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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오브제, 죽음의 장소 : 르네상스, 미니멀리즘, 김민애

posted 2019.06.11

이미지 인류학과 동시대 미술 : 이미지와 죽음 ②



이나라 이미지문화연구자


이미지문화연구자 이나라의 연재 「이미지 인류학과 동시대 미술 : 이미지와 죽음」은 발터 벤야민, 조르주 바타이유, 한스 벨팅,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등 이미지 이론가들의 이론을 빌려 죽음이라는 인류학적 주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이미지의 역사와 현재를 살피고, 인류학적 이미지, 예술사의 이미지, 영상을 포함한 동시대 국내외의 조형 예술작품을 선별하여 다룬다. 이를 통해 특정한 시대나 영토에 국한되지 않는 이미지의 이주를 일별해보고자 한다.


김민애, 〈기러기〉(부분), 2018. 폴리스타이렌과 고무에 페인트, 사운드, 무빙 라이트, 300×4,000×3cm. 사운드 디자인 Woo Morceau J., ⓒ에르메스 재단, 사진ⓒ 남기용.

1. 이미지, 물신, 석관 : 르네상스의 분열적 심성


1478년 피렌체의 부유한 은행가 프란체스코 사세티(Francesco Sassetti, 1421~1490)는 산타 트리니타 대성당에 돈을 지불하고 예배당을 얻는다. 이제 사세티는 아내와 함께 이 예배당 벽에 묻힐 것이다. 이에 앞서 사세티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에게 예배당을 장식할 벽화를 주문한다. 예배당 측면에는 사세티 부부의 관이 각각 들어서고, 정면에는 세 개의 벽화가 세 층위로 그려졌다. 제일 위로 프란체스카 수도회 소속 사제들이 교황에게 회칙을 승인받는 벽화, 그 아래 한 아이의 부활의 기적을 다룬 벽화, 제일 아래쪽에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목동을 묘사한 드물지 않은 주제의 종교화가 차례로 묘사되었다. 주문자인 사세티 부부는 기를란다요의 벽화 하단 양측에 신실하게 기도하는 모습으로 또렷이 묘사되고 있다.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는 당시의 문헌 자료와 도상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여 프란체스카 수도회를 묘사한 상단 벽화 속의 인물들이 사세티와 당시 피렌체 유력 가문 구성원(로렌초 메디치와 그의 아이들, 이들과 교류하였던 시인 폴리치아노 등)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종교화의 비용을 치루는 주문자와 주문자 가족의 초상이 종교화 속에 등장하는 것은 당시 회화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데 아비 바르부르크는 기를란다요의 벽화가 플랑드르 화가들의 빼어난 관찰력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나 당시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여 주변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아비 바르부르크에게 기를란다요의 벽화 속 인물로 등장하는 주문자의 형상은, 신비한 힘을 얻기 위해 자신의 밀랍인형을 신성한 장소에 남겼던 당시 피렌체의 ‘원시적’인 이교적 풍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유력인사와 외지인들은 자신의 모습을 본뜬 밀랍인형을 만들어 피렌체의 산타 안눈치아타 교회에 봉헌했다. 이들의 밀랍인형이 교회를 가득 채웠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의 개념이 정초되는 시기로 간주되었던 르네상스 시기에도 시각적 형상을 추동하는 주요한 원리는 현세적인 물신숭배의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교황 앞에서 수도회 회칙 승인을 요청하고 있는 프란체스카 수도승들이 벽화의 가운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앞쪽을 차지하고 있는 건축적 구조와 인물들이 벽화 내부의 의미 공간을 순식간에 기묘하게 변주한다. 우리가 실상 볼 수 있는 것은 거대한 구멍이다. 그 구멍 아래로는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는 계단이 있을 것 같다. 구멍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바르부르크는 이들이 메디치 가문의 아이들이라고 주장했다)이 계단의 존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로렌초 메디치와 사세티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오른쪽 귀퉁이에서 계단을 오르는 이들에게 분분한 해석을 남기는 손짓을 하고 있다. 가운데 층위의 벽화가 부활한 아이의 기적을 묘사하고 있으니 계단을 오르는 아이들은 마치 부활하여 지상으로 오르고 있는 것처럼 해석되기 쉽다. 이곳에 자신의 묘를 남길 유한한 인간 사세티는 신앙심을 드러내기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방책을 마련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비 바르부르크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연결되는 듯 보이는 계단 장면이 사실상 벽화 전체의 “예술적, 정신적 중심”이라고 지적한다. 이곳에서 “이토록 많은 침묵하는 생명을 구제하고 목소리를 내도록 하고 싶다는 바람이 솟구친다.”


