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 재학 시절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박화영은 한국 싱글채널 비디오 역사에서 선대나 후대와 무관하게 독자적이고 고유한 길을 걸어왔다. 그녀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홀로 존재하는 개체가 부조리한 상황에서 취하는 존재론적 대응을 여러 가지 매체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다원적 양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문혜진의 ‘새로운 영상문화 도래와 한국 싱글채널 비디오의 태동’을 마무리한다.
글 문혜진 미술비평가
0. 한국 싱글채널 비디오의 역사에서 박화영만큼 선대나 후대와 무관하게 독자적이고 고유한 길을 걸은 작가는 없다. 실로 이 작가는 유학 시절의 서구미술계나 귀국 후 한국미술계와 거의 관계없이 스스로의 목소리만을 지침삼아 자신만의 세계를 일구었기에 계보화하기에는 지나치게 유다르고 독특하다. 하지만 박화영의 모든 작업에서 강조되는 비선형적 서사나 탈장르적 극적 연출은 새로운 매체 실험과 장르 융합적 다원예술을 환영하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한국미술계가 원하던 것이기도 했다. 서구에서 미술과 영화를 공부하고 당시 촉망받던 PS1 국제 스튜디오 프로그램에 참가 후 귀국한 박화영의 작업들은 서사 중심의 싱글채널 비디오 신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국제적 감각을 갖춘 젊은 작가가 필요하던 1990년대 후반 한국 미술계의 수요에 부합했다. 귀국 보고전인 《먼지의 두께》(1997)를 통해 그는 단번에 당대의 대표적인 영상미디어 작가로 주목받았고, 곧바로 국내외의 주요 기획전에 초대되고 젊은 작가 공모전에 선발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국립현대미술관과 펜실베이니아대학 ICA(Institute of Contemporary Art) 미술관의 공동 기획으로 4명의 한국 작가를 미국에 소개한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1997)1), 새로운 매체를 탐색하는 전위적인 한국작가 10인을 뉴욕에 소개한 《호랑이의 눈》(1998)2), 1998 사진영상의 해를 기념해 사진뿐 아니라 영상 및 미디어아트 전반을 망라한 대형기획전 《사진의 시각적 확장 - 현실과 환상》(1998)3),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1차 심사 선발자에게 출품작 제작비를 지원해 젊은 작가들의 관심을 모은 《제2회 신세계미술제》(1998)4) 등이 대표적인 예다.
박화영이 영상작업을 시작한 것은 미국 유학 시절(1992-1996)이나 그의 궤적은 개념적 비디오아트의 거두 피터 캠퍼스(Peter Campus)의 제자로 비교적 정통적으로 비디오아트를 공부한 함양아와는 사뭇 다르다. 그녀의 영상작업들은 미술계 내부의 비디오아트 선례들과 거의 무관하고, 그렇다고 실험영화나 극영화와도 별 관계가 없다. 물론 199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동년배 영상 작가들처럼 박화영 역시 미대 재학 시절 영화를 좋아했고, 학교 수업보다 영화를 보는 것이 재미있어서 중앙대학교에서 열린 컬트영화제를 비롯해 희귀한 예술 영화들을 찾아다니며 보았다고 한다. 이러한 성향은 아방가르드 작업을 접하기에 한국과 비할 바 없이 풍요로운 뉴욕 거주 시절에 한층 강화된 듯하다. 뉴욕에서 박화영은 실험적인 영상작업을 취급하는 대여점 킴스 비디오나 전위적인 영화를 상영하던 안젤리카 극장을 즐겨 찾았고, 뉴욕대의 영화 제작 워크숍 코스(School of Continuing Education)(1994-1995)를 이수할 당시 학교의 멀티미디어 라이브러리에서 영화, 공연, 미술과 관련한 실험적인 영상들을 섭렵했다.5) 하지만 이 같은 광범위한 흡수에 비디오 매체에 형식적으로 접근하는 1970년대의 전통적인 비디오아트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박화영은 피터 캠퍼스나 비토 아콘치(Vito Acconci) 같은 개념적인 비디오 작업들이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기에 더 찾아보지 않았고, 당대 작가 중에서도 매튜 바니(Matthew Barney) 정도만 영화적이라 조금 보았지 스탠 더글러스(Stan Douglas)나 더그 에이트킨(Doug Aitken) 등 미술 쪽의 영상작업들은 거의 관심이 없었다고 말한다.6) 그녀가 좋아한 작가들은 주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Krzysztof Kieślowski), 피터 그리너웨이(Peter Greenaway), 빔 벤더스(Wim Wenders),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크리스 마커(Chris Marker), 구로사와 아키라(Akira Kurosawa), 알랭 레네(Alain Resnais) 등의 영화감독들이었고,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이나 로메오 카스텔루치(Romeo Castellucci) 같은 공연예술 감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7) 이 같은 경향은 박화영이 영상에 접근하는 방식이 통상의 비디오 작가들과 달랐음을 암시한다. 그녀의 탐색은 미술사의 주요 사조나 선례를 체계적으로 학습해 선대를 계승하거나 극복하는 체제 내부적인 모범 답안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감성에 부합하는 언어를 찾기 위해 정해진 길을 무시하고 장르를 넘나들며 총체적인 공감각 풍경을 모색하는 모험이다.
