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은 유럽을 무대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여성 작가다.
그는 한국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유럽에서 서구의 조형어법을 새롭게 체험했다. 동서양 미술의 개념적 연관성에 골몰하면서 마침내 독자의 작품 방법론을 창안했다. 한지를 불에 태워 먹선을 만들고, 그 한지 조각을 콜라주해 미니멀적 추상회화를 구현해냈다. 지필묵을 작업의 원천으로 삼으면서도 동시대성을 담보하는 작품이다. 동양과 서양 조형의 융합, 이른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실천이다. 런던 화이트큐브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더 메모리 오브 프로세스(The Memory of Process)》(1. 26~3. 10)를 계기로 김민정 예술의 방법과 정신을 조명한다.
※이 글은 김민정의 개인전 도록에 실린 비평문과 작가의 인터뷰를 발췌한 것이다. 출처는 다음과 같다.
1.엔리코 룽기(Enrico Lunghi, 전 룩셈부르크 무담(Mudam)미술관디렉터) '종이, 먹, 그을음: 그 후',《MINJUNG KIM》,갤러리현대 개인전(2017.9.1~10. 8)도록
2.이숙경(영국 테이트미술관 큐레이터) <오르페우스의 시>,《결》,OCI미술관개인전(2015. 11. 5~12. 27) 도록
3.데이비드 자페 (David Jaffe),(전 런던 내셔널갤러리큐레이터),《더 메모리 오브 프로세스(The Memory of Process)》,런던 화이트큐브 개인전(1.26~3.10)도록
4.김민정 , OCI미술관 개인전 영상 인터뷰
김민정 1962년 광주 출생. 홍익대 미술대학 석사 졸업 및 밀라노 브레라아카데미 수학. 런던 화이트큐브(2018), 갤러리현대(2017), 싱가포르 에르메스파운데이션(2017), 런던 패트릭하이데컨템포러리아트(2017), OCI미술관(2015), 로마 마크로현대미술관(2012), 토리노 팔라초브리케라시오파운데이션(2006) 등에서 개인전 개최. 베를린 에스더쉬퍼 (2017), 뉴욕 강컬렉션 (2016), 니즈 헨리무어인스티튜트 (2008), 제5회 광주비엔날레(2004) 등 다수의 단체전 참여. 현재 미국 뉴욕과 프랑스 남부를 오가며 작업 중이다. |
ArtinCulture(이하Art) 김민정은 런던 화이트큐브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에 2000년대 작품 <비움 속의 채움(Void in fullness)> 시리즈에서부터 <산(Mountain)>, <방(The Room)>, <도배(Dobae)> 등의 근작에 이르기까지 회고전 성격의 작업을 선보였다. 그는 유년시절 광주에서 수채화가 강연균 화백에게 미술수업을 받았으며, 홍익대에서 동양화와 서예를 본격적으로 체득하는 등 일찍이 전통미술의 기초를 굳건하게 다졌다. 이후 1991년 이탈리아로 유학해 밀라노 브레라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이 시기에는 서구적 조형어법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면서 동서양 기법의 개념적 연관성에 골몰했다. 지난 30년에 이르는 김민정의 화업을 관통하는 예술적 지표는 동양과 서양 조형의 융합, 이른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미학이라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김민정은 한지를 촛불로 태우는 행위, 그 결과로 드러난 불탄 자국을 하나의 먹선으로 활용하고, 한지조각 콜라주로 화면을 경영하는 독자의 방법론을 창안했다. 지필묵이라는 자신의 문화적 고유성을 작업의 원천으로 삼으면서도 동시대성을 담보하는 조형언어로 끌어올렸다. 자신의 태생적 자산, 지역적 특수성을 존중하고 고수하면서도 그것을 국제적인 보편성으로 구현해낸 것이다.모국주의(Vernacularism)와 글로벌리즘의 변증. 그 다양한 조형적 변주가 국내외에서 평가를 받아, 동양화 베이스의 작가로는 드물게 국제적인 작가로 부상하고 있다.