인류는 세계를 마술적으로 재현하던 단계를 벗어나 이성적으로 세계를 개념화하는 방식으로 진보한다는 역사학의 가정을 대체로 용인한다. 이미지의 역사를 고려할 때에도 이러한 역사학의 가정은 여지없이 힘을 발휘한다. 고답적 이미지가 부재하는 대상을 대체하고 붙들어두기 위한 염원을 실천하는 것이었다면, 이성의 빛과 함께 이미지는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는 언어 내지 예술 속에서 제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상상하게 된다. 아비 바르부르크는 플랑드르 미술의 영향을 받은 피렌체의 초기 르네상스 회화를 살피면서 르네상스 인문정신과 예술 개념이 정초되는 과정을 확인하기보다 오히려 같은 시기 문화 내부의 모순과 분열을 강조했다. 특히 다나카 준은 아비 바르부르크가 사세티 예배당에서 인간에게 불안과 분열을 야기하는 이미지의 물신적 성격과 분신으로서의 성격을 발견했지만 바로 그 불안으로 인해 이 문제에 대한 사유를 스스로 중단한다고 지적한다. 사세티 예배당에서 이미지의 물신성을 강하게 환기하는 것은 밀랍인형을 연상시키는 벽화 속 사세티의 형상뿐만이 아니다. 중앙부 제일 아래 단의 벽화 속 목동의 경배를 받는 아기 예수 뒤에는 마구간의 초라한 말구유 대신 석관(石棺)이 묘사되어 있다. 부활한 아이 역시 마치 관 위에 앉아있는 것 같다. 예배당 측면의 영면에 드는 성 프란체스카의 자리 역시 침상이자 관을 연상하게 한다. 그래서 벽화 속 주문자의 형상뿐 아니라 관의 형상 역시 탄생, 죽음, 부활의 장면마다 등장하여 공명하며 불안을 야기한다. 관, 석관(石棺), 묘석은 분신으로서의 이미지, 물질성의 이미지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던 오브제들이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The Confirmation of the Franciscan Rule〉, 1449. Santa Trinità, Florence.

2. 육신의 와해와 육신의 장소 : 분신 이미지와 기억 이미지


묘지, 묘, 관에 무엇이 있는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한국의 묘지에는 완만한 곡선의 봉분(封墳)과 크건 작건 우뚝 솟은 채 망자의 신원과 망자를 묻은 이들의 신원을 적어둔 비석이 있다. 망자에게 올릴 술잔과 음식 그릇을 놓을 상도 빠지지 않는다. 봉분과 비석, 상은 바깥세상, 산 자의 세상에 속한다. 바깥에는 무엇인가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반면 봉분 아래, 관에 담겨 땅 속에 매장되었던 시신은 아마도 더는 없을 것이다. 망자의 사체는 자연의 질서와 시간에 따라 흙의 세계 속에 분해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묘는 없음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미지, 역사적이거나 동시대적 매체, 관객이라는 세 가지의 항(이미지와 시각적 장치, 우리의 살아있는 신체라고 바꾸어 쓸 수도 있겠다)의 성좌 속에서 이미지의 인류학을 탐구하는 미술사학자 한스 벨팅(Hans Belting)은 묘지와 묘란 죽음 이후 ‘남아있는’ 사체의 자리, 보존의 자리라기보다 죽음 이후 ‘부재’와 관련된 자리라고 주장한다. 물론 묘는 매장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부차적인 일이다. 묘지는 살아있는 이들이 자기 고유의 장소라 할 육체를 ‘잃은’ 사후의 인간에게 마련하는 허구적인 장소, “고착의 장소 이미지”다. 고착이 요구되는 것은 사라짐 탓이다. 그러나 산자가 죽은 자와 자신을 구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산자들은 죽은 자와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애도하며 “죽음을 상상적으로 재생산하는” 장례 의식을 치른다. 장례 과정은 생물학적이고 개인적인 죽음을 상징적이고 공적인 죽음으로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묘지는 단지 휴식의 장소가 아니라 행위의 장소다. 우리는 이 장소에서 죽음의 시간을 다시 발명한다. 매장하기는 죽음을 상상적으로 재생산하는 하나의 제도다. 죽음이라는 ‘파국’ 은 어느 순간 통제로 교체된다. (어떤 문화에서 이 순간은 실제의 죽음 이후 몇 달 내지 몇 해가 되기도 한다.) 공동체는 주권적 행위를 통해 공동체를 구성하는 질서를 다시 세운다. 죽음은 장례의식을 거치며 자신의 장소를 사회적 환경 안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고답적 사회에서는 죽음을 반복하는 것이 일종의 고전적 “통과 의례”였다. 마찬가지로 남성 사회의 승낙에 의해 탄생은 재생산되었다. 두 경우 모두 ‘생물학적 사건’이 ‘사회적 사건’으로 대체된다. 죽음에 관한 본유의 관념, 그리고 “새로운 탄생”을 요청받는 “낡은 인간”이라는 관념이 보여주듯 기독교의 세례 의식 안에 그러한 통과 의례는 희미하게 남아있다.” -한스 벨팅, 『이미지의 인류학을 위하여(An Anthropology of Images)』


