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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참여 작가 인터뷰 – 남화연

posted 2019.06.18

반도의 무희, 이태리의 정원 – 남화연


미술세계


남화연 작가. 사진ⓒ 김흥규

남화연 작가. 사진ⓒ 김흥규

남화연(1979-) 작가는 미국 코넬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독일 HZT-베를린(베를린 대학간 무용 센터)에서 수학했다. 개인전 《임진가와》(시청각, 2017)와 《시간의 기술》(아르코미술관, 2015)을 비롯해 《역사를 몸으로 쓰다》(국립현대미술관, 2017), 《유명한 무명》(국제갤러리, 2016) 등의 그룹전을 가졌으며,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모든 세계의 미래(All the World’s Future)》와 2015년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에서 진행된 《Nouvelle Vague》에도 참여한 바 있다.


한국관에 설치된 남화연 작가의 〈반도의 무희〉와 〈이태리의 정원〉 ⓒKorean Pavilion, Venice Biennale 2019.

한국관에 설치된 남화연 작가의 〈반도의 무희〉와 〈이태리의 정원〉 ⓒKorean Pavilion, Venice Biennale 2019.

2015년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초대된 후 4년 만에 한국관 참여 작가로 다시 베니스를 찾았습니다. 본전시 준비 때와는 차이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전을 앞두고 최승희와 관련하여 리서치를 진행하던 중에 김현진 감독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한국관 전시 콘셉트에서도 크게 어긋나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에 특정한 문맥에 따라 제 작업을 맞출 필요는 없었죠. 단, 리서치의 범위가 매우 넓었기 때문에 〈반도의 무희〉에서 다루는 최승희의 시간은 다시 설정했습니다. 김현진 감독님과는 2008년 《광주비엔날레》, 2015년 개인전 《시간의 기술》 등 오랜 시간을 같이 해온 작업적 동료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본전시 때보다 더 내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현진 감독님은 최승희를 처음 다뤘던 2012년 작 〈이태리의 정원〉에 대해서도 지지해 주었고요.


〈반도의 무희〉는 일제 식민지 시절 아시아와 서구를 가로지르며 당대의 여성 예술가의 신화적 이미지를 만들어낸 최승희를 다루는데요, 말씀하신 대로 최승희는 2012년 《페스티벌 봄》에서 선보인 〈이태리의 정원〉에도 등장한 바 있습니다. 최승희를 다시 소환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태리의 정원〉은 ‘퍼포먼스’와 ‘퍼포먼스 아카이브’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역학에 집중한 작품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카이브는 퍼포먼스의 조건으로 충분히 기능하는지, 아니면 역으로 퍼포먼스가 시간 속에 존재했다 사라지는 임시적 아카이브가 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들이었고, 그래서 최승희의 개인사와 전형적인 이미지들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다루려고 했었어요. ‘극장’이라는 조건이 주어졌기 때문에 퍼포먼스와 퍼포먼스 아카이브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주목했던 것도 있고요. 저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죠. 이후 많은 질문이 남았고, 오랜 시간 그 질문들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번 리서치와 작업에서는 특히 1941년 이후 최승희의 예술 형식이 역사와의 접면에서 전개, 발명, 발전되었던 과정을 다루고자 했습니다.


남화연, 〈반도의 무희〉, 2019. 멀티채널 비디오 설치, 가변크기, 29분. ⓒ남화연.

남화연, 〈반도의 무희〉, 2019. 멀티채널 비디오 설치, 가변크기, 29분. ⓒ남화연.