김민정 작가(이하 김민정) 대학시절, 조소에서 유화까지 대부분의 재료를 다 사용해봤지만 내 체질에 맞은 것은 종이와 먹, 붓이었다. 이 재료들은 방랑자처럼 돌아다니는 나의 삶과도 잘 맞았다. 종이를 둘둘 말아 가지고 다니며 언제든 펼쳐 작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마치 자신의 살결처럼 만져지는 것을 재료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재료를 구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작업으로 드러나는 것은 결국 재료이기 때문에, 여러 재료 중 내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고르는 것이 출발점이다. 이렇게 종이를 고르고 나면, 종이를 작두로 절단하는 작업을 한다. 작두를 사용해 종이를 자를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종이를 자를 때는 매우 과감하게, 힘 조절을 잘해 한 번에 ‘싹’ 자른다. 끊을 때는 잔인하게 딱 끊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두로 종이를 자르면서 마치 내 삶에서 쳐내야 하는 것들을 딱딱 쳐내는 일처럼 느낀다. 종이를 자른 다음에는 얇은 촛불을 앞에 놓고 마치 납작한 국수 면발처럼 잘려진 종이의 가장자리를 태운다. 종이를 태우는 작업과정은 나에겐 마치 명상과도 같다. 고르게 태워진 선이 나오기 위해선 우선 숨 고르기를 해야 한다. 침묵 속에서 똑같은 힘을 주고, 똑같은 호흡을 반복하며 불에 집중해야 고른 선이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하나라도 틀어지면 종이가 금방 타버리고 만다. 이 작업을 하는 순간에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잊게 된다. 그 다음에는 이 종이를 콜라주하는데, 궁극적으로 하나하나의 손길이 만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엔리코 룽기(Enrico Lunghi, 전 룩셈부르크 무담(Mudam)미술관디렉터, 이하 엔리코 룽기) 김민정의 작업은 종이와 먹 그리고 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공하지 않은 재료에 불길을 가한 효과와 흔적으로 이뤄진다. 손으로 만든 종이(한지)는 먹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전통 재료에 대한 작가의 애착은 작가가 받은 미술교육뿐 아니라 성장과정에서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인쇄소를 운영했다. 김민정은 어릴 때부터 종이가 지닌 수천 년의 역사와 더불어 아시아 문화에서 종이가 지니는 깊은 근원에 흠뻑 빠져있었다.
이숙경(테이트 미술관 큐레이터, 이하 이숙경) 둥근 형태의 한지를 겹친 <채움 속의 비움>과 <비움의 채움(Full of emptiness)> 연작은 존재와 무(無)에 대한 김민정의 순환적 관점을 상징한다. 이러한 형태는 특히나 색지로 이루어졌을 때 종종 꽃의 형상으로 (잘못) 보이기도 한다. 첫눈에 드러나는 화려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이 이러한 섬세한 형태의 본성을 깨닫게 될 때, 태우는 행위의 파괴력은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 김민정은 이탈리아 작가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의 찢어진 캔버스 작품에서 채움과 비움 사이의 긴장감이 훌륭하게 표현되었다고 설명한다. 마치 폰타나의 찢어진 캔버스처럼, 부정적 존재(negative presence), 즉 ‘비존재(non-being)’의 영역을 담아내기 위해, 김민정의 종이는 주어진 표면 너머로 물리적인 비움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비움과 채움의 병치는 이 작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각 영역의 본질은 서로의 존재로 인해 반증될 때까지는 드러나지 못한다.