1. 형식적으로는 여러 가지 매체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다원적 양식이요 내용적으로는 홀로 존재하는 개체가 부조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취하는 존재론적 대응을 다룬다는8) 점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박화영의 화법이다. 학부를 졸업하자마자 연 첫 번째 개인전 〈지구 위에 선합법적 외계인〉(1992)의 출품작들은 드로잉, 페인팅, 목판화, 석판화, 템페라, 오브제 설치, 야외 공공미술 등 가능한 온갖 매체가 동원된 총체적이고 혼성적인 것이었다. 당시 작가는 사회나 미술계의 세속적 가치들에 반항적이었기에 미술 작품을 판매하거나 소장하는 세태에 거부감이 컸고, 그래서 작업을 설치처럼 팔 수 없는 형태로 제작하곤 했다고 한다.9) 영상이나 공연 같은 비물질 형태의 작업으로 이행하게 된 것도 소장 가능한 물질로서의 작품보다 경험하는 종류의 작업을 선호한 성향의 영향이다. 물성에 의존하지 않고 보다 많은 이에게 각기 다른 방식의 체험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나 문학의 방식이 교감을 중시하는 작가에게 보다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다. 유학 후 처음 연 개인전 《인큐베이터 (Incubator)》(1993)는 시간 기반의 작업이 등장하기 시작한 첫 전시다. 젤라틴과 빨간 염료를 섞은 물컹한 덩어리가 담긴 비닐을 갤러리 바닥에 깔고 의학박사가 심장병에 관해 강의하는 음성, 심장 박동소리, 숨소리, 물 속 공기방울 소리 등이 섞인 음향을 틀어10), 마치 관객이 신체 내부를 돌아다니는 듯한 역겹고도 기이한(abject) 경험을 하게 만든 것이 이 작업의 요체였다. 여기서 작가가 창출한 소리풍경(sound scape)과 꿈틀거리는 물체를 발로 밟았을 때의 촉감, 몽환적 분위기를 창출하는 조명은 공간 전체를 하나의 무대 장치로 변환시킨다. 이때 관객은 신체에 대한 자신만의 기억을 회상하는 배우로 작업을 개별적이고 고유하게 체험하게 된다. 거리를 두고 작품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안에 함몰되어 함께 호흡하며 경험하는 것, 구체적인 신체 감각에 의거한 직접적이고 고유한 감상의 방식, 음향이나 공간 연출처럼 시간성에 기반을 둔 극적 연출 같은 특징은 이후 작업에도 계속 이어지는 박화영 특유의 방법론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듬해 졸업 작품으로 연출한 〈펄스룸(Pulse Room)〉(1994)에는 보다 본격적인 비디오 작업이 포함되나 이 역시 비디오가 하나의 영상 풍경(video scape)으로 포함된 총체적 공간 설치에 가깝다. “Be Still My Beating Heart”라는 문장을 읊조리는 입이 거품을 물다가 화이트 노이즈로 바뀌는 비디오가 놓인 공간은 문자 그대로 ‘박동하는 방’에 다름 아니다. TV 모양으로 캐스팅한 모니터 조형물은 빛을 반사해 각기 다른 속도로 깜박이고, 또 다른 비디오는 심장이 멎기 직전의 심박수 모니터처럼 흔들리는 푸른색 선을 보여준다. 