『일리아드(Illiad)』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무덤가에 세웠던 비석에 대한 에피소드를 전한다. 수직으로 솟은 비석들은 육체의 소멸과 훼손이 진행되는 불확실한 공간인 묘에 정착과 고착의 성격을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비석이 단단한 물질성과 수직성으로 고착의 성격을 부여한다면 석관은 마찬가지의 물질성과 용기라는 속성으로 고착의 성격을 부여할 것이다. 석관과 비석, 묘라는 장소는 죽은 자의 ‘육신’을 죽은 자의 장소의 ‘이미지’로 바꾸어 준다. 그러므로 이 장소의 이미지는 죽음을 치환하는 일종의 분신 이미지다. 동시에 이 장소는 묘를 방문한 산자들에게 죽은 이에 대한 기억 이미지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죽음, 사라짐, 부재와 관계되는 이미지의 수수께끼는 여기에서 연원한다. 철학자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도 죽음의 이미지가 부재와 맺고 있는 역설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 이로부터 이미지 일반에 대한 형이상학을 제시한 철학자다. 장례식 등 죽음을 둘러싼 의식, 장례용 마스크나 깃발 등 의식에 필요한 도구, 관과 비석 등 매장지의 구성품, 망자의 초상 등이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일 것이다. 이 이미지는 있지 않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여기에 있다. 이미지는 이미지 안에 있지 않으나 다만 ‘나타나는’ 것을 조명하는 것이다. 이미지란 산자들이 부재를 메우기 위해 요청하는 무엇이다. 석관과 비석은 불안과 동요를 메우기 위한 분신이며 상징적 신체들이다.


