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나라 이미지문화연구자
이미지문화연구자 이나라의 연재 「이미지 인류학과 동시대 미술 : 이미지와 죽음」은 발터 벤야민, 조르주 바타이유, 한스 벨팅,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등 이미지 이론가들의 이론을 빌려 죽음이라는 인류학적 주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이미지의 역사와 현재를 살피고, 인류학적 이미지, 예술사의 이미지, 영상을 포함한 동시대 국내외의 조형 예술작품을 선별하여 다룬다. 이를 통해 특정한 시대나 영토에 국한되지 않는 이미지의 이주를 일별해보고자 한다.
데릭 저먼(Derek Jarman, 1942~1994)이라는 인물과 오준수(1964~1998)라는 인물이 있다. 두 사람은 1990년 중반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망하기 전 두 사람은 모두 게이 인권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2018년이 저물어가는 무렵 원앤제이갤러리에서 소개된 이강승의 전시 《Garden》은 게이 인권과 에이즈라는 두 가지 공통점을 가진 두 인물의 삶을 함께 기린다. 먼저 한국 동성애자 인권 운동에 힘썼던 오준수의 삶이 있다. 오준수가 남긴 일기, 편지, 가명으로 펴낸 에이즈 환자의 수기가 전시된다. 개인적인 고독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는 글과 오준수를 기리는 지인들의 글은 아카이브의 형태로 전시되기도 하고, 작가의 드로잉, 설치, 영상 작업을 통해 소개되기도 한다. 그리고 데릭 저먼의 삶이 있다. 데릭 저먼은 전위적이고 전복적인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이지만 전시는 저먼이 만들었던 영상 클립을 소개하지 않는다. 이강승은 데릭 저먼이 가꾸었던 정원을 소개한다. 1986년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안 데릭 저먼은 1994년 세상을 뜰 때까지 영국 켄트 지방의 외딴 던지니스 해변가(Dungeness)에 기거하며 ‘프로스펙트 코티지(prospect cottage)’라 이름붙인 작은 집과 정원을 가꾸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데릭 저먼의 정원은 병든 자가 찾아들었던 은거의 땅이 아니다. 데릭 저먼이 그곳에서 찍었던 영화 〈The Garden〉에서 확인할 수 있듯 던지니스 해변가 프로 스펙트 코티지 바로 옆에는 핵발전소가 있었고, 바람이 거세었으며 자갈 가득한 토지는 결코 비옥하지 않았다. 비옥한 토지 대신 자갈 가득한 곳에서 저먼은 정원을 가꿨다. 헤새욘(D.G.Hessayon) 같은 이가 쓴 근대적 정원 가꾸기 매뉴얼을 조롱하면서 저먼은 울타리 없는 정원, 낯선 꽃과 뜻밖의 꽃이 함께 어울리는 장소를 ‘살았다’. 그곳은 선사(先史)적인 시간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무화과, 도마뱀 등의 사물에서 선사의 시간을 읽어냈던 시인 프랑시스 퐁주(Francis Ponge)는 자갈 또는 조약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 조약돌은 그의 과거의 형태 더미와 미래의 형태 더미 위에 쉬고 있다. (…) 그러나 바다가 일상적으로 쫓아보내는 이 장소들은 공인 받기에 가장 부적합한 장소들이다. 