유학 시절 TV를 켜고 자면 침대 쪽 벽에 반사되어 조명처럼 깜박이던 환영이 마치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대상처럼 느껴졌다는11) 작가의 말은 연약함과 강인함이 공존하는 생명의 역설, 고립된 존재들의 실존적 정서, 차갑고 비인간적인 의료 시스템과 대비되는 뜨겁고 유기적인 생체 등의 사유로 이어진다. 신체적 기억, 직접적인 감각이 당신에게 왜 그리 중요했냐는 나의 질문에 작가는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답했다. 머리로 아는 모든 것은 간접 경험이요, 내 몸으로 매 순간 체험하는 현재의 감각만이 온전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12) 가장 원초적이요 즉물적인 신체적 체험이 유일하게 ‘살아있는(live)’ 것이고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작가의 생각은 몸에 기반을 둔 관객의 주관적 · 현재적 체험이 주가 되는 비물질적 영상설치 혹은 연극적 연출로 귀결된다. 귀국한 다음 해에 박화영은 싱가포르 극단 시어터웍스(Theatreworks)가 주최한 아시아 예술 워크숍 〈플라잉 서커스 프로젝트(Flying Circus Project)〉(1998)에서 화장을 하고 지우는 과정을 제의적 의식으로 변환한 퍼포먼스 작업을 선보였고, 2년 후 같은 극단의 초대로 〈데스데모나〉(2000-2001)라는 멀티미디어 실험극에 공동 작업자로 참여했다. 이때 작가는 비디오 아티스트 겸 퍼포먼스 배우, 코스튬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음악, 무용, 연극, 미술 등서로 다른 분야의 아시아 예술가들과 협업했다. 이작업에서 박화영은 ‘모나(Mona)’라는 가상의 여성 캐릭터를 고안해 현대여성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을 해학적으로 비트는 라이브 비디오 퍼포먼스를 실연했다(〈블러디 모나(Bloody Mona)〉(2000)).13)
이후에도 박화영은 멀티미디어 실험극이나 퍼포먼스 공연에 지속적으로 참여한다. 대표적으로 서현석, 홍성민과 함께 로봇과 결혼식을 주제로 각기 다른 3막극을 만든 〈컬트로보틱스 (Cult - robotics)〉(2004), 재팬 파운데이션 포럼 주최로 사무엘 베케트를 주제로 열린 멀티미디어 공연 연출 〈록-아-바-이(ROK-A-BA-EE)〉(2005)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중 〈컬트로보틱스〉는 집중된 시선을 요하는 극장공간을 해체하고 분산된 시선과 분절적인 이야기 형식을 실험한 공연으로14), 박화영이 추구하는 비선형적 내러티브와 열린 서사 구조를 개인의 영역을 넘어 협업의 형태로 적극적으로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샴쌍둥이처럼 합체되어 서로 각기 다른 춤을 추는 남녀 무용수들, 당첨된 로또 번호에 따라 연주되는 라이브 오르골 음악, 임신한 여성의 가랑이에서 쏟아지는 로또 공은 자본주의와 결혼이 결합된 광기어린 현대의 자화상인 동시에 무용, 음악, 미술, 연극이 혼재하는 총체극이기도 하다. 작가가 결정해 제시한 것을 관객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할 때마다 매번 달라지는 행위와 풍경을 관객이 각기 다르게 체험하며 무수히 다양한 주관적 서사가 발생한다는 점이 박화영이 영상을 넘어 극예술로 나아간 이유일 것이다.
