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모두 조각이다. 조각은 뭐든지 조각이 될 수 있다. 미술에서는 위험하다는 것이 없다. 뒤샹 이후 무엇을 하건 작가의 자유이고 허용되는 것이 많다. 나의 모든 작업은 조각가라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진행되는 방편이다."
권오상은 사진 조각의 창시자이다. 또한 그는 질문의 명수이다. 질문 속에 답이 있다고 했다. 잘 구성된 좋은 질문은 좋은 답을 가져온다. 현대미술에서는 입체적인 미술은 전통적인 조각(sculpture) 개념을 넘어서 오브제, 인스톨레이션, 미디어아트, 개념미술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그 재료도 빛, 소리, 텍스트, 디지털 기술 등 다채로워졌다. 조각이라는 말은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듯 했다. 그러나 어떤 미술 장르가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작가들이 던지는 래디컬한 질문 때문이다. 영어로 래디컬(radical)하다는 말은 ‘근본적’이라는 뜻과 ‘급진적’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급진적일 수 밖에 없다. 권오상이 던진 조각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장르의 근본을 뒤흔들 정도로 급진적인 답을 얻었다. 그것이 새로운 작품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중요한 것은 그의 질문들이 손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관념적인 질문들이 아니라 실제 조각 작업을 행하면서 나오는 질문들이다. 권오상은 오브제의 차용으로 조각가의 손이 사라지기 시작했던 순간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럼으로써 그는 사진, 잡지 이미지, 인터넷 이미지 등 다른 미디어를 본래의 조각적 특성에 종속시킬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조각가였다.
권오상은 대학교 시절부터 ‘데오도란트 타입’이라는 명칭으로 사진 조각을 시작했다. 그의 출발점은 명확했다. 1990년대 초반 조각이 인스톨레이션이라는 확장된 가능성에 흠뻑 빠져 있을 때 그의 질문은 고전적이고 명료했다. “왜 조각은 무거울까? 가벼운 조각은 없는 것일까?”, ‘가벼운 조각’을 위해 그는 가벼운 재료인 사진을 조각의 재료로 취했다. '데오도란트 타입'이라는 명칭이 붙은 사진-조각이 탄생했다. 사진 조각은 한 명의 모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부분부분 나눠 사진 촬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음에 실제 사람 크기로 조각한 압축 스티로폼의 일종인 아이소핑크 위에 사진을 차례로 붙여 나간다. 재현은 사진이, 입체적인 틀은 조각이 담당한다. 결합과정에서 두 장르의 미학적 특징들이 충돌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었다.
우선 사진의 폭 넓은 복제 능력은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쌍둥이처럼 머리가 둘인 경우(이 경우 실제 쌍둥이보다 더 쌍둥이답다.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복제인간'이다)도 있을 수 있고 더 크기를 줄여서 네 개의 얼굴을 가진 작품도 만들 수 있다. 고전적 조각에서 볼 수 없는 기형 혹은 이형의 인간들이 등장했다. 또 사진은 피사체를 포착할 때 빛의 영향을 예민하게 받는다. 동일한 대상을 동일한 조명에서 찍어도 찍는 사람의 위치 때문에 생기는 빛의 밝기 차이 때문에 같은 표면을 찍더라도 서로 다른 사진이 되어버린다. 동일한 사물의 제 각각의 재현이라는 결론은 사진이 가진 고전적인 다큐멘타리성에 대한 불신을 야기한다. ‘같은 대상을 찍은 다른 사진’을 이어 붙이는 과정은 권오상의 조각을 회화처럼 얼룩덜룩하게 만든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미학적인 문제들이 제기되는 가운데 최초의 질문은 물리적으로도 그 답을 찾았다. 확실히 그의 조각은 무게가 가벼워졌다. 그런데 이 가벼움은 물리적인 무게상의 가벼움을 넘어서는 캐주얼한 분위기로까지 나가게 된다. 고전적 이론에서 조각은 회화보다 더 보편성이 강한 장르로, 기념비적이고 대표적인 성격을 갖는다. 예컨대 회화에서 풍속화는 있지만, 풍속 조각은 없다. 이 기념비성은 조각의 크기, 대상, 자세 모두를 규정한다. 고전 조각에서 누드를 선호하는 것 역시 보편성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패션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인간의 신체는 시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한다. 그러나 권오상의 작품은 옷을 입고 생활하는 실제 인물을 촬영하는 데서 시작한다. 당대성은 필연적으로 함축된다.