그 인구들은 그 지역만 알고 있는 가운데 그곳에 산다. 각자는 그곳에서 잊혔다고 여긴다. 왜냐면 그는 번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를 고려해주기에는 너무 맹목적인 힘들만을 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마지막 조금 남은 이 대상들은, 마른 풀들, 해초들, 낡은 병뚜껑들, 인간의 생필품의 온갖 쓰레기들로 인해 손상된 고독의 한복판에서 무질서하게 버려진 채, 대기의 엄청난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꼼짝 않고 있으면서, 맹목적으로 숨을 헐떡이며 모든 이성을 저버리고 모든 것을 쫓아가는 이 힘들의 광경에 말없이 참관하고 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바로 그 지역 어느 곳엔가 남아 있다.(…)” - 프랑시스 퐁주, 「조약돌」
이성애적 규범, 산업사회, 상품 물신주의, 계급적 억압을 조롱했던 병든 자는 척박한 땅을 찾아들고 그곳에 정원을 가꾸며 이를 낙원이라 부른다. (“낙원은 정원에 출몰한다. 어떤 정원은 낙원이다.”) 낙원은 아담과 이브가 살던 노동이 없고 수치가 없는 공간이 아니라 노동의 공간이며 정상성에 대한 투쟁으로 평화를 갈구하는 장소다. 작은 돌들은 이 시간과 장소를 증명하는 질료이고 형식이다. 이강승은 드로잉, 설치, 영상작업을 사용하여 정원의 흙과 식물, 정원의 질료들을 전시장에 가져온다. 흙, 자갈, 흙으로 만든 조각이 바탕을 이루고 그곳에 자라던 식물이 바탕 위에 무늬를 남긴다. 이 과정에서 오준수의 몸, 기억, 장소가 데릭 저먼의 몸, 기억, 장소와 겹쳐진다. 우리는 오준수가 드나들던 종로의 ‘낙원’을 익히 알고 있다. ‘낙원상가’라는 남루한 장소, 이강승은 데릭 저먼의 정원과 오준수의 낙원-정원을 겹친다. 작가는 데릭 저먼이 흙을 채집하여 만들었던 조각을 다시 만드는데 이때 오준수의 장소로 지명된 남산의 흙이 재료로 참여한다. 흑연으로 양피지 위에 데릭 저먼의 정원에 남겨진 오브제, 흔적, 광경을 드로잉하고 이를 갈라 남산에 묻는다. 저먼의 흔적이 오준수의 땅에 참여한다. (자르고 묻는 과정을 기록한 영상은 전시장 한쪽에서 상영된다.) 저먼이 뿌렸던 씨앗은 자라 잎이 되고 꽃을 피웠을 것이다. 이강승은 식물을 니시진 금사로 삼베 위에 수놓는다. 금사 수가 놓인 삼베 천은 〈무제(Garden)〉이고, 〈무제(해먹)〉이며, 〈무제(테이블)〉의 자리가 된다. 이강승은 오준수가 참여했던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가 펴낸 잡지의 표지 속 두 인물의 형상도 작은 사이즈의 삼베 위에 금사로 수놓았다. 저먼의 초상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것과 달리 오준수의 얼굴은 드로잉으로 소개된다. 그래서 오준수가 직접 남기거나 참여한 글들은 저먼이 심었던 씨앗과 같은 것으로 상상되고, 전시장 안쪽 정면에 전시된 두 장의 거대한 자갈 드로잉(〈프로 스펙트 코티지의 자갈〉)이 데릭 저먼의 얼굴과 같은 것으로 상상된다. 정원을 구성하는 두 가지의 계열, 연약하고 단단한 것의 두 가지 계열이 우선 있다. 씨앗과 식물, 자수의 흔적, 글자라는 이질적인 것들의 등가성이 연약한 계열을 만들고, 돌과 얼굴이라는 이질적인 것들의 등가성이 단단함의 계열을 이룬다.