데이비드 자페(David Jaffe, 전 런던 내셔널갤러리큐레이터, 이하 데이비드자페) 김민정의 작업에서 태움은 곧 창조의 일부다. 종이 원료인 나무를 태우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목탄을 만들기 때문에 화학적으로는 매우 익숙한 과정이다. 종이 속으로 타들어가는 산성잉크는 연약한 가장자리를 만든다. 고대 그리스시대의 토기나 르네상스의 에나멜을 사용한 기술에서도 열이라는 요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불이 자리 잡는 동안 숨을 멈춘다는 김민정의 이야기는 이러한 선을 만드는데 필요한 조절과 긴장감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Art 모노톤의 부드러운 색감, 미묘한 지지체의 재질감, 반복적인 형태, 단순한 패턴의 구성, 무한히 증식하는 이미지…. 김민정의 작품은 미니멀리즘적 추상회화 혹은 전면균질회화(all-over painting)과 유사한 조형적 속성을 고루 갖추고 있다. 김민정이 한지를 다루는 태도는 물리적이자 동시에 정신적인 속성을 띠고 있다. 작가는 한 장의 한지를 태워 ‘비움’의 조형을 노리기도 하지만, 태워지지 않은 다른 한 장의 한지를 겹쳐 ‘채움’의 조형으로도 활용한다. 그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비움과 채움’의 미학을 통해 음/양, 질서/혼돈, 정지/움직임, 표현/절제 등의 ‘균형’과 ‘평형’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배제하는 차가운 형식주의 회화와 달리 가까운 일상의 세계를 떠올린다. <길(The Street)>, <방>, <도배>와 같은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김민정의 작업에는 작은 일상에서 얻어낸 철학적 사색의 빛이 드리워져 있다. 작품 이미지는 길 위에 흩어진 꽃, 황토를 바른 시골의 토담 벽, 봉우리가 겹겹이 쌓여 펼쳐지는 산맥을 닮았다. 혹은 미시세계이거나 거시세계를 떠올리는 미지의 풍경으로 안내한다. 특히 <도배>는 한국에서 벽지나 문풍지를 붙이는 것처럼 대단히 일상적인 방법에서 착안한 것이지만, 그 미묘한 뉘앙스의 한지 겹들은 마치 켜켜이 쌓인 먼 시간의 겹처럼 아른히 피어오른다.
이숙경 김민정의 많은 작품에서, 개별 구성단위는 미니멀리즘의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격자 구조를 이루면서 정연함 혹은 연속성의 느낌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방> 연작에서는 이러한 구도적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직선과 대담한 원근법을 도입하여, 작가는 태운 한지를 극도로 촘촘하게 겹쳐 쌓는다. 한지의 가장자리를 태워 만든 이 선들은 거의 공명하는 듯한 느낌을 주며, 시각과 청각의 근접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표현한다. 작품에서 한지의 빽빽한 겹으로 완성된 확연한 두께 또한 회화 표면의 물질적, 3차원적 본질을 강조한다. <방> 연작 중에는 두 패널 작품이 다수 있는데, 이 작품들은 벽 모서리에 마주하여 설치된다. 작품 자체의 강렬한 구도감과 함께 이러한 설치는 조각 작품의 효과와 비슷한 촉각적 감성과 공간적 인지감을 유발한다. 또한, 노동집약적인 이 작품들은 명상적인 반복 행위뿐만 아니라 일상적 노동에 근접하는 작품 제작의 물리적 과정을 보여준다.
김민정 내 작업의 원천은 자연이다. 그렇다고 자연을 오랫동안 집중해서 보고 있을 때 그 영감이 오는 것은 아니다. 한 주, 한 달이 넘어, 또는 밥을 먹다가, 누군가와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형태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사람들과 덜 만나고, 일상을 벗어나 쉬고 있을 때 영감의 순간이 오는 것 같다. 쉼은 곧 비움이다. 그 비움이 계속해서 채워지고 또 비워지고…. 이 비움과 채움의 과정은 곧 우주의 순환이다. 우주의 본체가 내재되어있는 우리들도 이 순환 속에서 또 작은 순환의 과정을 겪는 것이다. 우리는 시작도 끝도 없는, 이 끊이지 않은 순환 속에 존재하는 작은 점과 같은 존재다. 나는 작품을 할 때 그 작은 점을 찍어 놓고 간다는 생각이 든다. 비워야 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고통을 받는 이유는 ‘몸’이 중력을 받기 때문인 것 같다. 몸이 곧 무게라고 할 때, 작업의 재료 역시 곧 무게다. 나는 그 재료를 쓰면서 없앤다. 그런데 재료는 더 채워진다. 가벼워지면서 채워지는 것. 가벼워진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태어나기 전이나 죽은 후다. 나는 아무런 방해도, 걸리는 것 없는, 그렇지만 차이는 있는 상태. 내 작업은 그 상태에 다다르고자 하는 나의 ‘행위’다.