2. 살펴보았듯 통상의 비디오 작가와 달리 박화영이 영상이라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탐색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시청각 자료를 마음껏 흡수할 수 있었던 서구의 풍족한 환경의 혜택일 것이고, 이차적으로 기존 장르를 뛰어넘는 새로운 작업을 권장하던 석사 시절의 전공(New Forms)도 일부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녀는 당시 작가로서는 드물게 서구에서 제대로 영화 제작을 공부하기도 했기에 영상 매체에 대한 이해 및 숙련도는 높은 축에 속하기도 했다. 비디오의 경우 프랫인스티튜트 재학 시절(1992-1994)에 제작의 기초를 습득했고, 영화의 경우 뉴욕대에서 16mm 영화 제작 과정을 수료했다. 영화를 공부했음에도 박화영의 작업이 거의 모두 비디오인 것은 현실적인 이유와 개인적인 이유가 모두 존재한다. 우선 16mm 필름 자체가 비싸고 구하기도 취급하기도 어려웠기에 물리적으로 작업이 거의 불가능했고, 배우가 등장하고 여러 스태프와 의사소통해야 하는 영화 제작 방식이 작가에게 잘 맞지 않았던 듯싶다. 마침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고 디지털카메라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혼자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당시로서는 고화질 촬영이 가능한 6mm DV 디지털 비디오 캠코더가 출시되면서 영화와 미술을 아우르는 독립적인 영상언어의 가능성을 탐색할 길이 열리게 된다.
영화제작 워크숍의 졸업 작품을 제외하고 16mm 필름을 사용한 유일한 작업은 PS1 레지던시 시절에 만든 〈비상飛翔(Animate Aviation)〉(1996)이다. 실제 깃털을 필름에 부착해 두 대의 영사기로 상영한 이 작업은 필름을 불에 태우거나 그림을 그려 셀룰로이드 필름의 물질성을 강조한 스탠 브래키지(Stan Brakhage) 등의 실험영화 선례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박화영의 작업은 영화 매체에 대한 구조적 탐색이라기보다 관객의 오감을 자극해 특정 정서나 교감을 극대화시키는 연극적 연출에 가깝다. 관객은 좁은 통로를 걸어 들어가며 켜지는 전구의 위치와 소리로 서서히 고양감을 느끼다가 탁 트인 공간에서 거대한 깃털이 날갯짓하는 영상을 마주치게 된다. 스크린 뒤에는 이미지의 원천인 실제 깃털이 영사기에서 루핑되고 바닥에는 깃털이 가득 깔려 있다. 관객의 발목 높이에는 레이저가 깔려 전시장을 걸어 다니는 관객의 발에 걸려 날아오르는 깃털을 붉게 물들인다. 다치기 쉬운 약한 존재를 대변하는 깃털은 덧없고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비상을 꿈꾸는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상징이다.15)
〈비상〉이 형식적으로 필름이라는 영화의 재료를 반영했다면, 내용적인 측면에서 내러티브 서사의 영향이 엿보이는 작업은 〈소리(Jaywalker)〉(1998)다. 동네 아파트 단지를 떠돌아다니는 떠돌이 개를 1년 정도 관찰하며 개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아픔을 공유하는, 서로 다른 존재 간의 교감과 유대를 그린 〈소리〉는 일상의 대상을 기록한 세미(semi) 다큐멘터리이자 개인의 내밀한 상념을 독백체로 내레이션하는 에세이 필름의 포맷을 취한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크리스 마커의 〈환송대(La Jetée)〉(1962)처럼 영상이 사진과 드로잉 같은 정지 이미지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얼핏 〈환송대〉에 대한 오마주 혹은 응용으로 보이는 외견상의 유사성은 실상 우연의 일치다. 멈춰 있지 않고 사람을 피해 빠르게 도망 다니는 피사체를 찍자니 비디오 캠코더 촬영이 불가능했고 초점을 맞춰야 하는 수동스틸카메라도 어려워서 자동카메라로 스냅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작업은 인화한 사진을 다시 Hi - 8mm 비디오 캠코더로 촬영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먼저 내레이션을 녹음하고 각 대사의 타임 코드를 기록한 후 이에 맞춰서 사진을 교체하며 촬영한다. 아날로그 비디오카메라의 특성상 중간에 멈추면 노이즈가 발생하기 때문에 한 번의 촬영이 곧 하나의 컷이 되도록 안무를 짜듯 정교하게 촬영을 계획했고, 조명과 초점이 균질적으로 적용되도록 카메라의 위치를 바꾸지 않고 한 장씩 사진을 바꾸며 조심스레 촬영했다.16) 정지 사진에 확대, 패닝, 이미지 중첩 등 카메라 움직임을 부가한 것도 〈환송대〉와 흡사하나, 정작 작가는 역사 다큐멘터리에서 오래된 흑백사진을 활용하는 방식을 생각하고 작업했다고 한다.