지난 호에서 필자는 미술사가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1866~1929)가 르네상스 화가 기를란다요(Domenic Ghirlandio)가 그린 피렌체 성당 벽화 속에서 봉헌물(Ex-voto)의 전통을 발견했다고 기술한 바 있다. 봉헌물이란 신에게 소원하는 바를 이루어달라는 호소로서 바쳤던 사물, 기도를 들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교회 등 성스러운 장소에 바치는 사물이다. 르네상스 시기 피렌체 미술의 도상적 요소를 해명하기 위해 사회적 맥락을 분석해나갔던 바르부르크는 뜻밖에도 회화의 형상이 피렌체 산티시마 안눈치아타(Santissima Annunziata) 성당을 가득 채웠던 봉헌물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를란다요가 활동하던 시절 피렌체와 피렌체 바깥의 유력 인사들은 자신의 크기와 모습을 본뜬 조형물을 만들어 교회에 봉헌하는 유행을 따랐다. 당시에는 이 봉헌물들이 그 교회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이 조형물들은 17세기와 18세기가 되면 모두 파괴되어 바르부르크가 살았던 시대에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바르부르크는 기를란다요가 그린 벽화 속의 어떤 형상이 봉헌물 이미지와 조형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봉헌물 이미지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나 형식을 배태한 미학적 의도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종교적 의도, 더 넓게는 인류학적 의도, 기능과의 관련 속에서 그러한 봉헌물의 형식이 출현하고 존속되어왔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즉 어떤 ‘정신적 과정에 의해’ 오브제가 봉헌의 오브제로 ‘구성되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소원을 비는 용도로 사용되는 오브제 몇 가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또는 봉헌물과 같은 기능을 하는 오브제를 필요로 하는 어떤 행위들을 떠올릴 수 있다. 예를 들어 가톨릭 신도들이 봉헌하는 초, 불교 신도들이 사찰에 올리는 쌀과 같은 오브제의 기원은 봉헌물일 것이다. 특히 질병이나 사고에서 신자들을 보호한다고 알려진 성인의 이름을 딴 이탈리아의 가톨릭 성당 내의 예배당 입구에는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서 몰려든 신도들이 소원을 새기거나 옛 봉헌물에 새겼던 문구를 새긴 금속판이나 간단한 오브제들이 넘쳐나듯 쌓인다. 지난날에는 교회 등의 성소(聖所)에서 후광(aura)을 발견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후광을 발견하는 장소는 스크린 속이나 무대 속이다. 아니면 대단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도 그 장소에 합류할 수 있다. 그 장소 안에 서 있는 스타들이야말로 아우라의 담지체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스타들은 무대 위에서나 사이버 공간에서 팬들에게 스스로 다가오기도 한다.) 멀리 있음, 거리를 현현할 때에야 아우라를 지닌 스타로 남는 이들. 살아있는 스타에게 쏟아지던 선물은 세상을 떠난 스타에게도 형식이 바뀌어 계속된다. 스타였던 이들이 잠든 묘석 근방에는 메시지와 꽃다발, 팬들이 자신의 신체 가까이 간직 했던 작은 오브제들이 끊임없이 쌓인다. 이 오브제들은 스타의 신성함을 간직하고 스타의 효력을 믿는 팬들의 소망과 욕망을 담고 있는 현대의 봉헌물이다.
다시 옛 봉헌물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도처에 산재해 있던 봉헌물들은 보통 고귀함과 거리가 먼 원시적이고 통속적인 오브제들이었고 신체와 관련된 오브제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속적이고 생체적인 봉헌물의 전통은 기독교 문화가 유럽의 정신문화를 장악하기 전, 이교도 무리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에트루리아, 로마 시대의 봉헌물이나 오늘날 키프로스, 바비에르, 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 등의 기독교 성지에서 발견되는 봉헌물들이 거의 같은 크기와 재료, 제조 기술, 형태화 방식을 가지고 있다. 미술사학자들이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봉헌물 오브제의 특징에 주목했던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이 오브제들이 “미적인 유치함, 진부하고 천편일률적인 성격을 지닌 탓에 모든 ‘위대한’ 양식의 역사에서 동떨어진 자리를 배정”받았다고 지적했다. 봉헌물 오브제의 생체적 천박함은 아카데미와 규범적 비평이 낳은 예술의 미적 모델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신도들은 평범한 오브제 중 아무거나 봉헌했던 것이 아니다. 신도들은 극단적인 사건이나 어떤 증상에 저촉되었던 오브제를 주로 봉헌했다. 불행한 경험이나 기적과 관련된 오브제와 같은 것들이 선택되었다. 다리를 다쳤던 이가 다리 부상에서 치유되었다면 그는 부상 당했을 때 사용했던 목발이나 지팡이같은 오브제를 봉헌물로 바쳤을 것이다. 목발 이외에도 상해를 입은 신체에 사용되었던 원시적인 보철물들은 곧장 봉헌의 오브제가 되었다. 부상당한 이를 들어 올렸던 들것, 앉은뱅이가 앉아있었던 판자 조각 같은 것도 목격할 수 있다. 망자가 입었던 옷도 봉헌된다. 화살처럼 누군가의 신체에 직접 상해를 입혔던 도구들도 봉헌물이 되었다. 신체가 경험하는 시련의 흔적, 후유증으로서의 오브제는 봉헌의 오브제로 구성될 수 있다. 혹은 스타와의 각별한 추억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스타에게 선물하는 팬들처럼 봉헌하는 이들은 자신에게 각별한 물건을 신에게 바쳤다. 중세 시대 신도들은 이러한 정신적 논리에 따라 빵이나 살아있는 짐승, 귀중품, 심지어 아이들을 교회에 바쳤다.