이숙경 김민정의 <도배> 연작에서는 일상적이고 가시적인 노동의 개념이 중추적으로 다뤄진다. 작가는 커다란 한지를 어디든 들고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작은 사각형으로 자름으로써 이후 단계에 재구성될 수 있는 모듈 시스템을 가능하게 했다. 각각의 단위들은 형과 배경의 두 상반된 요소로 나눠진다. 작가는 작은 사각형으로 자른 한지조각을 향으로 태워 작은 구멍을 내고, 이를 다시 타원형으로 오려낸다. 자르고 남은 바깥 부분 한지도 버리지 않고 다시 사용하여 타원형 한지 작품과 쌍을 이루는 ‘비움’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는 어떤 것도 낭비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이 상호적 상반됨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맡는다. 김민정은 농담처럼 이 과정은 버려지는 것을 아까워하는 가정주부의 알뜰한 습관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창작 행위 이면의 작업 동기를 대단한 것처럼 포장하지 않는 김민정의 태도는 그를 세속적 세계에 뿌리내려 살게 하는 방도이기도 하다. 작품명 <도배>는 한국의 벽지 도배에서 착안한 제목이며, 일상과의 밀접한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전통적인 한국 가옥에서 오랫동안 문과 벽에 한지를 사용해왔고, 많은 가정에서 매해 봄 대청소를 하며 창호지와 벽지를 새로 발랐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자페 김민정 작품의 정수는 세심한 패턴과 의도적인 배치다. 그의 작업에 나타난 종이의 층은 진흙으로 집을 칠하거나 벽에 여러 겹 도배를 해서 수리를 하는 방법에서 유래했다. 그의 작업은 전통적인 종이공예의 형식을 띠면서도 그 자체만의 놀라운 미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우산 모양의 패턴이 정확히 짜 맞춰진 <길>은 완벽하게 조절된 간격과 스케일로, 종이작업에 대한 작가의 관념을 여실히 드러낸다. <방>의 선의 배치는 좀 더 미묘하다. 불에 그을린 종이의 가장자리는 나무의 질감을 모방하면서도, 이 수많은 종이 선들은 여러 소실점을 향해 합쳐진다. 어쩌면 이러한 평가는 한국의 내재적 양식을 서구의 관점으로 비틀어서 본 것일 수 있다. 작가의 예술관을 직접적으로 대면할 순 없더라도, 그의 작품을 더욱 예술적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로 세심하고 정확한 선의 배치를 빼놓을 수 없다.
엔리코 룽기 <위상(Phasing)>에서는 작품에 쓰인 한지의 첫 장에 서예적인 몸짓이 가해지는데, 이는 절제가 이뤄지면서도 다시 만들어낼 수 없는 몸짓이다. 먹이 시원하게 뿜어지는 형태를 자주 취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두 번째 장에는 첫 장의 윤곽에 따라 향을 사용해 먹의 흔적에 대응하는 부분을 잘라낸다. 이러한 표면은 어느 정도는 첫 장의 음화(negative)로 기능하며,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보충하는 동시에 스스로와 대비되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은 서구인들이 일반적으로 음양의 법칙과 연관지어 동양의 전체론적 접근으로 해석하는 개념이라 하겠다. 다른 작품에서 작가는 몸짓을 활용한 표현 대신 검은 한지를 완벽한 원형으로 잘라낸 모양을 성좌와 같이 배열한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동일하다. 원형의 구성을 두 번째 한지로 옮긴 뒤 향을 사용해 구멍을 낸다. 작가는 형태가 겹치는 곳을 그대로 둠으로써 서로 맞물린 원형의 무늬가 곱게 이어진 형상을 얻어낸다. 두 장의 한지는 살짝 어긋나있어 쾌활한 리듬을 만들어내며, 작가가 처음에 만든 구성의 흔적을 좇으며 이것을 자유롭게 그려내기에 리듬적 요소가 배가된다. 나는 이를 ‘음악적’이라 칭하기를 제안한다.