3. 가짜 주인공과 특정한 오브제 : 김민애의 〈기러기〉와 미니멀리즘의 오브제


현대의 미술관으로 돌아가보자. 하얀 색 벽 위에 벽과 같은 색, 도합 9개의 모종의 모양이 3cm 높이로 벽에 고착되어 있다.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시종 들리고 무빙 라이트가 빙그르르 돌며 전시장 삼면 벽 위를 차례로 비춘다. 구를 방도는 없으나 구를 잠재성은 가지고 있는 바퀴를 구태여 미술관 실내 구조물의 연장이자 이탈인 스틸 기둥 아래 달아둔 바 있었던 작가는 (〈지붕발끝〉, 2011) 상업 시설 탓에 바깥 도산공원 근방보다 가까스로 조금 조용한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장에 날 방도도, 날 가능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새의 윤곽을 설치했다. (〈기러기〉, 2018) “미술을 담는 공간이 거꾸로 미술을 규정하는 틀로 둔갑하는 지점”에 대해 묻기 위해 별다른 의미 없이 일상 공간에서 볼 수 있는 닭, 오리, 비둘기 같은 새의 간단한 윤곽을 가짜 주인공 삼아 배치하고 공간을 텅 비웠다는 김민애는 이미 이전에도 오브제의 용도뿐 아니라 미술관이라는 ‘장소’를 의식하고 활용하는 작업을 진행했었다. 다만 이번 전시는 보다 직관적이고 감정적 결과물이라고 스스로 밝혔던 것처럼, 가짜 주인공으로 초대된 윤곽들의 지시체(새)가 ‘대충’ 환기하는 감각과 감정, 기억이 너무 구체적인 탓에 가짜 주인공들은 곤란하게도 쉽게 가짜 진짜 주인공 노릇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본래 가짜 주인공은 진지하게 고려될 때에만 가짜일 수 있다. 청둥오리와 비둘기, 이름만 남은 기러기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자. 이 새들은 평범하고, 이 새들은 여기 부동의 자세로 있다. 평범하다고는 하나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모자람을 가졌다기보다 색조 없이 윤곽으로 일반화되어 있다. 조류는 대체로 인간의 지각이 미칠 수 없는 거리에서 활동하므로 윤곽을 제외하면 먼 거리에서 조류를 식별할 수 있는 감각적 소여는 별반 없다. 그래서 사냥꾼은 조류의 윤곽으로 조류를 식별한다. 이런 면에서, 발자국과 같은 지표적 기호를 남기는 지상의 야생 동물보다 조류는 추상적인 동물이다. 윤곽이란 다른 유(類)의 생명체보다 조류와 관련될 때보다 본질적인 요소이기에 김민애의 새들은 실루엣으로 남아있어도 가짜가 되는 일에 실패한다. 김민애가 설치한 새를 보고 새소리를 들으며 가짜의 감정을 경험하는 편보다 부동의 새가 새겨진 벽을 보며 생명 없음, 죽음을 상상하는 편이 더 용이해 보인다. 높이 있어야 할 새가 지하의 아뜰리에에 붙박이로 남아있으니 전시장 벽면은 새들의 묘이거나 석관의 표면으로 상상될 수 있겠다. 〈기러기〉는 새를 이곳에 묻고 묘석을 세움으로서 미술을 ‘매장’하는 미술관 제도, 장소, 특히 (새가 그려진) 벽에 대한 고민을 피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김민애가 별 다른 의미가 없는 가짜 주인공이라 칭한 새 모양의 부조 또는 부조가 설치된 벽면은 미니멀리스트들이 특정한 오브제라 칭했던 입방체를 생각나게 한다. 가짜 주인공이 되는 일에 실패하는 일 역시 그렇다. 미니멀리스트가 ‘특정한 오브제’라 칭했던 바에 대해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 Didi-Huberman)은 오히려 불길하고 역설적인 오브제를 보았었다. 디디 위베르만은 추상표현주의라는 50년대 미국 미술의 지배적 경향을 부정하며 오브제의 일의적 의미를 확정하려고 했던 60년대 미니멀리스트의 주장을 그 자체로 뒤집는 한편 미니멀리즘 오브제, 전시 양태의 사물성과 즉물주의를 비난하고 이들의 작업이 결국 연극적이며 현전의 논리로 귀결된다는 프리드(M. Fried)의 주장 역시 기각한 바 있다. 미니멀리스트들은 ‘이미지로서 우리 앞에 무엇도 표상하지 않는’ 자명한 오브제, 관계를 맺지 않고 분리되어 있는 오브제들, 손상되지 않는 오브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이들은 또한 오브제에서 ‘모든 인간적 형태의 사유’를 제거하고자 했다. 미니멀리즘을 저속한 것으로 간주했던 프리드 역시 인간형태주의를 배척한다. 반면 디디 위베르만은 스텔라(F.Stella), 저드(D. Judd), 모리스(R. Morris)의 글과 작품에서 궁극적으로 거의 상호주관적 주체, 유사주체로 작동하는 변수로서의 오브제, 시간에 얽매인 오브제를 발견한다. 그는 체적 자체라 할 미니멀리즘의 입체 오브제의 공동(空洞, évidement) 상태에 주목하면서 이들이 객관적이고 특정하기보다 유일하고 낯설다고(unique et étrange, sonderbar) 설명했다. (디디 위베르만은 이 표현을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에 대한 설명에서 빌어온다.) 디디 위베르만이 설정하는 미니멀리즘의 오브제와 주체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기계적 행위로서의 ‘보는’ 일이 아니라 독특한 신체적 행위로서의 보는 일, 상실, 분열, 징후와 긴밀히 얽혀있는 행위로서의 ‘보는’ 일을 사유하게 된다. 미니멀리즘을 변증법적 응시의 문제로 전환하는 디디 위베르만의 해석은 매우 파격적이다. 더구나 변증법적 이미지인 한에서 미니멀리즘의 오브제는 죽음과 긴밀해지는데, 이 역시 잠재성을 소거하려했던 미니멀리스트들의 의도와 정면에서 배치된다.