봉헌물 이미지에 각별한 관심을 표하는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바르부르크의 주장뿐 아니라 ‘밀랍’ 초상의 역사에 대한 세기말 비엔나 미술사가 슐로서(Julius von Schlosser, 1866~1938)의 저작이 지닌 중요성을 강조한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밀랍을 조형 재료로 사용했던 조각가 메다르도 로소(Medardo Rosso, 1858~1928)의 작품에 큰 관심을 표하기도 했다.) 슐로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무의식을 호명하고 필름 위에 현실을 전사하는 사진의 기술과 성과가 실재의 재현과 모방이 지녔던 가치를 재고하도록 하였던 시대의 미술사가다. (『밀랍 초상의 역사』는 1911년 출간되었다.) 한편으로 슐로서는 미술관에 보존되지 않는 밀랍 조형물들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고, 다른 한편으로 밀랍으로 만든 봉헌물에 관심을 가졌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중세 시대 봉헌 물의 압도적 다수가 밀랍 조형물이었다고 한다. 슐로서는 대리석, 석재, 목재, 상아 조각 등을 소장하고 기술하는 미술관과 미술사가 다루지 않는 밀랍 조형물의 역사를 탐구한 셈이고, 예술 작품으로 분류되는 밀랍 초상 이외의 다양한 밀랍 초상의 역사 역시 탐구한 셈이다. 밀랍을 사용한 해부학 모형, 봉헌물, 성유물 등이 슐로서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밀랍이라는 재료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밀랍 초상은 살아있는 이나 죽은 이의 본을 떠서 만들기에, 모델이 되는 원래의 인물과 조형물 사이에는 직접적인 접촉의 관계가 있다. 접촉을 강제하므로 아날로그 필름처럼 실재의 직접적인 흔적을 지닌 밀랍 조형물의 면모는 증거나 유물로서의 봉헌물의 성격을 강화한다. 그뿐 아니라 밀랍은 탁월한 형태 가소성의 재료다. 밀랍은 이미지 제조와 모방에 알맞은 재료인 셈이다. 한쪽 다리를 절던 환자가 완치되어 신에게 감사하는 봉헌물을 바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그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신체를 도왔던 목발을 봉헌한다. 목발 대신 밀랍 다리를 봉헌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완치를 소원하는 동안 밀랍 다리는 기대를 담은 봉헌물일 것이다. 완치가 되었을 때, 즉 소원 충족의 시간이 도래했을 때 밀랍 다리는 감사의 봉헌물일 것이다. 기대의 시간과 충족의 시간 동안 환자는 계속 자신의 목발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밀랍은 불행과 기도에 조형적으로 맞춰진다. 밀랍은 증상과 욕망이 변할 때 변할 수 있다. 다리를 절던 이가 완치된다. 이번에는 독한 폐렴에 걸린다. 이 경우 그는 밀랍 다리를 녹여 얻은 재료로 봉헌할 두 개의 멋진 폐를 만들지도 모른다. 이는 그의 온전한 자유일 것이다. (…) 가소성을 지니고 있는 모든 재료처럼 밀랍은 봉헌물이 마법적으로 역진화하고, 치유하며, 변용할 징후의 모든 불안정성에 완벽하게 동참한다. (…) 밀랍은 복수의 기능을 가지고 있고 재생산이 가능하며 변형에 능한데 이러한 밀랍의 특징은 밀랍이 재현하면서도 다른 한편 쫓아버려야 할 징후의 특징과 동일하다. (…) 밀랍은 말하자면 살을 획득하도록 한다.” -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엑스 보토』
그런데 슐로서는 밀랍 조형물이야말로 과학적 관찰에 따라 비례를 존중하는 사실적인 초상의 등장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자율적인 초상화의 등장 과정을 다룰 때 바사리(Giorgio Vasari)는 밀랍 초상의 중요성을 간과했고 예술사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슐로서는 바사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실적인 밀랍 인물 초상화의 부상을 묘사하지만, 인물 초상화의 역사적 전개방향을 정립하려는 의도 탓에 놓치고 있는 지점도 존재한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슐로서가 밀랍 봉헌물을 다루면서 밀랍으로 만든 인물상들의 중요성을 과장하고 있다고 보았다. 1630년대를 예로 들면 밀랍 인물 봉헌물의 중요성은 상대화되어야 마땅하다. 