융합한 ‘포스트 휴먼(사이보그)’에 대한 그의 구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계와 기계의 융합만이 아니라 인간과 기계의 융합까지 포함하는 디지털 컨버전스 현상은 우리의 자아는 기술적 환경과 결합된 존재이며, 더 이상 우리들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토마우스는 팔 대신 등에 큰 귀를 이식하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중이다. 기괴하기는 하지만, 두 눈으로는 앞을 보고, 양 귀가 옆의 소리를 듣고, 등 뒤에 달린 큰 귀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다면, 우리는 좀 더 타인 지향적으로 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휴머니즘적인 측면에서 보면 스텔락보다 아토마우스가 더 진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진숙은 서울대학교 독문학과에서 문학전공으로 학사, 석사 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러시아국립인문대학교 미술사학부에서 말레비치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예술의 전당에서 <러시아 미술과 문학 사이>,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사>를 진행하고 있다. 동덕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 중앙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월간 [톱클래스]에서 ‘이진숙이 만난 우리 시대 미술가’를, [중앙 SUNDAY]에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국내에 소개가 미진했던 러시아 화가들을 알리는 『러시아 미술사』(민음in 2007)와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 대한 비평집 『미술의 빅뱅』(민음사, 2010), 아트 에세이 『아름다움에 기대다』가 있다. http://blog.daum.net/kmedic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