디디 위베르만은 미니멀리즘을 본격적으로 언급하기에 앞서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소설 『율리시스(Ulysses)』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죽음과 (이 글 앞에서 한스 벨팅의 인류학적 이미지론을 거론하며 언급한 문제이기도 한) 석관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 두 상황은 보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분열, 쪼개짐, 곧 상실의 지각을 강요하는 두 가지의 상황이다. 숨이 끊어져가는 어머니라는 대상을 ‘보는’ 경험과 죽은 자의 육신이 결국 사라지고 빈 채로 남은 거대한 묘석을 바라보는 경험이 있다. 첫 번째 경우 숨이 끊어져 우리 앞에서 사라지는 동시에 되돌아와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어떤 대상과 우리는 결부된다. 두 번째 경우 여전히 살아있는 내가, 생명의 증거로서 신체를 지니고 있는 내가 묘지의 텅 빈 석관과 결부된다. 디디 위베르만은 이 결부된 경험을 어떤 예술작품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과 등치시킨다. 그는 결국 미니멀리즘의 오브제를 석관의 견지에서 다루고 싶어 했던 것이라 할 것이다.


디디 위베르만이 보기에 미니멀리즘 오브제, 가령 로버트 모리스의 오브제는 일그러질 수 있는 것, 쓰러질 수 있는 것, 사라지는 것이다. 이들은 특정한 오브제라기보다 오히려 일종의 유사 존재이고 모방의 원리를 넘어서는 객체로 보인다. 사라지되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 오브제는 주체에게 불안을 야기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심지어 이미지를 해방한다. 이는 단지 미니멀리즘의 오브제가 아니라 정신분석학자와 시인, 예술가들이 고안하고 우리에게 바라보도록 하는 오브제 역시 같은 종류의 것들이다. 프로이트(S. Freud)가 인용했던 ‘포르트-다(fort-da)’ 놀이의 실패 뭉치, 엄마를 잃은 아이들이 침대 위에서 침대보를 가지고 놀이할 때의 침대보, 보들레르가 인용하는 아이들의 장난감과 같은 오브제, 토니 스미스(T. Smith)의 미니멀리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기하학적 체적 등이 그러하다. 이에 따라 예술의 오브제는 비-예술의 오브제, 인류학적 오브제와 같은 증상을 증언하고 실험한다. 기하학적 오브제와 인간형태가 맺고 있는 우회적 근친성을 변증법적으로 묘파하는 저작에서 디디 위베르만은 특히 토니 스미스의 작업의 계기들을 꼼꼼히 분석한 바 있다.


김민애, 《기러기》 전시 전경, 아뜰리에 에르메스, 2018. ⓒ에르메스 재단, 사진ⓒ 남기용.

4. 토니 스미스의 오브제, 김민애의 장소


〈블랙 박스(Black Box)〉, 〈다이(Die)〉 등으로 뒤늦게 미술 작가 대열에 동참한 토니 스미스는 자신의 오브제 구성에 영향을 미친 어떤 밤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두운 밤이었고 도로 양쪽에는 조명도 신호체계도 없었다. 하얀 중앙선이나 안전망, 아무 것도 없이 오직 아스팔트뿐이었다. 아스팔트가 저 멀리 언덕들에 둘러싸인 평야의 풍경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공장 굴뚝, 매연, 철탑, 색색의 불빛이 풍경에 구두점을 찍었다. 이 여정은 계시하는 경험이었다. 도로 및 풍경의 대부분은 인위적인 것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예술품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다른 한편, 나는 예술작품이 내게 결코 경험하게 한 적이 없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무엇보다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거기에, 전혀 예술적 표현 양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의 현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로의 경험은 분명 규정된 무엇을 구성하지만 이것은 사회적으로 인식된 무엇이 아니었다. 속으로 나는 생각했다 : 분명 예술의 목적이란 이런 것이야.”


토니 스미스는 밤 시간을 마치 아우라처럼 경험한다. (김민애는 “손전등에 의지해 칠흑 같은 밤길을 걷는 일” 동안 경험한 오인을 바탕으로 〈모래성〉(2011)을 제작했다. 김민애의 경험 역시 아우라의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토니 스미스가 검은 체적 앞에 혹은 한 밤에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 (토니 스미스의 조각) 앞에 잠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가 만든 밤과 같이 검고 내적 윤곽을 갖지 않은 조각물은 우리에게 다가설 수 없는 거리의 경험을 제공한다. 우리는 숲 속에서 길을 잃은 듯 토니 스미스의 조각의 가장 단순한 “체적성”에 인도되었기 때문에 이 조각물의 평면, 절단, 표면들의 놀이를 요령 있게 짚어낼 수 없다.