당시 피렌체 지방에는 6백여 개의 밀랍 인물 봉헌물이 존재했던 것에 반해 해부학적 봉헌물, 즉 신체 장기의 일부를 본뜬 봉헌물은 2만 2천여 개에 육박했다고 한다. 슐로서가 제대로 분석하지 않았던 2만 2천여 개의 인체 봉헌물, 예를 들어 외따로 제작된 귀, 턱, 신체 기관들, 심장, 실물 크기의 고환들도 봉헌자의 초상화만큼이나 봉헌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을까? 디디 위베르만은 신체 부분들을 조잡하게 모방하여 신에게 바친 이 봉헌물들, 거의 불쾌함을 불러일으키는 봉헌물들이 봉헌자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과 가설을 이어간다. 간단히 말해 이 부분 신체의 봉헌물 역시 봉헌하는 자를 재현한다. 외양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동원하여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의 증상과 기도, 살을 가지고 있는 봉헌자의 경험의 순간을 재현한다. 봉헌자가 “밀랍으로 본을 떠내고자 하는 것은 그가 지금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고, 지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고자 하며, 평온을 되찾고자 하고, 치유되고자, 개종하고자 한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신체의 일부처럼 봉헌자가 겪고 있는 불행의 특징들도 봉헌자 얼굴의 특징만큼이나 한 주체를 개체로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시 회의에 빠진다. 밀랍으로 만든 빵, 덩어리라 할 정교하지 않은 오브제와 섬세하게 조각해 낸 밀랍 얼굴이 어떻게 같은 가치, 같은 (예술적) 중요성을 띨 수 있단 말인가? 밀랍 조형물은 원래 모델과의 접촉의 산물이므로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적 의미에서 지표적이고, 가소성을 지닌 재료이므로 닮음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밀랍 이외에도 얇은 금속판이나 종이 등을 사용하여 만든 봉헌물도 흔하였다. 금속판이나 종이도 밀랍처럼 가소성을 지닌 재료다.) 그리고 무정형에 가까운 밀랍 덩어리 봉헌물들이 봉헌자의 특징을 재현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닮음에 대한 당시의 사유방식을 추론할 수 있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중세 시대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는 질병에 걸린 아이를 구하고자 할 때 아이를 저울에 달던 습관이 있었다고 상기시킨다. 저울의 한쪽 접시에는 아이를 올려두고 다른 쪽에는 아이의 무게만큼 밀랍을 쌓았다는 것이다. 이때 아이의 무게와 밀랍의 무게는 닮음의 근거가 된다. 저울 위에 아이를 올려 기도를 하던 관습이 아니라도 재료의 물리적 속성에 근거하여 봉헌자들의 “생체적 무게, 과잉, 짓누르는 현전”을 드러내는 봉헌물을 선택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여기에는 가장 물리적인 속성이 가장 생체적이고 징후적인 것을 표현 하는 역설이 존재한다.
다시 데릭 저먼과 오준수에 대한 이강승의 작업 〈Garden〉으로 돌아와 보자. 이강승은 정원이라는 장소, 토대, 그릇, 행위 속에 오준수와 데릭 저먼을 포갠다. 이강승은 죽음을 준비했던 두 사람을 기억하고, 이들의 고통을 기억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삶을 고통의 서사로 묘사하는 대신 정원을 다시 가꾸는 수행의 작업을 통해 이들을 기억하려고 한다. 그래서 정원은 장소이자 봉헌물 그 자체이며, 봉헌물을 바치는 성스러운 장소다. 마치 성스러운 장소에 자신의 증상을 닮은 봉헌물을 바치며 소원을 빌고 욕망을 드러냈던 이들처럼 이강승은 데릭 저먼과 오준수를 닮은 오브제를 예술적 봉헌, 예술적 기억의 욕망이 담긴 오브제로 변용한다.