이번 한국관 전시에서 작가님은 〈반도의 무희〉와 〈이태리의 정원〉을 선보이셨는데요, 작품 구성과 설치에 주안점을 두었던 부분이 무엇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반도의 무희〉는 메인 영상 1점과 서브 영상 4점으로 구성된 다채널 작업이고, 〈이태리의 정원〉은 한국관 뒤편에 식물을 심은 정원과 랜드스케이프를 연상시키는 내부 구조물, 최승희가 부르는 〈이태리의 정원〉(1936)으로 구성된 작업입니다. 〈반도의 무희〉의 메인영상이 한국관 유리창 쪽 벽면에 설치된다면 일부는 구조물 안에 삽입되어 있어서 관객들이 그 구조물에 앉아 작품을 감상할 수 있죠. 제 경우 실내와 실외를 연결할 수 있는 랜드스케이프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영상 작업이기 때문에 빛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만 주어진 조건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우선적으로 찾아야 했고, 공간 자체가 열린 구조라면 그 상황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죠. 작품과 조경 자체가 하나의 풍경(landscape)처럼 보이도록 내부에서 외부로 연결되는 구조인데, 다행히 관객들 역시 구조물 내외부를 작업과 유기적으로 연결시킨 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계세요. 영상의 시공과 현재의 시공이 혼재되며 발생하는 미묘한 차이들이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내부와 외부가 연결되는 설치 방식은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열려 있는 ‘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코스모폴리탄적인 동시에 식민지 근대 여성의 삶을 살았던 최승희의 인생과 유사하게 해석되는 것 같습니다. 최승희라는 코스모폴리탄적인 인물을 ‘반도’와 연결시키며 여러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반도의 무희’에는 어떤 의미들이 담겨 있을까요?


참고로 ‘반도의 무희’는 일본에서 최승희를 호명했던 수식어였습니다. 1935~36년도 일본의 영화감독 곤 히데미(今日出海)가 최승희를 주인공으로 만들었던 영화도 〈반도의 무희〉였고요. 찾아보니 필름은 유실되었고, 영화 스틸 사진만 한두 장 남아있더군요. 일본영화에서는 조선의 무희이자 일본의 대표 무희로 활동하며 코스모폴리탄적인 삶을 살아가던 최승희의 모습을 담고 있다면, 제 작업에서는 그 이후의 최승희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일단 최승희라는 예술가의 역사와 반도의 역사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반도’와 ‘무희’가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고요. 작업 안에서 문자 그대로의 지정학적 ‘반도’와 최승희라는 ‘무희’를 넘어선 의미가 발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이후’의 최승희에 대해 좀 더 설명 부탁드립니다.


제가 작업에서 주목하는 최승희의 삶의 시기는 1941년 이후부터 월북하는 1946년 이후까지입니다. 당시 외국에서 돌아온 최승희는 본인이 ‘동양춤’을 수입해왔다는 이야기를 해요. 서구의 시선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자신의 예술적 주체성을 어떻게 이동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생겼던 것 같아요. 1941년은 대동아공영권 아래에 있었고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게 되죠. 그리고 최승희는 동양춤을 추겠다고 말하거든요. 중국으로 일본군 위문공연을 가거나 군부의 압력이 있었으므로 ‘’나 ‘부가쿠’ 등 일본의 영향을 받은 춤을 프로그램에 넣어야 했지만, 한편으로 중국 ‘경극’에서 모티프를 얻어 동양춤을 수립, 완성해가겠다는 것이었어요. 이 동양 무용이라는 것이 최승희가 마주한 현실을 돌파하는 출구이자 새로운 예술적 영토의 입구로 동시에 존재했던 것이 아닐까 많은 생각이 들었죠. 해방 후 최승희는 중국에서 귀국해 결국 월북하고, 〈사도성의 이야기〉와 같은 무용극을 만듭니다. 제가 최승희가 아니므로 알 수 없는 일이나, 아마도 북한의 무용극이 최승희가 꿈꿨던 동양 무용의, 그러나 변형된 완성태가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어쨌든 남아 있는 최승희의 자료 중에는 구체적 춤을 재현할만한 근거가 충분치 않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저는 최승희 춤의 재현에는 큰 관심이 없었죠. 물론 최승희라는 인물에 대해, 그리고 그가 남긴 작품 자료들은 철저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남아 있는 자료들 사이의 틈새가 저라는 예술가가 최승희라는 예술가와 그의 작품들과 대면할 수 있는 입구가 되었죠. 이를테면 작업 과정 중 경극의 화단, 난화지 등과 일본의 노(能) 등을 리서치하고 그걸 조합하는 방식으로 제가 개입한 동양춤을 안무하는 과정을 작업에 담았습니다. 리서치에서 일차적 안무가 일어나고 영상 안에서 리서치 재료를 배열/재배열하는 편집 방식에서 또 다른 안무가 발생하는 것이죠.