“체적성이 여기에 있다. 우리의 발 아래, 우리 주변 가까이, 꼭 만질 수 있듯 있다. 그런데 체적성의 유일한 ‘어둠’이 상호적 멀어짐, 간격두기, 고독의 측정할 수 없는 요소를 도입한다. 거기에 더하여 마치 밤이 토니 스미스를 위치시켰던 것처럼 작품은 우리를 거의 고고학적인 미적 기억의 “상징의 숲” 속에 위치시킨다. 상징의 숲은 자신의 조각물로 그 박탈을 위한 장소를 만들 뿐 아니라 기억을 위한 기념물을 만든다. 따라서 ‘이 중거리’는 숱한 수준으로, 가상적으로 비워진 그 체적 속에서, 시각적으로 치밀해진 그 텅 빔 속에서 작업 중이다.”-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우리가 보는 것, 우리를 응시하는 것(Ce que nous voyons, ce qui nous regarde)』


마이클 프리드는 관객이 땅바닥이나 벽에 움직임 없이 존재하고 있는 미니멀리즘 오브제와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연극적 요소라 지칭하며 비난한다. 미니멀리즘을 비판했지만 어쨌거나 프리드는 미니멀리즘 조각이 관객과 거리를 두는 동시에 관객을 침범하는 현상을 간파했다. 로버트 모리스의 우뚝 서 있거나 갑자기 쓰러지는 기하학 입체 기둥, 토니 스미스의 조각은 (외양의 단조로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닮았다. 디디 위베르만은 ‘선조 유사성(arrière-ressemblanc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무덤처럼 침묵하고, 무덤 또는 무덤에 들어갈 인간과 같은 치수(6피트, 디디 위베르만은 칼 안드레, 솔 르윗 등의 작품에서 이와 같은 인간적 ‘치수들’이 빈번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지적했다)를 가진 토니 스미스의 밀폐된 상자는 우리에게 기이한 친밀함(unheimliche, uncanny)을 야기한다. 미니멀리스트 오브제의 선조 유사성은 우리의 불안을 야기하는 인류학적 닮음이 아닌가.


디디 위베르만은 토니 스미스의 밤의 경험 뿐 아니라 토니 스미스의 조각들이 환기하는 죽음의 요소들을 하나하나 거론하며 토니 스미스의 입체물에 깃들어 있는 인간 형태의 불안을 해명해낸다. 그의 조각은 인간이 경험하는 텅 빈 공간, 텅 빈 입체의 가장 보편적 사례인 석관과 다름없다. 보통 직육면체와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고, 반드시 우리의 손길을 거친, 거대한 돌덩어리로서의 석관은 우리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상상, 우리의 죽음 이후에 찾아 올 우리 몸의 상실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인류학적 경험이 석관의 경험에 대한 보편성과 실재성을 입증한다. 석관 내의 텅 빈 공간은 인공물의 세계나 시뮬라크르의 세계와 하등의 관련을 맺지 않는다. 혹자는 석관은 석관일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믿음의 황홀경에 빠진 인간은 석관 너머의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며 석관에서 썩어가는 살을 지우고 숭고하고 정제된 신체의 이미지로 석관을 채우려 할 것이다. 김민애는 똥을 싸서 분쟁을 일으키고 (작가는 비둘기 똥으로 이웃과 싸운 일화를 여러 번 언급한다), 숭상받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새의 의미와 살을 스스로 지우고 이들을 무의미한 가짜 주인공이라 칭했다. 작가는 동시에 교회 목사를 비추는 조명을 가져와 〈기러기〉 벽면의 새를/ 새가 있는 벽면을 비추는 무빙 라이트로 사용했다. 교회의 불빛은 3cm의 부조가 여전히 삭제하고 구제해야 할 육체임을 역설적으로 입증한다. 작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새들은 (혹은 벽들은) 그곳에 부재하지만 나타나고 있다. 벽만큼, 무덤만큼, 석관만큼 흥미로운 장소가 또 있겠는가?


※ 이 기사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을 받아 미술세계 2018년 12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미술세계와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이나라

이나라는 이미지문화연구자로, 파리 팡테옹 대학에서 동시대 영화가 물질성과 흐름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화, 무빙 이미지에 대한 동시대의 미학 이론을 연구하고, 영화사, 인류학적 이미지 및 동시대 이미지 작업에 대한 비평적 글쓰기를 시도한다. 현재 동의대 영화 트랜스미디어 연구소 전임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