종교적 제례의 감각은 전시장 도처에서 감지된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한 네온 작품 〈무제(이름들)〉에서 우리는 오준수, 오창호, 김경민, 김다빈, 루까, 종로바닥의 걸레라는 이름을 읽을 수 있다. 오준수가 사용했던 모든 이름이자 별명을 보며 우리는 오준수가 ‘루까’라는 세례명을 지닌 가톨릭 신자였음을 알게 된다. ‘친구사이’의 커버를 수놓은 작품 옆에는 데릭 저먼의 코티지에 걸려있던 성모 아이콘을 연필로 드로잉한 작품을 배치했다(〈무제(프로스펙트 코티지의 마리아와 아기 예수상)). 퀴어적 실천과 우상파괴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던 데릭 저먼을 기독교적 시각으로 조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아마 우리는 데릭 저먼이 결코 기독교적 전통 자체를 무용한 것으로 간주한 바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데릭 저먼이 만든, 라틴어 대사로만 이루어진 영화 〈세바스티안(Sebastian)〉(2014)에서 퀴어적 실천은 우상파괴의 한 수단이었지만 아담과 이브, 예수의 수난을 퀴어적 상상력으로 재해석한 영화 〈The Garden〉은 종교적 이데올로기 자체를 비판하기보다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상업화된 교권, 신용카드를 선전하는 유다같은 모티프를 통해 자본에 의해 타락하고 오염된 교회를 비판한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강승은 기독교적 함의를 배제하거나 이에 얽매이는 대신 또 다른 문화와 장소, 시간과 교배한다. 가령 석관, 미사 테이블처럼 돌, 혹은 돌로 이루어진 것들은 인간 예수의 탄생과 수난, 예수 그 자체를 상징하는 요소들이다. 앞서 말했듯 이강승은 여러 작품에 한국의 장례에 사용하는 천인 삼베를 사용했다. 특히 〈무제(테이블)〉에서는 예수의 몸이 놓이는 석관이자 미사의 자리인 테이블 위에 삼베 천을 깔고, 예수의 피가 뿌려지는 곳으로 상상되었던 정원을 배치했다. 그 테이블 위에 데릭 저먼의 정원과 오준수의 공간의 사진들과 기록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 과정에서 예수의 피라는 상징은 꽃이라는 다른 기호로 전이된다. 기호들은 다른 매체, 다른 장소로 계속 이동한다. 그래서 이강승의 작업에서 기호는 흔적이자 지표이고 동시에 상징이며 도상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봉헌물의 이미지에 대해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봉헌물의) 영역에서 모든 이미지는 한편으로 매우 상징적이고 계약적인 양상을 지닌다. 이는 ‘제가 제 징후를 재현 하므로 당신은 치유의 현실을 부여하소서’라는 대타자와의 관계다. 동시에 봉헌물은 봉헌물이 처한 상황의 매우 즉각적이고 실재적인 양상, 매우 육감적인 양상을 지닌다. ‘나의 병든 신체 기관, 내 의상들이 여기 인물상 위에 걸쳐 있습니다. 이 징후 또는 이 기적의 물리적인 증상들이 있습니다.’” 상징이면서 흔적인 것들, 부서질 것처럼 생명을 지닌 것들이면서, 검은 흑연으로 남은 것들이 여기 바쳐진다.
이교도의 상상력이었던 봉헌물의 전통은 기독교 문화로 비밀스럽게 전승되었다. 이강승의 작업은 데릭 저먼과 오준수가 소망했던 것, 소망을 담아 만들고 헌정했던 것들을 다시 만들고 수행하는 작업일 뿐 아니라 기독교 문화를 침식하며 그 안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퀴어적 전통을 상기하는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이나라는 이미지문화연구자로, 파리 팡테옹 대학에서 동시대 영화가 물질성과 흐름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화, 무빙 이미지에 대한 동시대의 미학 이론을 연구하고, 영화사, 인류학적 이미지 및 동시대 이미지 작업에 대한 비평적 글쓰기를 시도한다. 현재 동의대 영화 트랜스미디어 연구소 전임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