지금까지의 작품들이 단일 인물상 위주였다면,
는 여러 인물들이 함께 등장하는 복잡한 군상을 이루고 있다. 인도 콜렉터의 요청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인도의 국민 배우 아미타브 밧찬, 슈퍼 모델 미란다 커, 그리고 권오상 자신의 얼굴, 세계적인 래퍼 카니에 웨스트의 얼굴이 들어있다. 이 군상은 18세기 오스트리아 조각가 발타자르 페로모저(Balthasar Permoser)의 작품에서 구성을 빌려왔다. 이 조각은 바로크 양식과 신고전주의 양식이 혼재된 절충주의적인 작품이다. (Ruby Nike Bape)은 17세기 조각의 거장 베르니니의 작품의 구성을 차용하면서 전통 바로크 양식과 절충적인 양식을 손으로 비교하여 보았다.
구성은 고전 미술에서 차용했지만 권오상은 여기에 특별한 스토리를 담지는 않는다. 비 기념비적이고 대중문화적인 내용에서 당대성은 다시 한 번 얼굴을 내민다. 사실 고전 조각이 보편성을 지향한다고 했으나 유명한 베르니니의 작품이나 그 보다 덜 유명한 페로모저의 작품 모두 21세기의 우리에겐 보편적이지 않으며, 제작된 당시의 문화적인 코드를 담고 있을 뿐이다. 그의 작품은 감수성과 형식 모두 철저하게 우리 시대의 산물이다. 이전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포즈는 패션 잡지에 등장하는 모델들의 포즈를 따온 것이다. 그런데 "패션 잡지에서 나오는 포즈들을 따라 하다 보니까 그것들이 고전 조각의 포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맥락을 찾고 싶었다." 사진은 모델의 현재적인 모습을 작품에 그대로 실어 나른다.
최근에는 이미지를 얻는 과정에서도 당대성을 드러냈다. 2012년에 완성된 영국의 대표적인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조각상은 직접 만나서 촬영한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이미지를 활용한 것이다. 모델을 두고 촬영한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다운을 받은 이미지로 조각작품을 만들었다. 2D의 이미지를 3D로 전환시키다 보니 다양한 각도에서 매번 다르게 찍은 여러 사진이 함께 사용이 되었다. 하나의 호크니 조각상에 20대부터 70이 넘은 지금의 모습까지 다양한 사진이 사용되어 더욱 흥미로운 모습이 되었다.
첫 번째 질문에 답을 찾자 그에게는 곧이어 두 번째 의문이 떠올랐다. 데오도란트 타입은 작업 공정이 까다롭고 복잡하다. '좀 쉬운 작업은 없을까?' 매우 단순한 이 질문은 조각 과정의 본질적인 문제와 닿아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회화의 우위성을 주장하며 내세웠던 논거 중의 하나가 회화는 깔끔한 옷을 입고 점잖게 할 수 있는 신사다운 작업이지만, 조각은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하는 험한 일, 고로 격이 낮은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코믹한 비교이긴 하지만, 조각이라는 예술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물리적 과정에 대한 타당한 지적이다. 돌, 브론즈, 나무 등등 조각의 전통적인 재료는 어느 하나 조각가의 신체적인 수고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가벼운 조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난 후에도 이 수고스러운 과정은 줄지 않았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패션 잡지에 실린 화려한 광고 사진을 오렸다. 그리고 뒤에 철사 등의 간단한 장치로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이 세워진 이미지를 그는 조각이라고 부른다. 벽면이 아닌 입체적인 공간을 요구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에서 그것은 조각의 최소 요건을 충족시켰다. 또 한번의 래디컬한 질문과 답이 오고 간 것이다. 이렇게 세워진 조각품들(?)을 한데 모아 사진으로 찍음으로써 다시 한 번 조각과 사진과의 결합이 시도되었고 다시 한 번 전대미문의 이미지가 얻어졌다.
그가 선택한 대상들은 모두 소유의 욕망을 자극하는 소위 명품들이고 그만큼 시각적인 매력이 강한 존재들로 '뻔쩍뻔쩍' 빛난다. 이중 플랫 #16, #17, #18번은 럭셔리 잡지 [노블레스]에 6년 간 등장했던 보석 광고 사진을 한 군데 모은 것이다. 잡지에 실린 화려한 이미지들은 우리를 유혹한다. 1997년 IMF 전후를 한 기간에 발간된 이 잡지에는 혹독한 경제 위기를 겪고 나서 더욱 증대하는 물질에 대한 욕망이 그대로 투사되어 있다. 당대성은 이러한 방법으로 그의 작업에 다시 한 번 침입해 들어온다. 최근 작품들은 디자인과 인테리어 전문 잡지인 [월 페이퍼 매거진]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다. 이 작업은 그가 사람이 아닌 사물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에게 조각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현대미술에 왜 정물조각이라는 장르가 없는가?”