최승희의 경우 무용수이기 때문에 작품에서 안무가 두드러지는 측면이있지만, 초기 드로잉 작업들 이후 〈작전하는 희곡〉(2007), 〈망상 해수욕장〉(2008), 〈오퍼레이셔널 플레이〉(2009), 〈가변크기〉(2013) 역시 퍼포먼스 작업이었고, 움직임, 안무 등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습니다. 무용에 대한 작가님의 관심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요?


잘 모르겠어요(웃음). 학부에서는 조각을 전공했거든요. 그런데 조각의 과정에는 신체와 시간이 많이 개입되기도 하죠. 특히 영상 편집 과정에서 인체 모델링 회전판을 이리저리 돌리는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한국관에 설치된 남화연 작가의 〈반도의 무희〉와 〈이태리의 정원〉. ⓒKorean Pavilion, Venice Biennale 2019.

한국관에 설치된 남화연 작가의 〈반도의 무희〉와 〈이태리의 정원〉. ⓒKorean Pavilion, Venice Biennale 2019.

무용, 안무가 가지고 있는 문법 혹은 체계가 있을 텐데, 이런 것들이 무용을 직접적으로 전공하지 않은 작가님의 작업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체계를 배우려고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런 거 없이 했던 것 같아요. HZT-베를린(베를린 대학간 무용 센터, Hochschulübergreifendes Zentrum Tanz Berlin)에 들어갔을 때는 퍼포머들과 소통할 때 어떤 식의 언어를 사용해야 더 잘 전달될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 정도는 있었어요. 2007년 에르메스 미술상에 선보였던 〈작전하는 희곡〉이 중요한 분기점이었는데, 그 작업에서는 전문 무용수가 아닌 일반인들이 퍼포머로 참여했거든요. 제가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몸이 개입하고 작품이 흘러가는 것에 매료되었고, 그러면서 움직임의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움직임이라는 게 꼭 몸의 움직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임진가와〉(2017)에서도 ‘임진가와’라는 노래의 기원과 역사를 역추적하는 과정에서 위치의 이동이 발생하는데, ‘임진강’도 아니고 ‘림진강’도 아니고 ‘이무진가와’도 아닌 ‘임진가와’라는 노래의 지오그라피(geography)를 그리는 방식 자체가 안무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핼리 혜성의 이미지를 추적하는 〈동방박사의 경배〉(2015)나 프랑스 국립도서관측으로부터 ‘직지심체요절’의 관람을 거절당한 후 직지심체요절이 프랑스까지 오게 된 경위를 리서치하는 〈코레앙109〉(2014)에도 그런 움직임이 드러나 있고요. 이번 〈반도의 무희〉에서도 최승희와 관련된 자료들 사이를 통과하는 과정이 담겨있는데, 특별한 동작을 구현해내는 것보다는 그런 과정 자체를 안무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시대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월북이라는 상황 때문에도 자료를 찾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주로 어떤 방식으로 최승희 관련 자료를 수집해 오셨는지요?


최승희에 대한 연구는 많이 되어있는 편이지만 실증적인 자료들, 예를 들어 무용 작품에 대한 세밀한 자료들이 없는 상황이에요. 일본 평론가들이 기록해놓은 인상비평 정도의 글들, 프로그램 북에 적힌 글들이 있고, 국내에서는 그래도 밀도 있는 리서치를 해온 무용학자 정병호 선생님의 연구들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리서치를 진행했고요. 그 과정에서 여러 분들의 도움을 받았죠. 최승희기념사업회를 진행했던 홍천군에서도 도움을 받았고, 하정웅 선생님도 제가 일본에 가서 직접 뵙고 허락을 구했어요. 변월룡 작가가 그린 〈최승희의 초상〉의 개인 소장자와 같은 여러 컬렉터 분들,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이미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습니다. 저작권 문제도 할 수 있는 선에서 철저하게 조사를 했는데, 최승희가 월북예술가이기 때문에 저작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고, 그나마 현존하는 자료들도 복제본이 퍼져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사진가를 찾아 연락을 해야 했는데 원작자를 찾을 수가 없는 거죠. 무엇이 오리지널이고 무엇이 복제본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고, 경매시장에 나온 자료에도 복제본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 상황 자체도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작가님의 경우 사진, 기록물과 같은 아카이브 자료들을 작업의 기반 혹은 조건으로 삼아왔는데, 작가님의 작업에서 아카이브가 지닌 의미가 궁금합니다.