기록에서 출발했지만 환상과 실제가 교차하는 내면 일기의 구조를 취하고 있기에 〈소리〉는 전형적인 다큐멘터리와 거리가 멀지만, 다른 한편 이야기 형식의 내레이션 때문에 박화영의 모든 작업 중 가장 선형적인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 작업 이후 박화영의 비디오는 비선형적 서사의 성격이 갈수록 강화된다. 사고사한 동물의 사체에서 털 난 고기의 모티프를 떠올리고 이를 양심에 난 털과 가려움, 부조리한 현실에 입을 다무는 공공연한 비밀로 연결시키는 〈가려움(Itch)〉(1999)처럼 단채널 작업에서도 이미지와 이미지가 비약하며 환유적 인접성으로 띄엄띄엄 연결되지만, 비선형적이고 다층적인 서사는 채널과 채널이 교차하며 이어지는 2000년대 초반의 다채널 비디오에서보다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일례로, 서로 마주 보는 벽면에 각 채널을 영사해 한 번에 볼 수 없도록 만든 〈별일 없지?(Everything Okay?)〉(2003)는 한 여성이 땅에 버려진 쓸모없는 사물의 파편을 줍는 흑백 영상과 버려진 파편이 주체가 되어 온전할 때의 모습을 꿈꾸는 컬러 영상이 서로 대비를 이루며, 동전의 양면과 같이 공존하는 현실과 꿈의 기묘한 병치를 형식적으로 지원한다. 마찬가지로, 버려지고 쓸모없는 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4채널 비디오 〈드라이브(Drive)〉(2003)는 버려진 피아노와 관련해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넘나드는 4가지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17) 여기서 각 채널의 이미지와 소리, 서사는 마치 서로 다른 악기의 선율이 전체적으로 앙상블을 이루듯 서로 교차하고 충돌하며 하나의 화음을 이룬다.18)
박화영은 스스로의 작업을 “선형적 스토리텔링 방식보다 비선형적 중층적 레이어를 혼재시켜 그것들이 구축하는 망 틈새에서 기존의 학습되고 익숙한 언어로 소통하는 방식 너머의 교감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 정리한 바 있다.19) 이러한 방법론은 그녀의 영상 내부에서, 영상과 영상의 사이에서, 나아가 영상과 다른 장르 간의 혼성에서 다층적으로 적용된다. 이처럼 비선형적이고 통(通)장르적이며 비규범적인 작업이 당시 한국미술계에 어떻게 수용되었을까. 박화영이 귀국한 시점인 1990년대 후반의 국내 미술계는 정부의 다원예술 지원 정책으로 장르 혼성이나 뉴미디어 같은 실험적인 작업이 환영받았고 상업 갤러리가 아직 활성화되지 않아 시장의 입김이 덜하던 시기였다. 미술관이 아닌 영화관에서 비디오 작업을 상영하고 도록도 VHS 비디오테이프의 형태로 남기며 이를 새로운 미술품 유통의 일환으로 판매까지 한 〈The Cross〉(1999)20)나, 삼각관계에 있는 세 남녀의 이야기를 세 작가가 각기 다른 관점으로 그리되 때때로 이야기가 교차하도록 영상의 비선형적 서사를 실험한 〈빠지다, 빠지다, 빠지다〉(서현석, 박화영, 홍성민 공동작업, 1998)처럼 작업의 내외부에서 새로운 시도들이 활발히 전개되었기에, 박화영의 다매체적 실험들은 진보적이고 신선한 감각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수용은 외형적이었을 뿐 진정한 이해에는 이르지 못한 듯싶다. 이제 막 싱글채널 영상이라는 포맷을 인지한 한국 미술계가 채널과 장르를 가로지르며 서사가 교차되는 복합적인 영상 구조를 이해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21) 더욱이 내용적으로도 지극히 섬세하고 내향적인 작업의 결을 섬세히 살피기에 급속한 양적 팽창의 과정에 있던 한국미술계는 너무 여유가 없었고 거칠었다. “버려진 깃털 하나가 꾸는 커다란 날갯짓”(작가)은 광포한 속도로 내달리던 스펙터클의 경쟁에 밀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소통할 기회를 유예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에 파악되지 않는 복합적이고 예민한 작업이 메시지나 개념이 명료하고 외향적인 작업에 비해 소외된 양상은 시간성이 내재되어 감상에 일정 수준 이상의 노력이 필요한 비디오아트의 수용에도 대단히 한국 특수적인 상황이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 비디오아트 신의 형성에는 자신의 주관적 언어를 찾아가려는 제각기 다른 창작자도 존재하지만 취사선택으로 창작의 방향과 열기에 영향을 끼치는 수용자 집단의 경향도 자리한다. 매 시기 한국미술계가 선호한 영상작업과 이에 반응한 작가들의 상호 피드백 루프가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가 곧 한국 비디오아트사의 규명일 것이다.