왜 정물 조각이 없는가? 짧지만 조각의 본질에 대한 깊숙한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답이 바로 2006년 개인전에 선보였던 [더 스컬프쳐(The Sculpture)] 시리즈이다. 보통 명사를 대문자로 써서 고유명사화 하려는 의도에서 보이듯이 이 작품은 조각만의 고유한 화법으로 조각을 하고 싶었던 작가의 열망을 보여준다. 그러나 전통 조각에서 정물은 조각의 유의미한 대상인 적이 없었다. 보편성과 영구함을 지향하는 조각의 고전적 속성상 세계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과 관련이 없는 정물들은 조각의 대상이 될 수가 없었다. 정물 조각은 1960년의 조지 시걸의 작품에서처럼 세계 속의 인간의 실존적인 의미가 탈각되어, 부수적인 주변 환경을 통해서 상황적 설명이 필요한 순간에 등장했었다. 지금 권오상이 발견한 정물 조각은 조각 자체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는 람보르기니 같은 명차와 두카티 같은 명품 모터싸이클을 손으로 재현했다. 그는 우선 명품들에 내재된 현대미술적인 속성에 주목했다. 어떤 명차는 로켓 엔진이 장착되어 2056km/h의 최고속도를 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지만, 실제로 그 차가 달릴 수 있는 지구상의 공간은 거의 없다. 현대미술이 절대적인 자기 목적성을 향해 달리듯, 이 명차는 오로지 속도라는 자기 목적성을 향해서 질주하고 있다고 작가는 생각했다. 후에 두카티 모터싸이클을 직접 소유하기도 했지만 그는 이미지들을 우선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이미지를 이용해 3차원의 입체물을 만들어내었다. 2차원의 평면 이미지를 3차원의 입체 조각으로 번역하는 작업은 최근의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사진으로 사진 조각을 하는 작업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그가 아무리 정교하게 람보르기니를 만든다 한들 그것은 람보르기니 조각일 뿐이다. 타지도 못하는 그의 말대로 ‘처치 곤란의 작품’이다. 그가 만든 나이키 운동화도 마찬가지이다. 신지도 못하고 결국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전시실에서나 존재의 의미가 생기는 것들이다. 그러나 애써서 권오상은 아무 쓸모없는 것들을 만들어낸다. 바로 ‘조각을 만든다’는 목적을 위한 행위만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상품으로서 그 대상들이 갖고 있었던 표면적인 완벽함을 배반한다. 그는 오로지 예술작품에만 표현될 수 있는 ‘예술가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노력한다. 작가의 손자국으로 얼룩진 작품의 울퉁불퉁한 표면은 소재를 붙이면서 형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예술가의 신체의 흔적이다. 이것은 번들거리는 금속성의 광택을 자랑하며 소비자를 현혹시키던 상품성을 제거해내는 일이었다. 1960년대 도널드 저드 류의 조각들이 상품미학에 도취되어 공업적인 표면 처리를 사용했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행위이다.
“미술은 모두 조각이다. 조각은 뭐든지 조각이 될 수 있다. 미술에서는 위험하다는 것이 없다. 뒤샹 이후 무엇을 하건 작가의 자유이고 허용되는 것이 많다. 나의 모든 작업은 조각가라는 직업을 수행하기 위해 진행되는 방편이다.” 사진조각, 정물 조각이라는 낯선 형식의 작업을 선보이지만 조각의 재료, 모델의 포즈 등 조각의 문제는 언제나 그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각가이다. 조각가만이 할 수 있는, 조각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느끼는 크고 작은 고민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그것은 권오상을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손으로 사유하는 작가로 만든다. 그는 언제나 조각가다.
[사진제공] 작가
이진숙은 서울대학교 독문학과에서 문학전공으로 학사, 석사 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러시아국립인문대학교 미술사학부에서 말레비치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예술의 전당에서 <러시아 미술과 문학 사이>,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사>를 진행하고 있다. 동덕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 중앙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월간 [톱클래스]에서 ‘이진숙이 만난 우리 시대 미술가’를, [중앙 SUNDAY]에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국내에 소개가 미진했던 러시아 화가들을 알리는 『러시아 미술사』(민음in 2007)와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 대한 비평집 『미술의 빅뱅』(민음사, 2010), 아트 에세이 『아름다움에 기대다』가 있다. http://blog.daum.net/kmedic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