Art 김민정은 결국 불의 특성을 작품에 십분 활용한다. 한지에 불을 태워 선을 만든다. 그의 창작 과정은 불을 태우는 명상의 과정이라 해도 좋다. 작가에게 불은 “고정되어있지 않는, 다른 물질의 숨은 특징을 드러내는 매체”다. 그는 마치 수련하듯 숨을 고르게 쉬고 일정한 힘으로 한지의 가장자리를 태운다. 그 다음 그을린 종이에 풀을 칠하고, 겹겹이 종이를 붙이는 수공적인 작업을 반복한다. 김민정의 태우기, 그을음의 방법은 서예처럼 일정한 규칙에 얽매여 작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는 “불을 다루면서 자연의 힘뿐만 아니라 또 다른 절제의 감각을 느끼게 됐다”고 설명한다. 한지를 태워 선을 만드는 작가의 조형행위는 동양 사상을 실천하는 행위로도 읽혀진다. 자신의 작품으로 이룩한 비움과 채움의 미학은 김민정이 끌어들이는 도가사상과 맥락이 통한다. 도가는 인위적인 것을 해체하고 무위(無爲)의 자연을 추구했다. 무(無)를 추구하는 것이 도(道)이며, 이것은 불교의 공(空) 사상과도 유사하다. 그러니까 김민정으로서는 창작 과정이 곧 명상 행위이기도 하며, 그 명상행위야말로 선(禪)이나 도(道)를 시각화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창작 행위란 거대한 존재의 뜻을 옮기는 사제(司祭)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김민정 나의 ‘선(線)’은 무엇일까. 나의 오랜 생각 중 하나다. 미켈란젤로의 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선, 올드 마스터들의 드로잉을 보면 그 작가의 성격과 모습이 드러난다. 얇게 또는 굵게, 빠르게 또는 천천히, 내 의지로 선을 긋다보면 어느덧 스스로 한계를 느낀다. 어떻게 하면 한계가 있는 인간의 힘이 아닌, 거대한 힘을 빌려 선을 그을 수 있을까? 우연히 종이를 태우고 난 자국을 봤더니 그 자국에는 속력도 없고, 나의 의도도 없었다. 나의 의지가 사라지면서 결국 ‘불’이라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은 물체 혹은 형체, 그리고 ‘종이’라는 만질 수 있는 물체가 서로 공동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들이 서로 화합하여 만들어낸 선이 내가 만들어내는 선보다 훨씬 큰 선인 것 같다. 또한 태워진 한지의 뒷자리는 끈끈하고 진진한 맛을 남긴다. 태워진 자국은 스스로 또 다른 자국을 불러오는 것 같다.
데이비드 자페 끊임없는 실험을 멈추지 않는 작가에게 자신이 만들어낸 조형적 선에 대한 새로운 시도는 필연적이다. 나선형의 형태를 띤 <앵무조개(Nautilus)>가 그 예다. 그가 만들어낸 나선형의 움직임은 또 다른 에너지를 발산한다. 또한 구부러진 방을 형상화한 작업 역시 공간의 전형적 관념에 대한 도전이다. 절반은 행위예술인 듯한 그의 작업은 마치 우리가 볼 수 없는 5차원의 세계를 형상화하려 한 것 같기도 하다.
이숙경 개인적 경험과 기억들은 김민정 작업의 근본을 이루는데, 작품의 직접적 원천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예술적 주체성에 내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국화와 서예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예술적 수련 과정은, 작가로 하여금 불교와 도교 같은 한국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음과 양, 자연과 문화, 질서와 혼돈, 빛과 그림자 같은 개념들은 단순히 이원적인 대신, 끊임없는 유동과 변화 속에 있다. 김민정의 작업은 이러한 개념들 및 이에 연계된 존재들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을 드러낸다. 그러나 작가의 해석을 더욱 풍부하고 복합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작가가 유럽으로 이주한 이후 수학한 유럽 미학과 미술사, 현대미술 등이라고 여겨진다. 단일한 문화에 편향하는 작가들과는 달리, 김민정은 다양한 문화를 종횡하며 일견 고립되어 보이는 여러 예술 유산을 흡수하고 발전시켰다. 작가는 이러한 다양한 유산을 추상적 지식이 아닌 체화된 경험, 비록 작가 본인의 것이 아닐지라도 집단적이고 문화적으로 매개된 경험으로서 접근했다.
엔리코 룽기 나는 김민정의 작업에서 근본적으로 사물의 본성에 경의를 보이는 태도를 감지한다. 이것은 도교의 가르침과 선(禪)적 가르침에서 유래한 자신의 삶의 철학과 공명하는 일이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우주와의 공명을 목표로 하는 접근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의 울림은 서구에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상과 플라톤적인 대화의 개념에 있어, 모든 지식의 근원을 영혼으로 바라보는 태도에서도 보여진다.
김민정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과 만져지지 않는 것들의 질서와 규율을 파악해 그것을 형상으로 드러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느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우주의 질서, 그 힘을 보여주는 것이 곧 작가의 자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