1)참여작가: 김영진, 박화영, 배병우, 임영선.
2)《In the Eye of The Tiger》라는 제목으로 뉴욕의 엑시트아트(Exit Art The First World)에서 1997년 1차 전시된 후 동명의 타이틀로 1998년 일민미술관에서 2차 전시되었다.
기획: 김유연, 참여작가: 이승택, 임충섭, 육태진, 임영선, 윤동천, 박화영, 김명혜, 홍성민, 김영진, 조숙진.
3)책임기획: 이원곤, 참여작가: 박화영, 심철웅, 공성훈, 박현기, 김해민, 켄 파인골드, 이와이 도시오, 백남준, 김세진, 오경화, 임영균, 이강우, 이주용, 민병헌 등 41명.
4)157명의 응모자 중 권소진, 류지선, 빅지현, 박화영, 안승민, 오진영, 정라미, 정주영, 조성혜, 최소연의 10인이 입선했고, 총 1000만 원의 제작비가 지급되었다.
5)문혜진과 박화영의 인터뷰, 2019년 2월 16일.
6)위의 인터뷰.
7)류병학(엮음), 채미지와 박화영의 인터뷰, "스스로 혁명을 추구하는 세상의 많은 작은 쿠바들에게", 『육감 마사지』. 서울: 나비프레스, 2011, p. 141.
8)위의 인터뷰, p. 140.
9)문혜진과 박화영의 인터뷰.
10)채미지와 박화영의 인터뷰, p.140.
11)위의 인터뷰.
12)위의 인터뷰.
13)가임 여성의 장기체류를 막기 위해 임신하지 않았다는 서명을 요구한 싱가포르 비자국에서의 경험을 온갖 종류의 “~이 아님”을 선언하는 비디오로 패러디하거나, 억압적인 사회에서 버티려면 무언가 지탱할 대상이나 의식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위반하다(violate)’를 비롯해 주체적인 의미가 적힌 단어 - 알약을 계속 먹는 퍼포먼스로 전달한다.
14)〈컬트로보틱스〉 팸플릿, 페이지 없음.
15)발열이 심하고 국내에 취급되지 않는 16mm 영사기의 한계 때문에 필름을 이용한 포맷의 영상 설치는 단 한 번만 선보이고, 이후 국내 전시에서는 비디오 변환 상영물과 깃털을 부착한 16mm 필름 루프 오브제 설치로 대체되어 전시되었다.
16)문혜진과 박화영의 인터뷰.
17)‘드’는 피아노를 청소하며 그 먼지를 털고 닦는 과정을 담고 있고, ‘라’는 방치된 피아노를 발견한 사람의 시점의 이야기며, ‘이’는 분해된 피아노 부속을 차에 싣고 달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리에 대한 것이고, ‘브’는 피아노 안에서 발견한 잡동사니를 단서로 연출한 가상의 이야기다.
18)채미지와 박화영의 인터뷰, p. 145.
19)위의 인터뷰, p. 146.
20)기획: 김세진, 임연숙. 참여작가: 강영민, 강홍구, 김세진, 박은영, 박일현, 박화영, 이동기, 이중재, 홍성민.
21)미술관에서의 영상 설치에 대한 오늘날의 일반적인 통념(형식의 가변성과 감상의 자율성)과 반대로, 상영시간이 긴 비디오아트를 제대로 감상하도록 조형물과는 다른 별도의 설치 형식(아마도 블랙박스)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한 글은 당시 비디오아트에 대한 이해가 이제 막 시작된 단계임을 가리킨다. 김현도, "한국 비디오아트가 가야할 길", 『월간미술』, 1998. 10, p. 80.
미술비평가, 번역가, 미술사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