아카이브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의 시간이 내재되어 있다고 봐요. 그것이 현재의 나와 만나 사건으로 발휘하거나 작동하는 지점에 관심이 있습니다. 아카이브를 통해 무엇을 설명하거나 실증적으로 검토하기보다는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우회하거나 이탈해서 아카이빙되는 대상의, 혹은 아카이빙이라는 행위 자체가 가진 다면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죠. 2012년 〈이태리의 정원〉에서도 최승희라는 무용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현의 불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해 최승희의 자료로 개입한 것이었고요. 우회와 이탈 등의 운동과 궤적이 많은 경우 곧 작업이자, 반복해 등장하는 특징적 방법론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운동의 방식을 만드는 많은 경로 중 하나로 아카이브를 경유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반도의 무희〉에서 텍스트는 객관적인 아카이브 자료로서도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작전하는 희곡〉(2007)이나 〈오퍼레이셔널 플레이〉(2009)에서는 직접 대본도 작성했고, 대부분의 작품에서텍스트는 영상, 퍼포먼스와 함께 하며 작업의 레이어를 다층적으로 구성하는 만큼 작가님의 작품에서 언어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고요.


실재하는 텍스트를 작품의 텍스트로 사용하는 걸 좋아하고 그걸 배치하는 방식을 쓰기로 생각합니다. 〈반도의 무희〉에 들어가는 텍스트도 제가 쓴 몇 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최승희가 쓴 잡지 기고문, 신문 기고문 등의 텍스트를 인용했어요. 그런 텍스트들이 중립적인 태도를 확보해주는 것 같아요. 최승희에 대해서 예전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저는 최승희가 아니죠. 그리고 이 작업은 저와 최승희라는 두 예술가의 대면(encounter)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과거의 예술적 주체와 어떻게 만나서 지금 어떤 예술을 만들어내느냐가 핵심이고, 그렇기 때문에 있는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는 것 자체가 세상에 없는 예술가에 대한 존중이자 저 스스로 확보하고자 하는 거리였습니다. 일부 관객들이 최승희가 쓴 텍스트를 제가 쓴 허구의 텍스트인지 물어보더라고요. 저에게는 이런 뒤엉킴이 중요합니다.


한국관에 뒤편에 설치된 〈이태리의 정원〉 설치 전경. Photoⓒ Davide Giacometti

한국관에 뒤편에 설치된 〈이태리의 정원〉 설치 전경. Photoⓒ Davide Giacometti

최승희라는 아이콘은 여성, 타자, 전통, 근대성을 가로지르는 주체이지만 한편으로는 최승희라는 인물이 부각됨으로써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오리엔탈리즘을 역으로 환기할 수 있는 이중성도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비단 최승희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성을 주제로 다루는 작업들이 탈식민주의 서사에서 맞닥뜨리는 우려이기도 한데, 특히 베니스비엔날레를 배경으로 하는 이번 작업에서는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고려했는지 궁금합니다.


최승희도 아마 그런 시선을 알았기 때문에 서구에서 동양춤을 수입해왔다고 말한 것도 있겠죠. 재밌는 말이에요. 그런데 최승희는 여성 예술가이기 전에 근대 무용의 초석을 만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또 최승희의 동양춤은 당대의 급변하는 역사적 상황에 맞닥뜨린 예술가의 내적 갈등과 분열 사이에서 튀어나온 것이고, 내재화한 오리엔탈리즘과는 다른 궤도로 굴절된 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로서, 한 개인으로서의 분열과 외부세계와 예술의 사이를 돌파해야 하는 분투가 동양춤이라는 특이한 예술 형식의 발명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거고, 바로 그 형식의 발명이 예술가로서의 저에게 흥미로운 것이죠. 그렇다면 그 형식은 발명 과정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 조건 아래에서 어떤 형식이 발명될 수 있는가. 이것이 작업 내내 스스로 집중했던,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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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원고는 미술세계 2019년 6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미술세계와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장서윤

미술세계 기자